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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80화 (80/446)

성장 (1)

80화

데런에게 있어 레이는 믿음직한 형이자 훌륭한 스승이었다.

평소에도 데런은 레이를 보육원의 기둥이자 리더로 여겼지만.

레이가 알레시아를 따라 황실 마탑으로 떠난 후에야 그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보육원에선 각기 다른 개성과 상처를 지닌 아이들이 단체 생활을 하다 보니 당연히 이런저런 갈등이 생겼다.

그 모든 갈등에 어른들이 개입해 일일이 조율해줄 수는 없었다.

그런 때에 항상 의지가 된 건 레이였다.

레이는 아이들 간의 갈등을 힘으로 억압하기보단 원활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성격적인 결함이 있는 아이라도,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곁에 두고 끈기 있게 지켜봤다.

선을 넘는다 싶으면 날을 잡고 죽어라 쥐어 패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생각보다 몇 없었다.

레이는 아이들 앞에서 항상 완벽하려 했고, 대개 완벽했다.

도리어 너무 완벽했기에, 데런은 종종 레이를 무감정한 사람이라 느끼고는 했다.

그리고 레이는, 보육원의 가장 강력한 무력이었다.

어른들조차 조심하는 레이를 보고 데런을 비롯한 아이들은 경외와 함께 큰 안정감을 느꼈다.

그런 레이가 보육원에서 사라졌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개울가에 혼자 놓인 심정이었다.

하루 이틀은 자유를 만끽하며 물을 첨벙댔지만 얼마 안 가 나를 지켜주는 보호자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불안해했다.

카렌이 특히 우울감에 빠져 지냈으나, 상태가 안 좋았던 건 요하나도 마찬가지였다.

레이가 없는 동안 요하나의 눈은 항상 거멓게 죽어있었다.

요하나는 잡생각을 떨치고 싶었는지 레이가 떠나고서 한동안 검술 훈련만 지독하게 반복했다.

레이가 돌아올 때쯤 되어서야 표정이 다양해졌지만, 레이의 귀환이 늦어진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루 동안 방에 박혀 나오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레이가 귀환한다는 날짜가 다시 다가왔다.

데런은 알고 있었다.

요하나가, 영주성에서 일하는 메이드 누나에게 받은 작은 향수병을 오늘 아침 내내 만지작거리고 있었음을.

향수를 뿌려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자존심 때문에 내려놓는 모습을.

데런은 두 눈으로 직접 봤다.

요하나는 레이의 마중을 나와서도 손 한 번 흔들지 않고 틱틱댔다.

데런은 미움받을 짓만 골라 하는 요하나가 참 답답하게 느껴졌다.

허나 레이는, 뻗대는 요하나를 타박하긴커녕 우아하고 아름다운 검을 요하나에게 선물해주었다.

좋아 죽으려는 요하나를 보고 데런은 훈훈한 웃음을 흘리면서도 약간의 쓰라림을 느꼈다.

요하나 만큼 좋은 검을 받지는 못하리라는 실망감.

인기 많은 여자아이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 레이를 향한 질투.

두 감정이 혼합되어 가슴을 울렸다.

뭐, 입맛이 조금 쓰긴 했지만, 데런은 여전히 레이를 동경하며 존경하고 있었다.

그때 레이가 카렌을 불렀다.

데런을 비롯해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 대부분이 레이가 적당히 고급스러운 검 한 자루를 카렌에게 선물할 줄 알았다.

헌데 레이가 새롭게 꺼낸 상자는 크기가 고작 손바닥만 했다.

레이가 카렌을 마주 보고 상자를 열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작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검은 상자 속에서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윽...?"

카렌이 괴상한 탄성을 내었다.

너무도 예상치 못한 선물의 정체에 완전히 생각이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시골 바닥에선 어지간하면 평생 구경하기도 힘든 아름다운 목걸이였다.

모두의 시선이 목걸이에 박힌 황금색으로 빛나는 보석에 집중됐다.

오직 데런만이 요하나의 표정을 황급히 살폈다.

방금까지 히죽이던 요하나의 입꼬리가 얼음장처럼 굳어져 있었다.

차르륵!

레이가 상자에서 조심스레 목걸이를 꺼내 펼쳐 보였다.

내리쬐는 햇빛 아래 아름답게 반짝이는 목걸이를 마주한 카렌의 두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레이가 카렌에게 한발 다가선다.

데런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저 새끼 지금 설마...?"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질 않았다.

레이는 흐트러진 카렌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더니, 두 손을 카렌의 새하얀 목덜미 뒤로 뻗어 목걸이를 대신 걸어주었다.

톡!

목걸이의 잠금장치가 채워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카렌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금속의 어색한 차가움을 느꼈다.

카렌의 피부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으으..."

귀까지 빨갛게 물들인 카렌이 차마 레이를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레이는 거의 녹아내릴 듯한 표정을 한 카렌을 살펴보곤 흡족하게 웃었다.

저물어 가는 석양을 떼다 놓은 듯한 카렌의 머리카락과 황금색으로 빛나는 보석이 아주 잘 어울렸다.

"예쁘네."

레이의 그 한마디에 카렌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온 몸이 너무 달궈진 탓에 머리 위에서 연기가 펑펑 올라오는 듯했다.

데런이 속으로 외쳤다.

'미친놈아 제발 좀...!'

분명 흐뭇한 광경이었다.

허나 자리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직 겨울이 멀었음에도 공기가 차가웠다.

뚜두둑!

허리띠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요하나의 허리춤에 매어져 있던 제플린의 검이 검집 째로 뜯겨져 나왔다.

레이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카렌과는 완전히 반대의 이유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요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상황을 이해 못 하고 눈을 깜박이는 레이를 향해 요하나가 제플린의 검을 검집 째로 휘둘렀다.

뻐억!!

"아악!!"

팔뚝으로 요하나의 일격을 막아낸 레이가 비명을 질렀다.

상당히 강맹한 내려치기였다. 못 본 새 요하나의 실력이 꽤 늘어 있었다.

레이는 잠깐 흡족한 감정이 들었지만, 연거푸 휘둘러지는 요하나의 공격 탓에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뻑!! 뻑!! 뻑!!

"아악! 왁!! 으악!!"

레이는 영문도 모른 채 요하나의 공격을 계속해서 몸으로 막아냈다.

이를 갈아내며 레이를 수십 번 후려친 요하나가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이딴 거...!! 필요 없어...!!"

콰악!!

요하나는 레이를 향해 검을 던져 버렸다.

그대로 등을 돌린 요하나가 눈을 비비며 발이 닿는 대로 뛰었다.

멀어져가는 요하나의 소맷자락이 금세 젖어들었다.

그때까지도 카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기 세계에 푹 빠져 있어 외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레이가 지면에 엉덩이를 붙인 채 지끈거리는 팔목을 매만졌다.

"쟤는 갑자기 나한테 왜 저러는...?"

레이가 주변을 살폈다.

마중을 나왔던 모두가 힐난이 잔뜩 서린 눈빛을 레이에게 쏘아 보내고 있었다.

특히나 데런의 눈빛이 강렬했는데, 거의 눈으로 욕을 하는 수준이었다.

"?"

레이가 혼란에 빠진 채 일단 아가리를 닫았다.

대체 무엇을 잘못했는가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옆구리를 툭툭 쳤다.

루나였다.

루나가 두 손을 뻗은 채 레이를 빤히 바라봤다.

"...나도 선물 줘요."

"..."

달라니까 줘야지.

레이가 다시 짐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짐을 뒤적이면서, 레이는 강렬한 불안이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레이의 손에 황실 마탑에서 받아온 마법서가 잡혔다.

협곡에서 습격을 당했을 때 마법서가 지면을 구른 탓에 상태가 꽤 꼬질꼬질했다.

마법서를 꺼낸 레이가 마법서 겉면을 툭툭 털어내며 추하게 중얼거렸다.

"아이고, 여기 왜 흙이 묻어있냐..."

"..."

루나가 꼬질꼬질한 마법서를 받아들곤 말없이 레이를 쳐다봤다.

레이가 눈치를 보다 두 팔을 올려 방어자세를 취했다.

루나는 사양 않고 마법서로 레이를 후려쳤다.

퍽! 퍽!

마법서를 휘두르는 루나의 손에는 힘이 전혀 실려있지 않았다.

레이는 가드를 올린 팔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마음이 많이 아팠다.

우리 착한 루나에게 이토록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낸 자가 누구인가?

바로 레이 자신이었다.

충분히 분풀이를 한 루나가 책을 내려놓고는 요하나가 버리고 간 검을 주워들었다.

"...이거, 요하나 가져다줄게요."

"어, 응... 고마워."

루나는 낑낑거리며 검을 집어 들고는 자리를 떠났다.

카렌은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온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레이는 황망한 얼굴로 제자리에 앉아 있다가, 마중을 나왔던 다른 보육원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너희들 선물은 이따가 줄게."

"네, 뭐..."

다들 세상 한심한 놈을 바라보는 눈으로 레이를 응시하곤 몸을 돌렸다.

모든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지미가 한 마디 했다.

"너 병신이냐?"

"...나름 반성 중이에요."

레이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해야 했다.

이번에 선물을 살 때 아무래도 좀... 애정캐한테 룩딸하고 성능캐한테 장비 맞추는 감성으로 물건을 고르긴 했다.

요하나가 평소에 검술 훈련에 열성이기도 했고, 루나 또한 워낙 책을 좋아했던 탓에 별 문제 없을 줄 알았는데, 어째 제대로 점수가 까인 듯 했다.

"끄응..."

지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가 옷을 털었다.

디디에가 정색하고 안뜰에 나와 있는 걸 보니 빨리 필립스 백작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지미, 카렌 좀 잘 부탁할게요."

"그래."

지미가 카렌을 돌아봤다.

아직까지 카렌은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뭐... 걱정 마라."

사실 레이가 카렌에게 값비싼 장신구를 선물해준 게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았다.

괜히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골치 아팠으니까.

그래도 카렌이 평소 보육원을 위해 나름의 헌신을 해왔다는 것을 알기에 지미는 굳이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

레이가 디디에와 함께 영주성 집무실로 들어섰다.

백작은 레이의 몰골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잠깐 못 본 새에 얼굴에 멍이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 누구와 싸웠나?"

"아, 별 거 아닙니다. 환영인사가 살짝 격했던 탓에..."

백작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본제를 꺼냈다.

사실 지금 레이의 얼굴에 멍이 들고 안 들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협곡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음..."

생각을 정리한 레이는 로얄가드와 전투 과정만을 제외하고 알고 있는 대부분의 정보를 백작에게 전했다.

레이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백작이 한 손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품위를 중요시하는 백작이 저리 반응할 정도면 어지간히 충격적이란 뜻이었다.

"운이... 나빠군."

운이 나빴다. 백작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제국의 귀족된 자로서 함부로 황실을 비난하기도 어려웠고, 권력의 생태라는 걸 아는 입장에서 황실의 판단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레이가 혹시나 싶어 한 마디 덧붙였다.

"황태자 위와 이번 습격이 관련되었다는 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가깝습니다."

"시간이 지나봐야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겠지."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영지로 바로 귀환하겠다는 그대의 판단이 옳았네. 변방의 귀족은 중앙의 일에 아예 엮이지 않는 게 제일이지. 근데 대체... 어떻게 무사한 건가?"

로얄가드, 혹은 로얄가드 급 무인이 두 명이나 습격에 동원됐다는 건 젠킨슨 또한 증언했다.

로얄가드라면 기사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는 마스터 급을 제외하면 거의 최강에 가깝다.

레이가 머쓱해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명을 붙들고 늘어지는 사이 고모가 다른 한 명을 처리했습니다. 정말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어떻게든 해냈네요."

"..."

백작이 말 없이 열셋 먹은 소년을 쳐다봤다.

로얄가드를 상대로 정면에서 버텼다는 개소리를 지껄이는데 그걸 부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백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이고 이야기했지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게. 최대한 지원해주겠네."

"알겠습니다."

"중앙이 안정될 때까지 목을 움츠리고 있어야겠군. 그대는 어찌할 건가? 혹시 다른 곳에 볼일이 있나?"

"아니요. 저야 뭐 마법사님도 모셔왔으니..."

곁에 있던 로필렌에게 눈길을 준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한동안 애들 가르치는 데 집중해야죠. 그전에 먼저 화해해야겠지만..."

요하나에게 얻어맞은 곳들이 욱신거린다.

레이는 마른 세수를 하고서 백작에게 부탁했다.

"알레시아 님께 협조를 받고 싶은 일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대 원하는 대로 하게."

백작이 시원하게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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