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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79화 (79/446)

재회 (4)

79화

협곡에서 부상을 입었던 젠킨슨이 거동이 가능할 만큼 회복됐을 때쯤.

필립스 백작이 파견한 디디에가 병사들과 함께 글리비아스에 도착했다.

디디에는 어수선한 도시의 분위기를 느끼고 눈치껏 말을 아꼈다.

필립스 백작가 사람들은 디디에가 도착하자마자 도시를 떠나기 위해 움직였다.

도시에서 머물며 습격 사건을 조사하는데 협조하라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전부 무시했다.

많은 이들이, 필립스 백작가가 겁이 많고 힘이 없어 습격을 받고도 꼬리를 말고 도망친다고 떠들었다.

모욕적인 언사였으나 그쪽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디디에가 도착한 후 이틀 만에 필립스 백작가 사람들은 글리비아스를 떠났다.

글리비아스에서 벗어나기 전에 레이는 세리아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고모, 몸조심 하세요."

"응. 레이도. 몸조심해."

"분위기 이상하다 싶으면 조카 보겠다는 핑계 대고 필립스 백작령으로 오세요. 거기서 일 잠잠해질 때까지 시간 좀 보내다 돌아가시면 되잖아요."

"알았어. 레이, 꼭 챙겨 먹어? 라푸마."

"흐흐. 그건 무조건 먹어야죠."

서클도 생겼으니 라푸마 같은 마나가 함유된 약재 또한 섭취할 수 있게 되었다.

레이는 두 번째 삶에서 수명 따윈 신경 안 썼으나 윗공기는 한 번 맡아보고 싶었다.

세리아가 레이의 볼에 연거푸 입을 맞춘 후 레이를 놓아주었다.

오시리스 가 사람들과도 간단히 작별 인사를 마친 레이가 마차에 올라탔다.

알슈테인 가에서 좋은 마차를 빌려준 덕분에 여행길이 한결 편해졌다.

다행히, 필립스 백작가로 귀환하는 동안 더 이상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동한지 며칠이 지나 익숙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자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백작령에 거의 도달했을 때쯤 마차에서 내린 알레시아가 펜리르 위에 올라타고 싱글벙글 웃었다.

정령 자랑할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난 듯했다.

레이 또한 펜리르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모너클인 알레시아는 중급 정령 두셋으로 셀로미어 용량이 가득 찼다.

때문에 굳이 더 정령을 족칠 필요가 없었지만, 백작령엔 루나가 있었다.

루나의 마법적 재능이라면 셀로미어 용량 또한 광활할 게 분명했다.

'고위 정령 하나만 뽑아보자.'

정령을 족쳐서 친구를 불러오게 하고, 불려 온 친구를 또 족쳐서 친구의 친구를 불러오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한 번쯤 고위 정령도 낚아낼 수 있을 것이다.

루나가 고위 정령과 계약만 맺을 수 있다면 웬만해선 어디 가서 다칠까 봐 걱정 안 해도 됐다.

정령 가챠 돌릴 생각에 신이 난 레이의 입꼬리가 쭉 찢어지자 펜리르는 괜히 불안감에 빠져 몸을 떨었다.

슬슬 시야 끝에 영주성이 보인다.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데, 저 멀리서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묶은 소녀가 뜀박질로 다가왔다.

레이가 곧장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원래도 붉었던 눈동자를 더더욱 붉게 물들인 카렌이, 확 달려들어 레이를 끌어안았다.

콰악!

"안 오는 줄 알았잖흐에에엥..."

카렌이 팔다리로 레이를 바짝 조인 채 울음을 터뜨렸다.

앞이 전혀 안 보였던 레이가 카렌을 조금씩 돌려 등으로 옮겼다.

간신히 시야를 확보한 레이가 어깨에 뚝뚝 떨어지는 카렌의 눈물을 느끼며 혀를 찼다.

"내가 안 오긴 왜 안 와. 여기가 내 집인데. 당연히 돌아와야지."

"흐아앙...! 흐윽!"

카렌이 훌쩍이며 레이의 귀를 우물우물 씹어대기 시작했다.

옛날 생각이 난 레이가 피식거리며 카렌을 달래다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마탑으로 떠나기 전보다 카렌의 몸무게가 가벼워져 있었다.

살이 포동포동 오른 알레시아만큼은 아니더라도 성장기이니만큼 더 묵직해졌어야 정상이다.

마침 카렌을 쫓아 달려오는 지미가 레이의 시야에 걸렸다.

레이는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한 거냐고 한소리 하려다가, 지미의 몰골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마탑으로 떠나기 전보다 한참 수척해진 지미가 퀭한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놈, 드디어 돌아왔구나."

"아니... 안색이 왜 그래요? 그동안 잘 못 지냈어요? 나 없다고 엄청 좋아했잖아요?"

"레이, 잘 들어."

레이의 어깨를 붙잡은 지미가 피로가 가득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앞으로 몇 달 이상 나가 있을 거면, 카렌도 무조건 데려가. 난 절대 못 돌봐준다."

"어, 음... 고려해 볼게요."

레이가 질겅질겅 씹히는 귀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카렌과 지미를 마차에 태운 채 좀 더 움직이자, 영주성 근처에 마중 나온 사람들이 가득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다가, 알레시아가 탄 펜리르를 보고 깜짝 놀라길 반복했다.

레이는 마음 같아선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싶었지만 일에도 순서가 있었다.

필립스 백작을 먼저 찾아뵈어야 했다.

레이는 등에 붙어 있던 카렌을 지미에게 맡겼다.

덜컹!

영주성 울타리 안으로 들어선 마차가 정지했다.

알레시아가 영주성 안뜰에 나와 있는 필립스 백작을 향해 한걸음에 달려갔다.

"아빠! 다녀왔어요!"

경망스러운 행동이었으나, 오랜만에 딸의 얼굴을 본 백작이 웃음꽃을 피우며 알레시아를 안아 들었다가 표정을 굳혔다.

무거웠다.

손아귀에 힘을 주니 빵빵히 올라온 알레시아의 뱃살이 느껴졌다.

딸의 식습관에 참견할 필요성을 느낀 백작이 알레시아를 내려놓고는 다른 이들의 인사를 받았다.

기사들에 이어 로필렌 또한 자신의 신분을 소개하며 백작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백작은 로필렌에게 환영의 뜻을 밝힌 후 레이를 돌아보았다.

"고생이 참 많았네."

"아닙니다."

"그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더군. 먼저 가서 인사를 나누고 오게."

"백작님, 어찌 그런..."

"그냥 다녀오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백작에게 보고를 올려야 할 사안이 산더미만큼 쌓여 있었다.

이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몇 시간도 모자랐다.

백작은 이를 감안해, 레이에게 마중 나온 이들과 우선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레이는 깊게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레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백작이 흐뭇하게 웃었다.

알레시아가 정령을 얻은 것.

황실 마탑 교수를 영입한 것.

그리고 습격을 이겨내고 무사히 귀환한 것.

그 공로가 대부분 누구의 것인지, 편지에 적혀 있지 않았다 해도 백작은 모를 수가 없었다.

"흠... 다들 무사하니 다행일세."

레이가 사라지고 나서 백작이 젠킨슨의 어깨를 가볍게 쳐주었다.

영지로 귀환한 이들 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는 없었다.

백작은 아직까지 습격자에 관한 정보를 얻지 못했으나, 모두가 무사한 것을 보고 내심 큰 사건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젠킨슨 경, 습격자의 정체에 관해 혹시 추측 가는 바가 있나?"

"..."

젠킨슨이 평소답지 않게 입을 우물거렸다.

백작은 이번 습격이 혹여 사교도나 흑마법사, 혹은 타국의 소행인가 싶어 젠킨슨을 재촉했다.

"젠킨슨 경, 답해보게. 정확하지 않은 정보라도 좋네."

디디에 또한 의문 어린 얼굴로 젠킨슨을 바라봤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젠킨슨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로얄...가드였습니다."

"..."

얼을 타며 눈을 깜박인 백작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잠시만, 젠킨슨 경. 지, 지금 뭐라고...?"

"황실에서 이번 습격을 주도했습니다. 습격자 중 로얄가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백작은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

레이가 영주성을 나오자 곧장 카렌이 몸에 달라붙었다.

레이는 귀를 질겅질겅 씹히며 벨라와 포옹했다.

레이를 따뜻하게 안아준 벨라가 화장기가 번진 눈으로 레이의 몸을 훑었다.

"다친 곳은 없니?"

"멀쩡해, 엄마. 중간에 잠깐 문제가 생기긴 했는데 별일 아니었어."

"다행이네. 난 먼저 들어갈 테니 이따 집에서 보자."

해가 중천이었다. 벨라는 꽤 졸려 보였다.

레이는 벨라를 위해서 산 약재가 몇 개 떠올랐지만, 그냥 집에 가서 건네는 게 낫겠다 싶었다.

벨라 말고도 마을 사람들, 보육원 관계자, 그리고 보육원 아이들 여럿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눈 레이가 요하나를 향해 눈을 돌렸다.

요하나는 친구들에게 억지로 붙들려 나온 것처럼 레이와 한참 떨어진 채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요하나를 바라보던 레이가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흐에에에에엥~"

어설픈 가성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레이를 향해 요하나의 고개가 삐거덕거리며 돌아갔다.

레이가 계속해서 아가리를 놀렸다.

"그러니까 떠나지 마요~ 호에에에엥~"

앞뒤 정황을 아는 누군가의 웃음이 터짐과 동시에 요하나의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그 찰나 카렌을 내려놓은 레이가 허공에서 요하나를 붙잡았다.

요하나가 몸부림을 치며 반항했지만 레이는 요하나를 꽉 붙든 채 영주성 울타리로 끌고 갔다.

영주성 울타리 근처엔 미리 마차에서 내려놓은 레이의 짐이 쌓여 있었다.

요하나를 풀어준 레이는 요하나의 주먹을 맞아가며 검이 보관된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두 자루의 검이 서로 교차하는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검을 꺼낸 레이가 기분 좋게 웃으며 요하나를 끌어당겼다.

요하나는 갑자기 레이에게 허리를 붙잡히자 깜짝 놀라 격하게 몸부림쳤다.

레이가 검집을 고정하기 위한 허리띠를 요하나에게 둘러주며 중얼거렸다.

"잠깐 그대로 있어봐."

이쯤되니 요하나도 레이가 무엇을 하려는 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다.

요하나의 몸부림이 슬그머니 잦아들었다.

레이가 요하나에게 허리띠를 단단히 묶어준 후 제플린이 제작한 검을 허리띠에 매달았다.

검의 위치를 세심하게 조정한 레이가 한 발 물러섰다.

"자, 한 번 뽑아봐."

망설이던 요하나가 마지 못해 검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스륵-

선명한 예기를 드러내는 은색 검신이, 내리쬐는 태양 아래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 입에서 작게 탄성이 터졌다.

"우아..."

제플린이 제작한 검의 가치를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지만.

요하나에게 쥐어진 검이, 이런 시골구석에서 쉽사리 구경하기 힘든 고급품이란 사실은 뿜어져 나오는 예기를 보고 누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

검을 뽑아낸 요하나가 자꾸만 벌어지려는 입을 막기 위해 얼굴에 힘을 주었다.

괴상한 표정으로 어깨를 떠는 요하나를 보고 레이가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비싼 검이라서 괜히 문제 안 생기게 검집은 바꿔 끼워야 하겠다만...'

처음 건넬 때만큼은 완벽한 상태로 쥐여 주고 싶었다.

"으흡... 으흐..."

요하나는 어떻게든 표정을 굳히려 발악했지만 자꾸만 입꼬리가 파도쳤다.

제자리서 끅끅거리던 요하나가 슬그머니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고맙다는 말은 하고싶은데 입이 잘 안 떨어지는 모양새였다.

레이가 요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어울리네."

"..."

요하나의 뺨에 붉은 빛이 일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렌에게 레이가 손짓했다.

"카렌도 일로 와봐."

카렌은 레이에게 다가가며 미리 실망할 준비를 했다.

카렌은 레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모든 아이들에게 따뜻하지만, 아이들이 내놓는 성과에 따라 그 보상에 확실한 차등을 두는 게 레이였다.

카렌은 요하나에 비해 여러모로 모자랐다.

요하나처럼 좋은 검을 받진 못할 것이다.

허나 레이에게 선물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기쁜 일이라고, 카렌은 그리 되뇌이며 레이 앞에 섰다.

짐을 뒤적여본 레이가 새로운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크기가 손바닥만 했다.

"...?"

저 작은 상자에 날붙이가 들었으리라곤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는 카렌을 향해 레이가 상자를 열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작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검은 상자 속에서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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