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3)
78화
글리비아스는 규모 있는 도시인 만큼 행정을 담당하는 청사를 따로 두고 있었다.
지역 영주의 가신, 상위 계층으로 이루어진 행정관, 황제가 파견한 지방관 등이 오늘도 청사에서 해결해야 할 사안을 두고 논의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다들 서로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열심히 목소리를 높였으나, 갑작스레 들려온 굉음에 전부 묻혀버렸다.
콰앙!!
청사의 정문이 통째로 박살 났다.
위병들이 우르르 정문으로 달려갔지만 침입자가 팔을 한 번 흔들자 단번에 나가떨어졌다.
결국 청사에 머물던 기사가 직접 검을 뽑았다.
모두의 얼굴에 안도가 내려앉았으나, 극히 찰나였다.
뻐억!
기사가 병사와 마찬가지로 나가떨어졌다.
정문을 쑥대밭으로 만든 침입자가 건물 안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관리들에게 손을 까닥였다.
그 의미가 명백했기에, 가장 짬 떨어지는 행정관이 밖으로 나와 덜덜 떨며 물었다.
"누구시기에 이리 행패를 부리는 겁니까?"
"세리아 알슈테인."
"세리아 알슈... 네?!"
익숙한 상대의 이름에 행정관이 눈을 크게 뜨고 세리아를 살폈다.
전쟁터에서 뒹굴기라도 한 것처럼 몰골이 처참했다.
그제야 행정관은 세리아가 무식하게 정문을 뚫고 들어온 이유를 약간이나마 이해했다.
어딘가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거다.
"대, 대체 무슨 일입니까...?"
"연락 넣어. 알슈테인 가에. 지금 당장."
세리아의 안광이 시퍼렇게 번쩍였다.
알슈테인 가는 물론 근방에 있는 모든 지역에 습격 사실을 전해야 했다.
브릿지, 역마, 아티펙트 등.
세리아는 무력시위를 통해 글리비아스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통신 수단을 동원시켰다.
*
갑작스러운 귀족 습격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이 지났다.
알슈테인 가가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해 듣고 움직였다. 세리아가 직접 공격받았기에 반응은 꽤 격렬했다.
다른 귀족들 또한 하나둘 소식을 전해 듣고 이번 사건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장도 시끄러웠고, 앞으로 더욱 시끄러워질 예정이었다.
레이가 로필렌이 공손히 따라준 차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내 할 일은 다 한 거 같고..."
레이는 그제까지 습격받았던 협곡을 배회하며 혹여 수작을 부리는 자가 없는지 살폈다.
현재는 습격지 주변을 글리비아스, 알슈테인 가, 그리고 근방의 몇몇 영주가 지원한 병력들이 모여 철저히 통제 중이었다.
앞으로 며칠 안에 습격자들의 신원을 밝혀내기 위한 조사가 들어갈 것이다.
"황태자라..."
황태자가 이번 일로 직위를 박탈당할 것이라고 습격자는 말했다.
1황자가 황태자 직위를 박탈당하면 그다음 순서는 2황자였다.
로필렌은 2황자를 유능하나 잔혹하다고 평했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저들끼리 치고받는 동안 얌전히 고개 숙이고 있으면 될 따름이었다.
레이는 이번 습격을 주도했다고 여겨지는 황실에 별 감정이 없었다.
습격자의 말을 믿는다면, 황실 권력 구조가 변하는 시기에 재수 없이 휘말려 피해를 봤다는 소리인데...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이 크게 상했다면 이야기가 좀 달랐겠지만.
필립스 백작가 측 사람들은 다들 무사한 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가 로필렌과 함께 글리비아스 중심에 위치한 치료소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치료소에 도착하자 신관과 치료사가 가볍게 예의를 표했다.
세리아를 제외하곤, 이번 습격에서 부상당한 인원들이 전부 이곳에 있었다.
레이는 가장 먼저 아벤시오를 찾아갔다.
며칠 동안 혼수상태였던 아벤시오는 어제 정신을 차렸다.
어찌저찌 목숨을 붙여 놓긴 했지만, 빈말로도 상태가 좋지는 못했다.
"살아는 계시는군요."
"끄응..."
앓는 소리를 낸 아벤시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아가씨들은 무사하신가?"
"그 질문만 세 번째군요. 두 분 다 무사하십니다."
레이가 품에서 포션을 꺼내 뚜껑을 땄다.
"고모께 얻은 겁나 비싼 포션이니 뱉지 말고 드세요."
"음..."
누워서 포션을 받아마신 아벤시오가 불편한 숨을 몰아쉬었다.
"거기서 어떻게 살아 나왔는지 모르겠군..."
"제 대단하신 고모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하며 레이는 아벤시오를 위아래로 살폈다.
팔은 통째로 날아갔고 다리도 박살 나서 오랜 재활이 필요해 보였다.
신성력의 존재 덕분에 권력과 금전만 있으면 결손된 부위도 복구는 가능했으나, 그 수준의 치료는 어지간한 고위 귀족도 받기 힘들었다.
이러나 저러나 앞으로 제대로 된 기사 노릇은 무리였다.
"한동안 힘드시겠습니다."
"...받아들여야지. 기사로서 의무를 다하다 입은 부상이니."
"혹시 가문에서 박대받으시면 필립스 백작가로 오십시오.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종자 놈 주제에 뭐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피식 웃은 아벤시오가 다시 고개를 뉘었다.
레이는 아벤시오의 휴식을 방해 않고 다음 병실로 향했다.
알레시아가 펜리르를 타고 제자리서 빙글빙글 돌다가 깜짝 놀라 침대로 몸을 던졌다.
레이가 동행했던 치료사를 향해 떫은 얼굴로 물었다.
"쟤는... 아니, 알레시아 님은 왜 저리 멀쩡해요?"
"상처가 얕기도 했고, 두꺼운 피하지방이 충격을 흡수해주어 장기가 대부분 무사했습니다. 때문에 회복이 빠르신 것 같습니다."
"그거 지금 살쪄서 살았다는 소리죠?"
대화를 듣던 알레시아가 레이를 보며 히죽였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살을 찌웠다는, 그런 되도 않는 의미가 담긴 웃음에 레이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알레시아가 눈치 빠르게 이불을 파고들었다.
'뭐, 무사하다니 됐다.'
작게 코웃음 친 레이가 병실을 돌며 인사를 전한 후 마지막으로 플로리아를 찾았다.
병실에 홀로 들어온 레이를 보고 플로리아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아, 안녕하세요!"
기강이 아주 바짝 잡혀있었다.
평소에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비쳤던 여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는 내심 머리가 아팠다.
'볼 건 다 봤군.'
협곡에서의 전투를 지켜본 플로리아가 정확히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레이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플로리아는 계약 각인에 묶여 있기도 했으니 남에서 함부로 입을 놀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표정 푸세요, 플로리아 님. 누가 잡아먹는답니까."
"으, 응. 그, 그럴까?"
눈치껏 말투를 고친 플로리아가 어렵사리 인사했다.
"그, 고, 고마워. 구해줘서. 또 은혜를 입었네."
"예, 뭐. 근데 오시리스 백작가에서 새로 들어온 소식 있나요?"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준다고 하셨는데, 아직 자세히는 모르겠어."
"그렇군요."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난 후 오시리스 백작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모르겠다만, 레이가 참견할 부분은 아니었다.
"몸조리 잘하고 계세요."
잘게 떨리는 플로리아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준 레이가 치료소를 나왔다.
로필렌이 곧장 뒤에 따라붙었다.
"숙소로 바로 돌아갈 거야?"
"아니요. 애들 선물할 물건 좀 다시 사려고요."
레이가 주머니를 짤랑였다.
협곡에서 습격자들의 품을 모조리 뒤진 덕분에 백금화를 꽤 많이 건질 수 있었다.
이름만 금화지 불순물이 대부분인 제국 금화와 다르게, 백금화는 확실히 가치가 높은 화폐였다.
레이는 얼마 전 샀던 필기구를 재차 구매한 후 로필렌에게 떠넘겼다.
로필렌은 무거운 짐 탓에 뒤뚱거리며 걸으면서도 흡족한 얼굴로 레이의 뒤를 따랐다.
다음은 대장간이었다.
대장장이는 검을 몇 자루나 부러뜨린 레이의 얼굴을 기억했는지, 레이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는 개의치 않고 전시된 검을 들어 퉁퉁 튕겼다.
'이제야 좀 공간검을 공간검답게 다룰 수 있게 되긴 했는데...'
완벽하진 않지만, 도약 검기가 떨어져 내릴 시간과 위치를 자의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리실로테 레코드 안에서 얻은 깨달음과 심장에 생성된 서클 덕분이었다.
서클을 얻음으로써 코어에도 더 많은 마나를 축적할 수 있게 됐다.
허나 이건 양날의 검에 가까웠다.
코어의 마나가 증가할수록 서클의 압박이 거세지고, 이는 심장에 강한 부하가 걸림을 뜻했다.
'얼마나 버틸는지.'
초월자가 찝어준 육체이니만큼 허무하게 훅 가진 않을 테지만 장수하기 그른 건 틀림 없었다.
레이는 괜히 세리아가 준 고가의 포션을 한 병 더 입에 털어놓고는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마나가 회전하기 시작하자 검신이 뚝 부러진다.
대장장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벗겨 먹으려 안 할 테니 검 좀 그만 부러뜨리쇼."
"세 자루."
레이가 백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넘겼다.
동전을 확인한 대장장이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는 대장장이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코어를 관조했다.
심장에 걸리는 부하를 제외하고도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코어의 성능을 완전히 활용하려면 서클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코어와 반발한 서클의 마나가 사방에 휘몰아쳤다.
이게 바로 하르시아가 항상 한기를 발산하고 다녔던 이유다.
'내가 다음 경지를 개척해도, 검강을 발현하려면 서클의 보조가 필수일 테고...'
검강을 발현하는 순간 주변이 얼어붙는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보이기엔 아무래도 제한이 있었다.
한기를 끌고 다니는 그래듀에이트가 누구를 연상시킬지는 뻔했으니까.
'성능은 확실한데 써먹기가 영 쉽지 않네.'
이럴거면 아예 황자로 환생시키든가.
툴툴댄 레이가 대장장이에게서 검을 챙겨 몸을 돌렸다.
'일단 백작령으로 돌아가자.'
얼마 안 가 필립스 백작이 파견한 호위 병력이 이곳에 도착할 터다.
병력이 도착하는 대로, 레이는 알레시아와 백작령으로 귀환할 생각이었다.
조사에 협조하라니 뭐니 붙잡는 이들은 많겠지만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폭풍이 불어닥친다.
미래를 훤히 꿰고 있지 않은 이상 폭풍에 휩쓸리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게 제일이었다.
'고모가 좀 걱정되지만...'
세리아의 신분과 입장상 이번 사태에 발을 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습격을 당한 피해자이며 알슈테인 가가 뒤를 바쳐주고 있으니 잘 대처하리라 믿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본 레이가 피식 웃었다.
"그립다...라."
지금 느끼는 감정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정을 붙여가는 것 같아 껄끄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엄마랑 애들 보고 싶네."
슬슬 집이 그리웠다.
*
지미는 레이가 마탑으로 떠나는 날 매튜와 함께 축배를 들었다.
그토록 골머리를 썩혔던 놈이 떠났으니 한동안은 행복하게 슬로우 라이프를 만끽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허나 필립스 영지엔 레이가 떠넘겨 놓은 아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레이가 사라진 탓에 보육원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한동안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지미와 매튜가 발로 뛴 덕분에 며칠 안에 보육원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영 우울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축 처져 있는 아이가 몇 있었다.
카렌이 특히나 심각했는데, 레이가 떠난 후부터 햇빛을 못 본 꽃처럼 생기를 잃고 쭈그러들더니 계속해서 비실거렸다.
밥을 먹다가도 훌쩍이고 잠을 자다가도 훌쩍인다.
계속해서 말라가는 카렌을 보며 지미는 불안에 떨었다.
이대로면 몇 달 뒤 복귀한 레이에게 애들 관리를 어떻게 했냐며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제발 밥 좀 똑바로 먹어!!!'
지미는 비어가는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속으로 외쳤다.
그나마 레이가 돌아올 날짜가 다가오자 단단히 굳었던 카렌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생글생글 웃는 날이 많아진 카렌은 목이 빠져라 레이가 돌아오는 날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레이가 돌아온다 약속했던 당일이 되었을 때.
카렌은 나름 열심히 차려입고서 레이를 마중 나갔다.
허나 하루 종일을 기다려도 레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필립스 백작에게 불려 간 지미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었다.
"습격...을 당해요?"
"나도 정확한 상황은 파악하지 못했네."
백작이 답답해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가 작성해 보낸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일행이 습격을 당했는데 다들 목숨엔 지장이 없다고 한다.
이걸 나쁘게 해석하면 간신히 목숨만 붙어있다는 소리도 됐다.
백작은 당장에라도 습격이 벌어졌다는 곳으로 기사들을 대동하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레이는 편지에 강한 어조로 경고하고 있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라고.
레이가 대놓고 무례를 범할 때는 항상 이유가 있었다.
백작은 상황을 조사할 사람과 추가 호위를 파견하는 등 최소한의 조치만 취하고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복귀 일정이 보름 정도 늦어질 것 같다고 하네."
"그... 알겠습니다."
지미 또한 궁금한 게 많았지만 백작의 표정이 워낙 안 좋아 보여 말을 아꼈다.
그래도 보름 정도야 크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 지미는 그리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레이의 복귀가 늦춰진 후.
카렌은, 레이가 황실 마탑으로 출발했던 영주성 앞에 앉아 이틀이 넘도록 꼼짝을 않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지미가 기겁하며 영주성으로 달려갔다.
"카렌!"
"...?"
수척한 얼굴로 마차가 떠났던 길을 바라보고 있던 카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는 지미를 확인한 카렌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흐윽! 흑! 레이가 안 와요... 흐윽! 우리 같이 레이 데리러 가요... 흐에에엥..."
"그 녀석 금방 돌아온다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마차에 문제가 생겨서 잠깐 늦어진다고 하더라."
지미가 카렌을 끌어안아 달래주었다.
지미의 품에서 훌쩍이던 카렌이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언제 오는데요?"
지미는 최대한 조심한답시고 어린 애들 달래주는 용어를 카렌에게 써먹었다.
"열 밤만 자고 나면 올 거야."
"흐윽...! 흐아아아아앙!!!"
카렌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지미는 한 발 늦게 자기가 단어 선택을 대단히 잘못했음을 알아챘다.
열 밤만 자고 나면 돌아오겠다는 부모 말을 믿고 집에서 배를 곯았던 고아들이 얼마나 많던가.
보육원 아이들에게 있어 열 밤 자고 돌아온다는 건 평생 볼 일 없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흐윽!! 레이 안 돌아온데요? 그런 거예요?"
"카, 카렌...! 그런 뜻이 아니고...!"
카렌을 어르고 달래며 지미는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보육원 아이들 대다수가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다.
또다시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슴 한편에 안고 살고 있었다.
그 탓일까.
레이가 약속했던 복귀 날짜에 나타나지 않자, 그동안 멀쩡했던 아이들도 불안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빨리 좀 돌아와라, 이 새끼야!!'
지미는 결국 그토록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랐던 레이를 다시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