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2)
77화
제국의 신검, 모로스.
용언이 깃들었다 전해지는 이 병기는 주인이 전달한 에너지를 종류를 가리지 않고 증폭시킨다.
촤악!!
레이의 팔이 채찍처럼 휘둘러진다.
동시에 모로스를 타고 흐른 검기가 불꽃처럼 거칠게 타올랐다.
카가각!!
서로의 검이 격돌하는 순간.
검강이 흐트러진 마우스의 검이 산산이 조각났다.
마우스가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지면이 찰흙처럼 뭉개지며 마우스의 몸을 받아냈다.
콰앙!!
"크헉...!"
절벽까지 밀려나서야 움직임을 멈춘 마우스가 각혈했다.
마우스의 상체는 부서진 검 조각에 의해 온통 짓이겨져 있었다.
당장 상처를 틀어막고 포션과 신성력을 때려부어도 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중상이었다.
전투가 끝났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세리아가 레이에게 다가와 포션을 내밀었다.
레이가 사양하지 않고 포션을 받았다.
"감사해요."
여전히 오버드라이브는 성장이 끝나지 않은 아이의 몸으로 사용하기엔 부하가 너무 컸다.
뒤늦게 찾아오는 강렬한 뻐근함 탓에 레이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레이가 몸에다 대충 포션을 찍어 바르며 세리아를 마주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세리아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짧게 혀를 찬 레이가 절반 정도 남은 포션을 찰랑이며 물었다.
"고모, 혹시 포션이 충분히 남아있나요?"
"응."
세리아는 미궁에서의 경험 탓에 포션 같은 소모품을 가득 챙겨다니는 편이었다.
평소에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지만 이런 때에 큰 도움이 됐다.
"포션 좀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세리아가 로필렌이 부상자를 끌어모은 곳으로 몸을 돌렸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이 꽤 위태로워 보였다.
지긋이 입술을 씹은 레이가 허공에 다시 모로스를 수납했다.
짜증어린 시선이 널브러져 있는 마우스를 향한다.
"아프텔."
츠즉!
아프텔이 펼친 차단막이 레이와 마우스를 둘러쌌다.
마우스가 피가 줄줄 새는 가슴을 움켜쥔 채 입을 열었다.
"넌... 대체 누구야?"
"환생한 하르시아다, 쌥새끼야."
"하하. 날 저 멍청한 마법쟁이랑 똑같이 취급하는군."
아무리 고강한 검술을 익혔다고 해도 세월이 채워주는 노련함까지 모방할 수는 없다.
"네 검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날카롭고 대담했지만... 아직은 어설펐어."
레이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듀에이트 쯤 되면 상대의 검술 수준이 어떤지는 검을 몇 번 맞대는 것만으로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레이는 농담 삼아 제국을 상대로 사기를 치네 마네 떠들었다만.
정말 제국을 속여 넘기고자 한다면 검술을 최소 수십 년은 더 수련해야 했다.
마우스는 점점 더 가빠져 오는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뭐, 그렇다 해도... 네가 그분의 적통한 계승자임은 분명하겠지."
레이는 하르시아의 모든 것을 온전히 전수받았다.
레이는 공간검의 계승자이자 모로스의 주인이었다.
허나 제국은 레이를 인정하지 않을 터다.
제국에게 있어 레이는 그저 도둑놈일 뿐이었다.
제국의 신검을 황가의 피가 흐르지 않은 자가 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경이었다.
"너도... 앞으로 고생 좀 하겠어."
"잡담은 그만하지. 우리를 습격한 이유나 말해."
"하..."
마우스는 잠시 세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혹시라도 우리가 역으로 사냥당하는 신세가 되면, 어떻게 해야 돼?
전부 황태자가 시킨 일이라고 외치고 자결해.
"큭큭큭..."
마우스가 실소와 함께 핏물을 게워냈다.
"대단한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그저... 너희는 재수가 없었을 뿐이야."
윗분들의 정쟁에 휘말려 죄 없이 목이 떨어진 아랫것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레이의 일행은 그저 재수 없게 천재지변을 맞닥트렸을 뿐이다.
마우스가 핏물에 가득 절여진 가슴을 쓰다듬었다.
"나는 어제까진 운이 좋았어."
그리고 오늘, 운이 다했다.
그게 마우스가 이 자리에서 죽는 이유였다.
잠시 눈을 찌푸렸던 마우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완전히... 의외의 결과이긴 하나... 그림은 나쁘지 않군."
황태자가 독단으로 특임대를 움직인 탓에 로얄가드 급 전력 둘이 희생됐다.
귀족들의 반발만 살 쓸모도 없는 작전을 펼치다가 말이다.
황제가 황태자를 쳐낼 명분으로 충분한 사건이었다.
"쯧."
눈이 반쯤 풀린 마우스가 투덜댔다.
"알슈테인 가에만 좋은 일을 해주었어..."
설마 레이가 황실 특임대 최고 전력 중 하나인 마우스를 제 손으로 죽였다고 떳떳이 밝히겠는가.
레이가 정체와 실력을 숨긴다면 결국 그 위업은 세리아에게 온전히 돌아간다.
로얄가드와 황실 특임대 흑색 요원이면 제국이 키워낸 최정예 전력이다.
기사들 중에서 이들과 정면에서 견줄 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헌데 세리아가 황실이 보낸 그래듀에이트 둘을 동시에 격살했다고 알려진다면.
세리아의 위명이 하늘을 찌름과 동시에 황실의 권위가 땅으로 고꾸라질 터다.
그에 더해 알슈테인 가는 황실이 세리아를 명분도 없이 공격했다며 막대한 보상을 요구할 게 뻔했다.
"황실의 출혈이... 꽤 크겠는데."
황태자야 완벽히 쳐낼 수 있겠다만 황제도 손해가 꽤 막심할 터다.
곤란해할 황제를 떠올린 마우스의 입꼬리가 빙긋 올라갔다.
"오늘 일로... 황태자가 자리에서 내려올 거야."
"..."
"만약 오늘 일을 침묵에 붙이고 빠르게 황태자 측과 접선하면... 그래, 썩 괜찮은 기회를 잡을 수도 있겠다만..."
그건 폭풍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가는 짓이다.
어지간한 뒷배와 정치적 감각이 없이는 폭풍에 휩쓸리다 머리가 잘릴 게 분명했다.
"도박을 할 게 아니라면 발을 빼는 걸 추천하지. 특히 너는... 숨길 게 많아 보이는데 말이야."
"발을 빼고 싶다고 뺄 수 있나?"
"그냥... 여길 벗어나서 오늘 일을 여기저기 크게 떠들고 다녀. 그럼 소식을 들은 높으신 분들이 서로를 알아서 물고 뜯으실 테니."
한동안 폭풍이 불어 닥칠 터다.
그 사이에 끼여 우왕좌왕하다 패가망신하는 자들의 숫자도 꽤 되겠지.
"하지만 네가 모시는 아가씨는... 제국 변방 가문의 사람이잖아. 고개만 잘 숙이고 있으면 중앙 정부에서 몰아치는 피바람도 손쉽게 지나칠 수 있겠지."
필립스 백작은 중앙 귀족들과 연줄을 거의 만들어 놓지 않았다.
그렇기에 특정 파벌에 속해있지도 않았고, 누군가의 이목을 끌 힘도 없었다.
오시리스 가라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지만, 적어도 필립스 가가 황실의 권력 구도 변동 탓에 돌을 맞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알슈테인 가는?"
"걱정할 곳을 걱정해. 이번 일 덕택에 알슈테인 가는 황실을 아주 잔뜩 뜯어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그렇겠군."
레이는 손가락을 툭툭 튕겼다.
황실 권력 구조에 지각 변동이 인다.
어쭙잖게 참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레이가 이 세계의 미래를 알고 있다 해도 굉장히 조심스레 접근해야 하는 판이었다.
허나 레이는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다른 황자들 간의 불화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마우스의 말마따나 눈 감고 도박할 생각이 아니면 한 걸음 떨어져 상황이 진정되길 기다리는 게 현명했다.
레이가 생각을 정리해가는 사이.
마우스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하나 더... 충고하지."
"...?"
"하르시아 류 공간검은 실전됐지만... 그 형태는 아직 제국에 남아있어. 남에게 함부로 그 검식을 드러냈다간 골치 아파질 거야."
"참고하도록 하지."
도움이 되는 충고였다.
수백 년 전 실전된 검술이라기에, 레이는 안이하게 하르시아의 검식을 사용하곤 했다.
허나 제국이 공간검을 전수하는데 실패했다고 해도 그 검식까지 소실했을 가능성은 적었다.
'듣고 보니 아찔하군.'
다른 검식을 하나 더 익히거나 두 번째 검을 뽑는 걸 최대한 지양해야 할 것 같았다.
하르시아 류 공간검이 지닌 검식의 특수함은 대개 두 번째 검을 뽑았을 때 훨씬 명확해졌다.
"크윽...!"
까각!
할 말을 모두 마친 마우스가 검집을 지팡이 삼아 일어나려 했다.
허나 지면을 잔뜩 적신 출혈 탓인지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앞으로 철퍽 쓰러진 마우스가 얼굴에 흙을 가득 묻힌 채 킥킥거렸다.
"선 채로 죽었다는 영웅 좀 따라 해 보려 했는데 잘 안 되네. 세타가 봤으면 비웃었겠어."
벌레처럼 꾸물거린 마우스가 간신히 몸을 뒤집었다.
애국심과 사명감을 지니고 제국의 어둠이 되기로 맹세했다.
허나 오랜 헌신 끝에 마음에 품었던 각오는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마우스는 사람을 죽이는데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죽음이 자글자글한 노인도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도 명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목을 베었다.
그 깊고깊은 업보의 끝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 정도면... 호상이군."
나는 좀 더 고통스럽고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게 아닌가, 그런 후회를 담아 마우스는 하늘로 손을 뻗었다.
환히 빛나는 태양이 마우스를 맞이해주고 있었다.
마우스가 마지막 힘을 짜내 중얼거렸다.
"제국에게..."
영광을.
툭
마우스의 눈동자가 생기를 잃었다.
마우스가 누워있던 지면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프텔이 펼친 차단막이 해제됐다.
냉담하게 등을 돌린 레이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까워지는 레이를 보고 로필렌이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으흑! 어흐흐크흐흑!"
레이가 곧장 눈살을 찌푸렸다.
"표정 관리해."
"네, 넵!"
"말투 고치고."
"..."
조용해진 로필렌을 지나친 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들 중 가장 큰 부상을 입은 자는 아벤시오였는데, 검강을 정면에서 막아낸 탓인지 팔이 하나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물론 남은 팔다리도 멀쩡한 건 아니었다.
기사의 강건한 육체와 로필렌의 무식한 지혈, 그리고 세리아가 때려 부은 포션 덕분에 간신히 명줄을 붙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플로리아가 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플로리아 님."
"네? 넵!"
기합이 바짝 든 플로리아를 보며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올린 레이가 말을 이었다.
"알레시아 님, 아벤시오, 고모. 이 세 사람 플랑 위에 태우고 도시로 돌아가요."
말도 죽고 마차도 박살났다.
현재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이 플로리아와 계약한 중급 바람 정령인 플랑이었다.
"도시로 가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금 습격을 사방에 알려요. 그 뒤에 이쪽으로 사람 보내고요."
습격에 실패했음을 알아챈 주동자들이, 혹은 이 명분 없는 습격이 정치적 공작이었음을 알아챈 무리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이 자리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더더욱 빠르게 공론화를 해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세리아가 레이를 잡아끌었다.
"같이 가. 레이."
"괜찮아요, 고모. 여기 있는 사람들 지켜야죠. 그리고... 만약 후속 부대가 있으면 명줄을 끊어 놔야 하고요."
사람도 사람이지만, 레이는 협곡 사이에 널린 습격의 증거가 인멸 당하게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서클과 아프텔의 존재 덕분에 원거리 탐색 또한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레이 혼자 남아도 이 공간을 지키기엔 충분했다.
레이의 강경한 태도를 보고 세리아는 결국 팔을 놓아주었다.
플로리아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빠,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쟤는 또 왜 저러냐.
혀를 끌끌 찬 레이가 멀어지는 바람 정령을 지켜봤다.
"후우..."
협곡 사이에 휘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레이가 한숨을 토했다.
갑자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당혹스럽기는 레이도 매한가지였다.
주변을 살피던 레이가 문득 부서진 마차에 시선을 주었다.
애들 선물이 저기에 다 담겨 있었다.
"아, 시발."
저기 있는 게 얼마짜리인데.
순간 정신이 번쩍인 레이가 황급히 마차로 달려가 짐칸을 헤집었다.
일단 천으로 둘둘 싸서 목제 상자에 담아 짐칸 밑에 따로 분리해 두었던 목걸이와 제플린의 검은 무사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죄다 작살났거나 지면을 굴러 엉망진창이었다.
"환장하겠네. 남은 돈 탈탈 털어서 산건데."
이 사태를 어찌할까 고민하던 레이가 쓰러진 마우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디... 백금화라도 하나 나오면..."
무릎을 꿇고 앉은 레이가 주섬주섬 마우스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