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1)
76화
새하얗게 물든 공간에서 레이가 소녀를 내려보았다.
길게 찢어진 레이의 입꼬리에서 실소가 흘렀다.
"지랄 말고 준비돼 있는 물건이나 내놔."
"어라, 나 거짓말하는 거 아닌데~?"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소녀의 머리채를 움켜쥔 레이가 얼굴을 더욱 가깝게 들이댔다.
웃음기가 어렸던 표정이 급격히 굳어진다.
"난 네놈들의 세상에 애착이 없어."
콜라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고 쓸만한 오락거리도 없다.
기술 수준이 지구보다 못하거나, 부분적으로 뛰어난 기술이 있다 해도 대중화되지 않았다.
허나 그런 사회 인프라적인 측면을 집어치우더라도.
"이해도 안 되는 글자가 힘을 발하고 너 같은 정신병자가 넘쳐 나는 이 세상이... 날 억지로 끌고 와 여기까지 몰아붙인 이 빌어먹을 세상이..."
레이의 두 손이 소녀의 목을 붙잡았다.
거친 감정이 휘몰아치며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었다.
"증오스럽다고."
가끔.
어쩌면 자주.
손에 닿는 모든 걸 짓이겨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곤 했다.
세상을 구원하라는 초월자의 요청 따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부수면 부쉈지, 이 빌어먹을 세상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닥이고 싶지 않았다.
한 여자의 사랑과 헌신이 결국 레이의 마음을 움직였지만.
레이는 여전히, 몇몇 사람에게 정을 느낄지언정 이 세계를 증오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구질구질하게 오래 살 생각 없어."
벽 끝까지 소녀를 몰아붙인 레이가 얼굴에 핏발이 설 만큼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목이 뒤틀리기 시작한 소녀와 이마를 맞댄 레이가 이를 갈아냈다.
"그러니까 준비해둔 걸 전부 내게 내놔."
"으크크크큭..."
소녀의 입가에서 거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뿌득!
레이의 손아귀가 소녀의 목을 완전히 꺾어버리는 순간.
소녀의 형상이 흐릿해지며 레이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쿵-!
새하얀 천장에 쩍쩍 금이 갔다.
벽이 통째로 무너지며, 빛으로 이루어진 새하얀 띠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릿해진 소녀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좋아, 네게 줄게."
반경 1 m가 넘어서는 새하얀 띠가 레이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내 영혼 조각을 정제해 창조한, 오직 공간검의 코어를 컨트롤하기 위해 조율된 서클이야."
끼기기기기긱!!
레이를 주위로 회전하던 새하얀 띠가 점점 더 압축된다.
레이는 심장이 짓눌러지는 압박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흐릿하게 번져가는 소녀가 손을 흔들었다.
"준비해둔 모든 안배를 네게 줄 테니..."
트드드득!!
레이를 가두었던 공간이 조각조각 깨져 나감과 동시에.
소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잔향처럼 울렸다.
"가렴. 가서,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렴."
*
콰앙!!
무너졌던 절벽 일부가 굉음과 함께 바스러졌다.
차게 식은 공기가 퍼져 나가며 레이가 절벽 속에서 걸어 나왔다.
뿌득뿌득
발에 얼음 조각이 밟힌다.
레이는 덤덤하게 오른손에 쥐었던 검을 납검하려다, 먼지가 걷히기 시작하자 서서히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파괴되고 내려앉은 협곡이 보인다.
사방에 핏물이 낭자했고, 여기저기 익숙한 얼굴이 쓰러져 있었다.
레이는 거칠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로필렌."
깊게 잠긴 목소리가 레이에게서 흘러나왔다.
"사람들 수습해."
죽진 않았으나 출혈이 심한 자들이 많았다.
옷자락으로 압박하다 안 되면 마법으로 상처 부위를 얼리든 지지든 해서라도 지혈해야 했다.
로필렌이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알겠습니다."
"..."
로필렌을 지나친 레이는 이미 뽑아냈던 검에 검기를 두르며, 왼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우웅!
심장 속의 코어가 날뛰기 시작한다.
심장 밖을 회전하던 서클이 요동치는 코어를 단단히 옥죄었다.
코어를 옥죈 반발 탓에 서클의 마나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티디딕!
레이가 발을 디딘 지면이 얼어붙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바라본 마우스가 헛웃음을 토했다.
"웬 미친놈이..."
두 자루의 검. 서클. 휘몰아치는 한기.
레이가 누구의 흉내를 내고 있는지는 명확했다.
제국 역사에 저런 미친놈이 한둘이었을까.
하르시아가 이루었던 경지에 닿겠다고 설쳤던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은 하르시아를 모방해 심장 주변에 서클을 만들었다가, 엑스퍼트 너머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공간검처럼 아주 예외적인 검술을 제외하면.
코어와 서클의 공존은 극심한 비효율을 초래한다.
이제는 동네 꼬마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 레이는 심장에 서클을 두르고 있었다.
'그 나이에 검기를 다룰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났으면서... 치기에 빠져 미래를 망쳤군.'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 썩 그럴싸하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레이의 자세는 제국에도 형태만 남아있는 하르시아 류 공간검의 검식과 완벽히 일치했다.
그리고 하르시아 류 공간검의 검식은 당연히 제국 최고 기밀이었다.
그걸 레이는 완벽히 재현하고 있었다.
"..."
마우스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동시에 레이가 양손의 검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검이 한 바퀴 돌 때마다 검에 맺혔던 검기가 점멸한다.
검기가, 점멸한다.
마우스는 가려움을 느꼈다.
자꾸만 피부를 타고 오르는 스산함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마우스는 말도 안 되는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억지로 숨을 크게 쉬었다.
그 찰나.
콰앙!!!
협곡 위쪽이 터져나갔다.
마법사들이 대기하던 공간이었다.
무엇에 당한 거지?
무심코 공격을 당한 위치로 고개를 돌렸던 마우스가, 곧장 허리를 비틀었다.
한참 떨어져 있던 레이가 삽시간에 코앞까지 다가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콰각!!!!!
검기와 검강의 충돌.
검기를 제아무리 압축했다 해도 검강과 맞부딪치면 박살 나기 마련인데, 레이는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으로 충격을 해소했다.
빙글
레이의 검이 다시 제자리서 한 바퀴 돈다.
검기가 점멸한다.
찰나간 갈등한 마우스는.
결국 제 직감을 따라 후방에 검을 휘둘렀다.
콰앙!!
허공을 가르고 내리꽂힌 검기를 마우스는 간발의 차로 요격할 수 있었다.
그 찰나 레이의 신형이 제자리서 증발했다.
파가각!!
레이의 검이 삽시간에 목젖을 파고들었다.
마우스가 공격을 쳐내자 레이는 검을 한 바퀴 빙글 돌리고는 양 손의 검을 교차해서 내려 벴다.
그 모든 과정이 찰나였으며, 허공은 또다시 찢어지고 있었다.
[경배하라.]
흘러 넘겼던 로필렌의 목소리가 마우스의 귓가를 울린다.
[제국 역사의 정점이 귀환하셨다.]
"너는...!!"
콰아앙!!!
"대체 누구냐?!!"
간신히 레이의 검격을 상쇄시킨 마우스가 코어를 폭주시키다시피 쥐어짰다.
사방으로 마나가 퍼져 나가며 지면이 움푹 패였다.
마우스가 익힌 분해검의 성질은 저주와 닮아 있었다.
물질 간의 결합을 약화시켜 구조를 붕괴시킨다.
찌직!
마우스의 마나에 휩쓸린 레이의 피부가 거칠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레이가 개의치 않고 앞으로 전진하려는 찰나 검기의 폭풍이 마우스를 덮쳤다.
콰가각!!
마우스는 어렵지 않게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 사이 허큘러스가 레이의 몸을 둘러쌌다.
간신히 마나를 짜낸 세리아가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었다.
마우스가 분노하며 세리아에게 검강을 쏘아내려는 순간.
사방의 공간이 갈라졌다.
마우스는 공포가 목구멍을 잠식함을 느꼈다.
사방에서 검기가 쏟아진다.
카가가가각!!
미친듯이 검을 휘둘렀지만 검기를 전부 방어할 수는 없었다.
황실이 제공한 최상위 등급의 갑주가 간신히 마우스를 지켰다.
공간검의 사용자에겐 거리도 시간도 그 무엇도 내주면 안 됐다.
이를 깨달은 마우스가 곧장 레이에게 달려들었다.
파가각!!
검격이 부딪친다.
마우스는 레이를 노려보았다.
제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공간검의 사용자다.
그 존재 자체가 반역이었다.
협상의 여지가 있는가?
아니, 이미 서로 선을 넘었다.
그러니 여기서 죽여야 했다.
더 성장하기 전에 죽일 마지막 기회였다.
츠즈즉!!
마우스가 평생 쌓아왔던 마나가 미친 듯이 흘러나왔다.
물질을 분해하는 힘이 폭주하며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착용하고 있는 갑주의 방호력은 마우스가 더 뛰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건 레이였다.
허나 그것도 마우스가 충분한 시간을 견딜 수 있을 때 이야기였다.
파가가가각!!
허공이 계속해서 갈라진다.
찬란히 빛나는 검기가 사각에서 짓쳐든다.
몇 번이나 검기에 피격당한 갑주가 버티질 못하고 깨져나간다.
우물거리던 마우스의 입가가 이윽고 히죽이기 시작했다.
제국 검술의 정점, 하르시아 류 공간검.
수백 년 전 제국의 적들이 맞닥트려야 했던 공포가 무엇이었는지.
마우스는 드디어 통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죽여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이성적인 사고가 그리 판단했다.
제국의 배신자가 공간검을 유출해 저 아이를 가르쳤다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레이와 제국은 결단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다.
마우스는 이미 과거에 망각했던 사명감을 떠올렸다.
"으아아아아!!"
마우스가 비명에 가까운 고함과 함께 두 자루의 검을 좌우로 교차시켰다.
레이가 마우스의 공격을 막아내는 순간 허공이 찢어졌다.
떨어져 내리는 도약 검기를 마우스는 몸으로 받아냈다.
콰각!!
갑주의 방어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며 마우스의 등허리를 뒤덮었던 가죽이 모조리 터져나갔다.
고통을 참기 위해 악 다문 마우스의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마우스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레이를 마주 봤다.
마우스가 레이보다 앞서는 것.
힘, 체격, 그리고 검과 갑주의 재질.
뿌드드득!!
마우스가 검을 맞댄 레이를 아래로 찍어 눌렀다.
검강이 서린 검에 몸을 들이밀면서까지 레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했다.
남은 모든 마나를 검강에 쏟아 넣는다.
레이의 검기는 마우스의 검강을 충분히 버텨낼 수 있었지만, 무기는 아니었다.
끼기긱!
휘몰아치는 검강과 검기에 의해 계속해서 혹사당했던 검 한 자루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레이의 눈동자가 자기 오른 손에 쥔 검으로 돌아갔다.
검에 본래부터 새겨져 있던 균열이 번져나가며 급격히 강도가 떨어졌다.
마우스가 괴성을 지르며 마지막 힘을 짜냈다.
"크아아!!"
까각!!
검이 부러진다.
힘이 가득 들어갔던 마우스의 일격이 레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마우스는 레이를 양단하리라 자신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치명상은 입힐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 찰나.
허공이 갈라지며 빛이 흘러나왔다.
마우스는 그 정체가 도약 검기인줄 알았으나, 이내 예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파스스!
갈라진 공간 사이로 아공간에 숨어 있던 은백색의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검신에는 괴이한 형태의 문자로 문장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마우스는 그 문장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문장의 뜻은 알고 있었다.
"제국에게..."
영광을.
초대 황제로부터 전해내려 왔으며, 하르시아가 사용하다 유실됐다는 제국의 신검, '모로스'.
휘몰아치는 섬광이 마우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