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 (4)
74화
레이는 얼어붙은 세계 속에서 몸을 움직여봤다. 아무 감각이 없었다.
자기가 지금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숨 쉬는 상상을 한 레이가 주변을 다시 인식했다.
온도가 낮아짐은 대체로 분자 운동이 느려짐을 뜻하니, 결국 빙결 마법의 정점이 지금 갇혀 있는 모든 것이 정지한 세계였다.
단 한 번도 경험치 못했던 완벽한 적막에 레이는 생소한 공포를 느꼈다.
레이는 공포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머리를 계속 굴렸다.
이 공간을 벗어날 방법이 대충은 예상이 갔다.
다만 리실로테의 안배를 향한 힌트가 혹시 이곳에 있진 않았을까 싶어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허나 얼어붙은 세계는, 그저 고요했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시간?'
시간.
문득 떠오른 시간이란 키워드에 레이가 얼어붙은 세계에 다시 깊숙이 몸을 담갔다.
시간이 정지한 세계.
모든 물질이 극한까지 얼어붙은 세계.
그 두 세계를 구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레이는 이 기묘한 공간 속에서 고민에 빠졌다가 고개를 저었다.
구분할 방법이 없다. 적어도 레이가 지닌 감각으로는.
허나 시간의 정지와 물질의 정지는 등가하는 개념이 아니다.
레이가 권능을 발현했다.
적막이 으깨지며 정체를 알기 힘든 고통이 영혼을 달군다.
대부분의 감각이 사라진 덕분에, 차라리 권능으로부터 더 직관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코어가 회전한다.
불세출의 천재, 하르시아가 창조해냈던 공간을 변질시키는 힘이 레이를 감싼다.
여전히 그 원리는 알 수 없다.
허나 이 얼어붙은 세계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 본질이 무엇인지 미약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츠즈즈즈즉!
세계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그저 자리를 지켰다.
허나 변화가 발생한다. 그 변화의 지점이 어디인가.
"아..."
레이는, '보았다.'
이 독특한 장소의 특성과 초월자가 내려준 권능이 맞물려.
4차원 시공간만을 한평생 살아왔던 인간이, 찰나의 순간 그 너머의 차원을 인식했다.
레이는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르시아가 만들어 낸 것.
더 상위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는 힘.
도약 검기는 공간을 도약하는 검기가 아니다.
더 상위 차원으로 발을 들여, 4차원 시공간을 살아가는 생물들의 인지를 벗어났을 뿐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닫는다.
"하르시아 이 미친 새끼..."
4차원 공간에는 3차원 공간이 네 개 존재한다.
더 상위 차원으로 가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레이가 환생한 이 세계는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존재와 접촉할 수단이 존재했다.
정령, 악마, 혹은 다른 무언가.
그들을 죽이기 위해.
하르시아는 더 상위의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는 힘을 창조해냈다.
"하..."
레이가 헛웃음을 토했다.
이게 과연 인간이 이뤄낼 수 있는 업적이란 말인가.
황당해서 감탄도 나오지 않았다.
트드드득!
얼어붙은 세상이 깨져 간다.
레이는 몸에 감각이 돌아옴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레이는 출구 없는 하얀 방에 앉아 있었다.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네가 하르시아의 계승자?"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녀가 레이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다리 아래까지 오는 금발을 질질 끌어가며 인상을 찌푸렸다.
"황족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잖아?"
"그래, 고추 달린 건장한 남자지. 그래서, 그쪽은 리실로테 님이 남겨둔 사념이라도 되시나?"
깔깔 웃은 소녀가 답했다.
"그냥 프로그래밍 된 데이터 쪼가리야."
"아, 그래. 쪼가리 양반."
레이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얼어붙은 공간에서 시간을 얼마나 보냈는지 알 수 없으니 여기서 최대한 빨리 벗어날 생각이었다.
바깥에서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을 게 뻔했다.
"리실로테 레코드 백도어 코드랑 계승자에게 남겼다는 안배 좀 받으러 왔어."
"그걸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근데 너 진짜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운이 좋았나 보지."
레이는 긴장을 조금 내려놓은 채 답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소녀가 레이의 명치를 지긋이 바라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와, 너 심장 엄청 튼튼한가 보다. 인간이 이걸 버티네?"
"하르시아도 버텼잖아."
"걔는 선조 중에 드래곤의 피가 섞인 혼종인데다 심장을 드래곤 하트로 강화했으니까 버텼지. 그러고도 꽤 아슬아슬했어?"
황가에 드래곤의 피가 흐른다는 전설이 설마 사실이었나.
눈을 깜박이던 레이가 문득 의문을 느꼈다.
"야, 쪼가리. 처음에 여자 이야기는 왜 나온 거야?"
황족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소녀는 처음에 레이를 보고 그리 말했다. 막 리실로테 레코드를 빠져나왔을 땐 정신없어서 신경을 못 썼는데, 돌이켜보니 이상한 말이었다.
"아~ 여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고민하던 소녀가 허공에서 의자를 뽑아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원래 기밀이긴 한데, 뭐 600년 가까이 지났으니 그냥 말해줄게."
"?"
"하르시아가 사용한 코어 말이야, 워낙 부하가 심해서 사용자의 심장이 버티질 못했거든. 그래서 다른 장기에 코어를 생성하는 실험을 진행했었어."
"..."
"예전부터 이런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최종적으로 그나마 적합하다고 판정받은 장기가 자궁이었단 말이야?"
"그래서 자궁에다 코어 만드는 실험을 진행하셨다?"
"응. 심장이 터지는 것보단 자궁이 터지는 게 낫잖아?"
미친년.
레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실험은 성공했어?"
"부작용이 만만치는 않았어. 다들 불임은 기본에 한두 달도 못 버티고 내장이 파열되거나 하더라고. 그래도... 실험 성과는 괜찮은 편이었지."
"무슨 성과?"
"심장보다는 몸에 부하가 한참 덜 걸린다는 게 확인됐거든. 근데 코어를 컨트롤 하는 난이도가 심장에 있을 때에 비해 너무 높아져서 말이야, 그게 문제였어."
"자궁엔 심장처럼 피가 안 흐르니까."
"맞아. 마나를 다루는 센스가 극한까지 타고난 여자라면 얼추 제어가 가능할 것도 같았는데, 그때쯤 연구가 중지됐어. 인재 소모가 너무 크다고 황제가 지원을 다 끊었거든."
"..."
"제국이 벼랑 끝에 몰리면 그때나 연구가 다시 진행되지 않을까 싶어서, 언젠가 여길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황족 아니면 여자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의자에서 일어난 소녀가 레이의 명치를 콕 찔렀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한데?"
"너 말이야, 단명할 거야."
레이의 눈가가 슬그머니 좁아졌다.
소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연거푸 입에 담으면서도 꽤 해맑아 보였다.
"심장이 꽤 튼튼하긴 한데, 그래 봐야 평범한 인간이잖아?"
"..."
"미리 말해주는데, 여기서 안배를 얻어가면 남은 수명도 절반 아래로 떨어질걸?"
소녀가 히죽거리며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서클을 만든다 해도 코어의 절대적인 부하를 줄여주진 않아. 심장이 버틸 수 있는 부하를 일시적으로 상승시켜줄 뿐이지. 결국 몸을 축내는 기술이야."
소녀가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간지러운 속삭임이 레이의 귓가를 타고 흘렀다.
"오래 살고 싶으면 그냥 돌아가는 게 어때? 꼭 네가 희생할 필요 없잖아."
"..."
"정 걱정되면 네 '역할'을 대신할 대체자를 직접 데려와. 찾아보면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
레이가 소녀를 내려보았다.
레이의 입꼬리가 소녀를 따라서 쭉 찢어졌다.
*
세리아는 무너진 절벽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결계까지 존재하는 미궁이라면 내부 구조가 꽤 견고할 확률이 높았다.
당장은 절벽을 파헤치기보다 외부의 위협을 제거하는 게 먼저였다.
콰앙!
세리아가 내딛고 있던 지면이 으깨졌다.
짓푸른 폭풍이 사방으로 비산함과 동시에 세리아의 신형이 제자리서 증발했다.
섬광 하나가 유성처럼 꼬리를 그린다.
브리즈는 강렬한 압박을 느끼며 섬광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앙!!!
"...!"
삽시간에 절벽까지 밀려난 브리즈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의 외견과 실력, 장비 수준을 고려했을 때 추측되는 인물은 하나였다.
'세리아 알슈테인...?'
갑작스레 등장한 너무도 예상외의 인물에 브리즈는 당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번 임무를 맡긴 세타는 알레시아의 일행 중에 세리아가 아끼는 혈육이 있다는 정보를 브리즈에게 고의로 누락했다.
또한 세리아가 레이와 동행했다는 사실은 일행들을 제외하면 디오리카만이 인지하고 있었다.
'대체 어째서...?'
혼란스러워 하는 브리즈를 향해 다시 섬광이 짓쳐 들었다.
그 틈을 타 젠킨슨은 빠르게 일행들의 역할을 나누었다.
"멘데스, 나와 함께 세리아 경을 지원한다. 아벤시오, 종자들과 함께 아가씨들을 지켜라."
명령권 가지고 자존심 싸움할 때가 아니었다.
멘데스와 아벤시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젠킨슨이 검기를 뽑아내며 로필렌에게 시선을 주었다.
"로필렌, 자리를 지켜라."
여러 의미가 함축된 지시에 로필렌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는 것으로 답했다.
알레시아가 종자들에게 붙잡혀 아벤시오 뒤로 끌려가며 외쳤다.
"젠킨슨 경! 나도 전투를 돕겠네!"
젠킨슨은 사양하지 않았다.
정령과 계약을 맺은 플로리아와 알레시아는 정면에 나서지 않아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다.
"플로리아 님, 절벽 위의 마법사들을 견제해 주십시오. 알레시아 님, 피닉스를 활용해 주변을 정찰해 주십시오. 그리고..."
젠킨슨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당부했다.
"상황의 여의치 않을 시 두 분은 펜리르를 타고 이 지역에서 이탈하십시오."
중급 바람 정령 펜리르는 어지간한 말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피닉스를 활용해 정찰을 마친 뒤라면, 적이 더 몰려온다 해도 몸을 뺄 수 있을 터다.
거기까지 계산을 마친 젠킨슨이 땅을 박찼다. 멘데스가 그 뒤를 따랐다.
저 앞에서 세리아가 브리즈를 향해 허큘러스를 철퇴처럼 내려치고 있었다.
콰앙!!
브리즈가 제자리에서 세리아의 공격을 받아냈다.
더럽게 무거운 일격이라 불평할 새도 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공방을 나눌 때마다 검강에서 떨어져 나온 마나의 파편이 사방으로 휘날린다.
강철조차 삽시간에 난자당할 그 위험천만한 폭풍 사이를, 세리아가 한 걸음 더 파고들었다.
"?"
도저히 허큘러스 같은 대검을 휘두를 간극이 아니다.
브리즈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드는 순간.
허큘러스가 자기 홀로 공중에 떠오름과 동시에 세리아의 허리춤에서 새로운 검이 뽑혀 나왔다.
다시 서로의 검격이 충돌한다.
카가가가각!!
지근거리에서 검강의 충돌은 서로의 살갗을 갈아먹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섬광의 중심에서 세리아와 브리즈는 상대의 혈흔을 갑주에 새겼다.
거칠기 짝이 없는 세리아의 공세에 브리즈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찰나 세리아가 브리즈의 검을 아래로 쳐냈다.
브리즈가 중심을 다시 잡으려는 순간 허공을 유영하던 허큘러스가 떨어져 내렸다.
허큘러스의 모습은 기이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끝이 세 갈래로 나뉘어진 허큘러스는 브리즈의 팔을 강하게 옥죄더니 그대로 지면에 내리꽂혔다.
팔이 묶인 브리즈의 후방에서 젠킨슨과 멘데스가 뛰어들었다.
'이런.'
역시 기본 검술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결론을 내린 브리즈가 힘으로 땅에 박힌 허큘러스를 끌어당기며 후방을 향해 수십 가닥의 검기를 방출했다.
날카로운 검기였으나 두 팔이 허큘러스에 구속된 탓에 정밀하게 쏘아지지 못했다.
젠킨슨과 멘데스는 검기 다발을 무시하고 돌진을 계속하려 했다.
허나 그 순간.
검기의 궤적이 휘어졌다.
"...?!"
카가가가각!!
수십 가닥의 검기가 제각각 방향을 틀어 사방에서 쏟아진다.
젠킨슨과 멘데스가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세리아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자신에게 휘어져 들어오는 검기를 쳐냈다.
검기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발톱처럼 매서웠다.
'이건...'
유도 검기를 구현 가능한 검술 자체가 몇 존재하지 않았다만.
개중에서 이토록 정교하고 위협적인 검기를 방출 가능한 검술은 '아랑검'이 유일했다.
아랑검.
이름 높은 제국 검술 중 하나.
세리아는 과거에 한 번 아랑검을 견식할 기회가 있었기에 더더욱 몰라볼 수가 없었다.
"너, 뭐야?"
"..."
브리즈가 로브를 벗었다.
갑주를 검게 물들였던 위장이 지워진다.
갑주 위에 새겨진 마나회로가 번쩍이며 로얄가드에게 하사된 갑주의 성능을 완전히 드러냈다.
"세리아 알슈테인 경."
브리즈가 정중히 권했다.
"무슨 경위로 제국의 배반자들과 동행하시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깊게 묻지 않겠습니다.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습니까?"
"..."
세리아의 검에 검강이 재차 피어올랐다.
브리즈가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황실의 집행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
콰앙!!!
브리즈의 머리 위로 화염구가 떨어져 내렸다.
마법을 쏘아냈던 로필렌이 흥분을 다스리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이, 이 미친놈들이..."
로필렌은 이번 기습이 기껏해야 자신을 노린 마탑의 독단쯤 될 것이라 생각했다.
헌데 황실이라니. 그도 모자라 로얄가드라니.
이 정신 나간 하극상을 앞에 두고 분노가 터져 나왔다.
"네놈들이 지금 누구에게 검을 들이댔는지 알고는 있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