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 (3)
73화
알레시아와 플로리아의 일행은 황실 마탑에 도착했을 때에 비해 그 숫자가 반절로 줄어 있었다.
사용인들 중 일부는 뒷정리를 위해 황실 마탑에 남았고, 또 몇 명은 미리 출발하여 아가씨들이 머물 숙소를 점검하는 등 자잘한 일 처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핵심적인 호위 전력은 대부분 알레시아와 플로리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황실 마탑을 출발한 마차는 며칠 간의 여정 끝에 글리비아스란 도시에 도착했다.
비교적 황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고 그 크기도 거대했기에 필립스 백작령과는 견주기 미안할 만큼 잘 발달된 도시였다.
레이는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마차를 탈출했다.
"흐우... 살겠다."
마차를 타기만 하면 세리아의 품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땀이 차서 찝찝할 지경이 되어서도 세리아는 레이를 잘 놓아주지 않았다.
그나마 마차 밖에서는 세리아의 손길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세리아는 조카를 배웅하는 자리까지 가문의 간섭을 받기 싫다며 디오리카의 도움을 받아 몰래 황실 마탑을 빠져나왔다.
밖에서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면 디오리카가 곤란해졌기에, 레이를 목마 태우고 돌아다니지는 못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빠르게 골라야겠네.'
글리비아스에선 하루를 머물기로 했다.
앞으로 복귀 경로를 고려하면 글리비아스 만큼 발전된 도시를 두 번 만나기는 힘들었다.
애들 선물 사갈 거면 여기서 마저 사야 했다.
레이는 일단 대장간부터 들렀다.
"이거 얼마입니까?"
"어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겠으나 손님은 운이 좋은 줄 아시오. 거기 전시된 검은..."
"얼마냐니까."
"본래 70골드는 받아야 하지만..."
익숙하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대장장이를 상대로 레이 또한 익숙하게 무력시위를 시작했다.
깡! 깡! 깡!
검 세 자루가 순서대로 반 토막이 나서 바닥을 굴렀다.
레이가 한참을 짧아진 검을 살랑살랑 흔들며 대장장이를 마주 봤다.
"야, 안 부러지는 걸로 가져와."
"...몇 자루 필요하쇼?"
"세 자루."
대장장이가 검을 새로 꺼내오자 품질을 확인해 본 레이가 삼백 골드를 내밀었다.
얼추 적정한 가격이었기에 대장장이는 떫은 얼굴로 돈을 받았다.
검집까지 손수 골라 챙긴 레이가 고급 필기구를 판매하는 가게를 찾아갔다.
보통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 계층이 쓰는 도구라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수십 골드면 괜찮은 물건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바가지를 씌우려는 시도는 있었다.
레이가 조금 어루만져주자 고분고분해졌다.
필기구 수십 세트를 산 레이가 장신구 가게를 앞에 두고 침음을 흘렸다.
"흠."
장신구를 선물해주면 좋아할 아이들이야 많았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사치품인 장신구는 남들의 표적이 될 확률도 높았고 잃어버리기도 쉬웠다.
괜히 장신구 쥐여줬다가 문제 생기면 레이만 골치 아팠다.
'카렌은, 음... 예외지.'
카렌은 성격도 꼼꼼하고 자기 몸 지킬 실력도 갖추고 있다. 그러니 목걸이 하나쯤은 선물해도 괜찮을 거라고, 뒤늦게 이유를 가져다 붙였다.
레이는 자신이 은근히 카렌을 편애하고 있다는 건 자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카렌은 고아 가챠 돌리다 처음 뽑은 레어였다.
오랜 가챠 끝에 카렌보다 성능 좋은 고아도 수집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처음 뽑은 레어에 애착이 더 갔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바리바리 싸든 레이가 알레시아가 머물고 있을 숙소로 향했다.
레이는 길을 따라 걸으며 혼잣말을 했다.
"뒷문을 만들어 놓은 진짜 이유가 뭐야?"
[리실로테 님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백도어는 언젠가 써먹을 일이 있으리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그러셨겠죠."
비꼬는 듯한 레이의 음색을 듣고 아프텔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허나 600년이 지난 현재까지 사용 가능한 단 하나의 백도어는, 리실로테 님이 명백한 목적을 지니고 안배해두신 장치입니다.]
"나와 같은 존재가 출현하는 때를 대비하신 건가?"
[그렇습니다.]
"하하..."
레이가 마른 웃음을 삼켰다.
불알 친구 놈이 읽었던 소설 속에서 리실로테의 안배를 취한 자가 있다면, 과연 누구였을까.
마왕에게 죽었던 용사가 안배의 주인이었을까?
만약 용사가 리실로테의 안배를 취했다면, 공간검을 어떻게 익힐 수 있었던 거지?
'어디 하르시아가 마련한 안배라도 남아있던가..."
그게 아니라면.
위기에 빠진 제국이 재능 좀 있어 보이는 아이들을 무식하게 긁어모아 공간검을 익히라고 강요했을 수도 있다.
레이는 리실로테의 안배를 자신이 취해도 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용사가 아니야. 나는 정점에 달하지 못해.'
엄살이 아니었다.
레이는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이 명백히 부족했다.
공간검의 부하를 버티고, 머리에 각인된 검술을 고스란히 재현할 수 있는 육체가 있었지만, 그 이상 나아갈 타고난 감각이 부족했다.
함부로 리실로테의 안배를 취했다가 용사의 기연을 뺏어 먹은 꼴이 되면 골치 아팠다.
'그럼 어떡할까.'
재능 좀 있어 보이는 애들 앉혀 놓고 공간검을 익힐 수 있나 실험이나 해볼까.
요하나가 첫 번째 실험 대상이 될 거다.
코어의 부하를 버티지 못하고 요하나가 죽으면, 과거 제국이 그러했듯 적합자가 나올 때까지 룰렛이라도 돌려야 할 터다.
퍼억!
대로변을 걷던 레이의 몸이 한차례 휘청였다.
반대편에서 다가오던 남자가 갑자기 몸을 틀어 레이를 밀친 탓이다.
레이의 품에 가득했던 짐이 땅에 우르르 쏟아졌다.
이때를 노렸다는 듯 골목에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달려나왔다.
개중에는 꽤 앳돼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바닥에 떨어진 레이의 짐에 손을 뻗으려던 순간.
검이 뽑혀 나왔다.
한 차례 검광이 번쩍이고, 레이에게 접근했던 모든 이들의 손발이 잘려나갔다.
레이는 자신과 부딪친 남자의 턱을 붙잡아 있는 힘껏 쥐었다.
이빨이 저들끼리 갈려나가며 잇몸을 뭉갠다.
비명이 울려 퍼지는 대로변 한가운데서 레이가 중얼거렸다.
"뭐, 안배든 뭐든... 내가 먼저 익혀 보고 가르쳐 주면 되겠지. 안배가 마련된 장소가 정확히 어디라고 했지?"
[데네프르 강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협곡에 리실로테 님의 안배가 잠들어 있습니다. 근처로 가시면 정확한 위치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실로테의 안배를 취하기로 결정한 이상 미루지 않고 빠르게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
"데네프르 강 근처에 들렸다 가자고?"
젠킨슨이 세리아의 품에 갇혀 있는 레이를 향해 의아함을 드러냈다.
데네프르 강은 글리비아스 동쪽에 흐르는 강이다.
데네프르 강 주변엔 거대한 협곡이 존재했는데, 여행객들이나 간간이 찾는 곳이었다.
"레이, 갑자기 이러면 곤란해."
이미 숙소 예약도 다 잡아 놨다.
갑자기 이동 경로가 틀어지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젠킨슨은 연거푸 불만을 토해내려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살기에 옆을 돌아보았다.
로필렌이 얼굴에 거친 주름을 만들어 내며 젠킨슨을 노려보고 있었다.
젠킨슨은 로필렌의 도전을 마다 않고 눈싸움을 시작했다.
둘은 동시에 생각했다.
'이 새끼는 뭘 믿고 자꾸 깝치지?'
로필렌은 하르시아에게 개기는 젠킨슨이 이해 안 갔고, 젠킨슨은 이제 막 식객이 된 주제에 까부는 로필렌이 이해 안 갔다.
오랜 눈싸움 끝에 결국 로필렌이 먼저 시선을 내리깔았다.
허나 로필렌은 눈싸움에 패배했음에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레이의 정체를 아는 자는 이 자리에서 로필렌 혼자였다. 그로부터 찾아오는 우월감이 로필렌을 들뜨게 했다.
젠킨슨은 홀로 킥킥대는 로필렌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한 가닥 하는 마법쟁이 놈들은 죄다 정신병자군.'
신경전이 끝난 것 같자 레이가 세리아의 품에서 버둥대며 양해를 구했다.
"살짝 돌아가면 되잖아요. 이동하는 길에 잠깐 구경하고 간다고 생각해주세요. 언제 또 거길 가보겠어요."
열심히 움직이면 대충 일정에 맞출 수 있긴 하다.
세리아까지 동행하고 있던 탓에 레이의 발언권은 더욱 강력했다.
결국 데네프르 강을 살짝 돌아가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
"그래서 대체 무슨 꿍꿍이냐?"
데네프르 강으로 가는 길에 젠킨슨이 불쑥 물었다.
레이가 팔찌를 매만지다 말고 실소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다들 궁금한 모양새였다.
동행하는 이상 완전히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나 레이는 적당히 둘러댔다.
"황실 마탑에서 보물 지도를 하나 발견해서요. 보물 찾으러 가요."
"농담...은 아닐 테고."
젠킨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궁 지도라도 주운 거냐? 진품이라 해도, 함부로 발을 들이밀었다간 비명횡사할 거다."
"주의하겠습니다."
한참을 가다 보니 마부가 말을 멈추고 곤란해했다.
"이 이상은 길이 닦여있지 않아 마차를 사용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마부의 이야기를 들은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물었다.
"레이! 미궁까지 얼마나 남은 것이냐?"
"음..."
아프텔을 슬쩍 바라본 레이가 답했다.
"지금 속도로 30분 정도 더 걸린다네요."
"그럼 내게 맡기거라!"
실체화된 펜리르와 피닉스가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에 휩싸인 바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퀴를 감싼 바람이 충격 흡수 장치처럼 작용하여 마차가 거친 지면을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알레시아가 목에 힘을 주자 레이가 한마디 했다.
"아가씨, 목에도 살쪘어요."
"살쪘다고 그만 놀리거라!!"
부들대는 알레시아를 뒤로 하고 레이가 마부 곁에 앉아 직접 방향을 지시했다.
협곡 사이로 마차를 몰아 얼마쯤 들어가니... 비슷한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마차를 세운 레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음... 도착한 것 같은데요?"
마차에서 내린 젠킨슨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군."
젠킨슨의 말마따나 협곡 근방에서 특별한 구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레이가 길 안내를 해준 아프텔을 빤히 바라봤다.
아프텔이 날카로운 경사를 그리는 협곡의 절벽으로 다가갔다.
반투명한 아프텔의 손이 절벽을 파고드는 순간 굉음이 울렸다.
쿠웅-!!!
"?!"
갑작스러운 지진과 함께 절벽의 하단이 내려앉았다.
피닉스가 날개를 흔들어 먼지가 걷어내자 절벽 하단에 작은 입구가 드러났다.
젠킨슨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레이를 바라봤다.
"나는 네놈이 어디서 사기라도 당한 줄 알았다."
"제가 사기를 쳤으면 쳤지 당할 놈입니까, 마스터."
"종자놈아, 그건 자랑이 아니다."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세리아가 물었다.
"들어가? 같이?"
"아니요. 초대받은 사람이 저 하나인지라."
젠킨슨이 레이를 제지했다.
"위험하다. 특히 이런 정체도 모를 미궁은..."
"괜찮아요, 마스터. 제가 이런 일에 흰소리는 하지 않잖습니까."
"..."
모두를 둘러본 레이가 절벽에 드러난 입구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레이, 잠...!"
후욱!
레이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레이의 모습이 통째로 사라졌다.
'결계...?!'
깜짝 놀란 젠킨슨이 무심코 레이가 사라졌던 입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그보다 빨리.
찬란히 빛나는 검기의 폭풍이 절벽에 내리꽂혔다.
콰가가가가가가강!!!
"?!!!"
검기의 폭풍에 휩쓸린 절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젠킨슨이 뒤를 돌아봤을 땐 멘데스와 아벤시오가 각각 알레시아와 플로리아를 챙겨 황급히 물러서고 있었다.
젠킨슨 또한 흥분한 말에 깔리기 직전인 마부의 멱살을 잡고 지면을 굴렀다.
반대쪽 절벽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브리즈가 눈살을 찌푸렸다.
'추적을 눈치채고 도주로를 만들어 놓은 건가? 아니면 미궁에 관한 정보를 듣고 확인하기 위해 들린 건가?'
만약 저 절벽 아래 장소가 견고히 건축된 미궁이라면 절벽 일부가 무너졌다 해도 내부는 멀쩡할 수 있다.
'일단 눈에 보이는 제국의 배반자들을 처리하고 확인해보면 되겠지.'
브리즈가 신호를 하자 대기하던 두 마법사가 지면에 손을 꽂아넣고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알레시아와 플로리아가 타고 왔던 마차를 중심으로 지면이 깊숙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브리즈는 절벽을 타고 미끄러져 협곡 사이에 착지했다.
마법사가 만들어낸 거대한 개미지옥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브리즈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제국의 배반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베어버릴 작정이었다.
허나 그 순간.
콰가가가가강!!
마법사가 위치한 협곡 위로 원반 형태의 빛무리 수십 개가 떨어져 내렸다.
폭격을 얻어맞은 탓인지 마법사가 발동시킨 마법이 흐트러진다.
그 찰나 지면에 반쯤 묻혔던 마차가 통째로 터져나갔다.
콰앙!!!
로브에 가려진 브리즈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박살난 마차 안에서, 한 여자가 선명한 검강이 맺힌 검을 들고 걸어나오고 있었다.
*
'이건...'
완전한 고요에 잠긴 레이가 주변을 둘러봤다.
아니, 둘러봤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했다.
육체를 잃은 레이는, 그저 의식만이 남아 주변을 '인식'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세계를 마주한 레이는 깨달았다.
'여긴... 리실로테 레코드 안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