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 (2)
72화
"으우으으..."
침대에서 일어난 알레시아가 불룩 올라온 정수리를 매만지며 울상 지었다.
온 머리가 혹에 뒤덮인 탓에 잠자리에 눕고 나서도 한참을 낑낑 앓아야 했다.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거늘..."
어제 저녁에 펜리르를 타고 냅다 도망친 알레시아는 결국 레이에게 붙들렸다.
레이가 검을 뽑아드는 순간 펜리르가 거품을 물며 배를 까뒤집었기 때문이다.
펜리르는 정령 중 몇 안 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였다.
피닉스도 레이를 보면 기겁하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결국 뒷덜미를 붙잡힌 알레시아는 얄짤없이 정수리를 내주었다.
"우울하구나아..."
알레시아가 축 처진 얼굴을 했다.
레이에게 얻어맞은 꿀밤이야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레이가 워낙 요령 좋게 때린 덕에 혹만 크게 났을 뿐 머리가 울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알레시아는, 하루아침에 친구와 권력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에 침통해 했다.
멜리를 시작으로 음란 서적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다른 귀족가 영애들은 알레시아를 빠르게 손절했다.
처음엔 자기가 먼저 책을 빌리겠다고 디저트까지 가져다 바쳐 놓고는 입을 싹 닦은 것이다.
"세상은 참 잔혹하구나..."
알레시아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숙소를 나섰다.
황실 마탑에 처음 발을 들였던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친구라 부를 사람은 플로리아 하나 남았고, 교수들의 관심 또한 예전만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알레시아가 약속을 잡아 놨던 교수를 찾아 황실 마탑 본관에 들렀다.
"으음..."
본관에 들어서자마자 복도를 걷고 있던 멜리와 눈이 마주쳤다.
알레시아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려는데, 멜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머! 좋은 아침이에요, 알레시아 양. 수업 때문에 오셨나요?"
'...갑자기 왜 친한 척을 하는 것이냐?'
알레시아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자 다른 귀족가 영애들도 알레시아에게 다가와 친한 척을 했다.
엊그제까지 인사도 안 받아주던 귀족가 영애들의 태세 전환에 알레시아는 잠시 혼란을 느꼈다.
'설마 또 책을 빌리려 하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 난리를 겪고도 또다시 책을 빌릴 만큼 귀족가 영애들의 간덩어리가 비대하진 않았다.
고민하던 알레시아가 얼마 안 가 답을 찾았다.
'나의 기사 덕분이로구나!'
레이의 존재는 본래 알레시아의 오점이었다.
알레시아 본인은 그리 여기지 않았지만, 알레시아를 향한 추문의 원인은 항상 레이였다.
허나 어제를 기점으로, 레이가 사실 세리아의 혈육이었으며, 레이에게 함부로 검을 들어댔던 기사가 머리부터 벽에 처박혔다는 소문이 빠르게 번졌다.
세리아는 젊은 나이에 대단한 공로를 쌓은 기사이자 알슈테인 가의 실세 중 한 명이었다.
레이는 그런 세리아가 아끼는 조카였고, 레이는 자주 알레시아 곁을 지켰다.
이를 좀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알레시아에게 밉보였다가 알슈테인 가와의 사이까지 틀어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귀족가 영애들이 허겁지겁 친한 척을 한 건 그 때문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알레시아가 탄식했다.
'이게 귀족들의 정치로구나!'
참으로 뻔뻔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하루 만에 가면을 바꿔 쓰고 이토록 염치없게 굴 수 있다니.
범부였다면 충분히 환멸을 느낄만한 상황이었지만.
알레시아는 귀족 사회가 지닌 천박한 일면을 대담하게 받아들이고 이용해먹기로 했다.
"입이 좀 심심하구나!"
"어머, 제가 자리를 빌려 다과를 준비해 놓도록 할게요."
"저도 그 자리에 함께해도 될까요?"
"이번에 동부에서 공수해 온 찻잎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귀족가 영애들을 보며 알레시아는 흡족하게 웃었다.
남은 유학 생활, 나름 풍족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몇 번이고 주변의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로필렌이 개인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결계를 중첩시켜 공간 왜곡장을 통과하자, 앳된 소년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로필렌이 곧장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르시아 님을 뵙습니다."
"일일이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다. 특히 남의 눈이 있을 법한 곳에선 더더욱."
레이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로필렌은 살짝 고개를 들어 레이를 살폈다.
세계의 구원이라는 거대한 짐을 짊어지고 있는 탓일까.
레이의 얼굴 위엔 어스름하게 내려앉은 고단함이 흉터를 타고 번져가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하루 전만 해도 세리아에게 붙잡혀 애새끼마냥 애교를 떨어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로필렌은 일종의 경외감을 느꼈다.
'과연 역사에 새겨진 영웅이란 말인가.'
만인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던 하르시아다. 그에 상응하는 자아와 자존심을 지니고 있을 터다.
헌데도 필요에 따라 철없는 애새끼 흉내까지 서슴없이 감수한다.
가히 두렵고 경이로운 인물이었다.
"오늘 자로 계약 각인의 조율을 완료했습니다."
로필렌은 무릎을 굽힌 채 서클에 새긴 계약 각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황실 마탑과 도중에 연을 끊은 마법사는 타인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금지된다.
허나 로필렌은 가정 교사직을 수행하기 위해 귀족가에 고용되었기에 이에 관해 세세한 조정이 이루어졌다.
"기초적인 마법 지식은 제약 없이 전수 가능합니다."
다만 본격적으로 마법을 가르치려면 제자들 또한 로필렌과 계약 각인을 맺어야 했다.
로필렌에게 전수받은 지식을 다른 이와 공유할 수 없도록 강제하는 계약 각인이었다.
"제가 지닌 셀로미어의 용량을 고려하면... 정식 제자로 들일 수 있는 인원은 기껏해야 한 명입니다."
"한 명이면 충분해."
"제게 맡기실 아이의 신원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디나르 산 레전드리 고아다."
"...네?"
로필렌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자 레이가 낮게 웃었다.
레전드리 등급이 책정된 유일한 고아, 루나.
황실 마탑에서도 수재라 불리는 이들을 두루 살펴본 레이는 자신의 등급 책정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가서 직접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하르시아 님."
"로필렌."
허리를 숙인 레이가 로필렌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 날 하르시아라 칭하지 마라."
"...주의하겠습니다."
"지금 내가 지닌 신분에 맞게 대하라."
"알겠습니다."
몸을 일으킨 레이가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 높게 솟은 오벨리스크가 시야에 온전히 들어왔다.
"내게 충성하라, 로필렌."
그리하면.
"오벨리스크에 묶여있던 모든 지식을, 너와 나누겠다. 하늘 아래 모든 마법사가 염원하는 리실로테 레코드까지도."
"따르겠습니다, 대영웅이시여."
로필렌의 고개가 더욱 깊게 숙여졌다.
*
레이를 포함한 필립스 백작가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은 유학 기간을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레이를 어깨 위에 태우고 돌아다닌 세리아 덕분이었다.
단기 유학이 끝날 때쯤, 황실 마탑 관계자가 유학 기간 연장 제의를 넌지시 알레시아에게 권했다.
물론 알레시아는 거절했고, 그렇게 단기 유학 종료 날짜가 다가왔다.
귀환하는 길에도 필립스 가와 오시리스 가는 함께하게 되었다.
며칠 동안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 바빴던 알레시아는 마탑을 떠나는 시간에 간신이 맞춰 마차 앞에 나타났다.
레이가 알레시아를 보고 눈가를 좁혔다.
한동안 세리아와 함께하는라 알레시아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는데, 못 본 새 덩치가 꽤나 불어 있었다.
"알레시아 님."
"왜 부르느냐?"
"살쪘죠?"
"...!"
입을 쩍 벌린 알레시아가 황급히 부정했다.
"그, 그럴 리가 없잖느냐!"
"아니 얼굴부터 옆구리까지 아주 온몸에 살이 포동포동 올랐구만."
"레이! 나를 모함하지 말거라!"
"쯧쯧, 그러게 단 음식 좀 적당히 얻어드시지."
"으그극..."
안 그래도 근래 들어 허리를 조이는 끈이 짧아졌음을 눈치챘던 알레시아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부들부들 떨었다.
레이가 빵빵하게 올라온 알레시아의 볼살을 바라보다 한숨 쉬었다.
"그렇게 자꾸 무게 늘리시면 펜리르 허리 나갑니다."
"그만 놀리거라! 그리고 나의 정령은 그리 연약하지 않도다!"
씩씩댄 알레시아가 실체화한 펜리르를 타고 레이를 휙 지나쳤다.
레이가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백작령 돌아가면 검술 연습부터 다시 시켜야겠네..."
한편 마중을 나온 황실 마탑 수석 교수 디오리카가 레이와 마지막 악수를 나누었다.
"다음에 또 보세."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고모님의 찐 조카에게 그 정도는 해드려야지."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넨 디오리카는 마차를 한 번 둘러보곤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유익한 기간이 되셨길 바랍니다. 살펴 들어가십쇼."
다들 각자의 신분에 맞춰 디오리카의 인사를 받았다.
레이 또한 고개를 숙이고는 마차 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우악...!"
정체불명의 손아귀가 레이의 목덜미를 붙잡아 마차 안으로 잡아당겼다.
레이가 저항도 못 하고 마차 안으로 빨려 들어간 후 마차 문이 덜컹 닫혔다.
그꼴을 보며 디오리카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뭐, 괜찮겠지.'
세리아는 필립스 백작령까지 레이를 마중한 후 곧장 돌아온다고 하였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이니 마지막까지 신경 써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해가 갔다.
세리아는 조카를 마중 나가는 사실이 가문에 알려지면 호위니 뭐니 귀찮게 굴거라며 싫어했다.
때문에 자신이 황실 마탑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조치해달라고 부탁했고, 디오리카는 곤란해하면서도 세리아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좋은 여행되시길."
디오리카는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
"..."
싸구려 목제 탁자를 앞에 두고 앉은 세타가 침묵한 채 생각에 잠겼다.
필립스 백작 영애와 오시리스 백작 영애가 황실 마탑을 떠났다는 정보가 방금 들어왔다.
그들은 황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황실 마탑 소속의 마법사, 로필렌을 영입했다.
로필렌은 불법적인 연구를 시도하다 발각되어 징계 절차를 밟고 있던 마법사였다.
황태자는 그들이 황실의 권위를 짓밟았다 여기며 분노했고, 그 배반자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암묵적으로 황태자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황실 특임대 소속 로얄가드, 브리즈는 앞뒤 정황을 그렇게 알고 있었다.
'황태자의 명이니만큼, 충실히 이행하겠지.'
브리즈가 적을 두고 있는 그레나딘 가는 중앙에 진출하기엔 그 힘이 한미한 가문이었다.
때문에 황태자에게 줄을 대기 위해 열성이었는데, 브리즈는 이번 일을 황태자의 눈에 띌 기회라고 여겼다.
'다만 전력 차가 너무 나는군.'
세타는 황실과 계약 각인을 맺은 은색 마탑 출신 마법사 둘에 황실 특임대 소속 로얄가드 하나를 이번 일에 투입했다.
그에 반해 백작 영애 일행들의 전력은 높게 쳐줘야 중급 정령사 둘에 엑스퍼트 급 기사 서넛이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였다.
영애들을 지키는 기사들이 아무리 발악해봤자 브리즈의 갑주에는 흠집 하나 못 낼 확률이 높았다.
너무 완벽하게 그들을 학살해서는 도리어 곤란했다.
세타가 장갑 낀 손으로 잘려나간 갑주 조각을 매만졌다.
갑주 조각의 재질과 제련 방식에서 그 출처가 황실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일 처리를 돕고, 추후 조사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충분한 흔적을 남기고 와."
세타가 뒤에 서 있던 남자에게 갑주 조각을 건넸다.
황실 특임대 소속 흑색 요원 '마우스'.
남자의 신분이었다.
"나야 뭐 흑색 요원이니 무사한다 쳐도..."
마우스가 갑주 조각을 품에 집어넣으며 세타의 맞은편에 앉았다.
"당신은 아닐 텐데."
황실 특임대가 백작 영애들과 로필렌을 제거한 이후 한바탕 태풍이 불어 닥칠 터다.
최소한의 경고와 의견 조율 과정도 없이 귀족을 공격하고 학살한 사건은 쉽게 덮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월권행위를 저질렀고 아랫것들은 충성 경쟁 탓에 황제에게 보고도 올리지 않고 참사를 일으켰다.]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면 세타 또한 책임을 피할 수가 없다.
도리어 참사를 일으킨 주요 책임자로 지목될 터다.
"쓰임새가 다한 말은 버려지는 법인데. 이번 일이 끝나고도 폐하께서 과연 당신을 지켜 주시려나?"
"닥쳐."
황제가 황태자를 찍어내기로 작정한 이상 이번 일은 공론화될 것이다.
그럼 세타는 최소로 잡아도 섬에 몇 년은 갇혀 있어야 된다.
허나 황제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목숨보다 더한 것을 잃게 될 게 뻔했다.
세타는 조급함을 숨기려 노력하며 마우스를 마주 봤다.
"현장에서 판단은 네게 맡기지. 하지만 백작 영애들 측 생존자는 남기지 마."
피해자는 말이 없는 상황이 주무르기 더 쉽다.
고개를 끄덕인 마우스가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원은 더 없나?"
"재미없는 농담이군."
마우스를 포함하면,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그래듀에이트만 둘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황실에서 하사한 온갖 진귀하고 강력한 검술과 장비로 무장 되어 있었다.
어쭙잖은 엑스퍼트 급 무인이라면 수십이라도 압도할 전력이었다.
"지원은 더 없어. 무운을 빌지."
"이것 참 서운하네."
자리에서 일어선 마우스가 짓궂은 웃음과 함께 재차 물었다.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잖아. 혹시라도 우리가 역으로 사냥당하는 신세가 되면, 어떻게 해야 돼?"
"...전부 황태자가 시킨 일이라고 외치고 자결해."
"알았어. 새겨두지."
세타가 고개를 저었다.
마우스가 항상 입에 담는 저 시답잖은 농담에 어울려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