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71화 (71/446)

귀환 (1)

71화

세리아가 레이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운 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자 기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예기가 서린 기사들의 검날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세리아는 개의치 않고 레이와 뺨을 비볐다.

안델루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신원을 밝혀라!"

마나가 주입된 검이 한 층 더 강렬한 예기를 뿜어냈다.

위협을 느낀 세리아가 한쪽 팔로 레이를 끌어안고선 남은 손을 뻗어 안델루네의 검신을 움켜쥐었다.

뿌드득!

마나를 머금었던 검이 어처구니 없도록 쉽사리 일그러진다.

비록 검기를 발현하진 않았다고 해도, 평범한 기사가 벌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이게 무슨...?!"

안델루네는 경악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대검이 안델루네의 허리를 향해 스스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쩌억!!

"컥!!"

흉갑이 찌그러지며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안델루네가 땅을 굴렀다.

몇몇 기사들이 기겁하며 검기를 발하려 했다.

디오리카가 다급히 기사들의 앞에 뛰어들었다.

"그만, 그만!!"

사방으로 마나를 퍼뜨려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킨 디오리카가 일갈했다.

"세리아 알슈테인 경입니다!! 예를 갖추십시오!"

기사들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세리아의 얼굴로 한 번 향했다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대검을 향해 돌아갔다.

허큘러스.

세리아가 현재 소유권을 지니고 있는 두 개의 최상급 아티펙트 중 하나.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기사와 귀족들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황급히 물러섰다.

꺄륵꺄륵 웃으며 즐거워하는 레이를 보고 안젤로가 황망해했다.

"대, 대체 무슨..."

세리아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고 세리아의 둥가둥가를 받으며 쪼개고 있는 저 새끼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디오리카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나섰다.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다음에 재차 논의하기로 합시다."

"아니, 이런 법이 어디 있소? 하다못해 저 장부라도 당장..."

"두 번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열이 뻗친 디오리카가 안광을 번뜩이며 씹어 말했다.

"지금은 자리를 비켜주시지요."

"..."

상황이 영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귀족들이 목소리를 낮췄다.

디오리카는 황실 마탑의 수석 교수였으며 알슈테인 공작가의 사람이었고, 이 자리엔 위명 높은 세리아까지 와있었다.

"후우."

귀족들이 하나둘 따지고 들기를 단념했다.

이번 일이 알슈테인 가와 얼굴을 붉히며 갈등을 빚을 만큼 중요한 사안은 아니었다.

"추문이 도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확답을 받은 귀족들이 서서히 자리를 떴다.

간신히 귀족들을 전부 돌려보낸 디오리카가 여전히 레이를 끌어안은 채 뺨을 비비고 있는 세리아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장소를 옮겨야 할 것 같았다.

*

디오리카는 마탑의 행정을 관리하는 본관의 사무실로 장소를 옮겼다.

숨을 고르는 디오리카의 맞은 편엔 필립스 백작가 사람들과 세리아가 앉아 있었다.

한편 계약 각인 건으로 본관에 들렀던 로필렌 또한 얼떨결에 레이와 만나 사무실 구석에 서 있게 되었다.

디오리카는 세리아를 바라보며 자기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세리아는 레이를 무릎 위에 앉혀 놓은 채 흡족한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디오리카는 세리아가 저토록 크게 감정 변화를 드러내는 모습을 오늘 처음 보았다.

목을 가다듬은 디오리카가 세리아에게 고개 숙였다.

"고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야."

고모님.

디오리카가 세리아를 부른 호칭을 듣고 레이가 의아해했다.

"고모님이라고요...?"

"조카야. 새로 생긴."

세리아가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알슈테인 가는 세리아를 확실히 붙잡기 위해 그녀를 전대 가주의 양녀로 들였다.

때문에 현재 세리아는 알슈테인 가의 가주, 즉 알슈테인 공작과 항렬이 똑같았다.

디오리카는 알슈테인 공작의 차남이었으니 세리아를 고모님이라 부른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 분이... 우리 고모의 짭 조카 되시는 분이로군요."

"짭... 뭐?"

순간 얼을 탄 디오리카에게 레이가 손을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디오리카 님. 우리 고모의 찐 조카 되는 레이라고 합니다."

"..."

디오리카가 세상 떫은 얼굴로 레이의 손을 맞잡았다.

그꼴을 본 세리아가 레이를 타박했다.

"레이, 지켜야 해. 예의."

"히잉."

레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앙탈을 부리자 세리아가 욕구를 참지 못하고 레이와 뺨을 조물딱거렸다.

"완전 귀여워. 우리 조카."

"..."

디오리카는 뒷목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세리아의 찐 조카라는 녀석,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건지 없는 건지...'

속으로 혀를 찬 디오리카가 입을 열었다.

"...레이, 자네의 이름은 한번 들었네. 자네가 지닌 실력과 자신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알겠군."

"실력이요?"

"컨퍼런스 거리에서 스콰이어 다섯을 때려눕혔잖은가. 꽤 화제가 되었었네."

사실 반쯤 거짓말이었다.

황실 마탑 교수 대부분은 스콰이어 간의 주먹다짐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단지 제플린이 X 등급의 물건을 거저 준 스콰이어가 있다기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디오리카는 제플린이 노망이라도 났나 했는데, 이제야 답을 알 수 있었다.

'제플린, 이 사람 아주 뱀 같은 작자였구만.'

어디서 레이가 세리아가 아끼는 혈육임을 파악하고 일을 꾸민 듯했다.

레이의 호감을 사 세리아와의 끈을 만든 후, 발레리우스의 미궁에서 습득한 아티펙트를 연구할 기회를 얻어볼 심산이었을 것이다.

'쯧쯧. 평소에는 그리 깐깐하고 고결하게 굴더니, 속이 시커먼 건 다른 놈들이랑 마찬가지였군.'

고결한 장인이라 불렸던 제플린의 평판이 억울하게 깎여나가는 순간이었다.

디오리카는 동료 교수들과 제플린을 씹을 생각에 즐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모님께서 자네를 가르쳤다면, 나이에 비해 좋은 실력을 갖췄음이 이해가 가네."

이야기를 엿듣던 로필렌이 속으로 비웃었다.

'멍청한 놈. 누가 누굴 가르쳐?'

하르시아가 세리아에게 배울 검술이 어디 있겠는가.

어처구니 없는 개소리였다.

차라리 세리아가 하르시아에게 검술을 배운 덕에 혁혁한 위명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게 더 말이 됐다.

디오리카나 로필렌이나 헛다리를 짚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레이와 세리아는 별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잡담을 조금 더 늘어놓은 디오리카가 본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알레시아님. 외설적인 소설을 마탑에 반입해 문제를 일으켰던 건은... 묻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귀족들의 반발이 있긴 할 터다.

허나 세리아가 레이와 알레시아에게 상당한 호의가 있음을 확인한 이상 세리아의 의중을 존중해야 했다.

'이딴 일로 고모님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다.'

알슈테인 가는 세리아를 양녀로 들임으로써 미궁에서 회수한 아티펙트의 지분을 더 크게 주장할 수 있었고, 로커스트를 토벌한 영광까지 나누었다.

더군다나 세리아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으리라 평가받는 천재 검사였다.

늦게 들인 양녀랍시고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도리어 알슈테인 가에서 세리아의 발언권은 꽤 큰 편이었다.

"약간의 잡음은 있겠지만... 고모님이 신경 안 쓰실 수 있도록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여기 물증도 있으니, 다른 귀족들도 계속 고집만 부릴 수는 없을 겁니다."

달가운 소식에 알레시아가 장부를 품에 안으며 기뻐했다.

"과연 장부를 꼼꼼히 작성한 보람이 있구나!"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알레시아를 레이가 도끼눈을 한 채 쳐다봤다.

디오리카가 목을 가다듬으며 분위기를 환기한 후 로필렌에게 손짓했다.

"로필렌 교수의 계약 각인은 이틀 안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로필렌 교수가 잘 협력해준 덕분에..."

디오리카는 말을 하다말고 로필렌을 위아래로 살폈다.

로필렌은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들고 디오리카를 내려보고 있었다.

디오리카는 이년이 미쳤나 싶었다.

'이년이 뭘 믿고 이렇게 목이 뻣뻣하지?'

아직 황실 마탑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상식이 있다면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됐다.

디오리카가 째려보자, 로필렌은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도리어 디오리카를 도발했다.

'내 뒷배가 하르시아 님이다, 병신아.'

하르시아 님이 옆에 계시는데 황제가 두려울쏘냐.

황제 할애비가 와도 꿇릴 게 전혀 없었다.

디오리카는 당장이라도 책상을 엎어버리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화를 꾹꾹 눌러담았다.

"계약 각인 과정이 끝나면 로필렌은 정식으로 교수 직위를 내려놓게 됩니다. 알레시아 님이 영지로 귀환하실 때 동행시키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레이의 입에서 나왔다.

일개 스콰이어가 주인 허락도 없이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경을 칠 일이었으나 다들 조용했다.

알레시아도 젠킨슨도 레이의 잘못을 지적하긴커녕 레이가 대표 노릇 하는 걸 은연중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디오리카는 이게 맞나 싶었지만.

여기서 대화를 질질 끌어봤자 골치만 더 아파질 것을 직감했기에 빠르게 자리를 마무리했다.

*

디오리카와 상담을 마친 레이가 세리아의 어깨 위에 올라탄 채 본관 밖으로 나왔다.

레이에게 목마를 해준 세리아는 썩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몸을 좌우로 흔들고는 했다.

로필렌의 레이가 펼치는 어린 아이의 연기에 깊게 감명받은 후 먼저 자리를 떴다.

만족할 만큼 건방을 떤 레이는 세리아의 어깨 위에서 슬금슬금 내려왔다.

세리아가 아쉽다는 듯 레이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들어 올려 당겼다 밀었다를 반복했다.

한참 후 레이를 지면에 내려 놓은 세리아가 품을 뒤적이더니 종이에 둘둘 말려져 있는 길쭉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선물."

"이게 뭐예요?"

"라푸마. 약재야. 키 크게 해주는."

"크흐..."

레이가 감격한 얼굴로 세리아를 바라봤다.

세리아가 슬그머니 다시 손을 뻗어오자 레이는 칼같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

비행기랑 목마는 충분히 즐겼다. 지금 잡히면 무조건 10분은 못 내려왔다.

레이는 당장이라도 약재를 갈아 입에 넣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런 최고급 약재는 마나를 머금고 있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잘못 먹었다가 코어에 마나 늘어나면 그대로 비명횡사할 수도 있었다.

'리실로테가 남겼다는 안배를 믿어봐야겠네.'

유학 기간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세리아가 마탑으로 와준 덕분에 자잘한 문제도 해결되었고 눈치 볼 일도 줄었다.

유학을 잘 마치고 백작령으로 귀환하는 길에 리실로테의 안배를 찾아가 보면 되었다.

키가 클 생각에 히죽이던 레이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어찌저찌 사건을 잘 마무리하긴 했지만 세리아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

급격히 주름이 늘어나는 레이의 미간을 보고 알레시아가 슬금슬금 발을 뺐다.

레이가 알레시아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아가씨 일로 좀 와보세요."

"나, 나는 지금부터 바쁜 일이 있구나아..."

"야이씨, 일로 안 와?"

"우아아악! 펜리르! 도와다오!"

늑대 정령을 타고 도망치는 알레시아를 레이가 이를 악물고 쫓아갔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