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2)
70화
무슨 사고를 쳤나 했더니 야설을 황실 마탑에 반입해?
반입했으면 조용히 볼 것이지 시도 때도 없이 읽어대다가 남한테 들켜서 이 사달을 만들어?
젠킨슨 또한 어지간히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디오리카가 둘을 향해 책을 한 권 들어 보였다.
"이게 알레시아 님에게서 압수한 소설이네."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
레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디오리카의 손에 들려 있었다.
몇 년 전에 저거보다 걸려서 며칠을 방 안에서 못 빠져나왔는데, 그때 버릇을 완전히 잡는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설마 마탑에까지 소설을 가져와 문제를 일으킬 줄이야.
단념한 레이가 하늘을 바라보며 욕을 중얼거리는데 알레시아가 교실에서 튀어나왔다.
"이건 모함이니라!!"
"?"
"나, 나는 숙소 안에서만 책을 감상했느니라!"
"숙소 안에서만 감상하셨는데 저건 왜 마법사님 손에 들려있습니까?"
"저 책은 멜리에게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한 것이야!"
알레시아의 주장에 디오리카와 동행했던 안젤로가 목에 잔뜩 힘을 주며 분노했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 자신의 죄를 남에게 뒤집어씌우려 하다니! 증인이 한둘인 줄 아시오?!"
"으으...! 먼저 책을 빌려가겠다고 디저트를 대접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나에게 책임을 미루는구나...!"
배신감에 부들부들 떠는 알레시아를 쳐다보며 레이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야설 돌려보다 들켜가지고 난리가 난 걸 알레시아 님한테 몽땅 뒤집어씌우고 끝내겠다는 거죠?"
굉장히 직설적인 발언에 잠시 침묵이 일었다.
알레시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억울하구나!"
"알레시아 님, 포기하세요."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높으신 분들끼리 이미 입도 다 맞춘 것 같고, 소설 돌려봤다는 물증도 없잖아요?"
객관적으로 뒤집기 힘든 상황이었다.
알레시아가 미리 자기 잘못을 고백하고 레이와 젠킨슨에게 상담했다면 대처를 할 수 있었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굽신거리며 책을 빌려 갔던 귀족가 영애들도 알레시아와의 신의를 지켜주기 위해 자기 위신을 희생할 리 없었다.
허나 알레시아는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물증이 있느니라!"
"...네?"
"레이가 말해주지 않았더냐! 물질적인 거래가 있었을 때는 반드시 장부를 만들어 기록해 놓으라고!"
"?"
알레시아에게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지미가 열심히 장부를 작성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에게 '기록'의 중요성을 가르친 적이 몇 번 있었다.
흥분한 알레시아가 교실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이내 노트 한 권을 가져와 건넸다.
"바로 이것이니라!"
"어디 보자..."
[책 대여 명부 - 알레시아 필립스 작성]
(추신*) 작성 시를 제외하고는 가방에 넣어 보관할 것.
(추신*) 우선적으로 보호하되, 상황이 여의치 않을 시 반드시 소각할 것.
"참 좋은 것만 골라 배우셨군..."
옛날에 가르쳐줬던 형식을 그대로 베껴놨다.
레이는 앓는 소리를 내며 다음 장을 넘겼다. 플로리아의 이름이 가장 처음에 기재되어 있었다.
"이런 씹..."
레이가 눈을 번뜩이자 플로리아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언니 된 자가 알레시아를 말리기는커녕 가장 먼저 희희낙락거리며 책을 빌려갔다는 사실에 레이는 깊은 빡침을 느꼈다.
"다음에 봅시다아..."
"..."
모른 척 고개를 돌리는 플로리아를 두고 재차 한숨 쉰 레이가 장부에 적힌 목록을 줄줄이 읽어 갔다.
누가, 언제, 무슨 책을, 디저트 몇 개를 사주고 빌려 갔는지 하나하나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심지어 지장까지 간간이 찍혀 있었다.
레이가 장부의 내용을 읽어나갈수록 디오리카와 동행했던 귀족들의 표정이 떫어졌다.
'이건 뭐 알레시아 게이트구만.'
이 장부 내용이 외부에 유출되면 장부에 기재된 영애들은 그야말로 개쪽을 당하게 된다.
처벌을 받을 일은 아니었다만, 그런 것과 별개로 명예를 중요시하는 귀족에게 있어 이건 분명한 역린이었다.
레이가 장부를 덮었다.
"물증도 남아있는데... 이리 된 거 그냥 덮고 넘어가시죠?"
레이가 장부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대놓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누가 봐도 협박이었다.
다 같이 뒤질 것 아니면 그냥 없던 일로 하고 좋게좋게 넘어갑시다. 우리 영애님들 혼삿길에 추문을 얹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안젤로가 거품을 물었다.
"감히 내 동생의 순수한 영혼을 더럽혀 놓고선 잘도 뻔뻔히...!"
"에헤이, 사춘기 때 친구끼리 야설 좀 돌려볼 수도 있는 법이지, 왜 그리 깐깐하게 구십니까? 너무 가둬 두면 늦바람 들기 십상입니다."
"이, 이 미친놈이...!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딴 망발을...!"
바들바들 떤 안젤로가 기사에게 명령했다.
"당장 저 시건방진 새끼를 무릎 꿇리고 저 장부를 가져오거라!!"
"크흠!"
분위기가 살벌해질 기미가 보이자 디오리카가 끼어들었다.
황실 마탑 내부에서 칼싸움을 하게둘 생각은 없었다.
"그 책은 내게 주시게."
"왜요?"
"이번 사건의 증거품 아닌가? 조사가 끝나면 다시 돌려주겠네."
"싫은데요?"
"...?"
"멀쩡한 책을 누가 태워드실 지 어찌 알고 제가 드립니까?"
잠시 저 멀리 시선을 두었던 레이가, 다들 그만 돌아가시라는 듯 손을 살랑살랑 휘저었다.
"이쯤에서 덮고 넘어갑시다. 여기 있는 내용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기 전에."
쿵!
지면을 내리밟은 안젤로가 고함쳤다.
"당장 저 시건방진 새끼 잡아와!!"
자리에 있던 귀족들과 기사들이 눈을 맞췄다.
알레시아의 장부는 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영애들의 명예를 위해 제거해야 할 문서였다.
마침 레이가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까불어댄 덕에 검을 뽑을 명분이 생겼다.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고 검 자루를 만지작거리던 젠킨슨이 레이에게 속삭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왜 이렇게 까불어 대?"
"왜 이렇게 까불긴요. 뒷배 밀고 까불죠."
"...장부는 이리 건네라. 내가 보관하겠다."
"괜찮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안 뺏겨요."
카가가강!
우르르 다가온 기사들이 거침없이 검을 뽑았다.
삽시간에 레이의 급소란 급소엔 전부 검 끝이 겨눠졌다.
"태도가 참으로 불손하구나."
기사들 중 일부는 레이가 며칠 전 컨퍼런스에서 겁 없이 다른 귀족가의 스콰이어를 때려눕혔던 녀석임을 알아챘다.
레이의 목을 겨눈 기사의 검에서 예기가 바짝 섰다.
"장부, 내놔."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열이 뻗친 기사 중 하나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레이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꽈드득!
"으윽?!"
기사의 견갑이 누군가의 손아귀에 종잇장처럼 뭉개졌다.
기사의 귓가에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비켜."
콰앙!!
허공을 유영한 기사가 그대로 벽에 박혀 들었다.
"무슨?!"
레이를 압박하던 검이 회수 되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여자를 향해 겨눠졌다.
그럼에도 여자는, 유유히 도검을 헤치고 걸어와 두 손을 레이에게 뻗었다.
"조카!!"
"고모!!"
레이가 꺄르르 웃으며 세리아의 품에 뛰어들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디오리카 알슈테인이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한 세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긴장을 풀었다.
이런 일이 처음 있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굉장히 잦았다.
황태자는 과거부터 망나니 기질이 다분했다.
장자이기도 했으며 여러 정치적 요인이 겹쳐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시간이 흘러도 나아짐이 없었다.
황태자는 자주 자기 직위를 남용해 제국의 행정을 주무르곤 했고, 그 수위가 너무 지나치다 싶으면 황제가 제지했다.
세타는 황제가 마련한 황태자의 제동 장치 중 하나였다.
언젠가 황제가 될 자의 미움을 산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허나 세타는 제국에 충성했고, 아직 황제가 정정했기에 일단은 스스로 어려운 역할을 자처했다.
"들어오시지요."
친위대의 안내를 받아 알현실에 들어선 세타가 곧장 황제를 향한 예를 표했다.
이미 보고서는 황제에게 제출했다. 세타는 황제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이행하면 됐다.
황태자는 황실 마탑에 속한 로필렌을 영입한 것을 두고 황실의 권위에 도전했다며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지껄였는데, 미친 짓이었다.
물론 황실 마탑의 사람을 빼간다는 건 황실 입장에서 불쾌한 일이다.
때문에 황실에서도 이건 선을 넘었다 싶으면 우회적으로 경고하거나, 아예 영입 대상을 제거한다.
황실의 경고를 듣고도 귀족이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헌데 이런 중간 과정도 없이 다짜고짜 황실 권위에 도전했다고 귀족을 해쳤다간 후폭풍이 말도 안 될 것이다.
황실의 권위가 아무리 지엄하다 하여도 황실과 귀족은 서로를 존중해야 했다.
필립스 백작 영애는 백작가의 하나뿐인 적통한 계승자다.
플로리아의 가문은 제국 변방에서 가장 세력이 큰 귀족가 중 하나였다.
여기에 더해 세리아 알슈테인이 아끼는 혈육이, 알레시아의 일행 중에 포함되어 있다는 정보가 최근 전해졌다.
'그런데 이들을 경고 절차도 없이 기분 나쁘다고 치겠다고?'
고작 망나니 황태자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재고할 가치가 없었다.
'그 망나니를 어찌해야 할지.'
세타는 당장의 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번 일도 황제가 적절히 제동을 걸어줄 것이다.
구두 경고를 통해 필립스 가와 오시리스 가가 로필렌에게 손을 떼게 하던가.
아니면 로필렌의 영입을 눈감아주는 것으로 결론을 맺을 터다.
세타가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니, 마침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짐의 육체가 노쇠해감을 느끼고 있어."
"?"
"다음 대 황제의 신뢰를 사기 위한 아래 것들의 경쟁이 시작돼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지."
갑작스러운 충성 경쟁 이야기.
세타의 두뇌가 급격히 회전하기 시작한다.
"황태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다들 열심히 꼬리를 흔들고 있더군."
"..."
"자네가 날 찾아오지 않았듯이 말이야."
'이 빌어먹을...!'
세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황태자가 망나니짓을 한 기간이 너무 길었다.
개선되기는 커녕, 몇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결국.
황제가 카리우스를 포기했다.
세타는 황제의 의중을 깨달았다.
황제는 카리우스의 황태자로서 직위를 박탈할 생각이었다.
허나 카리우스의 외가를 포함해, 황태자에게 줄을 댄 권력의 크기가 만만치 않았다.
단순히 무능하다는 이유로 황태자를 쳐내기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다.
황태자 직위를 박탈할 결정적인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걸 지금 나보고 꾸미라는 건가...!'
황제의 의중은 명확했다.
실제로 망나니 황태자를 향한 충성 경쟁도 존재했으니, 황제가 원하는 그림 자체는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문제는 세타 본인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느냐다.
황태자가 벌인 실책의 책임을 황제가 세타에게 뒤집어씌운다고 해도, 세타는 항변할 수 없었다.
"..."
세타는 심란함에 휩싸인 채 알현실에서 뒷걸음질쳤다.
세타가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황제는 세타를 단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