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 (2)
68화
몇 군데 더 부스를 둘러본 레이가 고개를 저으며 주머니를 닫았다.
현재 컨퍼런스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은 한 번씩은 마법사의 손을 거친 물건들이었다.
비슷한 품질의 물건이라도 마법사가 제작에 관여했다면 가격이 2배 이상 오른다.
마냥 의미 없는 프리미엄은 아니었다.
레이가 산 목걸이의 경우에도 마법사가 직접 세공에 참여해 마감의 완성도를 크게 높인 장신구였다.
전문가가 고배율 확대경을 사용해 살펴야 간신히 구분 가능한 차이였지만, 어쨌든 사치품에 있어 중요한 요소였다.
'남은 예산 싹 끌어모으면...'
아이 한 명의 선물에 대략 50~100 골드 정도 할당할 수 있다.
이 정도 예산이면 마탑 밖에서 물건을 구하는 게 가성비가 좋았다.
마탑에서 100 골드면 나무 깎아 만든 기념품 정도 구할 수 있었다.
'데런이란 이안한테 줄 선물엔 300 골드 정도 투자하고...'
레이는 재능과 성과를 중시했다.
애들 면전에서 노멀 고아 레어 고아 떠들진 않았지만, 노력과 성과에 따라 점점 더 뚜렷하게 보상에 차등을 두었다.
호의만 가지고 가족놀이 하려고 만든 보육원이 아니기에 불가피한 차별이었다.
이런 시스템 때문에 상처받는 녀석들도 있었다만, 카렌을 비롯한 몇몇 아이들이 잘 케어해주었다.
근 2년 정도는 카렌이 받은 쿠키 대부분이 남의 입에 들어갔다는 걸, 레이는 모른 척하며 지켜보는 중이었다.
어쨌든 레이는 예산을 남길 생각이 없었다.
추후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백작이나 지미를 통해 구하면 된다.
레이는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사치에 관심이 없었고, 정말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요구를 하면 되는 위치였다.
더군다나 필립스 백작령 근방에선 수표를 써먹기도 쉽지 않았다.
"어디... 루나에게 줄 선물은 따로 안 사도 될 것 같고."
필사한 마법서가 가득이고 과외 선생까지 모셔갈 예정이니 굳이 뭘 더 준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레이의 혼잣말을 듣던 하무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새끼 지금 일부러 이러나?'
사람 속 긁으려고 작정한 게 아니면 저럴 수가 없다.
물론 레이는 요하나와 루나가 진심으로 검술과 공부를 즐기고 있다 생각해 지금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허나 웬만큼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도, 부모가 동생한테 변신 로보트를 사주고 자신에게 값비싼 백과사전 세트를 선물하면 거품을 무는 법이다.
레이는 애매하게 정신연령이 높아진 탓에 아이들의 감수성에 대해 감이 좀 떨어져 있었다.
'뭐, 알아서 해라.'
하무스는 혀를 짧게 찬 후 신경을 껐다. 고생은 레이의 몫이었다.
예산이 없다 해도 스콰이어 셋은 컨퍼런스 거리를 걸으며 구경을 계속했다.
황실 마탑을 나가서는 쉽게 구경하기 힘든 아티펙트가 다수였다.
헌데 발걸음을 옮길수록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셋의 행색이 결코 특이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원인은 하나였다.
은색 검.
마법사 장인이 만들었다는 물건을 안목 좋은 자들은 바로 알아본 모양이었다.
몇몇 기사와 마법사는 대놓고 거리를 좁혀 레이의 허리춤을 뚫어져라 살폈다.
빅토르와 하무스는 불안하다는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컨퍼런스 거리 한가운데서 보물 좀 들고 다녔다고 습격당하진 않겠다만, 쏟아지는 관심이 꽤 부담스러웠다.
"너, 그거 어디서 난 거냐?"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의 질문에 레이가 순순히 답했다.
"제플린 님의 부스에서 구매했습니다."
"구매? 오늘?"
"네."
마법사의 눈가에 불신의 기색이 어렸다.
'경매에 올라갈 물건이 분명한데 스콰이어에게 팔았다고?'
대체 얼마를 건넸길래?
마음 같아선 훔쳤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러모로 말이 안 됐다.
제플린이 자기 물건을 도둑맞을 위인도 아니었고, 도둑맞았다면 이미 난리가 났을 터다.
"혹시 검집을 바꿔 끼운 것이냐?"
끼긱!
레이가 엄지손가락에 힘을 줘 검신을 살짝 빼냈다.
마법사가 눈을 깜박이다 입을 다물었다.
'대체 얼마를 쥐여준 거지?'
경매라는 게 분위기를 타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경우도 많다.
평소 20만 골드 내외로 거래되던 물건도 때에 따라 40~50만 골드에 거래되기도 한다.
"저게 대체..."
"진품이라고...?"
수군거림이 점점 더 퍼져 나갔다.
컨퍼런스 거리에는 레이의 신원을 알고 있는 자들도 꽤 있었다.
알레시아는 유학을 온 지 얼마 안 되어 교수들의 관심을 잔뜩 끌었고, 비록 동성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고 하나 시기 어린 시선은 많이 남아 있었다.
알레시아의 가장 큰 흠이라면 역시 레이의 존재였다.
필립스 백작령에서와 마찬가지로 알레시아는 레이와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고, 이는 추문이 돌기 좋은 소재 거리였다.
레이가 갑자기 수십만 골드에 달하는 검을 구매했으니, 그 자금 출처가 어디인지는 남들에게 명확해 보였다.
"필립스 백작가? 변방에 있는 쥐꼬리만한 가문이라며? 종자에게 저런 거금을 투자할 여유가 있어?"
"백작 영애의 사랑이 과하시군."
"쯧, 하나 있다는 계승자 정신머리가 저래서야..."
컨퍼런스 거리를 구경 나온 스콰이어들의 수군거림이 특히나 컸다.
기사들은 체면 때문에 대놓고 입을 열지는 못했으나, 묘한 질시와 멸시가 섞인 시선을 레이에게 보냈다.
빅토르와 하무스는 깨달았다.
'아, 이거 어디서 보던 상황인데.'
물론 지금은 환경이 전혀 달랐다.
오시리스 가 기사들과 레이가 충돌한 건 필립스 백작령 안이었고, 지금은 황실 마탑 내부였다.
수근거리는 스콰이어들 중 오시리스 가보다 강력한 가문에 속한 종자들도 많았다.
레이가 함부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레이도 그걸 알고서 적당히 몸을 빼려 할 때, 굵은 목소리가 레이를 붙잡았다.
"레이, 여기 있었구나."
먼저 뒤를 돌아본 하무스와 빅토르가 깜짝 놀라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레이를 부른 건 오시리스 백작가의 기사, 리옹이었다.
리옹은 품속을 뒤지다 말고 레이의 허리춤을 보고 깜짝 놀랐다.
"...? 레이, 지금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이 혹시...?"
"알아보시겠나요? 제플린 님께서 제작하신..."
"알아보고말고. 게다가 X 등급이잖느냐?"
"?"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옹이 검집을 가리켰다.
"제플린 님은 이름 높은 마법사이자 장인이시다. 제작한 도검의 품질에 따라 등급을 매겨 검집에 표기하시지. X 등급이면 거의 최상급 라인이라는 건데... 혹시 진품이냐?"
"아하."
그래서 검집만 보고 다들 관심을 가졌구만.
레이는 그제야 검집을 꾸미고 있는, 두 자루의 검이 서로 교차하는 문양이 단순 장식이 아님을 깨달았다.
"확인해보실래요?"
"음...?"
리옹이 레이에게서 검을 받아 한 번 뽑아보더니, 입을 쩍 벌리며 기겁했다.
"맙소사, 진품이군."
이걸 어떻게 구매했는지 이 자리에서 물어보는 건 적절치 않았다.
리옹은 검을 돌려준 후 레이에게 당부했다.
"레이, 황실 마탑 안에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빠르게 다른 검집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이런 걸 대놓고 들고 다니면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알겠습니다. 충고 감사드려요."
고개를 끄덕인 리옹이 잠시 레이의 검집에 새겨진 X자 문양을 감상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품속에 손을 넣었다.
"아, 그리고 이걸 필립스 백작 영애께서 전해 달라 하시더구나. 중요한 편지인 것 같군."
리옹이 편지를 내밀었다.
레이는 찝찝한 감정을 숨긴 채 예의 바르게 편지를 받았다.
'알레시아라면 당연히 컨퍼런스를 같이 둘러보자고 조를 거라 생각했는데...'
허나 알레시아는 컨퍼런스에 참석하긴커녕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며칠 전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낑낑 앓고 있단 말이지?'
얼핏 보기에 어떤 압박에 시달리는 것 같았는데, 알레시아는 불안에 떠는 이유를 순순히 고백하지 않았다.
레이는 일단 리옹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부탁 받은 일을 끝마친 리옹이 몸을 돌렸다.
"나는 다른 곳을 살펴보겠다. 재밌게들 구경 하거라."
종자들이 불편해할까 봐 자리를 비켜 주는 거였다.
리옹이 사라지자 다시 수군거림이 커졌다.
개중에는 노골적으로 필립스 백작가의 비하를 입에 담는 자들도 있었는데, 레이의 귀에는 아주 잘 들렸다.
레이는 일단 자신에게 왔다는 편지를 뜯어봤다.
레이가 편지를 읽는 사이 하무스와 빅토르는 불안에 떨었다.
레이가 상황을 가려가며 지랄을 하는 작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어쩨 불길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한편 편지를 읽던 레이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후우..."
레이가 한숨을 쉬자 하무스와 빅토르가 움찔 몸을 떨었다.
레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멸과 핍박의 시간... 지긋지긋했다.'
사실 그다지 큰 모멸과 핍박을 받은 것도 아니고, 지긋지긋할 만큼 마탑에 오래 머문 것도 아니었지만.
고위 귀족의 자제들과 마법사들 사이에 낑겨 있다 보니 몸을 엄청 사렸던 건 맞다.
허나 눈치 보는 것도 여기까지.
"이제 '고아 수집가' 레이로 돌아갈 때다."
"뭔 개소리야, 미친놈아."
불길함을 느낀 하무스가 식겁하며 한발 물러섰다.
레이가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고모가 내 얼굴 보러 마탑에 들리신 다네? 이틀 안에 도착하실 것 같아."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
하무스와 빅토르는 의아함을 내비쳤다.
레이는 내세울 가문도 없는 순수한 평민이었고, 이는 레이의 고모 또한 평민임을 뜻했다.
레이는 둘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고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까앙!!!
"?!"
대놓고 들리라고 알레시아에 관해 주절거리던 스콰이어의 흉갑에 돌멩이가 충돌했다.
우스르딘 백작가의 기사를 섬기는 스콰이어, 루블이 당혹을 떨치지 못하고 레이를 쳐다봤다.
레이가 루블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야 이 씹새야, 너 일로 와봐. 아가리를 찢어버릴..."
"레이! 미쳤어?!"
"레이, 네 신분으로 잘못 까불었다간 큰일 난다니까...! 여긴 필립스 백작령이 아니야!"
급발진하는 레이를 하무스와 빅토르가 끌어당겼다.
허나 레이는 팔을 털어내며 둘에게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잘 들어. 나는 '평민'이 아니야."
"?"
"이제부터 내 신분은 '제국 영웅 세리아 님의 조카'다."
레이가 허공에다 자신이 세리아의 조카라 떠들어봤자 믿는 사람 몇 없었을 터다.
만약 믿는다고 해도, 운 좋게 피 조금 이어진 먼 친척 관계라 생각할 확률이 높았다.
허나 세리아가 직접 찾아와 레이를 둥가둥가하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꽤 바뀔 터다.
레이는 오랜만에 혈육(아님) 덕을 볼 생각에 신이 났다.
"일로 와보라고, 씹새꺄."
*
"그렇다면..."
싸구려 목제 탁자를 중심에 두고 앉은 세 사람 중 가장 왜소한 체격의 여자가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로필렌을 제거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렇소."
은색 마탑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정보국 소속의 세타가 안경을 벗으며 적색 눈을 빛냈다.
"결과에 책임을 지실 수 있겠습니까?"
"로필렌은 연구 자료를 폐기하고 계약 각인을 조율하는데 적극 협조하고 있소. 위치 추적과 정기 보고에 관한 문제도 동의했소."
"그 연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눈치챘다는 의미 아닙니까."
"그렇기에 적극적으로 목숨을 구걸하고 있소. 위협은 되지 않을 거요.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면 다른 이들이 파고들 여지를 주게 되오."
마탑주의 주장에 서류를 살피던 로얄 가드 소속의 기사 미하엘이 몸을 일으켰다.
"결론도 난 것 같은데 이쯤 하지."
잠시 침묵한 세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결론은 이미 나온 상태고, 마지막으로 약간의 기 싸움을 동반해 의견 조율을 했을 뿐이었다.
세 사람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순간 회의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허리춤에 손을 숨겼던 미하엘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세타와 은색 마탑주도 급히 미하엘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흘러내리는 은발에 태양처럼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
황족의 특성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외견을 지닌 황태자, 카리우스가 술병을 들고 껄껄 웃었다.
"그래그래, 우리 제국의 기둥들이 긴밀히 모여 또 무엇을 상의하고 있었나?"
셋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세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논의하던 사안을 설명했다.
몽롱하던 카리우스의 눈동자에 갑작스레 안광이 일었다.
"이런 괘씸한 년을 봤나. 제국의 은혜를 저버린 죗값도 치르지 않고 도주하려 해?"
세타, 미하엘, 마탑주가 짧은 시간 시선을 나누었다.
본디 사람의 목숨이라는 게 권력자의 즉흥적인 감상에 따라 휙휙 잘려나가기도 하는 법이었다.
아무래도 로필렌은 운이 나쁜 듯싶었다.
"...처리하겠습니다."
"누구를?"
"마법사를..."
"마법사만?"
"...?"
"감히 제국의 은혜를 입었으며 제국의 배신자와 야합하려 한 이 괘씸한 놈들은 어찌할 거지?"
표정 변화 없는 세타의 미간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고작 그딴 이유로 제국에 충성하는 귀족가의 사람을 건드렸다간 굉장히 곤란해진다.
애초에 세타는 황제에게 소규모 작전권을 부여받은 특임대 소속이었다.
황태자라 해도 이런 간섭은 곤란했다.
황태자, 카리우스.
이 망나니 새끼의 고집을 꺾기 위해선 황제의 도움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