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2)
66화
"백도어를 만들어 놨다고?"
[그렇습니다.]
"..."
레이가 다시 미간을 짚었다.
뭐, 그래. 자기가 공들여 만든 게 아까워 제국에 팔아먹은 건 그렇다고 치자.
근데 거기서 또 백도어를 만들어놔?
'마법사와는 되도록 중고 거래도 하지 말아야겠다.'
깨달음을 얻은 레이가 고개를 젓는 사이 아프텔이 컨트롤 룸의 원탁을 향해 움직였다.
공간이 갑자기 밝아지며 원탁의 중앙이 반으로 갈라졌다.
드르르륵!
거친 마찰음과 함께 원탁이 있던 중앙에서 돌기둥이 솟아올랐다.
돌기둥 위에는 보라색 팔찌 하나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계승자를 위해 제작된 아티펙트입니다.]
"기능은?"
[착용하시는 순간 제 마스터로 등록됩니다. 저에게 허가된 정보를 아티펙트를 통해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어디에 계시든 제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안에 너를 포함한 방대한 데이터가 전부 들어가 있을 것 같진 않고. 일종의 중계 장치인가?"
[비슷합니다.]
"다른 기능은 없어?"
마법사가 만든 물건이다.
음습한 기능이 다수 숨어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아프텔은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백도어를 활용하시기 위해선 아티펙트를 착용하셔야 합니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무슨 사양을 하겠냐."
레이가 포기하고 팔찌를 들어 올렸다.
왼 손에 집어넣자 한 차례 박동한 팔찌가 팔목에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계승자님의 생체 정보가 등록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스터.]
"이거 은폐는 가능한 거야?"
[아티펙트임을 은폐할 수는 없습니다만, 고성능 탐지 마법을 써도 발광 기능 정도만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아프텔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바로 들렸다.
"이제 주위에 네 목소리는 안 들리는 건가?"
[그렇습니다.]
"혹시 내 생각도 읽을 수 있어?"
[불가능합니다.]
"그건 다행이고."
레이가 컨트롤 룸의 입구 앞에 섰다.
이제 어디에서도 아프텔과 대화 가능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오벨리스크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로필렌은 뭐라고 구워삶아야 하나."
[하르시아의 권위는 제국민에게 절대적입니다. 마스터를 하르시아라 믿는 이상 함부로 움직이진 못할 겁니다. 공명심을 자극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죠.]
"배신하면? 수습 못 할 텐데?"
[황실 마탑 내부에선 수작을 부려도 미리 관측 가능합니다. 여의치 않으면 제거하십쇼. 제가 돕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할게."
레이가 컨트롤 룸 밖으로 나오자 여전히 바닥에 얼굴을 붙이고 있던 로필렌이 몸을 움찔 떨었다.
로필렌의 앞에 선 레이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일어서."
몸을 일으킨 로필렌이 고개를 발밑으로 깔았다.
얼굴을 타고 흐른 식은땀이 턱 끝에서 똑똑 떨어졌다.
"지금부터 하는 말, 새겨들어."
"예, 알겠습니다."
"곧 멸망이 찾아온다."
"...!"
하르시아가 입에 담는 '멸망'은 여느 예언쟁이들의 헛소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로필렌의 시야가 잠시 까마득해졌다.
"나는 멸망을 막기 위해 안식을 포기하고 귀환했다."
"...!"
"로필렌."
레이가 로필렌의 턱을 붙잡아 시선을 맞췄다.
푸르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로필렌의 시야에 가득 담긴다.
"내게 충성하라. 네 충성에 상응하는 대가를 약속하마. 날 위해 목숨을 바쳐라. 멸망을 이겨냈을 때, 네 이름을 오벨리스크의 가장 높은 곳에 새겨주겠다."
"여, 영광..."
거의 울먹이던 로필렌이 무릎을 꿇었다.
"여, 영광입니다. 하르시아님."
이 정도면 되었겠지.
고개를 끄덕인 레이가 로필렌을 지나쳤다.
로필렌이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하, 하르시아님! 계약 각인은 새겨주시지 않는 겁니까?"
로필렌은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설령 영혼이 통째로 종속당한다 해도, 로필렌은 계약 각인을 새겨 하르시아의 신뢰를 사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면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몰라 불안에 떨며 밤을 지새워야 할 게 분명했다.
"..."
레이는 침묵했다.
레이에겐 서클이 없었기에, 계약 각인을 맺고 싶어도 맺을 수가 없었다.
아직 서클을 만들지 않았다고 밝혀?
안 된다. 로필렌 앞에서만은 허세를 유지해야 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레이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고작 네년 따위에 나의 셀로미어를 할당하란 의미냐?"
"...! 죄송합니다!"
식겁한 로필렌이 고개를 숙이자, 레이가 조금 풀린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믿겠다. 그러니 보답하라."
"감사합니다."
레이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이마를 찧은 로필렌이 황급히 일어서서 레이의 뒤를 따랐다.
레이는 부디, 지금의 공갈이 오래 통하기를 바랐다.
*
레이는 아프텔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오벨리스크를 벗어났다.
레이와 나란히 오벨리스크를 빠져나온 로필렌은 헤어지기 전 허리를 깊게 숙이려다 황급히 자세를 교정했다.
"다, 다음에 보지."
어색한 인사에 레이가 깍듯하게 화답했다.
"잘 들어가세요, 교수님."
"으, 응."
로필렌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레이에게서 멀어졌다.
시야에서 완전히 로필렌이 사라지자 레이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진이 다 빠지네."
그래도 성과는 괜찮았다.
불안 요소는 많았지만.
아프텔을 얻었고 로필렌에겐 심리적 목줄을 채웠으며 리실로테 레코드에 접속할 단서를 확보했다.
황실 마탑에 발을 들이기 전에 생각했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격이었다.
이제 유학 기간이 끝날 때까지 적당히 몸을 사리다 필립스 백작령으로 귀환하면 됐다.
"...조심하자."
꼭 이런 타이밍에 사건 사고가 터지고는 했다.
레이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레이."
숙소 앞에 도착하자 빅토르와 하무스가 아는 체를 해왔다.
유학 오고 얼마 동안은 미궁에서 일 때문에 좀 서먹서먹했다만.
알레시아와 플로리아가 끈끈하게 어울리며 지내자 자연히 스콰이어 간의 감정을 해소할 기회도 많아졌다.
이제는 썩 친구처럼 어울릴 수 있던 터라 레이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뭐해?"
"열흘 후에 열릴 컨퍼런스에 관해 할 이야기가... 아, 그래. 레이 너도 같이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게 어때?"
"음..."
황실 마탑에서 진행되는 연구 중엔 '제작'에 관련된 연구도 활발하다.
반드시 마법적인 기능이 들어간 아티펙트가 아니라 해도, 마법의 도움이 있다면 더 고품질의 물건을 생산하는 게 가능했다.
황실 마탑에 상주하는 학파 중 제작과 관련된 학파들은 몇 달에 한 번씩 모여 컨퍼런스를 열었다.
이때 황실 마탑에 출입을 허락받은 외부인들도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마법사들이나 장인들이 내놓은 물건을 구경하고, 그 자리에서 구매할 수도 있었다.
말이 컨퍼런스였지, 레이와 같은 외부인의 시선에는 볼거리 많은 장터에 가까웠다.
레이가 물었다.
"가서 검이라도 구하게?"
"컨퍼런스에 나오는 도검은 너무 비싸서 못 사. 기념품 될 만한 거 몇 개 사서 가져가게."
"음... 그래?"
레이가 꽤 혹한 얼굴을 했다.
몇 달 만에 필립스 백작령으로 돌아가면 찡찡거릴 녀석들 숫자가 꽤 됐다.
기념품 좀 챙겨가면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 터다.
"괜찮네. 같이 가자."
*
아침 하늘이 맑았다.
마차에 앉은 안젤로는 바깥을 보며 무심코 휘파람을 불었다가 무안한 듯 헛기침을 했다.
어린 시절엔 곧잘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곤 했다.
허나 상스러운 행동이라고 모친에게 크게 혼난 후 습관을 교정했었다.
어색하게 눈치를 살피는 안젤로를 보고 호위 기사인 안달루네가 작게 웃었다.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큼, 못 들은 걸로 해."
"예,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안젤로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안달루네는 적당히 안젤로의 시선을 피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제라도 아가씨께 연락을 넣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됐어. 예상치 못한 선물이 더 기쁜 법 아니겠어?"
"음..."
안달루네가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안젤로의 마차는 황실 마탑을 향해 이동하는 중이었는데, 현재 안젤로의 동생인 멜리가 황실 마탑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안젤로는 동생을 깜짝 놀래켜 주겠다고 방문 일정을 멜리에게 알리지 않았다.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고 있었지만, 안달루네는 멜리가 안젤로의 방문을 기뻐할지 회의적이었다.
멜리에게 지극정성인 안젤로는 동생을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멜리는 안젤로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했고 말이다.
남매 사이가 나쁜 것보다야 나았지만, 안달루네는 곤란해할 멜리의 표정이 훤히 예상됐다.
'뭐, 어쩔 수 없군.'
멜리의 불편함보단, 작위를 계승 받을 안젤로의 의중이 먼저였다.
마음을 편하게 먹은 안달루네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황실 마탑 근방에 도착하자 마법사가 마중을 나왔다.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 황실 마탑에 들어서니 멜리를 시중들던 가문의 고용인들이 허겁지겁 마중 나왔다.
"도련님을 뵙습니다."
"다들 고생하고 있어. 내가 도착했다는 건 비밀로 했겠지?"
"전부 입단속 시켰습니다."
"훌륭해. 멜리는 지금 어디 있지?"
"이반 교수님의 지도 하에 훈련실에서 마법 실습을 진행하고 있을 겁니다."
"하하! 예나 지금이나 참 성실한 동생이야."
흐뭇하게 웃은 안젤로가 시종에게 명령했다.
"멜리에게 안내해줘."
"도련님, 훈련실 안으로 들어가는 건 힘드실 겁니다."
"내가 그걸 모르겠어. 수업 끝날 때까지 바깥에서 기다릴 테니 걱정 마."
고개를 숙인 시종이 길을 안내했다. 부지가 넓어 마차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멜리가 벌써 3서클에 들었다고?"
"그렇습니다."
"이야, 역시 내 동생이야. 멜리가 말이야, 어릴 때는..."
동생 자랑을 이어가는 사이 마차가 훈련소 앞에 도착했다.
출입구 근처에 다가간 안젤로는 가방을 들고 서 있는 시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젤로가 다가가자, 잠시 눈을 깜박이던 시녀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젤로는 대충 인사를 받아주곤 시녀가 들고 있던 가방을 가리켰다.
"멜리의 짐이야?"
"예, 수업이 진행되는 사이 제가 잠시 맡아두고 있습니다."
"이리 줘봐."
시녀가 곤란해했다.
멜리가 안젤로를 부담스러워하는 건 이런 부분이 컸다.
사생활에 가까운 영역을 안젤로가 배려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멜리가 짜증을 내도, 안젤로는 '그게 다 널 지키기 위한 행동'이라 주장하며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어디 보자."
멜리의 가방을 받아든 안젤로가 책을 한 권 한 권 꺼내보았다.
마법서가 다수였고 멜리가 작성한 것처럼 보이는 필기도 잔뜩 있었다.
"흠..."
안젤로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는 유학을 와서도 영지에 있을 때처럼 성실하게 공부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하긴 예전부터 범생이 아니었던가.
책을 전부 확인해본 안젤로가 가방에서 묵직한 종이봉투를 꺼냈다.
지켜보던 시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안젤로는 의아해하며 종이 봉투를 펼쳤다. 웬 서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안젤로가 서책의 제목을 살폈다.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
제목의 뜻을 이해하는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눈을 깜박이던 안젤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녀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저, 전연령판이옵니다!"
"...뭐라?"
그제야 책의 커버를 자세히 살핀 안젤로는 책 하단에 적힌 '전연령판'이라는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안젤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멜리가 질 떨어지는 통속소설을 읽는다는 건 실망스러웠지만, 이 정도면 허용범위 안이었다.
물론 얼굴 보고 잔소리는 한 번 할 생각이었다.
"벌써부터 이런 책이나 찾아보면 안 되는..."
안젤로는 애들 보는 로맨스 소설을 생각하며 책을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책 속에서 목줄에 묶인 아나스타샤가 개처럼 짖고 있었다.
"...?"
탁!
당황해서 책을 덮은 안젤로가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
내가 지금 뭘 읽은 거지?
'자, 잘못 본 것일 터다.'
스스로를 다독인 안젤로가 책 후반부를 다시 폈다.
야밤에 길거리에 나온 아나스타샤가 땅에 엎드린 채 다리 하나를 옆으로 들고 나무에다...
"익, 이익...!"
제자리서 부들부들 떨던 안젤로가 뒷목을 잡았다.
안달루네가 기겁하며 거품을 무는 안젤로를 붙들었다.
"도련님!!"
"이거 놓아라!!"
곧바로 안달루네의 손을 쳐낸 안젤로가 눈이 뒤집힌 채 고함쳤다.
"지, 지금 당장...!!"
"...?"
"지금 당장 멜리를 데려와!! 지금 당자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