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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65화 (65/446)

대화 (1)

65화

자그마한 비밀 통로로 들어서자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리실로테의 분신이 내뿜는 빛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기니 얼마 안 가 막다른 길이 나왔다.

쿠구궁-

벽을 마주 보고 서자 작은 진동과 함께 바닥이 상승하기 시작한다.

벽면에 파인 홈을 따라 저 위에서부터 마나가 흘러내리며 옅게 빛났다.

천장까지 거리가 50 m는 넘어 보였는데, 승강기는 천장과 맞닿기 직전이 되어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레이는 찰랑이며 떨어지는 마나의 근원이 저 앞에 있음을 깨달았다.

'흠...'

레이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로필렌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몸을 벌벌 떨었다.

능력 좋은 마법사랍시고 고개 꼿꼿하던 양반이 완전히 기가 죽어 설설 기어 대는 꼴을 보자, 레이는 참으로...

기분이 흡족했다.

'이거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아.'

신분과 작위가 깡패인 세상이다.

아무리 같잖은 귀족이라 해도 조용히 담글 자신 없으면 비위를 맞춰야 했다.

헌데 내가 하르시아의 환생?

당장 황궁에 쳐들어가 황제 뺨을 후려도 황제가 꺄르르 웃으며 재롱을 떨어야 하는 항렬이었다.

'그야말로 신분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

레이는 황제가 따라주는 잔을 받으며 껄껄 웃는 자신을 떠올리다 이내 인상을 구겼다.

이런 사기 함부로 쳤다간 목 떨어지는 거 순식간이었다.

'로필렌의 아가리를 어떻게 다물게 할 지나 고민해야지.'

지금은 설설 기고 있지만 뒤로는 딴생각을 품는 게 마법사란 족속 아니겠는가.

혀를 차는 시늉을 한 레이가 긴장을 끌어올렸다.

협력적으로 보이는 리실로테의 분신 또한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제삼자의 인격을 베이스로 제작되었다지만 어쨌든 저걸 만든 년도 마법사였다.

초면인 상대에게 능숙하게 사기를 치는 걸 보니 절대 방심하면 안 됐다.

[여깁니다, 하르시아님.]

복도의 끝에 도착했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정사각형의 아티펙트를 반투명한 방어막이 넓게 감싸고 있었다.

[리실로테 님이 오직 하르시아 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한 절차입니다.]

"절차?"

[저 정사각형 아티펙트는 이 구역에 동력을 공급하는 코어입니다. 실드에 타격을 가하지 말고 내부의 코어만을 부수십시오.]

불가능한 일이다.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레이는 자신에게 향해 있는 로필렌의 시선을 느꼈다.

'뭐, 기왕 사기 칠 거면 제대로 쳐야지.'

레이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파스스스!

푸른 검기가 검날에 집약된다.

레이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검기가 허공에서 증발됐다.

로필렌을 호흡조차 멈춘 채 검기의 행방을 쫓았다.

주변에선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필렌의 눈동자에 불신이 새겨지려는 순간.

앱솔루트 실드 내부에서 짙푸른 검기가 공간을 찢고 모습을 드러냈다.

"...!"

로필렌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도약 검기가 코어를 향해 떨어져 내린다.

다리 힘이 풀린 로필렌은 버티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콰앙!

정사각형 형태의 코어가 산산이 박살 났다.

터져나간 충격파가 좁은 공간을 뒤흔들었다.

로필렌이 숨을 턱턱 몰아쉬었다.

'마, 말도 안 되는...'

이제는 완전히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제국검술의 정점.

하르시아 류 공간검.

그 전설적인 검술이... 6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 이, 이럴... 이럴 수가..."

로필렌이 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로필렌은 한참을 방황하다, 차갑게 굳은 레이의 시선을 느끼고 일어섰다.

"제,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로필렌이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무릎을 꿇더니 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하르시아 님. 부디, 부디 제 잘못을...!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600년의 세월 동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절기가 소년으로부터 재현됐다.

더는 의심할 수 없다.

하르시아.

위대한 영웅이자 제국의 정점이 지금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돌이켜 보면 그토록 많은 힌트가 있었는데.

탐욕에 잡아먹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지난날이 너무나 후회됐다.

"제, 제발 자비를...!"

"..."

레이가 뚜벅뚜벅 다가온다.

로필렌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툭!

레이가 로필렌의 머리 위에 발을 얹었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굴욕이었으나.

로필렌은 도리어 황송하다는 듯이 바닥에 이마를 찍었다.

레이는 생각했다.

'쓰읍, 진짜 제국 상대로 사기를 쳐봐?'

몽롱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입 꼬리가 자꾸만 실룩대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혀를 씹어야 했다.

레이는 그동안 가진 걸 드러낼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계속 답답함을 참고 살아야 했는데, 이렇게 남 앞에서 대놓고 도약 검기를 뽐내니 꽤나 흡족했다.

"여기서..."

레이가 억지로 묵직한 목소리를 뽑아냈다.

"가만히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바닥에 아예 얼굴을 박아 넣은 로필렌이 호흡조차 낮게 죽였다.

레이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렸다.

코어가 박살 나자 복도 끝이 갈라지며 새로운 장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가 좁은 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자 반짝이는 장막이 입구를 가렸다.

"그래서."

레이가 리실로테의 분신을 마주 봤다.

"여긴 어디야?"

[오벨리스크에 존재하는 여러 컨트롤 룸 중 하나입니다.]

"알았어. 근데 너는... 리실로테가 만들어낸 AI인가?"

[무슨 의미신지?]

"인공 지능이란 뜻이야."

[제게 부합하는 정의로군요. 맞습니다.]

"인격을 가지고 있는 건가?"

[사고는 가능합니다. 허나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으니 온전한 인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이 없어 보이진 않던데."

정말로 감정이 없다면, 인간처럼 보일 수 있게 프로그래밍 되었다는 뜻이다.

레이는 내심 감탄하며 의자를 찾아 앉았다.

"널 뭐라고 부르면 되지?"

[리실로테 님은 저를 아프텔이라 칭하셨습니다.]

"좋아, 아프텔. 날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제가 자유로운 발언이 가능한 공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건 알아들었어. 그래서, 불러서 하고 싶었던 말이 대체 뭔데?"

[공간검의 계승자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함축적인 의미가 담긴 질문에 레이 또한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 답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내려온 신의 사도지."

[알겠습니다.]

"지금 내 말을 믿어?"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으나, 아프텔의 반응은 무섭도록 진중했다.

[제국이 총력을 다해 모은 인재들 중 천재라 거들먹거리던 작자만 수백이었지만, 단 한 명도 공간검을 계승하지 못하고 병신이 되었습니다. 이곳 또한 본래 제국이 기른 계승자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지만, 역할을 잃었습니다.]

"..."

[저는 동면에 들었습니다. 수백 년이 지나, 당신이 찾아왔죠. 드디어 황실이 적법한 계승자를 길러 냈다 판단했으나, 아니더군요.]

"그건..."

[온갖 우연이 겹쳤다고 해도, 당신과 같은 존재가 자연 발생할 수는 없습니다.]

아프텔은 단언했다.

[당신은, 필연적인 존재입니다. 당신이 세상의 의지가 내린 존재라면, 협력해야겠죠. 리실로테 님은 지금과 같은 상황까지 고려하여 제게 자율권을 부여하셨습니다.]

"...날 돕겠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공간검의 계승자이자 하르시아의 후계자여.]

한쪽 무릎을 꿇은 아프텔이 고개를 숙였다.

[부디 우리의 미래를 빛으로 인도하여 주소서.]

"..."

잠시 침묵한 레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의심을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당장 아프텔을 경계한다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마음을 내려놓은 레이가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

[말씀하십쇼.]

"신이 구원자를 보낸 이유가 뭘까?"

의도가 명확지 않고 멍청해 보이는 질문이었으나.

아프텔은 레이의 저의를 꿰뚫었다.

스스로를 구원자라 자각하고 있으나, 무엇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모순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마경으로부터? 마족으로부터? 아니면 흑마법사 집단이라도 궐기할까? 대체 나는 무엇과 싸워야 하지? 무엇을 경계해야 하지?"

레이는 쌓아왔던 답답함을 아프텔에게 토해내고 있었다.

미래를 알지 못하는 세계에 환생했고 적의 정체조차 뚜렷하지 않다.

차라리 인류를 적대하고 있는 세력과 격렬한 전쟁이라도 벌이고 있었다면 답이 명쾌했겠으나, 아직 대륙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내 적은 누구야? 무엇을 보고 승리를, 패배를 판단해야 하지? 넌 답을 알고 있나?"

침묵이 일었다.

무기질적인 시선이 레이를 훑었다.

아프텔은 기계적으로, 가장 확률 높은 답을 도출했다.

[Dimension Alignment.]

"...그게 뭐지?"

[하나의 시기입니다. 또한 전조 없이 찾아오는 특정 재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 재해를 막아내야 한다고?"

[이건 막을 수 있는 재해가 아닙니다. 견뎌야 하는 재해지요. 당신이 정녕 신께서 내려보낸 구원의 사도라면, 얼마 안 가...]

가늘어진 아프텔의 시야가 과거를 눈에 담았다.

[타락한 자의 광기가 대륙을 집어삼킬 겁니다.]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레이는 텁텁한 공기를 삼키며,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미래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전에 희망한 얘기를 좀 나누고 싶었다.

"너라면 오벨리스크에 존재하는 마법서나 지식을 공유해줄 수 있겠지?"

[가능합니다.]

"그 리실로테 레코드인가 뭔가도 공유해줄 수 있어? 오벨리스크 안에 보관되어 있다며?"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리실로테보다 몇 배는 대단한 대마법사의 재목을 내가 데리고 있거든."

루나를 떠올린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에게 리실로테 레코드를 제공할 수 있다면 훨씬 빠르게 실력이 늘지 않겠어?"

우리 착한 루나라면 분명 인격에 하자 없는 강대한 대마법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레이는 그리 기대했다.

허나 아프텔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리실로테 레코드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보안 문제인가?"

[일단 리실로테 레코드는 문자로 이루어진 지식이 아닙니다.]

"...?"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프텔이 설명을 이어갔다.

[리실로테 님은 마법의 '극의'에 달한 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여러 '현상'을 아공간에 새겨 놓으셨습니다. 이를 통틀어 리실로테 레코드라 칭합니다.]

"새겨 놓았다?"

[해당 공간에 의식을 진입시키면 무한히 반복되는 '극의'를 원하는 만큼 관측할 수 있습니다.]

"...혹시 깨달음을 위해 창조된 공간인가?"

[대략 그렇습니다.]

"그럼 그 공간에 진입하기 위해선 어떡해야 하지?"

[현상이 새겨진 아공간의 '좌표값'이 필요합니다. 간단한 결계만 만들어낼 수 있는 마법사도 좌표가 있다면 아공간에 진입해 극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한 박자 쉰 아프텔이 아련한 눈을 했다.

[리실로테 님은 리실로테 레코드에 진입할 수 있는 좌표 정보를 세상에 뿌려 어느 마법사든 극의를 체험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조치하려고 하셨습니다. 미래를 위해, 마법사들의 수준을 올리려고 하셨죠.]

"근데... 어째서 리실로테 레코드를 제국이 독점하고 있지? 혹시...?"

레이는 순간 비극적인 사연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리실로테가 미처 좌표 정보를 배포하기 전에 제국에게 암살당했다던가 하는.

아프텔이 말을 이었다.

[헌데 막상 자신의 성취를 공짜로 뿌려 남 좋은 일을 해주려고 하니 배가 아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국에게 팔아먹었습니다.]

미친년 아니야.

무심코 중얼거린 레이가 손가락으로 미간을 눌렀다.

"그럼 너도 좌표 정보가 없는 거야?"

[아니요. 리실로테 레코드에 접속 가능한 좌표 정보는 제공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허나 멋대로 극의가 새겨진 공간에 진입하면 제국에게 역추적 당할 겁니다.]

답이 없군.

레이가 포기하고 주제를 돌리려는 데 아프텔이 거리를 좁혔다.

[허나 이런 때를 대비해 리실로테 님이 남겨둔 백도어가 있습니다.]

"...?"

[계승자님이 찾아가셔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셔야, 리실로테 님이 계승자에게 남겨둔 안배와 백도어 코드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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