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의 (3)
64화
로필렌이 교수 직위를 내려놓고 변두리 영주의 아래로 들어가게 됐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졌다.
마탑 관계자들은 식사를 하다 한 번쯤은 로필렌의 이름을 입에 담았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교수가 황실 마탑의 눈 밖에 나 사임하는 일은 종종 있어왔으니까.
황실 마탑 출신의 마법사가 귀족가 영애의 가정교사 노릇이나 하게 되었다는 건 굴욕적인 일이었으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선 가장 현명한 선택이기도 했다.
로필렌은 정식으로 교수직을 사임하고 황실 마탑과 계약 각인을 맺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최소 열흘은 걸릴 일이었는데, 로필렌은 그 사이 플로리아나 알레시아와 여러 번 같이 식당에서 만났다.
이 또한 고의로 소문을 부채질해 외부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한 의도였다.
로필렌과 각 백작가의 관계자들은 날을 바짝 세운 채 시간을 보냈다.
허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특별한 외부의 압박은 확인할 수 없었다.
로필렌의 사임 절차도 무난하게 진행됐으니, 순조롭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물러나기엔... 기회가 아깝단 말이야.'
로필렌이 개인 연구실 의자에 앉아 숨을 크게 내쉬었다.
로필렌은 근래 완전히 차분함을 되찾았다. 말인즉슨 지극히 마법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로필렌은 레이를 떠올렸다.
나이에 비해선 똑똑했지만, 아직 어수룩하고 마법에 무지한 녀석이었다.
마법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절대 그리 행동할 수 없었다.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걸까?'
확실한 건 레이의 스승 또한 마법에 대해선 문외한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대체 어떤 마법사가 기사의 길을 걷는 스콰이어에게 기밀에 부쳐야 할 수학적 지식을 가르쳐준단 말인가.
로필렌은 입을 다셨다.
레이의 스승이 탐났다. 그가 이루었을 학문적 성취가 탐났다.
귀족이 아니면 책도 구하기 힘든 시골구석에 복소평면의 개념을 완성할 수 있는 수학자라면 대단한 천재성을 타고났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오벨리스크.'
교수 직위를 완전히 내려놓게 되면 더 이상 오벨리스크에 발을 들이미는 건 불가능해진다.
리실로테가 남긴 지식도, 영영 손에 쥘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직 며칠 시간이 남았을 때, 어떻게든 그 편린이라도 훔쳐보고 싶었다.
'레이, 레이, 레이.'
모든 열쇠를 레이가 쥐고 있다.
마음 같아선 그 어수룩한 스콰이어를 감금한 채 지니고 있는 모든 비밀을 토해내게 만들고 싶었다.
허나 너무 과격하게 일을 벌여선 안 됐다.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로필렌은 어떻게 하면 레이를 속여서 이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레이는 아직 어렸으며 마법에 무지했다.
그 틈을 파고들어 그럴듯한 말로 회유한다면, 충분히 약점을 잡고 협박할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로필렌은 계획을 세워가며 잔잔하게 웃었다.
무지는 죄였으니 이제부터 죄를 지을 건 로필렌이 아닌 레이가 될 터였다.
로필렌은 참으로, 전형적인 마법사였다.
*
"며칠 뒤면 나는 평생 오벨리스크에 출입할 수 없게 될 거야."
로필렌이 레이를 데려다 놓고 입을 열었다.
"리실로테 레코드가 아니더라도 오벨리스크엔 외부 반출이 불가능한 마법서가 산처럼 쌓여있지."
개중엔 로필렌의 권한으로도 열람 못할 마법서가 꽤 되었다.
"그걸 살펴보려면 네 협력이 필요해."
"로필렌 님의 지적 호기심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위험하지 않아. 내 도움을 받는다면 오벨리스크 중층까지는 아무 문제 없이 올라갈 수 있어."
"문제가 없다 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무슨 이득을 얻을 게 있다고 거기 어울립니까?"
"너는 충실한 기사잖아? 나의 지식이 곧 네 주인 아가씨의 것이 될 텐데, 기사 된 도리로써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겠어?"
"..."
침묵하는 레이를 향해 로필렌이 눈을 가까이했다.
"두 번 없을 기회야. 잘 생각해봐. 그리고 난 은혜를 잊지 않아. 이번 일을 도와준다면, 계약 각인과는 별개로 최선을 다해 아가씨를 보필하겠다 약속하지."
레이는 뚱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척'을 했다.
로필렌은 정말 레이를 낮잡아 보고 말도 안 되는 제의를 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개소리 말라며 진작에 뺨을 후렸을 터다.
'근데 마침 안내자가 필요하니...'
리실로테 형상을 한 빛 무리는 오벨리스크 하층에선 길게 모습을 유지할 수도 없고, 직접적인 도움도 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층까지는 자력으로 올라오라고 통보했는데, 오벨리스크에 연구실을 두고 있는 마법사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레이는 로필렌의 저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순진한 아이를 연기하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를 위해서라면요. 그런데 정말 안전한 것 맞나요?"
"걱정할 것 없어."
로필렌은 자신만만했다.
오벨리스크 하층 구조는 이미 전부 파악해두었다.
더군다나 다른 마법사들은 오벨리스크의 보안을 굉장히 신뢰했다.
레이가 로브만 깊숙이 쓰고 돌아다니면 외부인이라 의심하기 힘들었다.
"넌 내 말만 잘 따르면 돼."
*
레이는 로필렌의 지시를 따라 해가 하늘 끝에 걸쳤을 때 오벨리스크의 숨겨진 복도로 진입했다.
인기척이 없는 복도 끝에 다다르니 계단이 나타났다.
레이는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치기를 몇 번 반복했다.
계단을 오르던 중 마법사를 두 차례 마주쳤다.
숨을 곳이 없어 자연히 스쳐 지나가야 했다.
마법사들은 로브를 뒤집어쓴 레이를 다른 학파의 마법사라 여기고 신경 쓰지 않았다.
내심 긴장했던 레이는, 오벨리스크 내부에 로필렌에게 할당된 연구실을 찾아 가 문을 두드렸다.
로필렌이 문을 열고 나와 주위를 확인한 후 레이에게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
레이는 침묵한 채 로필렌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뚜벅뚜벅 걸었다.
남들의 눈에 둘은 그저 방향이 같을 뿐, 일행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로필렌은 인기척이 적은 곳을 골라 안내하며 오벨리시크의 하층을 벗어나 중층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자잘한 보안 절차가 있었으나, 레이는 로필렌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로필렌은 속으로 웃었다.
'쉽네.'
오벨리스크의 보안은 공간 왜곡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공간 왜곡장만 무력화할 수 있다면 손쉽게 남은 보안을 뚫어낼 수 있었다.
레이는 결국 들키지 않고 오벨리스크의 중층에 도착했다.
로필렌은 레이를 중층 도서관의 뒷문으로 안내했다.
로필렌이 주변을 훑었다.
중층 도서관의 후문과 이어져 있는 복도는 가끔 짐을 옮길 때 빼고는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레이, 저곳은 공간왜곡장으로 보호받는 중층 도서관이야. 내 권한으로는 출입할 수 없어."
거짓말이다.
오벨리스크 중층 도서관은 로필렌도 얼마든지 이용 가능한 공간이었다.
허나 레이가 이 사실을 알아챌 방도는 없었다.
로필렌이 레이의 손에 종이를 쥐여주었다.
"자, 중층 도서관에서 여기 적힌 마법서를 찾아서 나와줘."
"마법서를 그냥 들고 나오라고요?"
대여 절차도 없단 말인가.
의문을 표하는 레이를 로필렌이 안심시켰다.
"출입만 가능하면 자유롭게 마법서를 빌릴 수 있어. 책이 훼손되거나 오벨리스크 밖으로 반출되면 추적 마법이 발동하지만, 무사히 돌려놓기만 하면 꼬리가 잡힐 일은 없어."
이 또한 거짓말이었다.
마법서에 손을 대는 순간 황실 마탑에 출입할 때 새겼던 각인이 발동된다.
이를 통해 중층 도서관의 기록 장치에 책을 빌린 자의 신원이 기록되는데, 담당자가 주기적으로 기록 장치에 적힌 신원을 확인했다.
만약 외부인의 신원이 기록 장치에서 발견된다면 마법사들은 곧장 조사대를 파견하리라.
로필렌이라면 한 번쯤은 그 기록을 덮어씌울 수 있었다.
로필렌은 레이가 책을 들고 나왔을 때, 이 사실을 밝히며 레이를 협박해 원하는 정보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레이는 분노하겠지만, 당장의 상황을 타파할 뾰족할 수단이 없다는 걸 깨달으면 순순히 협력하리라.
사실 굉장히 위험한 시도였다.
허나 로필렌은 원하는 지식을 얻기 위해선 위험부담쯤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자, 빨리 가져와 줘."
"알겠어요."
로필렌의 요구에 레이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중층 도서관을 향해 몸을 돌리는 레이의 뒷모습을 보고 로필렌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허나 레이가 미처 발걸음을 떼기 전에.
허공에서 빛이 집약되기 시작했다.
"...?!"
로필렌이 깜짝 놀라 한발 물러섰다.
집약된 빛 무리가 사람의 형상을 취한다.
로필렌은 경악했다.
리실로테.
빛 무리의 윤곽은 오벨리스크 입구에 걸려있는 초상화를 똑 닮아 있었다.
'서, 설마...?!'
저건 마법적인 현상이다.
오벨리스크 내부에서 허락 없이 마법을 사용했다간 곧장 보안 시스템이 발동한다.
헌데도 주변이 조용했다.
이 상황이 뜻하는 건 하나였다.
저 빛 무리가, 오벨리스크 보안 시스템의 일부였다.
'이런 맙소사...!'
리실로테의 분신.
리실로테가 오벨리스크에 안배해두었다고 전해지는 감시자의 별명이었다.
실제로 목격한 사람이 없어 괴담 취급받는 존재였으나, 로필렌은 그 괴담이 진실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로필렌은 연거푸 뒷걸음질쳤다.
오벨리스크에 외부의 침입자를 끌어들였다는 사실이 들켰다.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였다. 탐욕이 타오르던 자리에 뒤늦게 공포와 후회가 쏟아졌다.
허나 리실로테의 분신은 로필렌에게 관심이 없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드레스 끝자락을 잡은 리실로테의 분신이, 레이를 향해 격식에 맞게 허리를 숙였다.
[인사 올리겠습니다, 하르시아님.]
"...?"
뒷걸음치던 로필렌이 다리를 멈추었다.
"하르...?"
지금 리실로테의 분신이 레이에게 무어라 했지?
하르시아. 하르시아라 했나? 하르시아가 레이의 본명인 걸까?
그게 아니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말이 안 되는 가설을 떠올린 로필렌이 자기 머리카락을 붙드는 순간.
리실로테의 분신이 말을 이었다.
[환생하신 이후로는 처음 뵙는군요.]
로필렌의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리며 레이에게 기울어졌다.
하르시아. 환생. 공간 왜곡장에 대한 극한의 내성.
제국이 외부로 유출하기 극도로 경계하는 지식을 훤히 알고 있는데다, 괴담이라 여겨졌던 리실로테의 분신이 모습을 드러내 인사를 해온다.
각각 따로 놀던 퍼즐이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맞춰진다.
로필렌의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설마. 설마 그럴 리가.
"..."
레이가 제자리에 선 채로 고개만을 옆으로 천천히 돌린다.
반쯤 드러난 레이의 얼굴은, 지극히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길게 뻗은 레이의 검지가 입술 위에 붙는다.
공포스러운 전율이 로필렌의 심장을 헤집어 놓았다.
*
로필렌이 중층 도서관에 가서 마법서를 가져오라 요구했을 했을 때.
레이는 로필렌의 말을 신뢰하지도 않았고, 하물며 요구를 들어줄 생각도 없었다.
중층까지 올랐으니, 도서관에 가는 척하며 로필렌과 거리를 벌릴 생각이었다.
홀로 남는다면 리실로테 형상의 빛 무리가 접촉해 올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허나 리실로테의 분신은 로필렌이 보는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도 모자라.
레이가 생각지도 못한 개소리를 지껄였다.
[하르시아님.]
'아니, 무슨...'
어이가 없어 당황하는 와중 로필렌이 하도 꺽꺽대기에 조용히 하란 뜻으로 입술 위에 검지를 붙였다.
그 순간 레이와 리실로테의 분신을 감싸듯이 반투명한 구가 전개됐다.
[외부와의 소리를 차단했습니다.]
"이봐, 노망났어? 난 하르시아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시스템의 권한 문제 때문에 제가 임의로 계승자님의 신원을 하르시아로 덮어씌웠습니다.]
"아니... 그거랑 로필렌 앞에서 헛소리한거랑 무슨 상관관계인데?"
[저건 마법사입니다.]
"그래, 마법사지."
[마법사란 음습하고 이기적이며 필요하다면 언제나 신뢰를 저버릴 수 있는 족속입니다.]
"...?"
레이가 얼을 탔다.
600년전의 대마법사 형상을 하고 저런 말을 하니 호응을 해야 할지 순간 헷갈렸다.
리실로테의 분신은 레이의 반응과 상관없이 말을 이었다.
[마법사, 로필렌의 배반 행위를 확인했습니다. 제거하지 않고 옆에 두실 거라면, 감히 도전 못할 권위로 찍어 누르시는 게 좋습니다.]
"야, 내가 하르시아 환생이란 걸 저 마법사가 믿겠냐?"
[예, 믿을 겁니다. 공간검의 계승자여. 아니면 저 경멸스러운 족속을 굴종시킬 더 좋은 수단이 있습니까?]
레이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이봐. 너는... 아니, 널 만든 주인도 마법사 아니었나? 왜 이렇게 마법사를 싫어해?"
[제 현명한 주인님은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마법사가 심각한 성격 파탄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제 인격은 리실로테 님 본인이 아닌 제삼자의 인격을 베이스로 제작되었습니다.]
"제삼자가 누군데?"
[모릅니다.]
"아이씨... 됐다. 일단 날 여기까지 부른 이유나 답해."
[여기서는 보안 문제로 답할 수 없습니다.]
리실로테의 분신이 벽을 향해 손을 뻗자 작은 진동과 함께 비밀 통로가 드러났다.
리실로테의 분신은 허공을 미끄러지며 레이에게 당부했다.
[저 마법사는 동행시켜야겠군요. 차단막을 풀겠습니다. 무게 좀 잡아보시죠. 하르시아 님처럼.]
"진짜로 하르시아 흉내를 내라고?"
[그게 저 마법사를 다루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완벽한 수단입니다. 어색한 점이 있다면 제가 보조해 드리겠습니다.]
"...대체 누구 인격을 집어넣어 놓은 거야?"
레이는 중얼거리면서도 얼굴에 표정을 지웠다.
이게 갑자기 뭐 하는 짓거리인가 싶었지만, 여기서 해명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차단막이 사라진 후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로필렌을 바라본 레이가 낮게 명령했다.
"따라와."
"...!"
아직까지 반신반의하고 있던 로필렌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레이가 하르시아의 환생이든 뭐든 당장 죽기 싫으면 명령을 따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