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63화 (63/446)

제의 (2)

63화

"선수를 치러..."

"아, 잠시만요."

로필렌 교수의 말을 끊고는 연구실의 암막을 걷어냈다.

알 수 없는 마나 회로가 새겨진 창문 너머로 황실 마탑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납득이 안 갔다.

제한적이나마 이만한 발전을 이룬 문명에서 고작 학부생 수준의 수학적 지식으로 대단한 진리를 설파하듯 까불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마법의 기초는 룬 문자다.

내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다.

룬 문자와 관련된 학문은 일종의 신학처럼 느껴지고는 했으니까.

허나 룬 문자 때문에 수학이 퇴보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룬 문자는 마법에 한정된 개념이었지만, 수학은 모든 공학의 기초였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감안해도..."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들과 같기 때문에 고대인들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멀리 볼 수 있다.

지구의 격언이다.

수십 수백 년 동안 쌓인 데이터를 토대로 세기의 천재가 혁신적인 이론을 내놓으면 패러다임의 변화가 찾아온다.

이 세계에서 성립할지는 차치하고라도 20세기 지구의 관통한 이론 정도라면 여기서도 혁신으로 통할 터다.

예컨데 상대성 이론 같은 것 말이다.

허나 지구에서 17~18세기에 발견된 수학 이론이 아직 논의도 되지 않았다?

믿기 힘들었다.

다시 로필렌의 연구 일지를 훑어봤다.

로필렌은 확실히 나보다도 훨씬 뛰어나며 천재적인 학자였다.

비록 오답일지언정 정답을 찾기 위해 여러 아이디어를 동원해 길을 헤맸는데, 권능을 사용하고도 그녀가 무슨 의도로 수식을 전개했는지 쫓아가기 버거웠다.

가만히 두어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고 답을 찾았겠지.

로필렌이 연구하고 있는 개념은 이미 발견되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됐다.

허나 철저히 통제된 환경에서 독점되고 있겠지.

마탑 간에 서로 다른 기호를 사용하며 마법과 수학 공식들을 일일이 암호화해서 기록한다는 걸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결벽을 떠는가.

그건 아마도 마법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마법이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하는 세상이다.

마법과 긴밀히 연결된 수학적 지식 또한 독점적인 지위를 지닐 터다.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로필렌을 바라봤다.

낯빛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날 죽이러 온 거냐."

"그건 아닙니다. 우리 오벨리스크에서 얼굴 한 번 봤죠?"

로필렌이 눈가를 가늘게 떨며 뒤로 숨긴 손을 꼼지락댔다.

나는 곧장 허리춤에서 검을 풀러 로필렌을 향해 던졌다.

"교수님을 해치러 온 건 아닙니다. 아, 물론 오벨리스크에서의 일은 비밀로 해주시면 좋겠네요. 제가 특이체질이라는 건 최근에 알았어요. 혹시 이 연구실도 오벨..."

"순진한 척 말고 본론을 말해."

"제의할 게 있어 찾아왔어요."

본래라면 좀 더 길게 고민한 후 적임자를 골라 제의를 건넸겠지만.

오벨리스크의 일 때문에 로필렌은 반드시 제거하거나 회유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일단 들어보실래요?"

"...말해."

로필렌에게 건넨 제안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는 황실 마탑에 단기 유학을 왔다.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그녀들이 귀향한 후에도, 마법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고 있다.

당신이 그 적임자처럼 보이니 백작가에서 신변을 보장해주겠다.

대신 문제가 되었던 연구를 폐기하고 백작령에 정착해 아가씨들을 충실히 가르쳐라.

"나쁜 제안은 아니죠?"

"닥쳐. 시골 바닥에서 애새끼나 가르치다 늙어 죽으라고?"

로필렌은 예상된 반응을 보였다.

"너야말로 내게 협력해. 오벨리스크에 침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싫다면 말이야."

그녀가 지닌 광적인 탐구욕이 안전하고 편안한 여생 따위를 선택지 못하게 만들었다.

로필렌의 성향은 익히 들었기에, 그녀가 혹할만한 여러 대가를 고민했었다.

허나 연구실에 와서 생각이 바뀌었다.

"마탑에서 압박을 받는 이유가, 여기 진행하는 연구 때문입니까?"

"..."

미간을 거칠게 접은 로필렌이 이내 표정을 풀었다.

감정을 다스렸다기보다 자포자기한 모양새였다.

"그걸 원래 연구하던 놈은 죽었어!! 나는 그놈이랑 편지 좀 몇 통 주고받았다고 이 꼴이 됐지!!"

"교수님을 압박한 놈들이 누굽니까?"

"몰라!! 힘 있는 마탑 중 하나겠지!! 너도 내가 하던 연구를 봤으니, 똑같이 표적이 되겠군!!"

억눌린 분노가 가빠지는 숨에 섞여 터져 나왔다.

나는 연구실을 울리는 고함을 대충 한 귀로 흘리며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로필렌을 노리는 마탑이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마탑이라 해도, 원활하게 문제를 풀어낼 수단은 존재했다.

마법사는 계약 각인으로 신뢰를 살 수 있었으니까.

로필렌만 잘 설득하면 됐다.

"지금 연구하시는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 관점을 제공해 드릴게요. 그리고 필립스 백작령에 오신 후에도 교수님의 개인적인 연구를 지원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로필렌은 코웃음을 쳤다.

"이 무식한 기사 놈이 나에게 사기를 치려 하는군."

로필렌이 충동적으로 마나를 쏟아내려는 순간.

흐릿한 노크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똑똑!

내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았다면, 지금 노크를 할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플로리아 님이네요."

로필렌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사라지기 전에 선수를 쳤다.

"진정하고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시죠?"

*

첨벙!

레이가 로필렌과 담판을 짓고 사흘이 흘렀다.

황실 마탑에 존재하는 공용 목욕탕을 찾은 젠킨슨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후우..."

젠킨슨의 입가가 기분 좋게 풀어졌다.

위아래로 물이 퐁퐁 솟아나는 목욕탕의 시스템은 몇 번을 봐도 썩 새롭게 다가왔다.

화려하고 거대한 황실 마탑의 목욕탕은 제국의 기술력을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었다.

젠킨슨은 탕에 등을 기댄 채 느긋이 몸을 불렸다.

첨벙!

맞은편에 물소리가 나기에 눈을 뜨니 레이가 탕 속에 몸을 집어넣고 있었다.

레이의 인사를 받은 젠킨슨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로필렌님의 협력을 약속받은 게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마스터."

"걱정을 덜었군. 알레시아님과 플로리아님이 유학을 끝내고 귀향하신 후에도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으시겠어."

젠킨슨은 로필렌을 영입하는 대외적인 사유를 입에 담았다.

공용목욕탕이니 만큼 듣는 귀가 꽤 있었다.

레이와 젠킨슨은 일부로 로필렌의 일을 떠벌이고 있었다.

"계약 각인을 언제 새기기로 하셨지?"

"열흘 안으로 일정이 잡힐 겁니다."

황실 마탑을 떠나는 마법사들은 지식을 외부로 유출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계약 각인에 묶인다.

로필렌은 가정교사 역할을 부탁받은 만큼 계약 각인의 조건이 조금 복잡해지겠지만, 오랜 마탑 역사에 그런 경우는 수두룩했다.

적합한 절차를 거쳐 황실 마탑에서 나간다면, 다른 마탑들이 로필렌을 견제할 실리적인 이유는 사라진다.

고위 귀족이 신변을 보호해주겠다고 나선다면 감정적인 사유 때문에 불필요하게 날을 세우진 않을 터다.

'아마도, 말이지.'

레이와 젠킨슨이 이 대화를 이어가는 이유는 간을 보기 위해서다.

로필렌을 필립스 백작령으로 영입한다고 떠들어댔을 때 예상 이상의 압박이 들어온다면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소문이 번질 만큼 충분히 로필렌에 대해 떠들은 레이와 젠킨슨이 이내 침묵했다.

준비했던 대본이 다 떨어졌다.

"..."

"..."

레이와 젠킨슨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갈 만큼 사이가 가깝지 않았다.

어색함에 빠져 괜히 얼굴에 물을 찍어 바르던 젠킨슨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가 깜짝 놀랐다.

"...종자야."

"네?"

젠신슨의 시선이 레이의 하반신으로 향했다.

물에 잠긴 탓에 왜곡되어 보이긴 했으나 기사의 감각으로 충분히 보정 가능했다.

"몸집은 작으면서 물건은 꽤 실하구나."

기껏 꺼낸 화제가 이따위라니.

젠킨슨이 자괴감에 빠져 미간을 구기는 사이.

자기 물건을 내려다본 레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후... 이게 다 유전자 덕분 아니겠습니까."

"유전자?"

"그거 아십니까? 제 유전자의 절반은 금태양, 남은 절반은 탕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금태... 뭐? 대체 무슨 뜻이냐?"

"제 생물학적 애미애비가 십새끼였다는 소립니다."

레이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시발, 아랫도리 크기에 개연성이라니.'

참 좆 같은 부분에서 섬세한 세계였다.

"거지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거 치고 제가 참 번듯하게 자라지 않았습니까?"

이게 다 영혼이 맑아서 그렇습니다, 껄껄.

혼잣말을 지껄이는 레이를 보고 젠킨슨이 떫은 얼굴을 했다.

천장을 보고 궁시렁거리던 레이가 머리 위로 물을 끼얹었다.

"하아... 마스터. 제가 아침마다 어지럼증을 느낍니다. 이유를 뭔지 아십니까?"

"모른다."

"아랫도리에 피가 너무 많이 쏠린 탓에 머리로 갈 피가 부족해져서 그렇습니다."

"큭큭큭..."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음담패설은 쉽게 웃음을 살 수 있는 주제였다.

한동안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낄낄거린 레이와 젠킨슨은 욕탕을 나왔다.

개인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던 레이는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오벨리스크 밖으로도 나올 수 있는 거였어?"

[오벨리스크 안으로 오십시오. 보안 탓에 외부에서 전달 가능한 정보가 극히 제한됩니다.]

"미안한데 거기 들어갔다가 걸리면 잡혀 죽어."

[계승자의 흔적을 은폐할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그러니 찾아오십시오. 계승자가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이건 권유가 아닙니다.]

"600년 전 죽은 할머니한테 협박도 들어보는군."

걸렸으니 가보긴 해야 했다.

레이가 짧게 혀를 찼다.

"며칠 기다려봐."

*

화르륵!

아직 잉크도 덜 마른 종이가 한순간에 재로 변한다.

로필렌은 책 몇 권 분량의 자료를 아낌없이 태우며 고민에 잠겼다.

로필렌은 사흘 전 플로리아와 계약 각인을 맺었다.

레이가 로필렌이 찾던 '답'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날 일을 비밀에 부침과 함께 레이의 제안에 긍정적으로 응하겠다는 계약이었다.

로필렌은 레이가 개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무식한 기사가 사람을 현혹하려 혀를 놀린다고 생각했다.

로필렌은 레이를 비웃으며 욕설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계약에 응했다. 사실 손해 볼 게 없는 계약이었다.

그리고 레이에게 답을 받아든 로필렌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가 건넨 건 작은 아이디어이자 숫자를 뒤틀린 관점으로 보는 법이었다.

'이건 새로운 개념이 아니야.'

복소수에 관한 개념. 그리고 복소평면.

지구에서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완벽히 적립된 개념.

막상 답을 놓고 보니 몇몇 암호화되어 있던 마법 이론에서 이에 관한 개념의 흔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은색 마탑 놈들이었군.'

자신의 연구를 방해한 범인을 알 것 같았다.

공간에 관련된 마법을 주로 탐구하는 은색 마탑 놈들.

룬어와 경험에 의지하는 경향이 큰 원소 마법과 달리 공간 마법은 복잡한 수학적 계산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복소평면을 시작으로 이와 관련된 개념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면 훨씬 효율적이고 빠르게 공간 마법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고,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고 로필렌은 판단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건...'

아는 만큼 보인다.

마법적 지식이 일천한 레이는 지식을 전하면서도 그게 어떻게 마법에 활용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개념을 연구하던 수학자, 아토르도 그렇기에 멋모르고 로필렌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하지만 로필렌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극독이군.'

제국과 황실 마탑은 다른 마탑들의 마법 지식 독점을 견제하며 지식을 공유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을 권장한다.

때문에 본래 황실 마탑은 로필렌을 보호했어야 한다.

로필렌은, 세력이 강한 마탑이 우회적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줄 알았으나, 이제 보니 아니었다.

황실과 은색 마탑은 한몸이었다.

황실은 공간 마법에 사용될 지식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 이거라면 제국이 병적으로 경계할만하지.'

공간 계열의 대마법 중에 허락 없이 시도했다간 곧장 반역죄로 처형되는 마법이 두 가지 존재한다.

하나는 게이트.

다른 하나는-

"메테오(Meteor)."

영지 몇 개를 날려버릴 수 있는 파괴 마법.

대마법사가 여럿 모여도 한 번 전개하기 위해선 오랜 준비 기간을 필요로 하지만.

공간 마법 이론이 발전되면 필연적으로 메테오를 전개하기 위한 조건과 시간이 축소된다.

제국이 거품을 물만 했다.

발전된 마법 지식이 외부로 빠져나가 제국에 적대적인 대마법사가 제국이 대비도 하기 전에 메테오로 선공을 가했다간 도시 몇 개는 바로 괴멸될 테니까.

'제국이 나를 놓아주려나.'

연구 일지는 전부 태웠고 계약 각인도 충실하게 맺을 생각이다.

로필렌이 지식을 유출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제국이 로필렌을 껄끄럽게 여긴다면 어찌 나올지 몰랐다.

물론 냉철함이 돌아온 로필렌은, 이러한 사실을 레이에게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제국이 부디 마음 넓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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