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62화 (62/446)

제의 (1)

62화

"흠."

레이가 실험동에서 터져 나오는 화염을 차분하게 살폈다.

마탑이란 곳이 본디 이런저런 실험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저런 폭발 사고쯤은 꽤나 빈번하게 발생했다.

의외로 사상자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마법사들이 다들 '자기 안전'은 열심히 챙겼고 유학생들은 대개 실력 좋은 호위를 대동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화르르륵!

열기가 번져 나왔다.

화염에 휩쓸렸던 마법사 하나가 덤덤하게 불이 붙은 로브를 털어냈다.

이 쯤에서 사건이 수습되나 싶었는데, 뒤늦게 짐승의 울음소리가 실험동 안에서 흘러나왔다.

"크르르르..."

불길에 온몸이 휩싸인 마물이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외관이 꽤나 익숙했던 터라, 레이는 실소를 터뜨렸다.

"와일드호그?"

멧돼지를 닮은 몬스터.

비슷한 체격의 마물들 중 맷집이 좋은 편이라 마법사들의 실험 재료로 선호된다는 이야기는 몇 번 들었었다.

'저건... 룬 문자인가?'

자세히 살피니 와일드호그의 가죽에 새겨진 수십 개의 문자가 빛을 내뿜으며 공명하고 있었다.

사방으로 번져가는 불길의 원인이 저 와일드호그임을, 레이는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크르륵!!"

와일드호그가 주둥이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뚝뚝 떨어지는 침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증발되어 흩어진다.

와일드호그는 자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버티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쿠웅!

반 쯤 눈이 돌아간 와일드호그가 가장 가까이 있던 인간, 로필렌을 향해 땅을 박찼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인원이 꽤 됐지만, 다들 먼저 나서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딱 봐도 실험체로 보이는 와일드호그다.

어디가 어떻게 강화되었는지 파악이 힘들었다.

제압한다해도, 경우에 따라 실험체를 망가뜨렸다는 시비에 걸릴 수 있었다.

역시나 가만히 서 있는 레이를 향해 플로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분이 로필렌 교수님이야."

"그래요?"

레이가 뒤집힌 로브 사이로 드러난 로필렌의 얼굴을 확인했다.

오벨리스크의 일이 기억을 스쳐 갔다.

'그때 그 마법사군.'

묘한 우연이었다.

레이는 팔에서 힘을 뺐다.

마탑의 교수쯤 되면 와일드호그를 제압하진 못하더라도 자기 몸 지킬 수단은 충분히 지니고 있을 터였다.

그때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레이의 귓가를 때렸다.

"가거라, 피닉스여! 몸통박치기!"

바람이 휘몰아쳤다.

하늘에서부터 강하한 독수리 형태의 정령이 와일드호그를 향해 곡선을 그렸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괴수들이 엄청난 속도로 충돌했다.

콰앙!!

[크르륵!!!]

지면을 구른 와일드호그가 곧장 몸을 일으킨다.

와일드호그가 분노함과 함께 가죽 위에 새겨진 룬 문자가 점멸하며 주변의 온도가 가파르게 솟구쳤다.

깊숙이 파인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열기를 못 이기고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안광을 피워내는 와일드호그를 향해, 어느새 펜리르를 타고 나타난 알레시아가 일갈했다.

"마물이 발악을 하는구나!"

알레시아는 목에 힘을 잔뜩 준 채 와일드호그를 내려봤다.

레이가 중얼거렸다.

"저런 씹..."

플로리아가 옆에 있어서 욕을 하다 말았다.

레이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알레시아는 고조되는 감정을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내가 활약할 자리가 만들어졌구나!'

필립스 백작령에 있을 때는 지미 보육원의 고아들에게 치여 자존감이 꽤나 떨어졌던 알레시아다.

허나 황실 마탑에 유학을 온 뒤로 교수들이 하나같이 관심을 표하며 얼굴에 금칠을 해주니, 그야 마음이 들뜰 수밖에 없었다.

알레시아는 여기저기 실력을 뽐내며 칭찬을 듣고 싶었다.

허나 레이의 요구에 따라 한동안 조용히 지내며 속앓이를 했는데, 지금 떡하니 무대가 차려진 것이다.

사람도 구하고 명성도 높일 기회다.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었다.

"펜리르! 피닉스를 돕거라!"

펜리르가 와일드호그를 향해 마주 돌진했다.

레이가 한숨을 쉬며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아가씨, 도움을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그러면..."

레이의 설명을 들은 플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 걱정 마렴."

"감사합니다."

콰앙!!

펜리르와 와일드호그가 충돌했다.

주르륵 미끄러진 펜리르를 와일드호그가 재차 들이박았다.

와일드호그 주변의 공기가 가열되며 상승 기류가 발생한 탓에 실체화된 펜리르의 육체가 자꾸만 흩어졌다.

상성이 안 좋았다.

펜리르와 피닉스가 합공한다면 곧바로 와일드호그를 밀어붙일 수 있겠지만, 와일드호그는 보기보다 눈치가 좋았다.

"크르르륵!!!"

펜리르를 밀어낸 와일드호그가 정령을 부리는 알레시아를 향해 돌진한다.

알레시아가 몸을 움찔 떨었다.

별로 좋지 못한 추억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허나 당황은 길지 않았다.

알레시아가 마법을 쏘아내기 위해 자세를 잡았고, 피닉스와 펜리르도 다시 와일드호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꽤 흥미진진한 대결을 볼 수 있었겠지만.

당연히도 젠킨슨은 그 꼴을 두고 보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촤악!!

검기가 서린 칼이 와일드호그의 옆구리를 긁고 지나간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비틀거리는 와일드호그를 젠킨슨이 어깨로 들이받았다.

쿠웅!!

와일드호그의 돌진을 저지한 젠킨슨이 지면을 나뒹굴었다.

제 아무리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기사라 해도 질량 차이가 몇 배였다.

와일드호그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공간을 메운 열기 탓에 갑옷이 상하고 머리카락 끝이 타들어 갔지만, 젠킨슨은 개의치 않고 검을 겨누었다.

얼굴을 구긴 채 젠킨슨 곁에 도착한 레이가 어깨 위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레이의 신호를 받은 플로리아가 정령을 활용해 거친 바람을 만들어냈다.

쐐애애애액!!

사방에 들러붙었던 화염이 회오리를 타고 하늘로 솟구친다.

잠시 잠깐, 레이와 젠킨슨, 그리고 와일드호그의 모습이 화염에 가려졌다.

레이가 젠킨슨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 좀 빌려줘요."

"오냐."

젠킨슨이 순수히 검을 던져주었다.

검을 받아든 레이가 두 다리로 지면을 찍어 눌렀다.

"빨리 끝내겠습니다?"

"그래, 단칼에 죽여라."

"소문 좀 날 텐데요. 젠킨슨 경이 대단한 기사라고."

"맹약이 끝나간다. 백작님도 가문의 저력을 조금씩 드러낼 것이라 하셨다. 걱정 말고 마무리 지어."

"알겠습니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킨 와일드호그가 재차 돌진해온다.

츠즈즉!

레이가 손에 쥔 검에 찬란한 검기가 맺혔다.

검날을 타고 흘러내린 검기가 검 끝에 둥글게 압축된다.

레이의 검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쩌엉!!!!

레이의 코앞까지 돌격해온 와일드호그의 안면이 삽시간에 함몰됐다.

충격파가 일며 와일드호그의 몸뚱이가 훅 떠오른다.

와일드호그의 가죽이 파도처럼 출렁이길 한 번.

굉음과 함께 와일드호그가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콰가가가가강!!

불길을 뚫고 나간 와일드호그는 지면을 수십 번 찍으며 나뒹군 끝에야 자기가 뛰쳐나왔던 실험동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진귀한 광경에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도 탄성을 한 번씩 흘렸다.

플로리아가 만들어낸 화염 회오리가 가라앉는다.

레이는 금이 쩍쩍 간 검을 젠킨슨에게 반환했다.

"실력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마스터."

"그 아가리 좀 어떻게 하렴, 종자야."

젠킨슨은 떫은 얼굴로 검을 받아들었다.

한편, 뒤에서 대기하다 플로리아를 호위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던 리옹은 지면에 길게 이어진 와일드호그의 혈흔을 보며 짧게 감탄했다.

"아벤시오와 멘데스의 합공을 이겨냈다고 하더니, 가히 뛰어난 기사로군요. 검기로 저만한 파괴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글쎄. 저게 과연 젠킨슨의 경의 작품이려나."

부채를 펼친 채 쿡쿡 웃은 플로리아가 식어가는 열기를 느끼며 앞으로 걸었다.

레이가 뒷목을 잡은 채 알레시아를 올려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정수리를 쾅쾅 내려치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아 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이를 갈아낸 레이가 알레시아에게 속삭였다.

"제가... 나대지 말랬죠...?"

"크흠."

젠킨슨이 헛기침을 했다.

레이가 감정을 추스르며 문장을 고쳤다.

"아가씨, 위험한 행동은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으음, 알겠느니라..."

알레시아가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실험에 의해 강화된 와일드호그의 저력은 알레시아의 예상을 상회했다.

괜히 펜리르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본 알레시아가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교수님이 사라졌구나. 감사 인사는 받을 줄 알았거늘."

"남 함부로 돕는 거 아니에요. 잘못하면 없는 죄도 뒤집어쓴다니까요."

"네가 그리 말하니 굉장히 설득력이 떨어지는구나아..."

알레시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틱틱댔다.

그때 플로리아가 책을 한가득 품에 안고 레이에게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자, 네가 놓고 갔던 책이야."

"아, 감사해요. 하마터면 책이 상할 뻔했네요."

"나는 그만 가볼게. 지금은 스케줄이 있어서. 남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따 오후에 하자."

"그럼 점심 식사 마치시고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둘을 알레시아가 번갈아 쳐다봤다.

뭐지? 언제 둘이 이렇게 친해졌지?

그러고 보니 근래 들어 부쩍 레이가 플로리아의 이름을 입에 담는 횟수가 늘어났다.

뒤늦게 위기감을 느낀 알레시아가 다급히 물었다.

"프, 플로리아! 설마 나의 기사를 탐내는 건 아니겠지?"

"흐음."

눈을 가늘게 좁힌 플로리아가 레이를 마주 봤다.

자기 어깨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레이의 정수리를 손으로 두들겨본 플로리아가 싱그럽게 웃었다.

"잡아먹기엔... 아직 좀 이르지?"

"으그극..."

레이가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알레시아가 플로리아를 붙잡아 끌며 화를 냈다.

"안 된다! 탐내지 말거라! 나는 플로리아를 친구라고 믿었거늘 어찌 배신하느냐!"

"농담이야, 농담."

알레시아는 정령의 힘까지 빌려 억지로 플로리아를 레이에게서 멀리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은 레이가 책을 가득 들고 몸을 돌렸다.

얼마 뒤, 황실 마탑은 알레시아와 젠킨슨에게 책임자의 사과와 함께 기사 하나를 중무장시킬 수 있는 금액을 보상으로 건넸다.

깔끔한 일 처리였다.

*

우연인가, 아니면 겁박인가.

와일드호그 탈출 사건이 발생한 지 사흘 후.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붉게 물든 로필렌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제어하지 못한 실험체가 탈출하는 건 분명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다.

허나 로필렌은 이번 일을 우연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 와일드호그는 내가 실험동을 지날 때를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왔다고!'

한 달 안에 징계위원회에서 탈출한 와일드호그의 실험을 주도했던 교수의 징계 수위를 결정할 터다.

'경징계로 끝나겠지.'

누군가 뒤를 봐주었기에 벌인 짓일 테니까.

만약 중징계를 받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뒤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겉으로는 철저하게 우연을 가장하겠다는 의도일 테니까.

로필렌은 이번 사고가 자신을 노린 테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빨리 꺼지란 소리인가? 황실 마탑에서?'

목숨을 노린 테러는 아니다.

로필렌의 목숨을 빼앗기에 이성 잃은 와일드호그로는 부족했다.

마탑에서 계속 버티고 있다간 더 큰 위협을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협박에 가까웠다.

'젠장, 젠장!'

로필렌은 복도를 걸어가며 손톱을 깨물었다.

이미 손가락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안전한 개인 연구실에 박혀 있고 싶었지만, 침묵이 내려앉은 공간에 홀로 있다 보면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하곤 했다.

로필렌은 자각했다. 자신은 미쳐가고 있었다.

달칵!

사람 많은 다른 연구실은 전전하다 쫓겨나길 반복해, 12시간 만에 다시 개인 연구실로 돌아왔다.

로필렌이 개인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침입자를 쫓아내기 위해 오벨리스크의 공간 왜곡장을 모방해 구현해 놓은 장소였다.

이곳은 안전했다.

그리 생각하고 개인 연구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한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레이가 머쓱하게 웃었다.

*

황실 마탑 유학생들은 교수와 면담 약속을 잡을 수 있다.

레이는 플로리아가 잡아준 면담 시간에 맞춰 로필렌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허나 약속 시각이 지나도록 로필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연구실 안으로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열려 있네?"

마법사는 병적으로 보안에 집착한다.

만약 정말 중요한 연구가 여기서 진행되고 있었다면 분명 침입이 불가능했거나, 침입한 후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레이는 연구실을 둘러보며 사방에 늘어져 있는 종이와 그 위에 휘갈겨져 있는 수식을 살폈다.

'내용을 모르겠네.'

이 세계는 마탑이나 학파마다 같은 뜻을 가진 기호도 다르게 쓰고는 했다.

고개를 설래설래 저은 레이가 권능을 사용했다.

암호처럼 보였던 기호들이 자연스레 해독된다.

"흠..."

로필렌이 무엇을 연구했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종이에 쓰여있는 기호들은 마법학이 아닌 순수 수학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레이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어... 다 아는 내용이네?"

더 나아가 로필렌이 어떤 개념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며, 잉크가 마른 지 얼마 안 된 것을 보아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들어오면 안 되는 곳에 들어온 것 같은데.'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연구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레이가 머쓱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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