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 마탑 (3)
61화
"..."
레이는 굉장히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결계와 비슷한 무언가가 외부인을 일정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문제는 이걸 자신이 어떻게 통과했느냐다.
'오벨리스크 보안 시스템에 오류가 생겼거나, 내 신원이 관리자 등급으로 잘못 등록되었거나, 누군가 의도를 지니고 통과시켜주었거나, 그도 아니면...'
오벨리스크 내부에 펼쳐진, 사람들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힘에 대해 자신이 강력한 내성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었다.
레이는 골치가 아팠다.
이제야 며칠 전에 오벨리스크 내부에서 마주친 마법사가 보였던 반응이 이해가 갔다.
출입이 불가한 공간에 웬 기사 종자 하나가 천연덕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그야 어처구니없을 만했다.
'당시엔 그냥 보내줬다고 해도 분명 흥미를 가질 텐데...'
지금쯤 열심히 뒷조사를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당장은 다행이긴 해.'
레이가 오벨리스크의 출입이 금지된 지역을 거닐었던 사실이 공론화됐다면 진즉 구금되었을 수도 있었다.
허나 레이를 보았던 마법사가 입을 다문 것은, 호의가 아닌 음습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았다.
레이는 잠시 잠깐 마법사가 일을 벌이기 전에 먼저 제거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미친 짓이지.'
여기는 황실 마탑 한가운데였다.
마법사 살해 사건이 발생하면 살해당한 마법의 위상과 관계없이 제국은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 머리 아프네.'
그냥 숙소에 조용히 박혀있다가 유학 기간이 끝나고 일행들 사이에 끼어 도망가는 게 가장 안전하게 생각되긴 했다.
입술을 지긋이 씹은 레이가 다시 플로리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기서 더 들어가서 다른 마법사를 마주쳤다간 일이 더욱 복잡해진다.
오벨리스크 안쪽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 목적과 준비도 없이 다짜고짜 고개를 들이밀 수는 없었다.
츠즉!
레이가 공간을 왜곡시키고 있는 어떤 '선'을 넘으려는 순간.
어두웠던 복도에 한 줄기 빛이 떨어졌다.
레이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복도 구석에 빛 무리가 집약되더니 흐릿하게나마 사람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얼핏 홀로그램을 떠올리게 하는 그 빛 무리가 레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계승자여.]
레이의 눈가가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탑을 오르지 않고 무엇을 하십니까?]
"..."
고민은 길지 않았다.
레이는 빛 무리를 무시한 채 황급히 플로리아를 향해 몸을 던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플로리아가 갑자기 허리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깜짝 놀라 한발 물러섰다.
"어머, 어디 갔었던 거니?"
"어, 음..."
레이가 남들은 인식하지 못하던 복도를 되돌아봤다.
사람 형상의 빛 무리가 어느새 허공으로 증발하고 없었다.
"...멍하니 있다가 뒤처졌었어요."
"그랬니?"
대충 납득한 플로리아가 다시 레이와 나란히 출입구를 향해 걸었다.
레이는 바싹 긴장한 채 다리를 움직였다.
빠르게 오벨리스크를 벗어나야 했다.
출입구에 다다른 레이가 항상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출입구 옆에 걸린 거대한 초상화를 바라봤다.
"아가씨, 저 초상화의 모델이..."
"젊은 시절의 리실로테 님이시라고 해."
"아, 시발..."
레이가 낮게 욕설을 흘렸다.
*
홀로그램이 운운한 계승자.
레이가 당장 예상 가는 건 '하르시아의 계승자' 하나뿐이었다.
리실로테 또한 과거 하르시아와 친분이 있었다고 하니 하르시아의 후예를 위한 어떤 안배가 있었다고 해도 이상치는 않았다.
'코어를 알아본 건가?'
레이가 하르시아의 혈족은 아니니, '계승자'의 여부를 판별할 수단이 있었다면 코어 하나였다.
레이는 심란함을 감추기 위해 애썼다.
리실로테가 공간검의 후계자를 위해 작거나 큰 안배를 준비해두었다는 것.
일견 레이에게 좋아 보이는 소식이었다.
허나 그 안배를, 과연 조용하고 은밀하게 전달받을 수 있을까?
하르시아는 황족이었고, 누군가 정상적인 절차로 공간검을 계승 받았다면 분명 황실의 비호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리실로테가 계승자에게 준비해둔 안배의 종류가 무엇이든 황실이나 마탑 관계자가 이를 파악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만약 안배가 계승자에게 전달되는 순간 황실에 알림이 가도록 설정이라도 되어 있다면 리실로테의 안배에 손을 대는 건 미친 짓이었다.
'아까 본 그 홀로그램, 사람이 다루는 게 아니었다면 일종의 AI와 유사한 존재일 텐데... 설마 다른 마법사를 찾아가 계승자 운운하는 건 아니겠지?'
이래저래 오벨리스크에 찾아가지 말아야 할 이유만 쌓이고 있었다.
떫은 표정을 한 레이에게 플로리아가 물었다.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니?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
"방금 전에 귀신을 봐서요."
"귀신?"
"600년 묵은 귀신이 갑자기 친한 척 말을 걸더라고요."
"...혹시 열이라도 있니?"
"열은 없고, 요즘 고민이 좀 많아서 머리가 아프긴 하네요."
"괜찮다면 내가 상담해줄까?"
레이가 플로리아를 돌아봤다.
루나에 관해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허나 회유를 시도해볼 마법사 명단을 추리기 위해선 플로리아의 조력이 절실했다.
원래 알레시아의 도움을 받아볼까 싶었지만, 솔직히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영지에 등용할 수 있는 마법사 님을 찾고 있어요."
"흠..."
플로리아는 부채를 펼친 채 레이의 설명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레이는 자기에게 필요한 마법사의 조건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플로리아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백작령에 오랜 기간 머물며 평민에게도 마법을 가르쳐줄 실력 좋고 입 무거운 마법사를 찾는구나?"
레이가 루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플로리아는 레이의 목적을 꿰뚫었다.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네."
조건이 말이 안 됐다.
어설픈 마법사라면 재화를 가득 안겨 백작령에 붙들어 놓고 애들 교육을 시킬 수 있겠지만.
황실 마탑에 발을 들여놓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마법사를 레이의 바람대로 제국 구석으로 끌고 가 멋대로 다루는 건 불가능했다.
약점을 잡아 협박한다 해도 고분고분 따를 마법사는 몇 없었고 주위의 의심을 살 게 분명했다.
"실력 좋은 마법사가 너무 장기적인 계약을 맺거나 계약 기간이 끝나고도 특정 지역에 묶여 있다면 마탑에서는 사람을 보내 강압적인 계약 각인 절차가 이루어지진 않았는지 확인하고는 해."
계약 각인이 악용될 상황에 대해선 마탑도 대비하고 있었다.
물론 정령을 상대로 노예 계약을 맺을 수 있으리란 건 아무도 예상치 못했지만.
"급을 낮추는 게 좋을 같아. 당장은 네가 원하는 수준의 마법사를 장기적으로 고용하는 건 힘들 거야."
"역시 그런가요?"
"음... 잠깐만."
고민하던 플로리아가 천천히 입을 뗐다.
"네가 말한 기준에 적합한 교수님이 한 분 계시기는 해."
"?"
눈을 크게 뜨는 레이를 보고 미소 지은 플로리아가 말을 이었다.
"로필렌 교수님이라고, 학문적인 탐구를 중시하시는 분이야. 마법 이론에 관해서는 웬만한 고위 마법사보다 통달하셨지만, 경지는 아직 4서클에 머물고 계시지."
"황실 마탑에 그런 분은 많으시잖아요?"
서클을 올리는 것보다 학문적인 탐구를 중시하는 마법사들.
'이론 마법학자'로 불리기도 하는 그들은 황실 마탑의 주축 중 하나였다.
강압적인 수단을 써 그들 중 하나를 빼내 온다 해도 황실 마탑의 의심을 사버리면 얼마 못 가 들킬 터였다.
"후후, 네게 필요한 건 '아쉬운 게 존재하는 마법사' 아니니? 그래야 설득하기도 쉽고, 설득한 후에도 남들을 쉬이 납득시킬 수 있을 테니."
"로필렌 교수님이 그 조건에 부합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유학을 온 지 얼마 안 된 나조차 소문을 익히 접할 수 있을 만큼, 유명하신 분이야.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
"...'스스로'요?"
어째 뉘앙스가 이상하다.
피해망상 환자에 관해 얘기하는 것 같지 않은가.
잠시 침묵한 플로리아가 부채를 접었다.
"나도 잘은 모르겠어. 그 교수님이 정말로 피해 망상적인 사고에 갇혀 계시는지, 아니면 정말 위협에 직면하신 건지."
"하긴 몇 번 만나보지도 못하셨을 테니까요."
"두 번 정도 뵈었어. 마법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는 만큼 많이 까칠한 성격이셨지. 어쨌든."
플로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레이를 마주 봤다.
"후자라면, 네가 회유하기 괜찮은 대상이지 않니? 근래 들어 실적이 부족하긴 하지만, 실력은 정말 뛰어나신 분이야. 물론 그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누군가와 반목하는 위험을 감수해야겠지."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을 대가로 로필렌을 회유할 수 있다면 큰 마찰 없이 협의에 이를 수 있었다. 남들의 의심도 피할 수 있고 말이다.
'문제는 로필렌이 누구에게 원한을 샀냐는 건데.'
너무 거물이면 안 됐다.
허나 오시리스 가와 필립스 가가 같이 나서서 로필렌의 신변을 보장해준다면 웬만하면 위협을 끊어낼 수 있을 터였다.
'정령 족쳐준 대가로 이 정도 요구는 해도 될 것 같은데...'
레이가 부탁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굉음과 함께 커다란 화염이 눈앞의 건물에서 터져 나왔다.
*
"식사는 하셨습니까?"
"..."
친한 척 말을 걸어오는 지노 교수를 로필렌은 외면했다.
지노는 과거부터 마법 이론에 관해 심도 있게 토론도 나누던 동료였지만, 이제 로필렌은 지노에게 적의밖에 느끼지 못했다.
무시 당한 지노가 혀를 차는 소리를 뒤로하며.
로필렌은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로브를 더 깊게 썼다.
'빌어먹을 것들...'
중요한 자료가 분실되거나 진행하던 실험이 누군가에 의해 방해받기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흘렀다.
혹자는 로필렌이 본인의 실수 때문에 실험을 망쳐놓고 피해망상에 빠져 헛소리를 한다고 떠들었다.
그 주장의 진위야 어떻든 간에, 근래 로필렌의 실적이 크게 부진한 것은 사실이었다.
로필렌은 이미 입지를 많이 상실했고, 얼마 안 가 황실 마탑에서도 방을 빼야 할 확률이 컸다.
실적이 좀 떨어지더라도 5년은 넉넉히 교수의 재기를 기다려주었던 마탑의 관행을 감안하면, 분명 특정 세력이 황실 마탑에 압박을 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체 그 새끼가 연구하던 게 뭐길래!'
로필렌은 과거부터 마법 이론에 푹 빠져 있었고, 때문에 다양한 학자들과 관계를 쌓아 놓고 지식을 공유했다.
그들 중엔 아토르란 수학자도 있었다.
수학은 마법을 수월하고 정확하게 발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였다.
로필렌은 수학에 관해 굉장히 오랫동안 아토르와 의견을 나누며 지내왔다.
그리고 아토르가 특정 개념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이후.
연락이 끊겼다.
얼마 안 가 로필렌은 아토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의 연구가 아깝긴 했으나 처음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로필렌을 감시하는 시선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남들은 그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리 느낀 것이라 했지만, 로필렌은 확신했다.
감시의 시선이 많아진 뒤부터 누군가 방에 침입하거나 실험을 방해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그 여파로 실적이 떨어지니 곧장 황실 마탑을 나가라는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누구나 인정할 만큼 괜찮은 학문적 성과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냉정한 처사였다.
로필렌은 자신이 황실 마탑을 벗어나는 순간 살해당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그토록 갈망했던 리실로테 레코드의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고 죽어야 했다.
청색 마탑에서 관리 중인 건물을 나와 본인의 연구실을 향해 걸어가는 로필렌의 눈에 광기가 번뜩였다.
그 찰나.
바로 옆 실험동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폭발이 로필렌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