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60화 (60/446)

황실 마탑 (2)

60화

황실 마탑에서 정교수 직위를 지니고 있는 마법사, 로필렌은 레이가 사라지고도 오랜 시간 제자리를 지켰다.

현 위치는 오벨리스크 초입이기에 공간 왜곡장의 강도는 비교적 약한 편이었다.

레이가 고위 마법사거나 강력한 아티펙트를 지니고 있다면 공간 왜곡장을 뚫어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허나 오벨리스크 안에서 마법을 펼치거나 아티펙트를 사용하면 무조건 감지당한다.

레이가 만약 함부로 수작을 부렸다면 진즉 잡혔을 것이다.

'정말 정체가 뭐지?'

특정 세력이 자본과 정보를 모아 오벨리시크의 보안 시스템을 농락해 레이를 첩자로 잠입시켰을 수도 있겠다만.

인기척이 들렸음에도 태평하게 복도를 산책하고 있던 레이의 모습을 상기하면 믿기 힘든 가정이었다.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른다는 태도였는데...'

그게 기만을 위한 연기가 아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본인도 모르게 누군가의 실험 도구로 쓰였거나, 공간 왜곡에 대해 말도 안 되게 강한 내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일 수도 있었다.

양쪽 다 믿기 힘든 가설이었으나 이미 로필렌은 '현상'을 목격한 후였다.

'반드시... 얻고 싶은데.'

욕망이 일었다.

내부자인 로필렌이 레이처럼 공간 왜곡장을 기만할 수단을 갖춘다면 오벨리스크 대부분의 구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어쪄면, 높으신 분들이 꽁꽁 싸매고 있을 '리실로테 레코드'와 접촉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살짝 어깨를 떤 로필렌이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당장은 흥분하지 말고 저 스콰이어에 대해 알아봐야 했다.

배경과 실력을 파악하고, 공간 왜곡장을 기만한 기술의 실체를 확인해야 했다.

협박 혹은 회유는 그다음이었다.

로필렌은 몸이 다는 것을 느꼈다.

남들이 눈독을 들이기 전에 먼저 차지해야 한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으나, 리실로테 레코드는 목숨을 걸 가치가 있었다.

'어차피 이미 간당간당한 목숨, 판돈을 더 올린다 해서 달라질 게 있나.'

짙게 내린 다크서클 사이로 탐욕 어린 총기가 반짝였다.

마법학에 관해서 만큼은,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로필렌이 레이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

레이가 오벨리스크에 들르고도 며칠이 더 지났다.

레이의 걱정과 다르게 알레시아는 빠르게 교우 관계를 넓혀가며 충실한 유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알레시아와 함께 몰려 다니는 귀족 영애들을 훔쳐본 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알레시아는 수상할 정도로 동성 친구를 잘 사귀었다.

귀족 영애들의 성격이 부드러워 알레시아를 쉽게 받아들여 준 것일까?

'그럴 리가.'

유학 오자마자 어쭙잖은 정령 두 마리 사역한다고 교수들의 관심을 쏙 뺏어간 알레시아를 과연 다른 귀족들이 좋게 봐주겠는가.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대체 무슨 떡고물을 던져줬기에 저리 또래 친구들을 끌고 다니나 고민하던 레이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상념을 털어낸 레이가 숙소를 찾아 들어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며칠 동안 마법서를 통해 서클에 관한 지식을 조금 더 보충할 수 있었다.

레이는 이론을 더 보강하기 전에, 자기 몸을 점검해볼 생각이었다.

"자... 정신 차리고 해보자고."

레이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레이는 몇 년 전 코어의 마나량을 조금 늘리려 했다가 죽을 뻔했던 기억을 상기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체험이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낸 레이가 호흡을 골랐다.

코어는 심장 안에 자리한다. 마나량을 늘리겠다고 코어를 무작정 팽창시킬 수는 없다.

결국 체내의 마나량을 늘리기 위해선, 코어를 더욱 고밀도로 압축시켜야 한다.

이를 악 물은 레이가 심장의 코어를 억지로 압축시켰다.

끄드드드드득!

코어가 압축된다.

레이가 하고자만 하면, 당장도 코어를 쥐꼬리 뒤에 숨길 수 있을 만큼 고밀도로 압축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압축한 다음이었다.

끼기긱!

코어가 요동친다.

고밀도로 압축된 코어일수록 보통은 더 안정화되기 마련인데, 레이의 것은 거꾸로였다.

밀도가 높아질수록 그 특유의 성질을 더욱 강렬하게 드러냈다.

츠즈즉!

코어가 몸을 담은 차원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심층 차원에 발을 걸친 코어가 맞닿은 공간을 괴리시키며 주변을 일종의 아공간으로 변화시킨다.

심장 안에서 그 지랄을 해대니 몸뚱이가 버텨낼 리가 없었다.

"크륵!!"

핏물을 뱉어낸 레이가 곧장 압축된 코어를 풀었다.

가슴 주변이 뜯어질 것처럼 지끈거리며 심장 박동이 뛸 때마다 격통이 내달렸다.

"끄으으으으윽....!! 뒈질 것 같네, 진짜...!"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몇 년 전에 비해 변한 게 없었다.

간신히 뒤로 고꾸라지는 걸 막은 레이가 코어를 회전시켜 전신에 마나를 순환시켰다.

차츰 안정을 찾은 레이는 순환하던 마나를 오른쪽 팔뚝에 집약시키기 시작했다.

근육이 마나에 의해 강화되며 팔뚝에 힘이 넘쳤다.

허나 마나의 밀도가 계속해서 높아지자.

시푸르게 빛나던 팔뚝의 경계가 어느 순간 흐릿해졌다.

퍼버벅!!

살갗이 터져나가며 사방에 피가 튀었다.

레이는 피가 쏟아지는 팔뚝을 부여잡은 채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갈았다.

"미치겠네."

팔뚝 주위로 공간 괴리 현상이 나타나며 발생한 참사였다.

금속은 이런 공간 괴리 현상을 버틸 수가 있었다. 안정되고 정지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피가 흐르고 살아 숨 쉬는 세포로 구성된 신체는 공간이 괴리되며 발생하는 충격을 버티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터져 나가는 것이다.

"아니 무슨 마나 성질이 이따위야?"

이건 뭐 몸속에 폭탄을 집어넣고 생활하는 격이었다.

까딱 실수해 신체 일부에 과하게 마나를 집약시키면 바로 터져나간다고 보면 됐다.

물론 거진 검강에 가까운 밀도로 마나를 집약시켜야했지만,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아예 전신에 한꺼번에 고밀도 마나를 불어넣으면 버틸 수 있다고는 하는데...'

당장 지닌 소량의 마나로는 꿈도 못 꿀 시도였다.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황천길 직행이었고 말이다.

레이는 몇 년째 자신이 지닌 코어의 특수성과 관련된 문제를 고민했다.

과연 심장 주위에 만든 서클이 일종의 컨트롤러 역할을 해 코어를 제어해줄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장족의 발전을 이룰 수 있을 테지만.

부작용이라도 생긴다면 오래 사는 건 글렀다고 봐야 했다.

'굳이 서클을 만드는 도박을 해야 할까?'

자기 목숨을 판돈으로 올리는 건 레이에게 익숙했다.

허나 본인이 강해지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행위는 레이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

레이는 어디까지 영웅이나 악당의 운명을 타고난 재능 있는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목표였다.

목숨 걸고 강해져서 마왕을 직접 때려잡는 게 목표가 아니란 의미다.

레이가 고민에 잠겨 있는 사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피바다가 된 방을 확인한 젠킨슨이 미간을 찌푸렸다.

"침입자라도 있었던 거냐?"

"아니요. 수련 좀 하느라."

"수련을 왜 방안에서 하는데?"

"황실 마탑에는 기사가 이용 가능한 비공개 수련장이 없더라고요."

"해도 좀 얌전히 하던가. 피가 안 묻은 곳이 없네. 이건 다 어떻게 치우자고?"

"어쩔 수 없네요. 시종들 불러서 시키죠."

레이가 가볍게 답했다.

이게 다 세상 구하자고 하는 짓인데, 시종 좀 부려 먹는 걸 미안해할 생각은 없었다.

*

"빙결, 빙결 마법..."

다시 한 번 오벨리스크에 출입한 레이가 마법서가 모여 있는 도서관에 들렀다.

역사서에 하르시아는 한기를 몰고 다녔다고 쓰여 있었다.

'하르시아가 한기를 몰고 다닌 것이 그저 빙결 마법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종의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레이는 힌트를 얻기 위해 빙결 마법의 기초를 담고 있는 마법서를 찾았다.

"저기 있네."

마법서가 팔이 다을락말락한 곳에 꽂혀 있었다.

손을 위로 뻗어보니 조금 모자랐다.

레이가 점프를 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쭉 뻗어 책을 대신 뽑아주었다.

"이걸 찾니?"

플로리아가 마법서를 내밀었다.

레이가 내심 떫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받았다.

"감사해요."

"감사한 얼굴이 아닌데?"

"제 표정이 원래 험악해서요."

성장기, 빌어먹을 성장기가 빨리 찾아와야 했다.

빙결 마법서가 대부분 구석 상단에 박혀 있었기에 레이는 계속 플로리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굴욕 속에서 마법서의 대여 절차를 마친 레이가 플로리아와 함께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이거 필사해서 가져갈 수 있을까요?"

"설마. 그래도 꼭 필요하다면 나나 알레시아의 도움을 받으렴. 기본서 몇 권쯤은 필사해서 가져간다 해도 눈 감아줄 거야."

"그렇군요."

루나의 스승을 구하지 못한다면 책이라도 몇 권 필사해야 했다.

플로리아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레이에게 물었다.

"호기심이 많구나? 기사인 네게는 활용 못 할 학문일 텐데."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어요. 마법이란 게 신비롭고 강력한 학문이잖아요?"

"후후..."

산뜻하게 웃음을 흘린 플로리아가 레이의 책을 한 권 대신 들어주었다.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도 돼. 이래 봬도 마법에 있어선 꽤 박식하단다?"

"으음..."

잠시 고민한 레이가 먼지가 쌓인 조금 쌓여 있는 책을 살피며 물었다.

"빙결 마법이 비주류에 속하나 보죠?"

"원소 마법 중에 인기가 없는 편이긴 해. 다른 원소 마법에 비해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져서요?"

"어머, 정답이야. 어떻게 알았니?"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때려 맞춘 것이었다.

열역학적인 측면에서 난방보다 냉방이 에너지 효율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마법에다 진심으로 공학 지식을 들이댈 생각은 아니었지만, 잠깐 옛 추억이 떠올라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레이를 보며 플로리아가 말을 이었다.

"화염 마법을 빙결 마법으로 식히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마나가 필요해. 화염 마법으로 공격을 받았을 때는, 동일한 계통의 화염 마법을 쏘아내 위력을 상쇄시키는 게 효율적이야."

"그렇군요."

"물이 흥건한 전장이라면 빙결 마법을 더 위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겠지만, 결국 환경의 제한을 받는다는 의미니까."

"인기가 없을 만 하네요."

"마법에 무지한 사람들은 빙결 마법을 얼음 마법이라고 부르며 얼음을 생성하는 마법이라고 착각하고는 해. 하지만 그 본질은..."

"정지겠죠."

"정확해."

플로리아는 살짝 당황했다.

레이가 출신에 비해 굉장히 능력 있고 똑똑하다는 건 알았지만.

예상보다도 굉장히 예리하게 마법의 본질을 짚어나가고 있었다.

이미 누구한테 마법에 관한 지식을 배운 걸까?

플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레이가 이미 배운 내용을 가지고 통찰력 있는 척 허세를 부리는 인간이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부채를 펼쳐 작게 바람을 일으키는 플로리아에게 레이가 부탁했다.

"아가씨, 궁금한 것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빙결 마법으로 서클이나 코어도 '정지'시킬 수 있나요?"

"...어려운 질문이네."

잠시 고민한 플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할 거야. 마나는 일반적인 물질과 다른 성질을 지녔고, 서클과 코어는 특히 더 그러하지만... 제자리에 고정쯤은 시킬 수 있을 거야."

"그렇군요..."

레이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하르시아가 지나간 전장에 항상 한기가 휘몰아쳤던 이유.

어쩌면, 하르시아는 적을 해치기 위해 빙결 마법은 운용하게 아닐지도 몰랐다.

체내의 코어를 제어하고 날뛰는 마나를 억지로 고정시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서클과 마법의 운용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점점 더 자기 생각에 빠져가는 레이를 플로리아의 목소리가 일깨웠다.

"레이! 어디 갔니?"

"...?"

레이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레이 곁에 있었던 플로리아가, 10 m가량 떨어진 곳에서 레이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레이가 잠시 눈가를 좁혔다.

플로리아와 레이는 분명 가까이 붙어 직선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헌데 잠깐 사이에 이토록 거리가 벌어져 버렸다.

레이가 복도를 걷는 다른 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들은 전부 직선으로 걸어가는 듯했지만, 주기적으로 몸의 각도가 어색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뭐야...?'

레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 하나 없는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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