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59화 (59/446)

황실 마탑 (1)

59화

플로리아와 관련된 정령 문제가 해결된 이후.

알레시아와 플로리아의 일행은 순탄하게 황실 마탑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작은 해프닝도 있었고, 알레시아가 마차 대신 펜리르를 타고 이동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젠킨슨의 속을 썩이기도 했다만.

어쨌든 별 탈 없이 황실 마탑 인근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오..."

저 멀리, 150 m가 넘게 솟아올라 있는 탑을 바라보며 레이가 낮은 탄성을 흘렸다.

황도와 가까워질수록 유동 인구가 증가함은 물론 건물의 양식과 종류까지 급격히 변하였는데, 흡사 수백 년의 시간이 빠르게 흐른 느낌이었다.

'여기 문명 수준도 만만치는 않네.'

마나와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다.

특정 영역에 있어 21세기 지구에서도 구현 못 할 현상을 손쉽게 실현하여 레이를 놀랍게 만들고는 했다.

'하지만 발전은 훨씬 느리겠지.'

레이의 전생에 비해 정보·기술의 접근성과 양극화가 훨씬 심한 세계다.

지구보다 인구 또한 부족하니 발전이 훨씬 더딜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법과 관련된 지식은 권력과 직결되어 있어 서로 독차지하기 위해 으르렁대니, 몇백 년 동안 제자리걸음이나 다름없는 꼴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레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알레시아가 펜리르 위에서 신나서 외쳤다.

"저기가 바로 황실 마탑이로구나!"

[크릉!]

펜리르가 알레시아의 감탄에 호응했다.

펜리르는 이제 익숙하게 바람 안장을 만들어 알레시아를 안전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저 탑은 정말로 높구나. 무얼 하는 곳이냐?"

"탑의 이름은 '오벨리스크'. '리실로테 레코드'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곳이야."

플로리아가 답변을 해주었다.

일행끼리 자잘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황실 마탑에서 마중이 나왔다.

황실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는 일행 전부의 피부 위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마법 각인을 새겨주었다.

황실 마탑에 정상적으로 출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소지하고 있어야 하는 각인이었다.

황실 마탑을 넓게 둘러싸고 있는 결계를 통과한 뒤 한 번 더 신원 확인 절차를 거쳤다.

신원 확인을 끝낸 레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각기 다른 세력과 역할을 지닌 건물이 여기저기 세워져서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부지 중앙을 차지한 '오벨리스크'를 제외하면, 황실 마탑은 거대한 대학 캠퍼스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기숙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신원 확인 절차가 전부 끝난 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는 유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안내되었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는 같은 방에서 공동생활을 해야 했는데, 이것도 나름 귀족이라고 대접해준 것에 가까웠다.

시종과 시녀들은 유학생 기숙사와 조금 떨어져 있는 건물에서 하나의 방을 6명이서 사용해야 했다.

"플로리아!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기숙사에 도착한 알레시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 방을 둘러봤다.

시중드는 사람 하나 없이 지내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다른 말로 하자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치 볼 것 없이 행동할 기회를 얻었다는 의미였다.

들뜬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본 알레시아가 곧장 시종이 두고 간 가방 하나를 풀어냈다.

가방에 들었던 옷가지를 뭉텅뭉텅 꺼내는 알레시아를 플로리아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뭐해?"

"잠시 기다려 보아라. 으흐흐흐... 이걸 몰래 챙기느라 참으로 고생했도다!"

"...?"

음침한 웃음을 흘리는 알레시아를 플로리아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옷을 모두 꺼낸 알레시아가 천으로 둘둘 말아 은폐해놨던 서적 몇 권을 가방에서 빼냈다.

잠시 감격스러운 표정을 한 알레시아가 책상 위에 책을 내려놓으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아끼는 서책들이니라! 남에게 비밀로 한다면 플로리아에게도 빌려주도록 하마!"

플로리아가 눈을 아래로 내려 서책들의 제목을 살폈다.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

[짐승을 주웠다]

[로피탈의 50가지 그림자]

"?"

생전 처음 보는 서책들의 제목에 플로리아가 얼을 타고 있자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온 알레시아가 플로리아의 품에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을 안겨주었다.

"일단 읽어보고 감상을 들려다오! 내가 생각하기에 플로리아도 마음에 들어 할 것 같구나!"

"흠..."

플로리아가 호기심을 가지고 책의 첫 장을 펼쳤다.

플로리아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다.

*

기사들의 경우 기사와 종자가 같은 방을 쓰게 됐다.

젠킨슨과 함께 짐을 풀어놓은 레이가 침대에 드러누운 채 기지개를 켰다.

태평해보이는 레이와 다르게 의자에 앉은 젠킨슨이 고민에 빠져 눈살을 찌푸렸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숙소가 이리 분리되어 버리면 아가씨 곁을 지키기 쉽지 않겠구나."

알레시아가 기숙사 바깥으로 외출할 때는 밀착 호위가 가능했지만 기숙사 안까지 따라갈 수는 없었다.

젠킨슨이 곤란해하자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기숙사 안에서 문제가 생기긴 힘들 거예요. 거리 관리하는 인원이 몇인데요."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으냐."

"어지간한 위협은 아가씨 혼자 타파할 수 있으실 겁니다. 누구 덕분에 중급 정령이랑 중상급 정령을 자기 손발처럼 부릴 수 있게 되셨잖아요?"

뻔뻔한 레이의 자랑에 젠킨슨이 실소를 터뜨렸다.

레이의 말마따나 충성스러운 중급 정령과 중상급 정령이면 상황에 따라 기사보다 나았다.

알레시아는 아직 2서클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으나 실질적으론 4서클에 비견 되는 전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많이 곤란할 뻔했다."

"뭐, 은혜를 입은 만큼 하는 거죠."

낄낄 웃은 레이가 다시 허리를 일으켰다.

며칠 간은 여행 동한 쌓인 피로를 풀 겸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지만 마냥 마음을 놓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여긴 마법사들 천지인 마탑 한가운데였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자들 대부분이 마법사라 생각하니 절로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우리 아가씨가 그다지 환영받지는 못하겠죠?"

"그렇겠지. 가문도 다른 이들에 비해 한미하고 아주 대단한 재능을 타고나신 것도 아니니."

황실 마탑에는 유학생들을 위한 커리큘럼이 몇 가지 준비되어 있었다.

황실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진행하는 마법학 교수들이 시간을 할애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구조에 가까웠고, 진정 배움을 원하는 학생들은 따로 교수들에게 연락해 거리를 좁혀야 했다.

교수들 또한 학생들의 출신과 자질을 고려해 학생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지식을 익히고 인맥을 넓혀갔다.

알레시아의 경우 가문의 힘도 약하고 재능이 유별나게 눈에 띄지도 못하니 교수들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허나 젠킨슨과 레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정령의 존재였다.

알레시아가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 몇 개를 참관한 이후.

교수들 간에 비슷한 내용의 대화가 한 번씩 돌았다.

"선생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유학생 말입니다, 정령을 두 마리나 사역한다는데요?"

부교수 직급에 머물고 있던 와우트가 식사를 하다 말고 입을 뗐다.

수저를 내려놓은 정령학 교수 지노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게 뭐 대단하다고. 황실 마탑에서 정령 몇 마리 사역할 수 있는 인재는 쌔고 쌨잖아? 연구할 시간도 부족하니 그냥 신경 꺼."

"네추럴이 아니라 모노클이라는데요?"

"그걸 왜 이제 말해, 등신아!!"

네추럴이 아닌 모노클이 정령을 사역하는 경우는 굉장히 희귀했다.

소식을 들은 황실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이 알레시아에게 관심을 비쳤다.

갑자기 어마무시한 수의 러브콜이 알레시아에게 쏟아졌다.

레이가 알레시아를 불러다 앉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알레시아, 한동안 마법사들이 건네는 제안은 전부 다 거절해."

"알겠도다!"

"특히 뭐 어떤 실험을 같이 하자고 하거나 다른 마탑에 들려달라고 하거나 이러는 새끼들한테는 가까이 가지도 말고."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알아서 하겠다!"

목에 힘을 잔뜩 준 채 뻗대는 알레시아의 정수리를 레이가 힘껏 내려쳤다.

콩!

"아윽!"

"야이씨, 지금 네가 잘나서 인기 있는 줄 알아? 정신 안 차릴래?"

정수리를 쓰다듬는 알레시아를 보며 플로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플로리아는 커버를 갈아 끼운 책을 읽어가며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알레시아는 내가 옆에서 잘 지켜보고 있을게.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모너클이 정령을 사역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까."

굉장히 드문 확률이긴 하나 독특한 취향을 가진 정령이 가끔씩 모너클과 계약을 맺고는 한다.

"당장은 마법사들이 알레시아가 특이한 체질이나 비전을 가지고 있지는 않나 의심하고 있지만..."

그냥 다른 정령과 알레시아가 접촉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해결될 문제였다.

알레시아와 접촉한 정령은 당연히 모너클을 향한 적대감을 드러낼 것이고, 마법사들은 알레시아가 그저 운이 좋아 정령을 얻게 되었다고 판단할 확률이 높았다.

해명은 당장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알레시아에게 대단한 비전이라도 숨긴 듯 허세를 떨며 마법사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라 조언했다.

조금 위험한 선택이긴 했지만 어쨌든 인맥을 쌓아나갈 기회였다.

레이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선을 잘 타야 할 텐데요. 알레시아가 잘할 수 있을까요?"

"기사된 자가 자기 아가씨를 너무 믿지 못하는 거 아니니?"

평상시에는 좀 얼빵해 보이는 알레시아였다만.

플로리아가 보기에 알레시아는 결코 눈치가 없지 않았다.

플로리아의 설득에 레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의 조합은 유학을 온 지 보름도 안 되어 마법사들의 입에 굉장히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다.

모너클이면서 중급과 중상급 정령을 동시에 사역하는 알레시아.

오시리스 가의 영애이자 네추럴로 태어나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보유한 플로리아.

둘의 명성이 높아지자 당연히 견제가 들어올 기미도 보이기 시작했다.

레이는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에 마탑을 한 번 둘러보기 위해서 따로 시간을 마련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역시나 오벨리스크였다.

*

"리실로테 레코드가 잠들어 있는 탑이라..."

리실로테.

600년 전 존재했던 대마법사이자 인류의 마법을 한 단계 더 진일보시켰다고 평가받는 불세출의 천재.

물론 레이에게 전혀 와 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진일보시킨 마법 이론을 자기들끼리 꽁꽁 싸매고 있으니 말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레이는 아직 마법과 관련된 권력 구조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하지만 두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현대의 마법이 600년 전에 비해 크게 발전하지 못했으며, 리실로테가 남긴 유산을 적법한 절차를 거쳐 접하기는 거의 불가능 할 거란 것이다.

멸망을 막기 위해선 당장이라도 황실과 마탑의 지식을 모조리 끌어와 인재들에게 가르쳐야 하겠지만.

지식이 무엇보다 확고한 권력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그딴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이러다 다 좆 돼봐야 정신을 차리지."

레이가 끌끌 혀를 차며 오벨리스크에 입장했다.

오벨리스크의 일부 구역은 외부인에게도 출입이 허가되어 있었는데, 아주 기초적인 마도서를 몇 권 빌려 갈 수도 있었다.

'필사해서 가지고 나가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네.'

레이는 서클과 관련된 책 몇 권 집어 들었다.

서클을 익힐 각오도 했고, 사실 익히려고 작정했다면 주변의 도움을 받아 가능도 했을 테지만.

레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코어가 워낙 유별난 존재였던 탓에 신중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우리 루나는 어찌한담.'

아직은 알레시아를 따라다니며 황실 마탑의 분위기에 적응하고 있었다.

여기서 천천히 관계를 넓혀가며 회유 가능한 마법사를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남은 기간이 그리 넉넉지 못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책을 빌린 레이는 오벨리스크의 안을 잠시 거닐었다.

하르시아의 전진을 이었으니, 리실로테의 귀신이라도 나타나서 말을 걸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아주 약간 있었다.

"너는 누구야?"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생소한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로브를 입고 있는 중년 여성이 어느새 옆에 서 있었다.

레이가 곧장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필립스 백작가 영애님 곁을 수행하고 있는 레이라고 합니다. 젠킨슨 경을 마스터로 모시고 있습니다."

"오벨리스크에는 무슨 일이니?"

"작은 호기심 동해 들리게 되었습니다. 출입은 정식으로 허가받았습니다."

"정식으로 허가 받았다라... 알겠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렴."

레이가 대꾸 없이 고개를 숙였다.

초면인 사람을 오라 가라하는 게 불쾌했지만 굳이 마법사와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뒤돌아 걸어가는 레이의 뒷모습을 보며 마법사가 피곤해 보이는 눈가를 좁혔다.

"스콰이어...라고?"

오벨리스크 안은 대마법사 리실로테가 만들어놓은 공간 왜곡장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었다.

때문에 적합한 인증 없이는 앞을 향해 몸을 움직여도 결국 한정된 공간을 계속해서 맴돌게 됐다.

헌데 멀어져가는 스콰이어는 자연스레 공간 왜곡장을 통과해 오벨리스크 심부로 발을 들이려 했다.

"정체가 뭐지?"

여자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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