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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58화 (58/446)

계약 (3)

58화

친구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바람 정령이 모습을 감췄다.

레이는 몸을 덮을 망토를 플로리아에게 건네주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정령들은 실체화를 안 하고도 우리를 관측할 수 있나요?"

"관측이라..."

플로리아가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정령과 굉장히 깊게 연결되어있었던 플로리아이기에, 정령들의 생리에 대해서도 일부 이해하고 있었다.

"계약을 통해 실체화하지 않으면 우리 차원을 직접 관측하진 못해. 하지만 느낄 수는 있지."

고개를 든 플로리아가 중간이 뻥 뚫린 천장을 바라봤다.

"저 위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벽을 타고 흐르는 진동은 느낄 수 있잖아? 그런 원리가 아닐까... 싶어."

"그렇군요. 혹시 정령 간의 커뮤니티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아시나요?"

"서로 간의 소통이 활발하진 않을 거야. 무리를 짓는다 해도 같은 근원을 지닌 정령 중 격이 비슷한 이들끼리만 모인다고 해."

"그럼 그 개새끼도 비슷한 놈을 데려오겠네요."

"플랑."

"네?"

"플랑이었어. 그 개새끼한테 내가 지어준 이름."

"하하하."

레이가 낮게 웃었다.

늑대 정령의 이름을 입에 담는 플로리아의 얼굴엔 잠깐 사이에 다채로운 감정이 지나갔다.

레이가 대화를 이어가려는데, 마침 '플랑'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휘이익!

난데없이 바람이 인다.

플랑의 곁에, 흐릿한 무언가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알레시아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손을 뻗었다.

알레시아를 넓게 감싸듯 마나로 이루어진 원이 지면에 새겨지며, 흐릿했던 정령의 모습이 조금 더 뚜렷해진다.

플랑을 똑 닮은, 늑대 형상의 바람 정령이었다.

정령과 계약을 맺기 위한 첫 번째 절차를 성공한 알레시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목소리를 떨었다.

"아, 그, 그, 정령이여. 나와 계약을 맺어 주겠는가?"

알레시아의 서클 위로 룬어가 떠오른다.

마법사가 정령과 계약을 맺기 시작한 지도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정령과의 계약도 종류별로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었다.

알레시아가 내민 계약은 정형화된 계약 중에서도 정령에게 비교적 유리한 종류의 것이었다.

헌데도 바람 정령은 대번 아가리를 벌리더니 날카로운 이빨을 알레시아에게 들이댔다.

[크릉!]

"우왁!"

깜짝 놀란 알레시아가 엉덩방아를 찌었다.

정령은 계속해서 으르렁대며 알레시아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알레시아가 모너클인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본데, 레이는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알레시아에게 화풀이를 끝낸 정령이 임시 실체화를 풀고 사라지려는 순간.

공간검이 내리꽂혔다.

푸욱!!

[깨갱!! 깽깽!!]

등 뒤를 찔린 정령이 개처럼 울부짖었다.

발버둥치는 정령을 자기 품으로 끌어당긴 레이가 정령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거 알아?"

레이의 손가락이 미궁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플랑을 향한다.

"네 친구가 널 팔았어."

[크륵?!]

바람 정령의 눈에 분노가 불어닥치려는 순간 레이가 검을 비틀었다.

{깨갱!! 깽!! 깽!!]

다시 한 번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발버둥친 정령이 눈치껏 알레시아가 만들어낸 룬 문자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허나 계약 각인이 완성되기 전 레이가 알레시아를 멈춰 세웠다.

"알레시아, 계약 내용 좀 바꾸자."

"어떻게 바꾸면 되겠느냐?"

"그러니까..."

레이는 이미 한참 전에 이런 상황을 대비해 정령을 완전히 속박시킬 수 있는 계약을 필립스 백작의 도움을 받아 완성해두었다.

알레시아가 새로운 계약 각인을 그려내자 정령이 낑낑거리다 말고 고개를 돌려 레이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냐.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것도 없잖냐.

대충 그런 감정이 정령의 눈빛에 담겨 있었다.

레이가 목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꼽냐? 꼬우면 어쩔 건데?"

[...]

정령은 깨달았다. 미친놈한테 단단히 잘못 걸렸다고.

결국 정령은 알레시아와 노예 계약을 체결해야 했다.

난데 없이 수십 년을 노예 노릇을 하게 된 정령이 플랑에게 가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플랑 또한 뻔뻔하게 마주 이빨을 들이대며 성질을 냈는데, 그 순간 레이가 검을 뽑아들어 허공에 붕붕 휘둘렀다.

"어허, 이 새끼들이 어디서 주인 허락도 없이 아가리를 벌려? 칼침 한 번 더 맞을래?"

[...]

[...]

조용해진 정령을 보고 흡족하게 웃은 레이가 플로리아에게 부탁했다.

"이번엔 좀 더 강한 친구로 데려오라고 명령해주실래요?"

"어, 음...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었니?"

잠깐 망설인 플로리아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두 번째로 불려나온 정령은 거대한 독수리 형상을 지닌 바람 정령이었다.

중급 정령인 늑대 정령들과 달리, 중상급 정령인 독수리 정령은 꽤 완강하게 반항했으나.

날개가 달린 어깻죽지를 레이가 톱질하듯 썰어나가기 시작하자 결국 항복하고 노예 계약을 맺었다.

서글픈 표정으로 기어 다니는 정령들 사이를 알레시아가 감격한 얼굴로 파고들었다.

"나에게도 정령이 생겼구나!!"

늑대 정령과 독수리 정령을 끌어안은 알레시아가 양쪽에 뺨을 비비며 싱글벙글 웃었다.

"시작은 좀 거칠었지만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잠시 망설인 늑대 정령이 배를 까뒤집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알레시아가 꺄르르 웃으며 좋아하자 늑대 정령은 더욱 열심히 몸을 흔들었다.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정령이군..."

솔직히 감탄한 레이가 알레시아에게 물었다.

"알레시아, 셀로미어는 어때?"

"으음... 이번 계약으로 가득 찬 것 같구나아..."

셀로미어에 새길 수 있는 계약 각인의 용량은 한정되어 있다.

중급 정령 하나, 중상급 정령 하나, 그리고 플로리아와의 계약으로 인해 알레시아의 셀로미어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알레시아가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네추럴들도 중급 정령 두셋이나 상급 정령 하나와 계약하면 셀로미어의 용량이 대부분 차곤 했다.

알레시아는 더는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없단 사실에 잠시 아쉬워했으나, 이내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늑대 정령의 배를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정령들의 이름을 짓고 싶구나! 무엇이 좋을 것 같으냐?"

머리를 긁적인 레이가 되물었다.

"귀여운 게 좋아? 거창한 게 좋아?"

"고르자면 거창한 쪽이 좋겠구나!"

레이는 대충 답했다.

"펜리르랑 피닉스는 어때?"

"너무 과분한 느낌도 들지만 멋있는 이름이구나! 마음에 들었도다!"

알레시아가 해맑게 웃으며 정령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사이 레이가 플로리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가씨께선 정령 더 필요 없으세요?"

"권유는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게."

플로리아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처럼 강압을 활용해 정령과 계약을 맺을 거면 필연적으로 강력한 제약을 정령에게 걸어야 한다.

자유를 허락했다가는 뒤통수를 맞을 게 뻔하니, 무조건 목줄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헌데 계약 각인의 특성상, 노예 계약에 가까운 제약을 불어넣으려면 막대한 용량의 셀로미어를 소모해야 한다.

노예 계약을 맺게 되면 정령의 힘을 100% 활용할 수 있기에 비효율적인 선택은 아니었으나, 플로리아는 지금 당장 정령의 수를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당분간은 이 녀석이랑 단둘이 대화를 좀 나누고 싶어."

플로리아의 시선을 받은 플랑이 낑낑거리며 지면에 머리를 박았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곤 천장을 바라봤다.

플로리아의 일은 잘 마무리했으니, 이제는 벽에 틀어박혀 기절해 있을 기사들을 수습해야 했다.

*

머리의 특정 부위에 마나를 억지로 불어넣을 시 단기적으로 기억을 상실시킬 수 있다.

허나 외부의 마력에 저항력을 갖춘 기사의 경우, 마나로 머리를 좀 헤집는다 해도 기억의 혼란은 느낄지언정 대략적인 상황의 경위는 떠올릴 수 있었다.

레이에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젠킨슨과 레이에게 공격받았다는 사실은 기억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제압당했는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이 미친놈들이...!!"

물론 정신을 차린 오시리스 가 기사들은 험악한 기세를 뿜어내며 검을 뽑았다.

선제 공격을 당한데다, 기절했다 일어나니 플로리아의 뺨이 어마무시하게 부풀어 있었으니, 거품을 물지 않는 게 이상했다.

플로리아는 꽤 오랜 시간을 들여 기사들을 설득했다.

정령과의 재계약을 하는데 알레시아가 도움을 주었다고 말이다.

도움의 방법이 과격했을지언정 큰 은혜를 입었다는 플로리아의 설명을, 오시리스 가 기사들은 영 납득하지 못했다.

허나 알레시아가 정령을 자유롭게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제야 오시리스 가 기사들은 불만스럽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모너클이 정령과 계약을 맺기 힘들다는 건 상식이다.

플로리아는 알레시아가 특이 체질을 지닌 덕분에 정령들과 계약할 수 있었으며, 그 체질을 활용해 자신의 재계약을 도왔다고 설명했다.

얼추 말은 되었기에, 오시리스 가 기사들을 칼을 집어넣었다.

물론 이를 갈며 경고하는 건 잊지 않았다.

"이번 일은 오시리스 백작님께 분명히 보고할 것이오."

젠킨슨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서 더 입을 놀려봤자 도발만 하는 꼴이었다.

미궁 밖으로 나가자 다시 난리가 났다.

플로리아의 얼굴은 빵빵하게 부어있지, 망토를 벗기니 드레스는 다 찢어져 있지, 드러난 살갗에는 밧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몇몇 시종들이 뒷목을 잡고 기절했고, 리옹이 격분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다시 플로리아의 오랜 설득이 이어지고, 리옹은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검을 집어넣었다.

"최대한 빨리 가까운 도시로 가서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리옹이 설득했으나 플로리아는 포션만 하나 바른 채 고개를 저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

"아가씨...!!"

"잠시면 돼."

고집을 부린 플로리아가 산맥의 능선을 타고 걸어 올라가 주변 경치를 살폈다.

나무가 적은 산인지라 능선 아래가 훤히 시야에 들어왔다.

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플로리아가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정말로... 자유를 찾았네."

전신을 타고 흐르는 황홀감에 플로리아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플로리아는 여태까지 바람의 쾌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바람을 근원으로 둔 정령과 감정을 공유했기에, 도리어 바람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져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바람의 손길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플로리아를 뒤따라온 레이가 물었다.

"영지로 돌아가실 건가요, 아니면 황실 마탑으로 가실 건가요?"

"무슨 의미야?"

"정령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탑으로 가시려던 게 아니었나요?"

"아하하."

플로리아가 쾌활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 말도 맞지만, 황실 마탑은 연줄을 만들어 놓기에 최적의 장소야. 굳이 기회를 놓칠 필요는 없잖니?"

하늘을 올려다본 플로리아가 말을 이었다.

"네 아가씨도, 곁에 내가 없으면 남들이 우습게 보고 무시할 거야. 필립스 백작령의 저력을 제대로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니?"

하늘에서 내려앉은 바람 정령, 피닉스가 플로리아와 레이의 사이를 가로막듯이 파고들었다.

능선 아래서 알레시아를 등 위에 태운 펜리르가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다.

"우아아아아...!! 생각보다 빠르구나아아...!!"

바람을 다루는 펜리르의 속도는 말보다도 빨랐다.

삽시간에 플로리아의 곁에 도착한 알레시아는 비틀거리며 펜리르에서 내렸다.

잠시 균형을 잡지 못하던 알레시가가 레이의 팔을 훅 잡아당겼다.

"레이는 나의 기사이니라! 탐냈다가는 플로리아라 해도 용서치 않겠느니라!"

"우후후..."

새로운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린 플로리아가 언젠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알레시아, 정말 이자가 네 기사가 맞니?"

"그러하다!"

"남자 하나는 잘 잡았네."

산뜻한 미소를 건넨 플로리아가 설레는 마음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만 내려가자. 리옹의 눈빛도 점점 무서워지고 있으니까."

플로리아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리옹이 검자루에 손을 올린 채 마나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더 어울렸다간 재차 다툼이 벌어질 것 같았기에 플로리아는 다시 리옹 곁에 가서 섰다.

레이가 아닌, 리옹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기대되네. 마탑은 어떤 곳일지."

10년 전에 상실했던 순수한 호기심이 다시 샘솟는다.

해맑게 웃는 플로리아를 보며 리옹은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이리 자연스레 웃는 아가씨의 모습을, 리옹은 오늘 처음 보았다.

리옹은 그제야, 정말로 플로리아를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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