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2)
57화
다른 검사들은 말한다. 정령을 베어내는 촉감은, 케이크를 썰 때보다 못할 때가 많다고.
겉으로 투영된 허상을 베어봤자 정령은 금세 힘을 회복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악을 써가며 정령사를 죽여봤자 정령은 새로운 정령사와 계약해 세상을 유린하곤 했다.
불사와 불멸의 존재로 여겨지는 정령과의 싸움은 그토록 불합리했다.
허나 레이는 달랐다.
정령의 허상을 지나친 공간검이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정령의 본체에 닿는다.
인간을 베어낼 때와 별다를 게 없는, 살갗을 갈라내고 내장을 헤집는 촉감이 똑똑히 검을 타고 흐른다.
바람 정령의 배를 파고든 검이 등을 꿰뚫고 나왔다.
뒤늦게 정령의 괴성이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끼에에에에엑!!]
"아아아아악!!"
정령과 공명하듯 플로리아가 비명을 토해냈다.
레이는 검을 정령에게 쑤셔 넣은 채 플로리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빅토르와 하무스가 얼굴을 굳히며 레이에게 달려들었다.
가망 없는 돌격이었으나 레이는 나름 흡족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스콰이어가 그 정도 가오는 있어야지.'
쩌엉!!
빅토르와 하무스가 레이의 일격에 튕겨 나간 직후.
눈이 반쯤 뒤집힌 플로리아가 두 손으로 지면을 긁으며 뛰어오르더니 레이의 목덜미를 향해 이빨을 들이댔다.
레이가 혀를 끌끌 찼다.
"문제가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정령의 감정이 일부 역류할 수는 있다.
허나 정령과 일체화라도 된 듯 레이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몸을 날리는 행위는 결코 평범하지 못했다.
"대화가 통할지 모르겠네."
쩌억!
레이가 주먹을 휘둘러 플로리아의 뺨을 후려쳤다.
약하게 친다고 쳤는데도 고개가 휙 돌아간 플로리아가 땅을 굴렀다.
그 찰나 바람 정령이 쩍 벌린 아가리를 레이의 머리에 들이댔다.
몸을 일으킨 플로리아 또한 레이를 향해 재차 달려든다.
레이는 곧장 정령의 턱을 붙잡은 후 복부에 박혀있는 칼을 비틀었다.
다시 한 번 정령과 플로리아의 비명이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젠킨슨, 일단 얘 좀 묶어야 할 것 같은데요."
레이가 플로리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령과 감응해서 자꾸 덤벼드는 데, 매번 주먹으로 제압했다가는 반신불수를 만들 게 뻔했다.
정령이 배때기에 칼이 꽂혀 정신 못 차리는 사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 놔야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도록 잘 좀 묶어줘요."
"끄응..."
젠킨슨이 앓는 소리를 내며 준비해두었던 밧줄을 꺼냈다.
눈이 반쯤 돌아간 플로리아를 묶기 위해 꼼지락대기 시작한 젠킨슨이 얼마 안 가 눈가를 찌푸렸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병기와 무술, 잡기를 익혀야 하고, 그 안에는 포박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허나 젠킨슨은 포박술을 배운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데다, 전신을 봉인하는 종류의 포박술은 생각보다 난도가 꽤 높았다.
이런 잡기는 보통 스콰이어가 담당하고는 하는데, 불행히도 젠킨슨의 스콰이어는 제대로 된 놈이 아니었다.
'이걸 이렇게 묶었나...?'
젠킨슨이 끙끙 앓아가며 이리 묶었다 저리 묶었다를 반복했다.
그때 슬그머니 플로리아 옆으로 다가온 알레시아가 젠킨슨을 타박했다.
"팔목을 그리 묶으면 헐거워서 풀리느니라."
"...?"
"매듭의 방향과 순서 또한 잘못되었구나. 매듭을 이렇게 묶어 다리 사이로 집어넣고... 드레스가 방해되는구나아..."
드레스를 반으로 쭉 찢은 알레시아가 능숙하게 플로리아의 몸을 밧줄로 칭칭 감았다.
"이제 아래로 내려 발목을 묶어 올리면..."
"...?"
빠르게 포박을 완성해가는 알레시아를 보며 젠킨슨이 눈을 껌벅였다.
늑대 정령의 배때지에 검을 반쯤 뽑았다 넣었다를 반복하던 레이도 그 꼴을 지켜보며 떫은 얼굴을 했다.
"요즘은 귀족 영애한테 포박술도 가르칩니까?"
"그럴 리가."
"그럼 저건 누구한테 배운 겁니까?"
"글쎄...?"
레이가 미간을 짚었다.
"요즘 아가씨 관리 제대로 하고 있는 것 맞습니까?"
"자신 있게 대답하기가 힘들군..."
레이와 젠킨슨이 서로를 향해 속삭이는 사이 포박을 완성한 알레시아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기뻐했다.
"다 되었구나! 남에게는 처음 해봤는데 잘 된 것 같구나!"
남에게는?
레이는 머릿속을 헤집는 의문을 뒤로 미루며 플로리아를 살폈다.
몸부림을 칠수록 밧줄이 더욱 강력하게 몸을 압박할 수 있도록 묶여 있어 어느 부위든 힘을 주기 어려워 보였다.
레이가 착잡한 얼굴로 플로리아의 발목과 이어진 밧줄의 끝을 커다란 바위에 묶은 후, 플로리아를 뻥 뚫린 지하를 향해 던져버렸다.
"커억!"
떨어지던 플로리아가 바닥과 충돌하기 전에 밧줄이 팽팽히 당겨지며 플로리아를 멈춰 세웠다.
플로리아를 따라 지하에 착지한 레이가 다시 한 번 정령에게 박혀 있는 검을 뒤틀었다.
정령이 경기를 하며 눈을 뒤집자 플로리아 또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허나 알레시아가 어지간히 밧줄을 잘 묶어 놓았는지, 플로리아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거친 숨만 컥컥 내뱉었다.
'준비는 됐는데...'
한숨을 내쉰 레이가 뒤집어진 플로리아의 드레스를 대충 잘라냈다.
뒤집어진 드레스에 가려져 있던 플로리아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레이가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정령은 꼬챙이로 만들어 붙잡았고 플로리아도 허튼짓을 못하게 포박했다.
이제 재계약을 위한 수순을 밟아야 했는데, 이를 위해선 당연히 플로리아가 제정신이어야 했다.
쫘악!
주먹에 맞아 부풀어 오른 플로리아의 뺨을 레이가 거리낌 없이 후려쳤다.
"야, 뒈지기 싫으면 정신 좀 차려봐."
"끄르륵...!"
눈이 반쯤 돌아간 플로리아가 경기를 한다.
레이가 계속해서 플로리아의 뺨을 후려쳤다.
쫘악! 쫘악!
"야, 정신 안 차려? 정신 못 차리면 넌 내 손에 뒈진다니까?"
레이는 플로리아가 끝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정령을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확률은 낮았지만, 정령과 맺은 계약 내용에 따라 플로리아 또한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레이는 되도록이면 플로리아가 정신을 차려 재계약 절차를 한 번 밟아봤으면 싶었다.
쫘악!
플로리아의 고개가 연거푸 옆으로 돌아간다.
슬금슬금 지하를 향해 고개를 내밀어 보려는 알레시아를 붙잡은 젠킨슨이 진지하게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하나 고뇌했다.
*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고통과 공포, 살의뿐이었다.
요동치는 감정의 격류가 눈앞을 흐리게 하며 모든 사고를 앗아간다.
온몸에 뻗쳤던 감각이 멀어지며, 그저 뜨겁기 짝이 없는 격통만이 복부를 내달렸다.
플로리아는 그저 괴로워하며, 지금 자기가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몸을 뒤흔들었다.
쫘악!
귀를 울리는 이명과 함께 검게 변한 세상에 작은 균열이 인다.
플로리아는 직감했다. 저것이야말로 나의 감각. 붙잡아야 된다. 붙잡아서 이정표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해내야만 한다.
감정과 이성을 분리해, 모든 충동과 고통을 뒤로 밀어 넣고 이성만을 내세워 앞을 바라봐야 한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찐득한 고통, 공포, 그리고 살의가 휘몰아쳤지만.
플로리아는 느껴지지도 않는 이를 악물고 의지를 바로 세웠다.
"크윽, 큭...!"
멋대로 돌아가던 플로리아의 눈에 초점이 잡기 시작한다.
시야가 열리고, 귀가 사람의 목소리를 받아들여 해석하기 시작한다.
레이가 플로리아의 턱을 움켜쥔 채 눈을 마주쳤다.
"정신 차려, 플로리아. 정령이랑 재계약, 진행할 수 있겠어?"
"재계약..."
플로리아가 흐리멍텅한 사고로 단어를 곱씹었다.
정령과 최초로 계약을 맺은 이후,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던가.
정령의 감정과 뒤섞여 희석되었음에도, 후회라는 감정은 여전히 뇌리 속에 강렬하게 남아 플로리아의 의식을 각성시켰다.
츠즈즈즉!
플로리아의 셀로미어에 새겨진 계약 각인이 겉으로 번져 나온다.
플로리아의 서클로부터 발산된 마나가 휘몰아치더니, 이내 룬어의 형상을 갖춰 계약 각인 위를 회전하기 시작한다.
레이가 권능을 사용해 새롭게 떠오른 룬어의 내용을 살폈다.
'...완벽하네.'
정령을 완전히 속박하고자 하는 의지가 플로리아가 만들어낸 룬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저건 10년 동안 쌓인 플로리아의 울분이며 동시에 소망이었다.
정령의 동의만 얻는다면, 플로리아가 만들어낸 룬어가 과거에 맺었던 계약 각인을 덮어쓸 것이다.
레이가 정령을 돌아보았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레이는 눈으로 묻고 있었다.
재계약 할 거야? 안 할 거야?
정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레이가 낄낄거리며 반대쪽 검을 들어 올렸다.
"아, 이 새끼 이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찌릅니다?"
마지막 말은 정령이 아닌 플로리아에게 한 소리였다.
레이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정령의 가슴 아래에 검을 박아 넣었다.
[키에에에엑!!]
"아아아악!!!"
정령과 플로리아가 동시에 괴성을 질렀다.
허나 몰아치는 격통에도 불구하고 플로리아는 끝끝내 의식을 놓지 않고 새롭게 떠오른 룬어를 유지하고 있었다.
레이가 두 검을 교차한 채 정령을 끌어당긴 후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여기서 뒈질래? 아니면 수십 년 노예 노릇 하는 걸로 퉁 칠래?"
레이는 확신했다.
이 정도 겁박이면 정령 새끼는 분명히, 자기 말을 따를 것이라고.
결국 울부짖는 정령의 몸에서 룬어가 흘러나왔다.
그 위로 플로리아가 만들어낸 룬어가 겹쳐 흐르며 계약을 고쳐 쓰기 시작했다.
츠즈즈즈즈즉!
플로리아를 그토록 속박했던 계약의 내용이 역전된다.
플로리아는 느낄 수 있었다.
뇌리를 함부로 파고들었던 정령의 충동과 욕구가 점점 지워져 나가는걸.
구석으로 밀려났던 본인의 감정이 점점 제자리를 찾아간다.
흘러나오는 희열을 느끼며 플로리아는 감복했다.
이제야 오롯이, 나의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온전히 나의 안에서 비롯된 감정이.
"드디어... 드디어..."
이성이 완전히 돌아온다.
플로리아는 함박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살짝 눈을 찌푸렸다.
밧줄에 묶인 채로 워낙 발버둥을 친 탓에 온몸에 시뻘겋게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뺨이 더럽게 아팠는데, 워낙 퉁퉁 부어올라 입을 다물면 이빨에 씹힐 지경이었다.
허나 영민하게 상황을 파악한 플로리아는 일단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어. 으네를 이벘네."
뺨이 부풀어 오른 탓에 발음이 줄줄 샜다.
플로리아는 시행착오를 거쳐 발음을 조정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은혜를 입었어. 정신을 차렸으니까 일단 나 좀 내려주면 안 될까?"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자기가 얼굴 화끈거리는 꼴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드레스는 찢긴 데다, 온몸을 묶은 매듭은 적나라하게 몸의 맵시를 드러냈다.
다 떠나서 거꾸로 매달려 있으니 머리 쪽에 피가 쏠려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뺨이 더욱 욱신거리는 건 덤이었고.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계약 각인 하나만 더 새깁시다."
"난 은혜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말로는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말마따나 은혜를 입으셨으니 계약 각인 하나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허락해주시죠."
"..."
플로리아가 얌전히 서클 위로 계약 각인을 새기기 위한 마나를 회전 시키기 시작했다.
레이의 요구가 합당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반항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젠킨슨의 도움을 받아 지하로 내려온 알레시아가 플로리아의 꼴을 보고 중얼거렸다.
"나의 기사는 생각보다 취향이 과격하구나아아..."
"야이씨."
꽁!
결국 레이에게 딱밤을 한 대 얻어맞은 알레시아가 정수리를 비비며 플로리아 앞에 섰다.
새로운 계약 각인이 플로리아와 알레시아의 셀로미어에 새겨졌다.
오늘의 일을 함구할 것.
필립스 백작가의 관계자들에게 위해를 끼치는 행위를 금할 것.
플로리아가 얻게 된 새로운 제약의 대략적인 내용이었다.
그 대가로 알레시아는 플로리아가 정령과의 계약을 조율할 때 협조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됐다.
계약 각인을 새긴 후 간신히 지면을 다시 딛게 된 플로리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얼마나 오래 기다린 순간이었던가.
비록 온몸이 욱신대는 탓에 감흥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번져나가는 희열을 통제하기 힘들었다.
플로리아가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상처를 돌보고 있던 바람 정령에게 다가갔다.
"입장이 역전됐네?"
바람 정령이 흠칫 몸을 떤다.
플로리아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가는 순간 레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부탁 하나만 더 드릴게요."
"어떤 부탁?"
"이제 정령한테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으시죠?"
"그래."
"그럼 저 개새끼보고 친구 좀 데려오라고 해봐요."
"친구...? 어째서?"
레이가 고개를 돌려 알레시아에게 손짓했다.
"알레시아, 정령 가지고 싶다고 했지?"
"그러하다! 나도 귀엽고 말 잘 듣는 정령을 꼭 가지고 싶구나."
레이의 의도를 알아챈 플로리아가 무심코 고개를 저었다.
"알레시아는 모노클이라 정령이 계약을 맺기 꺼려..."
플로리아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레이가 허리춤에 찬 검을 다시 뽑았다.
플로리아는 깨달았다.
"아..."
정령과 좋은 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 오랜 시간, 그리고 운이 따라줘야 한다.
정령마다 호불호가 확실했기에 아무리 뛰어난 정령술사도 모든 정령에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허나 레이에게 정령의 취향은 관심 밖이었다.
"아가씨, 어서 빨리..."
정령의 취향 따위는 칼 한 자루만 있으면 얼마든지 교정할 수 있었으니까.
"저 개새끼한테 친구 좀 데려오라 해봐요."
레이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