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1)
56화
영맥.
세상에 불균일하게 퍼져있는 마나가 특히 집약된 장소를 가리키는 단어다.
얼마나 넓은 범위에 얼마나 고농도의 마나가 집약되었느냐에 따라 영맥의 가치가 달라진다.
대규모 영맥 위에는 종종 도시가 건설되기도 하는데, 이는 황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영맥 위에 세워진 제국의 수도는, 영맥을 동력으로 하는 강력한 방위 병기를 다수 개발해 운용하고 있었다.
미궁 또한 영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맥에 이끌린 마물이 굴을 파서 둥지를 틀거나, 국가의 허락 없이 영맥 아래 불법적으로 건설된 시설들이 대개 미궁으로 분류된다.
후자의 경우 은둔한 마법사가 영맥 아래 요새화된 아지트를 만들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대부분의 미궁은 그리 위험하지 않았다.
몇백년에 한두 번쯤은 발레리우스의 미궁과 같이 대륙을 격동시키는 미궁이 발견되기도 하나, 정말 드문 경우였다.
공략이 완료된 미궁은 상황에 따라 그냥 방치되고는 했다.
영맥을 활용할 방법이야 무궁무진했지만 도시와 너무 멀리 떨어진 영맥은 수익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필립스 백작령에서 황실 마탑으로 가는 경로 근방에도 이처럼 수익성이 낮아 방치된 공략된 미궁이 하나 있었다.
마탑으로 향하는 길에서, 플로리아가 먼저 알레시아에게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 근방에 공략된 미궁이 있다는데, 한번 구경해볼래?"
"오! 꼭 한번 가보고 싶구나!"
본래 호기심이 많았던 알레시아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공략된 후에 방치된 미궁이기에 그리 위험하진 않았다.
마물이 몇 마리 꼬여있을 수는 있겠지만 엑스퍼트 여럿이면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
허나 백작가 영애들을 수행하는 자들은 굳이 위험한 장소를 찾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오시리스 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플로리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알레시아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레이와 젠킨슨에게 징징대기 시작했다.
젠킨슨은 알레시아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헌데 레이가 나서서 도리어 알레시아의 의욕을 부채질했다.
"미궁이 위험한 장소이긴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옆에서 잘 지켜 드릴게요."
"역시 나의 기사로다! 날이 갈수록 믿음직해지는구나!"
알레시아가 싱글벙글 웃으며 좋아했다.
젠킨슨이 잠시 마차를 세운 후 레이를 불러 둘만의 자리를 마련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지금 찾아갈 미궁이 그리 위험한 장소는 아니잖아요? 들어보니 기껏해야 마물 몇 마리 돌아다니고 있을 텐데, 아가씨 부탁을 들어드리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오랜만의 나들이잖아요?"
그럴 듯한 소리였다.
허나 젠킨슨은 이미 레이의 성격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눈가를 가늘게 좁힌 젠킨슨이 레이를 추궁했다.
"말장난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라. 내가 아는 너라면 괜한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아가씨를 설득했을 거다."
"하하."
작게 웃은 레이가 답했다.
"마스터, 저희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나요?"
"...황실 마탑이지."
"그래요, 마탑. 눈치 보는 정신병자 소굴 말입니다."
레이가 잠깐 마차를 돌아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마탑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간 좀 봅시다."
"간?"
"플로리아 얘기하는 겁니다. 필립스 백작령 밖에서는 행실이 어떠할지, 미리 좀 알아보자고요.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작은 무대를 하나 마련해서요."
"..."
젠킨슨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플로리아에 관한 이야기는 젠킨슨 또한 백작에게 전해 들었다.
확실히, 마탑에 가기 전 플로리아에 대해 미리 파악해놓을 필요가 있었다.
젠킨슨이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이틀 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를 태운 마차가 미궁 앞에 도착했다.
작은 산맥 옆에 동굴처럼 생긴 입구가 하나 뚫려 있었다. 미궁의 입구였다.
나무 판자로 경고문이 새워져 있었는데, 워낙 오래된 탓인지 글자를 제대로 읽기 힘들었다.
레이가 나무판자를 살피며 오는 길에 들었던 미궁에 관한 정보를 상기했다.
수십 년 전 고위 마법사가 만든 미궁.
공략된지는 한참 지났고, 마법사가 만들어놓은 함정은 전부 해제되거나 파괴되어 있다.
별 볼일 없는 곳이었다.
허나 분위기 하나는 꽤 그럴듯해, 어두컴컴한 미궁의 입구를 앞에 두고 알레시아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정말 재밌겠구나아아..."
이제 와서 겁을 조금 먹은 모양이었다.
레이가 입꼬리를 올린 채 알레시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제가 잘 지켜드릴테니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
"나는 두려워한 적이 없느니라! 그래도 믿음직스럽구나!"
"..."
오시리스 가의 기사인 아벤시오가 히죽거리는 알레시아를 쳐다보며 고개를 휘저었다.
출신 천한 스콰이어에게 놀아나는 알레시아가 어지간히 한심한 모양이었다.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무시였지만 젠킨슨과 레이는 대응하지 않았다.
괜히 하무스와 빅토르만 긴장한 채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었다.
레옹이 입을 열었다.
"그럼 호위 인원은 이렇게 하시죠."
짧은 회의 끝에 미궁을 탐방할 인원이 나뉘었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 그리고 그녀들을 호위할 기사 셋과 종자 셋.
오시리스 가의 기사 레옹이 미궁 밖에 남아 사용인들과 마차를 지키기로 했다.
미궁 앞에서 플로리아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라이트."
둥근 구체가 손가락 위에 떠오르며 어두컴컴한 미궁 내부를 비춘다.
마법을 계속 사용할 수는 없으니 빛을 내는 아티펙트를 몇 개 챙겼는데, 사용할 일은 없었다.
미궁 안쪽으로 들어가자 영맥에서 흐른 마나가 천장을 타고 흐르며 은은한 빛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광경에 알레시아 두 손을 마주치며 기뻐했다.
"오오... 여기가 바로 책에서만 보았던 미궁이로구나...! 정말 아름답구나!"
"그러게요."
레이 또한 우중충한 동굴을 상상하고 들어왔는지라 빛이 흐르는 천장을 보며 감탄했다.
더군다나 레이의 예상보다 미궁이 꽤 넓었다.
'분명 복층 구조로 이루어진 미궁이라했는데... 아래에 이만한 장소가 또 있다는 건가?'
레이가 생각에 빠진 사이 신이 난 알레시아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그 순간 레이의 시야 끝에 벽면에 새겨진 마법진이 스쳐 갔다.
치지직!
누군가 양단해놓은 마법진의 이음새 사이로 작은 섬광이 파고든다.
침묵하던 마법진에 영맥의 마나가 깃들며 삽시간에 빛이 솟구쳤다.
레이가 곧장 알레시아를 끌어당겼다.
콰앙!!
"히익!"
갑작스레 코앞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에 알레시아가 깜짝 놀라 레이에게 매달렸다.
레이가 손을 휘휘 저어 연기를 날려보내고는 알레시아를 내려놓았다.
"아직 남아 있는 함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노, 놀랐구나!"
알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작 마법진 하나가 알레시아의 호기심을 억누를 순 없었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의 미궁 탐험은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해제되었던 함정 마법진이 종종 발현되기도 하고, 미궁에 터를 잡은 마물을 사냥할 때 바람이 불어와 레이의 무게중심을 흩트리고는 했다.
작은 사건 사고가 이어졌지만 레이는 개의치 않았다.
알레시아를 보호하며 계속해서 전진하자 얼마 안 가 미궁의 끝을 볼 수 있었다.
"여기가 마지막이구나!"
벽을 마주한 알레시아가 두 팔을 벌린 채 아쉬워했다.
얼핏 보면 더는 남은 공간이 없어 보였다. 허나 이 미궁이 복층 구조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레이가 미리 들었던 대로 미궁 끝에 놓여 있는 돌덩이를 움직이자 작은 진동과 함께 바닥이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약 10 m에 달하는 공간이 열리며 지하가 훤히 드러나자 다들 썩 흥미로운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봤다.
지하는 꽤 깊었는데, 지하로 내려가기 위한 계단 같은 것은 따로 안배되어 있지 않았다.
"오늘 구경은 여기까지만 하시는 게 어떻...?"
젠킨슨이 그만 복귀하자고 백작가 영애들을 설득하려던 찰나.
지하를 향해 얼굴을 빤히 내민 채 무릎 꿇고 있는 알레시아를 향해, 강풍이 훅 불었다.
"후악?!"
일순 균형을 잃은 알레시아의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레이가 곧장 몸을 던져 알레시아를 붙잡고 벽면에 칼을 박아 넣었다.
알레시아가 허공에서 두 다리를 달랑거리다 안도했다.
"레이가 있어 다행이로구나!"
"아가씨께선 안전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레이가 알레시아를 끌어올리자 젠킨슨이 받아주었다.
레이가 벽면을 타고 상층으로 올라오니 분위기가 차게 굳어 있었다.
깊은 동굴 안에서 무슨 바람이란 말인가.
미궁 내에서 망가진 마법진이 발동된 이유 또한 다들 눈치 챈지 오래였다.
허나 모른 척 넘어갔고, 넘어갈 예정이었다. 알레시아가 다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친우 간에 짓궂은 장난일 뿐이었다.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뒷머리를 긁적인 레이가 젠킨슨을 쳐다봤다.
"안 되겠네요. 제압합시다."
"...꼭 그래야겠냐?"
"네."
미궁에서 하는 짓을 보니 플로리아는 마탑에 가서도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킬 게 분명했다.
마탑은 미궁보다 훨씬 위험한 물건과 사람이 가득한 장소다.
지금이야 레이 혼자서도 플로리아의 장난질을 감당 가능했지만 마탑에서는 절대 불가했다.
사실 플로리아가 마탑에 가 사고를 쳐서 혼자 책임을 지고 끝난다면 레이 또한 굳이 나서진 않았을 것이다.
'근데 이번 유학은 알레시아가 플로리아 꽁무니에 껴서 가는 거란 말이야.'
황실 마탑 입장에서 둘이 한 세트란 의미였다.
플로리아가 사고를 치면 알레시아가 연대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오시리스 백작이 딸아이의 책임을 분산시키거나, 죄를 떠넘기기 위해 알레시아의 동행을 허락했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알레시아는 플로리아와 가까운 곳에서 지내며 자주 마주치게 될 것이다.
만약 플로리아가 알레시아를 계속해서 위협하면 언젠가는 알레시아가 크게 다칠 수 있었다.
레이는 결론을 내렸다.
"마탑에 도착하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어요."
젠킨슨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안'에 관해선 필립스 백작이 레이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레이가 까라면 젠킨슨도 까야 했다.
"...완벽히 '해결'할 자신이 있냐?"
"일단 해봐야 알지 않겠어요?"
"후우."
스릉!
한숨을 내쉰 젠킨슨이 검을 뽑아들었다.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이 기함했다.
"젠킨슨 경!! 진정하시오!!"
"너무 흥분하셨소! 검을 내려놓으시오!!"
그들의 걱정과 달리 레이와 젠킨슨은 아주 차분했다.
젠킨슨이 플로리아를 바라보더니 레이에게 물었다.
"일을 복잡하게 하는 것보다... 그냥 죽이는 게 났지 않겠냐? 너라면 가능하잖냐."
바람 정령 이야기였다.
허나 플로리아를 죽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이 마주 검을 뽑아내며 분노를 토해냈다.
격렬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레이는 플로리아가 정령과 맺은 계약의 내용을 몰랐다.
확률은 낮지만 정령을 죽였다가 플로리아도 같이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레이는 이번 기회에 정령과 계약에 관한 실험을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사실 그쪽이 메인이었다.
레이가 표정을 굳힌 채 명령했다.
"젠킨슨, 제압하세요."
츠즉!
검기를 뽑아낸 젠킨슨이 플로리아를 향해 돌격했다.
멘데스가 젠킨슨의 앞을 가로막았다.
파가가각!!
검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아벤시오가 종자들에게 소리쳤다.
"아가씨를 보호하고 있어라!"
하무스와 빅토르가 플로리아의 곁에 선 채 마나를 끌어올렸다.
레이가 달려들자 아벤시오가 마주 검을 휘둘렀다.
아벤시오는 빠르게 레이를 베어내고 멘데스와 합류해 젠킨슨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서로의 검이 맞부딪친다.
카가각!!
"이놈...!!"
카강!! 카가각!!
검을 몇 번 더 휘두른 아벤시오가 당혹스러워 했다.
아벤시오의 예상보다 레이의 실력이 뛰어났다.
비록 검기는 뽑아내지 못하지만, 검에 마나를 주입해 아벤시오의 검기를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었다.
승부가 늘어지기 시작한다.
카강!! 카가각!! 까앙!!
'이런...!'
옆을 돌아보니 멘데스가 젠킨슨에게 밀리고 있었다.
더 이상 스콰이어 따위에게 시간을 끌리면 안 된다.
아벤시오는 레이를 힘으로 찍어누르기 위해 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한 층 거대해진 검기가 다가오자 레이자 짐짓 긴장한 듯 자세를 다시 잡았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와 레이의 균형을 흩트렸다.
"윽...?!"
레이가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였다.
아벤시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레이를 내려 베었다.
레이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츠즈즉!
일순 레이의 검에 시푸른 검기가 실처럼 응축된다.
벼락 같이 휘둘러진 일격이 아벤시오의 검을 박살 내고 흉갑을 찍어눌렀다.
콰앙!!!!!
튕겨져나간 아벤시오가 벽에 틀어박힌 채 의식을 잃었다.
동시에 멘데스의 품을 파고든 젠킨슨이 검 자루로 턱을 후려쳐 멘데스를 기절시켰다.
레이의 고개로 뒤로 돌아간다.
늑대 형상을 한 바람 정령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레이가 쭉 찢어진 입꼬리로 낄낄거렸다.
"뭔가 아차 싶을 거야?"
공간검이 정령의 복부를 향해 휘둘러졌다.
"넌 좆 됐어, 새끼야."
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