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55화 (55/446)

이별 (2)

55화

레이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요하나를 보고 몇 번 더 튕겨볼까 고민하는 사이.

수풀 사이에서 요하나의 설득을 지켜보던 카렌이 불쑥 튀어나와 레이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늘어졌다.

"가면 안 돼!! 갈 거면 나도 데려가아!!"

카렌이 눈을 통째로 붉게 물들인 채 애원하자 레이가 짐짓 화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못 데려가. 나 혼자 갈 거야."

"흐에에엥!! 가지 마아!!"

"??"

요하나에 이어 카렌까지 오열하기 시작하자 슬슬 레이도 위화감을 느꼈다.

영영 보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몇 개월 여행 좀 다녀오겠다는데 이게 그렇게 울고 불며 매달릴 사안인가?

레이가 고개를 돌려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루나와 마주 봤다.

얘들 왜 이렇게 과민반응하느냐고 루나에게 물어보려던 찰나.

레이는 공기가 더워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레이가 허리와 다리에 달라붙은 카렌과 요하나를 질질 끌고 걸어가 루나의 뺨을 잡아 쥐었다.

"야이씨, 이게 어디서 협박질이야. 서클 안 집어넣어?"

"아우으으..."

잠시 몸을 뒤틀며 반항한 루나가 얼마 못 가 주변의 마나를 안정시켰다.

레이는 뻐근해져 오는 뒷목을 매만지며 물었다.

"아니, 길어봤자 다섯 달 정도 자리 비운다는데, 왜 이렇게 과민반응이야?"

카렌이 항변했다.

"거짓말하지 마! 기사님에게 다 들었어! 유학 가면 5년은 안 돌아올 거라며! 그러니까 나도 데려가아! 레이 옆에 있을래!"

"야야, 5년은 무슨...! 하아..."

레이는 한참을 투자해 유학을 다녀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반복해 설명했다.

카렌과 요하나는 영 레이의 말을 믿지 못했지만, 계속된 설득 끝에 어찌저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수 있었다.

훌쩍이는 카렌과 요하나를 뒤로 하고 루나가 레이의 팔목을 붙잡았다.

"정말 돌아와요?"

"아이고, 걱정 마라. 내가 너희를 두고 어딜 가겠냐."

"..."

무표정하게 레이를 바라보던 루나가 응석 부리듯 레이의 가슴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루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 레이가 카렌과 요하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 잠깐 사이에 진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

"...해서, 3~5개월 정도 보육원을 비우게 될 거 같아."

"정말요?!"

내친김에 보육원에 들른 레이가 단기 유학에 관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통보했다.

나도 데려가 달라고 졸라대는 아이들도 많았고, 내심 레이의 부재를 환영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레이는 손바닥을 맞부딪쳐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는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사고 치지 말고. 혹시 사고 치면 바로바로 선생님께 말씀드려. 괜히 숨기고 있다가 일 커지게 하지 말고. 알겠어?"

"네엡!"

"나 없다고 건방 떨고 다니지 마라. 경고했어."

"네엡!"

"그래, 다들 몸조심해라."

인사를 마친 레이가 등을 돌렸다.

보육원 입구에서 지미와 매튜가 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가 며칠 사이 주름이 많이 사라진 지미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살맛 좀 나나 봐요?"

"어흠, 살맛은 무슨..."

지미가 입꼬리를 흐물거리며 가슴에 달아놓은 휘장을 만지작거렸다.

비록 제대로 된 작위가 아닌 단순 훈장에 가까운 명예 작위였지만, 지미와 매튜에게는 충분히 영광스러운 수훈이었다.

지미는 요 며칠간 가슴에 휘장을 단 채 이곳저곳 쏘다니며 주책을 떨곤 했다.

우울한 얼굴로 밭을 갈고 있을 때보다는 훨씬 좋아 보였다.

레이가 삐딱하게 선 채 물었다.

"내 얼굴 안 본다니까 좋아죽겠죠?"

"큼, 그럴 리가 있겠냐.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레이의 공을 대신 뒤집어쓴 덕분에 명예 작위를 수훈할 수 있었음을 알고 있는 지미는 괜히 헛기침하며 겸양을 떨었다.

낄낄 웃은 레이가 뒤돌아서 보육원을 바라봤다.

"나 없는 동안, 보육원이랑 용주골 좀 잘 부탁할게요."

"걱정하지 마라. 근데 용주골이 대체 무슨 뜻이냐?"

레이는 간간이 홍등가를 '용주골'이라 바꿔 부르곤 했다.

새삼스러운 지미의 질문에 잠시 고민한 레이가 떠오르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가져다 붙였다.

"용주골... dragon princess lair란 뜻입니다."

레이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으나, 지미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너는 가끔씩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하더라."

어린 아이들이 자신만의 멋진 이름을 만들어 장소나 물건을 바꿔 부르는 경우는 흔했다.

지미도 어린 시절 노랗게 변색된 나뭇가지를 '썬더 호크'라고 칭하며 검 대신 휘둘렀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걱정하지 마라.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고마워요. 지미와 매튜도 몸조심하고요."

"너는 사고치지 말고 잘 다녀와라."

"노력은 해 볼게요."

고개를 끄덕인 레이가 옆에서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는 티티를 끌어당겼다.

마지막으로 가디 자작가를 들려볼 생각이었다.

*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군."

디나르 지역의 행정 전반을 담당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영주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피에트로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간간이 좀 들리지 그랬나."

"바빴습니다."

레이는 짧게 답했다.

피에트로에게 레이는 분명 은인이었지만, 어쨌든 레이는 피에트로의 하나뿐인 아들을 죽였다.

자식을 죽인 자의 얼굴을 어찌 편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때문에 레이는 웬만하면 가디 자작가를 찾아오지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 후.

회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어 앞으로 넘긴 소녀가 다과 접시를 든 채 문을 열었다.

레이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이야, 리파."

"오랜만에 뵙네요."

눈웃음을 흘린 리파가 다과 접시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였다.

"좋은 시간 되세요."

리파가 문을 닫고 나갔다.

다과를 하나 집어든 레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디나르에서 수집한 고아 중에서도 괜찮은 재능을 지닌 아이가 몇 있었다.

O.P.S를 통해 레어로 승급한 고아는 총 다섯이었는데, 그중 셋은 필립스 백작령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둘은 그대로 디나르 지부에 남았다.

리파는 후자의 경우였다.

리파는 몸을 쓰는 능력은 그저 그랬으나 숫자에 대한 감각이 비상했다.

2년전쯤에 실무를 익혀보라고 영주성으로 보냈었는데, 굉장히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아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리파는 여전히 잘하고 있나요?"

"참 우수한 아이야. 이제는 디나르 지역에 집행되는 예산 대부분이 한 번쯤은 저 아이의 눈을 거치고 있지."

"좋은 소식이네요."

"리파에게라도 자주 얼굴 좀 보여주게. 그 아이는 자네를 은인이라 여기고 있으니."

"은인이라. 그녀의 부친이 아마..."

"흑마법사에게 죽었지."

피에트로가 말을 끊었다.

로커스트를 토벌하기까지 희생된 모든 민간인은 흑마법사의 주술에 희생됐다고 발표됐다.

레이의 경우 공식적으로 세운 공로는 없었지만.

당시 필립스 백작과 동행하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되어 레이가 흑마법사 토벌에 일조한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러니 리파가 레이를 은인이라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머리를 긁적인 레이가 피에트로에게 물었다.

"리파 부친의 이름이 분명... '칼'이었죠?"

"정확하네."

"칼, 칼이라."

추억 속의 이름을 떠올린 레이가 창문을 통해 아련한 눈으로 저물어 가는 태양을 바라봤다.

4년 전 술집에서 보았던 칼의 얼굴이 태양 위로 어렴풋이 비친다.

'칼, 거기서 잘 보고 있나요? 당신 딸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어요.'

태양 위로 비친 칼이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가 창문을 향해 찻잔을 들어올렸다.

'나한테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그날 칼의 희생이 없었다면, 리파 또한 지금처럼 올곧고 뛰어난 인재로 성장할 수 없었을 거예요.'

칼을 레이에게 딸을 맡겼고, 레이는 훌륭히 그날의 약속을 이행했다.

칼은 딸의 성장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점점 흐릿해졌다.

레이가 칼과 잔을 나누려는 듯 찻잔을 앞으로 뻗는데, 피에트로가 떫은 얼굴로 물었다.

"자네... 뭐하는가?"

"아, 죄송합니다. 잠시 옛 생각이 나서."

찻잔을 내려놓은 레이가 본제를 꺼냈다.

"울트 님은 언제 귀환하신답니까?"

"소식은 다았지만, 글쎄. 잘 모르겠네."

피에트로가 착잡한 얼굴을 했다.

울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다.

울트는 여전히 세상을 떠돌며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허나 시간을 내고자 했다면 울트는 분명 잠시라도 디나르에 들릴 수 있었을 것이다.

레이는 옆방에서 메이드와 함께 다과를 집어먹고 있을 티티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소중한 인물이 하루하루 기억을 잃어가며 점점 더 작아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 자체로 고문이었다.

영지에 찾아오지 않는 울트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어쨌든 무사하시다니 다행이군요."

"그래, 다행이지."

피에트로는 조금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전보다 우울한 기색은 많이 줄어든 편이었다.

실무를 견학하라고 영주성에 파견한 아이들에게 정을 붙인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레이가 피에트로에게 펜을 빌렸다.

마탑에 가기 전 세리아에게 답장을 쓸 생각이었다.

세리아는 3년 전에 성(姓)을 얻었다.

알슈테인 가의 가주가 세리아가 얻은 위명을 활용하기 위해 세리아를 양녀로 들인 것이다.

그로 인해 세리아는 알슈테인 가에 발이 묶이게 됐지만, 그만큼 세리아가 얻게 된 것도 많았다.

울트의 소식을 포함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적어낸 레이는 밤이 되어서야 고모에게 보낼 편지를 완성했다.

펜을 내려놓은 레이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마탑으로 떠나기 전에 정리해야 할 일은 전부 끝냈다.

레이는 약간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의자 위에서 눈을 감았다.

*

황실 마탑으로 향하기 위한 인원이 전부 필립스 백작가의 영주성 앞에 집결했다.

이동수단은 마차였는데, 레이의 생각보다 황실 마탑으로 동행하는 인원이 많았다.

알레시아와 플로리아를 필두로, 그녀들을 시중들 보조 인력이 여럿이었고, 오시리스 가에서 호위로 붙여준 기사와 종자만 여섯이었다.

여기에 젠킨슨과 레이까지 동행하니 일행만 20명이 넘었다.

출발을 기다리다 보니 카렌이 불쑥 나타나 레이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흐윽! 레이랑 헤어지기 싫어어..."

"아이고, 되도록 빨리 돌아올 거라니까."

레이가 눈이 탱탱 부어있는 카렌을 달래주었다.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빅토르가 가슴을 움켜쥔 채 실연의 아픔을 달래고 있었다.

어느새 보육원의 아이들이 하나둘 나타나 레이를 마중했다.

요하나는 그새 또 마음이 바뀌었는지 말도 안 붙인 채 구석에서 미간을 구기고 있었고, 루나는 볼을 빵빵하게 만든 채 레이의 품에 한 번 안겼다가 떨어졌다.

슬그머니 다가온 알레시아가 팔짱을 낀 채 목에 힘을 주고 레이 곁에 섰다.

대놓고 맥이는 행동에 카렌은 팔다리를 부들거리며 씩씩대더니 결국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께서도 잘 다녀오세요오..."

옛날보다는 그래도 철이 든 카렌이었다.

인사를 전부 나눈 레이가 손을 흔들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서서히 마차가 멀어진다.

카렌은 힘이 빠진 채 터덜터덜 걷다가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는 요하나를 발견했다.

요하나는 짜증과 분함, 그리고 본인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여러 감정에 빠져 숨을 몰아쉬며 답답해하고 있었다.

카렌은 망설였다.

본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는 본인이 당장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판별하지 못하고는 했다.

이는 요하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도리어 요하나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카렌이 요하나가 왜 그리 레이를 향해 틱틱대는 지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요하나는 2차 성징이 찾아오기 직전까지 '이성'이란 개념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 모두 서로를 좋아하면 돼!'와 같은 속 편한 이야기를 외치며 순수하게 카렌과 레이의 거리가 더 좁아지길 응원하곤 했다.

허나 2차 성징이 찾아오면서, 요하나는 'like'와 'love'의 의미를 구분할 수 있게 됐다.

때문에 요하나는 옛날처럼 카렌 앞에서 마음 편하게 '나도 레이가 정말 좋아!'를 외치지 못하게 됐다.

요하나 자신은 몰랐지만.

카렌이 보기에 요하나가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시점이었다.

우정과 사랑 사이의 고민은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헤집어 놓기에 충분했고.

이는 카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우물거리던 카렌이 조용히 요하나의 손을 잡았다.

아직은, 이대로가 좋았다.

요하나의 등을 밀어주기엔, 카렌은 아직 레이의 옆자리에 있고 싶었다.

*

필립스 백작령을 떠나고 며칠 뒤, 미궁 내부.

"후우..."

한숨을 내쉰 레이가 뒤집어진 플로리아의 드레스를 대충 잘라냈다.

사지가 포박된 채 거꾸로 매달린 플로리아의 얼굴이 그제야 훤히 드러났다.

쫘악!!

이미 잔뜩 부풀어 오른 플로리아의 뺨을 거리낌 없이 후린 레이가 대롱대롱 흔들리는 플로리아를 붙잡아서 경고했다.

"야, 정신 안 차려? 정신 못 차리면 넌 내 손에 뒈진다니까?"

쫘악!

다시 한 번 플로리아 뺨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꼴을 바라보던 젠킨슨이 진지하게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하나 고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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