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1)
54화
늑대를 닮은 바람 정령은 기민하게 도주했다.
정령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자 레이는 오버드라이브라도 사용할까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실체화한 정령이 계약자의 동의도 얻지 않고 멋대로 행동할 확률은 극히 낮았다.
일단 계약자의 정체와 의도를 파악하고 정령을 찢어버리든가 해야 했다.
바람 정령이 영주성으로 향한다.
레이는 한숨을 삼키며 영주성을 두르고 있는 철제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정령을 쫓던 레이는, 얼마 안 가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플로리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플로리아가 곁으로 다가온 바람 정령을 쓰다듬어주고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이 아이가 내 정령이야."
맞은 편에 앉아있던 알레시아가 입을 크게 벌리며 감탄했다.
"신기하구나!"
"귀엽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인 알레시아가 축 처진 얼굴을 했다.
"나도 정령이 가지고 싶구나아..."
"힘들걸? 알레시아는 '모너클'이잖아."
모너클은 서클을 타고난 자가 아닌, 인공적으로 서클을 만들어낸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대다수의 정령은 모너클과의 계약을 꺼렸다.
알레시아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쉬움을 참아내며 플로리아의 정령에게 손을 흔들었다.
레이가 그 광경을 지켜보다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
레이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플로리아가 정령을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깊게 숨을 들이쉰 플로리아가 마음을 다잡았다.
'내 것이, 아니야.'
플로리아는 어린 시절 잘못 맺은 계약 탓에 정령의 감정을 '일방통행'으로 '여과 없이' 전달받았다.
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정령의 감정이 여과를 거치지 않고 머릿속을 파고들면 정령술사는 그 감정의 주체가 본인인지 정령인지 판별할 수가 없다.
때문에 플로리아는 정령과 계약을 맺은 그 순간부터 '정령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분별치 못하고 혼란 속에서 살아왔다.
지금도 플로리아는 알레시아를 향해 어떤 살인 충동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는데.
이런한 충동이 정령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악한 본성을 본인이 타고난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니야, 이건 내 것이 아니야.'
남 몰래 혀를 씹어가며 스스로를 설득한다.
플로리아는 비교적 최근 들어서야 모든 충동을 짓누르고 이성만을 날카롭게 세워 돌발적인 행동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으나.
잠깐만 정신을 흩트려도 정령의 욕구에 공명해 꼭두각시 놀음을 해야했다.
"차 향이 좋네."
플로리아는 주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헤집는 걸 느끼며 알레시아를 향해 활짝 웃었다.
유쾌하고, 공포스러운 나날이었다.
*
레이가 입을 열었다.
"플로리아, 죽여도 됩니까?"
"크흡..."
차를 마시던 백작이 잠깐 침묵하더니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았다.
"자중하게."
몇 년 사이 백작은 레이의 화법에 꽤 익숙해졌다.
방금 전 질문도, 플로리아에게 어떤 하자가 있고, 그걸 감당키 힘든 상황이 찾아왔을 때 내가 플로리아를 제거해도 되겠느냐는 의미가 담겨 있을 터다.
허나 레이의 저의를 고려해도 허락해주기 힘들었다.
"플로리아는 오시리스 백작의 독녀로서 많이 사랑받고 있네.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간단히 덮고 지나갈 수는 없을 거야."
백작은 찻잔을 옆으로 치운 후 허리를 살짝 기울였다.
"무엇이 문제인가?"
레이는 가감 없이 본인과 지미가 겪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라는 일이 있었는데, 그 '짓궂은 장난질'이 필립스 백작령을 벗어나서도 이어지거나 심해지면, 더 나아가 알레시아가 장난질의 표적이 된다면 조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후우."
드물게 한숨을 내쉰 백작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까 고민했네만, 역시 그대도 알아두어야겠군. 지금부터의 대화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주의하게."
"알겠습니다."
"플로리아는 '네추럴'일세."
네추럴은 서클의 축복을 타고난 자를 가리킨다.
모너클과 반대되는 개념이었다.
"그대가 보호하고 있는 루나라는 아이와 같지. 재능이야 플로리아 쪽이 떨어지겠지만."
"뭐, 그렇겠지요."
"헌데 과거, 플로리아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잠시 돌았네. 공식적으로 확인된 정보는 아니지만, 아마 사실일 걸세."
플로리아는 좋은 재능을 타고난 것에 비해 외부 활동이 굉장히 늦었다.
또한 오시리스 가에선 최대한 숨기려고 했지만, 플로리아가 기행을 벌인다는 소문이 최근까지 간간히 주변 영지에 들려오고는 했다.
레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문제라면 어떤...?"
"어린 나이에 멋대로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고 하네. 제대로 된 계약은 아니었겠지. 추측이지만, 플로리아는 정령과의 계약에 묶여 정령에게 휘둘리고 있는 상태일 확률이 높네."
"흠..."
레이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로커스트 토벌 이후, 레이는 정령사와 정령에 관한 정보를 많이 찾아봤다.
레이는 천천히 머릿속의 정보를 되새겼다.
마법사는 서클을 지닌다.
서클의 심부엔 영혼과 긴밀하게 연결된 일부 구간이 존재하는데, 이를 '셀로미어'라고 부른다.
셀로미어엔 상호 간의 합의를 거쳐 '계약 각인'을 새길 수 있다.
계약 각인은 서클 소유자 간에 중대한 합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활용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정령 혹은 악마와 계약을 맺기 위해 사용한다.
계약 각인을 합의 없이 파기하면 각인이 새겨진 셀로미어가 통째로 증발함은 물론, 계약 내용에 따라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개인 편차가 있지만 셀로미어의 용량은 한정되어 있다.
정령과 계약을 맺을 경우, 강력한 정령일수록, 또한 복잡하고 강제력이 강한 계약일수록 더 많은 셀로미어의 용량을 필요로 한다.
셀로미어에 각인이 가득 차면 더는 계약 각인을 새길 수 없다.
로커스트의 경우 굉장히 방대한 용량의 셀로미어를 타고났고, 때문에 그토록 강력한 암흑정령사가 될 수 있었다.
'정령과의 계약을 잘못했다라...'
계약 각인은 상호 합의 아래 이루어진다.
더군다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없었다.
허나 약간의 우회를 통하면 불공정한 계약이야 얼마든지 맺을 수 있었고 이에 대한 예시는 굉장히 많았다.
그렇기에 귀족가에 '네추럴'이 태어나면 함부로 정령이 접근하지 못하게 예의주시하는데, 오시리스 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플로리아에게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제가..."
"그래, 그대가 플로리아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있겠지."
백작이 말을 이었다.
"허나 나서지 말게."
"알겠습니다."
오시리스 백작가 측이 먼저 도움을 청했다면 모를까.
괜히 나섰다가 일이 꼬이면 수습할 수도 없고, 설령 일이 잘 풀린다 해도 플로리아가 적반하장으로 나올 가능성도 충분했다.
레이에 관한 정보가 유출됨은 당연하고 말이다.
백작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하지만."
"?"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플로리아에게 '조치'를 취하게."
백작은 알레시아와 레이를 위해 무리해서 황실 마탑에 유학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문제는 유학 기간 동안 알레시아와 레이가 플로리아와 동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학을 성사시키기 위한 조건이었지만, 백작 또한 불안정한 상태인 플로리아를 경계하고 있었다.
"플로리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 가능하겠나?"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어 확답은 못 드립니다. 일단 해봐야 알지 알겠습니까."
"현명하게 처신해줄 것이라 믿네. 문제가 생기면 최대한 그대를 변호해 줄 테니, 조치를 취할거면 확실하게 '마무리'하게."
"마무리요."
레이가 턱을 긁적였다.
"아시겠지만, 마무리를 위해선 알레시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허락하겠네."
"알겠습니다."
레이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레이는 정령과의 계약과 관련하여 실험해보고 싶은 게 몇 개 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유보하고 있었다.
'정령과의 계약은 본래 굉장히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지.'
일단 서클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네추럴이어야 했다.
모너클도 계약 각인은 가능했지만 대부분의 정령이 모너클을 배척했다.
운 좋게 네추럴로 태어났다고 해도 정령과 접촉해 계약 조건을 조율하고 계약 각인을 맺기까지는 보통 굉장히 험난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으흐흐..."
레이의 전생에서는 이런 농담이 있었다.
총 들고 협상했냐?
프로 스포츠 팀이 값비싼 선수를 굉장히 싼 값으로 영입했을 때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종종 쓰이는 표현이었다.
'아, 재밌을 거 같은데.'
마법사와 정령이 계약을 맺을 때는 서로에게 물리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단이 없다.
때문에 멋모르는 인간을 정령이 등쳐먹는 경우가 아니면, 마법사와 정령은 조건이 맞는 상대를 찾아 떠돌거나 오랜 시간에 거쳐 계약을 조율하고는 했다.
하지만 총이든 검이든 대가리에 들이대고 계약을 조율할 수 있다면.
"으흐흐흐, 크음!"
레이는 실실 쪼개다 말고 백작의 눈치를 보고 헛기침을 했다.
플로리아는 여러모로 레이가 정령에 대한 '실험'을 해보기 적절한 대상이었지만 레이 또한 다짜고짜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레이는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플로리아가 먼저 선을 넘지 않는 이상 레이 또한 칼을 들이대진 않을 터다.
때문에 백작과 레이 둘 다 예상하지 못했다.
마탑으로 출발한 지 며칠도 안 되어.
레이가 플로리아를 거꾸로 매달아 묶어놓은 후 뺨을 후리게 될 줄은.
*
백작과 대화를 끝낸 레이가 기지개를 피며 영주성을 나섰다.
사흘 뒤면 필립스 백작령을 떠나야 했다.
레이는 턱을 매만지며 단기 유학을 떠나기 전 해결해야 할 일이 더 있나 고민했다.
'...굵직한 건 다 해결했지?'
이제 마지막으로 자작령을 한번 둘러본 후.
보육원 아이들에게 몇 개월 여행을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단기 유학 사실을 보육원 아이들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은 건, 아이들이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고집을 부릴까 걱정돼서였다.
'무조건이지.'
보육원 운영하며 애들이랑 워낙 지지고 볶은 탓에 이제는 애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빤히 예상이 갔다.
단체로 징징거리는 꼴을 보는 건 하루 이틀이면 족했다.
레이가 끌끌 혀를 차며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 옷깃을 잡아왔다.
돌아보니 요하나였다.
"?"
레이가 당황했다.
요하나는 오래 울기라도 했는지 눈 주위가 퉁퉁 부어있었다.
레이가 다급히 요하나의 어깨를 잡아채며 무슨 일이 있었나 물어보려는데 요하나가 선수를 쳤다.
"...했어요."
"뭐?"
"잘못했어요."
"?"
레이가 당혹에 빠져 눈을 깜박이자 요하나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잘못했어요. 흐에에엥... 그러니까 떠나지 마요. 흐윽!"
"???"
갑작스럽게 뒤바뀐 요하나의 태도에 레이가 인상을 찌푸리다 간신히 상황을 이해했다.
'누가 알려줬구만. 몇 달 떠나있는다고.'
굉장히 어처구니없긴 했다.
평소에는 그리 틱틱대던 애가 길어봤자 네다섯 달 떠나 있는다고 하니 태도가 이리 바뀐다고?
'사춘기 애들 상대하기 진짜 더럽게 어렵다.'
레이가 고개를 저으면서도 요하나가 하는 짓이 귀여워 싱글벙글 웃으며 되물었다.
"떠나지 말까?"
"흐윽! 잘못했으니까, 떠나지 마요. 앞으로 말 잘 들을게요. 흐아앙..."
'크으.'
레이가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이렇게 질질 짤 거면 평소에 말 좀 잘 듣지 그랬냐.
레이는 요하나를 달래줄까 고민하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수모를 떠올리곤 생각을 고쳐먹고 짝다리를 짚었다.
"싫은데?"
"...으끅!"
차갑기 그지없는 레이의 목소리에 요하나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허나 이미 신이 나버린 레이는 이제껏 요하나가 그래 왔듯, 끝까지 삐딱선을 탔다.
"나 떠날 거야. 요하나가 말 안 들어서 도망가는 거야."
"흐아아아아앙!"
요하나가 오열하며 레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