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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52화 (52/446)

경고 (2)

52화

매가 약이란 말이 있긴 하다만.

아이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데 있어 폭력적인 수단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님은, 레이 또한 전생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만약 레이가 고아들을 모아 사조직이라도 만들어 세력을 넓힐 생각이었으면 폭력으로 군림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겠으나.

레이의 목적은 거악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가 비뚤어지는 걸 막고, 영웅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가 재능을 꽃피워 사명을 이룰 수 있게 돕는 것이었다.

그래야 이 멸망이 예정된 세계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겠는가.

물론 레이는, 아이들이 영 엇나간다 싶으면 쥐 잡듯이 쥐어패기도 했다.

헌데 요하나는 평소에는 멀쩡하면서 레이를 만날 때만 삐딱선을 탔다.

왜 나한테만 띠겁게 구느냐고 쥐어패기도 뭐해 지금까지 참고 있었는데, 레이는 슬슬 꼭지가 도는 걸 느꼈다.

"야이씨, 너 일로 와 봐."

"싫은데? 올 거면 네가 오든가. 자기가 뭔데 오라 가라야. 짜증 나게."

"...으흐흐흐흐흐."

레이의 입가에서 귀기 서린 웃음이 흘렀다.

레이가 목을 45°쯤 꺾은 채 성큼성큼 다가오자 잠시 움찔한 요하나가 이내 미간을 찌푸린 채 툴툴댔다.

"꼬맹이 주제에 맨날 어른 흉내나 낸...!!"

꽈앙!!

"액욱?!"

갑작스러운 충격에 시야가 흔들린 요하나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요하나의 정수리에 꿀밤을 먹인 레이가 연거푸 주먹을 들어 올렸다.

"먹여주고!"

꽈앙!!

"재워주고!"

꽈앙!!

"가르쳐 놨더니...!!"

꽈앙!! 꽈앙!!

"이렇게 뒤통수를 쳐?!"

꽈앙! 꽈앙! 꽈앙!

"아악!! 아악!! 아악!!"

잇따라 꿀밤을 얻어맞던 요하나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빽 소리쳤다.

"내 몸에 멋대로 손대지 마!"

"내가 해준 게 얼만데!! 성장판까지 박박 갈아가며 등 따숩게 키워놓으니까 이제 와서 나를 무시해?!"

"내가 틀린 말 했어?! 너 꼬맹이 맞잖아!"

요하나가 떽떽거리며 레이의 주먹을 피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허나 레이는 귀신같이 요하나의 움직임을 쫓아가 계속해서 정수리 위에 주먹을 적중시켰다.

요하나는 지금까지 배워왔던 무술을 총동원해 레이에게 반항했지만, 레이는 어렵지 않게 요하나의 머리카락을 붙든 채 좌우로 흔들며 괴성을 질렀다.

"나한테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말을 해!! 말을!!"

"아악!! 이거 놔아!!"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보라고오!!"

결국 옆에 있던 카렌이 요하나와 레이를 말리기 위해서 두 팔을 파닥이며 끼어들었고.

루나는 볼을 부풀린 채 가만히 서서 꽥꽥대는 레이를 구경했다.

그 난장판을 지켜보며 하무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근본 없는 귀족가는 처음 보는군."

후계자는 신분 천한 놈이랑 놀아나고 있질 않나.

기사들은 보육원에 가서 검을 가르치고 있고, 기사에게 검을 배웠다는 놈들에겐 규율과 품위를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혀를 찬 하무스가 역시 신분은 못 속인다며 한 마디 덧붙이려는 순간.

뒤에서 목 가다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음!"

고개를 돌리니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 피코르가 서 있었다.

침음을 삼킨 피코르는 요하나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는 레이에게 소리쳤다.

"그만하거라!"

피코르의 목소리가 들리자 레이는 곧장 손을 놓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요하나 또한 씩씩거리면서도 자세를 바로 하고 피코르를 바라봤다.

피코르는 둘을 향해 한소리 하려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포기하고 빅토르와 하무스를 돌아봤다.

빅토르와 하무스가 살짝 허리를 숙이며 예의를 표했다.

피코르가 입을 열었다.

"지나가다 들었다. 대련을 나누겠다고?"

"원치 않으시면, 없었던 이야기로 하겠습니다."

속내야 어찌 됐든 하무스는 꽤 겸손하게 답했다.

며칠 전 레이가 깽판을 친 이후부터 책잡힐 일은 최대한 줄인 하무스와 빅토르였다.

잠시 고민한 피코르가 요하나에게 다가갔다.

"다른 검식을 익힌 또래들과 검을 나누다 보면 깨닫는 게 또 있을 거다. 대련을 한 번 해보겠느냐?"

"알겠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요하나를 보고 레이가 뒷목을 잡았다.

차라리 사람 안 가리고 지랄을 하면 덜 꼬울 텐데, 왜 나한테만 지랄일까?

거품을 물려는 레이를 애써 무시한 피코르가 가까운 공터 방향을 가리켰다.

"따라오너라. 적당한 장소가 있다."

*

"사람은 더 안 부를 거냐?"

공터로 향하는 길에 하무스가 레이에게 물었다.

구경꾼 부르자는 소리에 잠시 눈을 깜박인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피코르 경께서 참관해주시는 걸로 족하지. 사람을 더 부를 필요가 있겠어?"

"겁쟁이 놈."

얕은 도발에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빅토르와 하무스에게 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 굳이 창피를 줘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애들 상대라고 너무 방심들 하지 마."

"아까부터 지껄이는 실없는 소리, 도발이라고 하는 거냐?"

"카렌과 요하나가 만만해 보이는 건 아는데..."

신분 천하고 나이 어리고 얼굴 예쁘장한 여자애들이다.

직접 붙어보기 전까지는 낮추어보는 마음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기사님들이 꾸준히 검술을 가르쳐 온 아이들이야. 재능이 없다면 기사님들도 진즉 그만두셨겠지. 너무 마음 놓고 있다가 식겁하지 말고, 긴장 좀 하라고."

"..."

하무스가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말싸움을 이어가면 필립스 가의 기사들을 모욕하는 모양새가 될 터다.

말을 아껴야 했다.

한편 빅토르는 노골적으로 카렌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꼴깝 떤다 싶긴 했으나 레이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빅토르가 아니더라도 근래 들어 카렌의 뒤를 쫓아다니는 남자아이들이 많아졌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니 선을 넘지 않는 이상 먼저 손댈 문제는 아니었다.

공터에 도착한 후, 빅토르의 열렬한 바람에 따라 카렌의 대련 상대는 빅토르로 정해졌다.

레이가 카렌과 요하나에게 충고했다.

"처음 30초 정도는 방어적으로 검을 운용해봐."

빅토르와 하무스는 여전히 카렌과 요하나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초장부터 공세를 가한다면 당황해서 제 실력을 못 낼 가능성이 컸다.

'애들 경험 쌓아야 하는데 니들도 실력 발휘는 해 줘야지.'

카렌과 요하나가 30초간 수세를 취한다면 저쪽도 카렌과 요하나의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파악할 수 있을 터다.

레이의 충고에 카렌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물론 요하나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피코르가 레이의 눈치를 보다가 레이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30초 간은 수세를 취하거라."

"알겠습니다."

순순히 답하는 요하나를 보고 레이가 다시 뒷목을 잡았다.

이윽고 공터 중앙에서 빅토르와 카렌이 서로를 마주 보고 검을 뽑았다.

빅토르가 고개를 까닥였다.

"잘 부탁 할게.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테니까 너무 겁먹지는 말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검날에 안전장치를 씌운 걸 확인한 피코르가 한발 물러섰다.

"시작하도록."

대련이 시작됐지만 곧장 쇳소리가 울려 퍼지진 않았다.

빅토르가 가만히 서서 카렌을 바라봤다.

카렌이 움직임에 방해되는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등 뒤로 내린 탓에, 하얀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나 빅토르의 눈을 어지럽혔다.

잠시 입을 벌리고 있던 빅토르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검을 다잡았다.

카렌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카렌이 겁을 먹었다고 여긴 빅토르는 평소의 반도 안 되는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그제야 카렌이 움직였다.

카앙!

"오...!"

생각보다 잘 막아낸다.

빅토르는 조금 안심하며 한 단계씩 검속을 끌어올렸다.

카앙! 카가각!!

잘 막는다. 되게 잘 막는다.

생각보다...

'너무 잘 막는데?'

검을 좀 느슨하게 휘두른 감이 있다 해도, 카렌은 완벽하게 빅토르의 공격을 막아내는 중이었다.

흐물거리던 빅토르의 입가가 진중해졌다.

'검을 제대로 배웠군.'

레이가 그토록 자신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빅토르가 본격적으로 검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카앙!

빅토르의 공격을 좌측으로 밀어낸 카렌이 빅토르의 겨드랑이 아래를 기습적으로 찔렀다.

허나 빅토르는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조금 틀었다.

기긱!

카렌의 찌르기가 빅토르의 어깨 갑옷을 미세하게 긁고 지나갔다.

카렌이 황급히 검을 거둔다. 허나 빅토르가 한발 빠르게 카렌의 허리를 베어왔다.

까앙!!!

묵직한 일격을 검면으로 막아낸 카렌이 지면을 굴렀다.

빅토르는 한 번 잡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카렌을 추격해 검을 내리그었다.

카가각!!

카렌은 또다시 지면을 굴러야 했다.

오시리스 가의 검술은 직선적이고 공격적이며 강맹하다.

반면에 필립스 가의 검술은, 수세를 유지하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검식이 많았다.

상성을 따지자면 필립스 가의 검술이 조금 우세했으나.

빅토르와 카렌은 실력 차가 분명하게 났다.

까강!

"윽...!"

카렌이 힘겨운 신음을 흘렸다.

우직하고 직선적인 빅토르의 공격은, 막아낼 때마다 무슨 돌덩이를 치는 것 같았다.

손아귀과 워낙 아려오는 탓에 어떻게든 빅토르의 검을 흘려내 보려 노력했지만 아직 기교가 부족했다.

결국 카렌은 공격 한 번 적중시키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밀려났다.

빅토르가 카렌에게 숨을 고를 시간을 주지 않았더라면 벌써 검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만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카렌은 아직 13살이었고, 체중과 근력이 빅토르에 비해 한참 떨어졌다.

그럼에도 정면에서 빅토르의 검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나이에 비해 대단한 기량을 보여준 셈이었다.

대련은 5분 정도 더 이어졌다.

끝에 갈수록 카렌의 검이 흔들리더니, 결국 카렌이 검을 놓쳤다.

까앙!

"아윽!"

검을 놓친 카렌이 지면에 주저앉았다.

허나 빅토르는 카렌을 비웃긴커녕 진심으로 감탄한 얼굴로 탄성을 삼켰다.

"좋은 대련이었다."

빅토르가 검을 집어넣은 후 카렌에게 손을 뻗었다.

카렌이 손을 잡고 일어서자 빅토르의 입꼬리가 흐물흐물 풀렸다.

카렌은 아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정말 강하시네요."

"너도 훌륭했어. 이름이 카렌이라고 했나?"

"네."

"큼, 그 나이가 어떻게 되지?"

"열셋이요."

"그래, 열셋... 뭐? 열셋?!"

내심 카렌을 열여섯 정도로 생각했던 빅토르가 입을 쩍 벌렸다.

뭐야, 나 지금 나보다 4살은 어린 꼬맹이한테 반한 거였어?

아니, 그보다 열셋 먹은 소녀가 내 검을 정면에서 받아내며 5분을 버텼다고?

아이들은 하루하루 발전한다.

카렌이 1년만 더 검을 단련해도 지금의 빅토르에게 밀리지 않고 검을 겨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카렌의 잠재력을 깨달은 빅토르가 탄식했다.

"...허언이 아니었군."

필립스 가의 기사들이 명예와 부끄러움을 몰라 보육원에서 검술을 가르치는 게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무스가 빅토르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낮게 속삭였다.

"야이 병신아, 지금 뭐하자는 거야? 아까부터 좀 불안하더니, 여자라고 헤벌레거리며 봐준 거냐?"

"아, 아니..."

카렌이 숨을 돌릴 시간을 주기는 했지만.

처음 몇 번을 빼고는 검을 휘두를 때 크게 손대중을 하지 않았다.

허나 하무스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는지, 하무스가 이빨을 갈며 분개했다.

"저 새끼 콧대 좀 꺾어주자고 했더니 여자한테 눈이 돌아가서 일을 망쳐?"

"어, 그, 미안."

빅토르가 순순히 사과했다.

같은 스콰이어 신분이었지만 하무스가 나이도 하나 많고 실력도 더 좋았다.

빅토르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자 하무스가 어깨를 옆으로 밀치며 공터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바로 시작하지?"

하무스는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어깨 아래에 오는 계집 같은 건 단번에 날려버리고, 레이와 대련을 펼쳐 반드시 다리 하나는 부러뜨려 줄 생각이었다.

하무스와 요하나가 마주 서자, 재차 검날에 채워진 안전장치를 확인한 피코르가 뒤로 물러섰다.

"시작하도록."

콱!

하무스가 곧장 앞으로 돌진했다.

요하나의 명치를 겨누고 있던 검이 땅으로 꺼지더니, 하무스의 오른발이 지면을 찍어누름과 동시에 사선으로 베어 올려졌다.

요하나가 흉갑을 착용하고 있음을 감안해, 정말 일말의 손속도 두지 않은 일격이었다.

하무스는 이번 일격으로 요하나의 흉갑이 찌그러지며 요하나가 땅을 구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요하나는 쇄도하는 하무스의 공격을 차분히 지켜보더니, 검을 반시계방향으로 살짝 회전시켰다.

카각!

요하나의 검과 맞닿은 하무스의 검이 제멋대로 하늘로 치솟더니 요하나의 머리 위를 간발의 차로 스치고 지나갔다.

"?!"

삽시간에 허공을 베어버린 하무스가 관성을 이용해 한 바퀴 회전하며 뒤로 물러났다.

억지로 몸을 멈춰 세우려 했다면 더욱 큰 틈을 내주었을 것이다.

하무스의 판단은 현명했으나, 지금 그따위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무스가 얼이 빠진 채 요하나를 바라봤다.

'요행인가?'

아니다.

요행이 아니다.

요하나는 대련이 시작되고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차분한 얼굴로 하무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무스는 등골을 타고 오르는 한기를 느끼며 검을 다잡았다.

그꼴을 보며 레이가 낄낄거렸다.

"어이, 하무스."

"?"

"정신 바짝 차려."

네 상대는 '유니크'니까.

레어와는 다르다. 레어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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