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50화 (50/446)

건방 (2)

50화

갑작스럽게 뽑혀나온 검에 모두가 당황했다.

멘데스는 물론이고 동료 기사인 아벤시오까지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그보다 한발 앞서 디디에와 젠킨슨이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차가운 침묵 속에서, 쇠 긁어내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끼기기기긱

레이의 검이 멘데스의 흉갑을 타고 오른다.

점점 목덜미로 다가오는 검 끝을 의식하며, 멘데스가 디디에와 젠킨슨을 돌아봤다.

둘 모두 레이를 말리긴커녕 언제든지 발검이 가능토록 허리를 뒤튼 채 검 자루를 잡고 있었다.

충분한 명분을 쥐고 있지 않는 이상 저리 강맹하게 나올 리가 없다.

그제야 멘데스는 상황을 되돌아봤다.

스콰이어가 기사를 모욕하고, 먼저 검을 뽑아 위협을 가한 건 상상키 힘든 무례가 맞았다.

허나 레이는 멘데스가 알레시아에게 무례를 범한 것을 명분 삼아 검을 뽑았다.

백작위 계승이 예정된 귀족에게 기사가 함부로 무례를 범한 것.

이건 스콰이어가 기사에게 칼을 뽑아 휘두른 것보다 훨씬 중대한 사안이었다.

문제를 삼지 않았다면 괜찮았다.

레이가 나서지 않았다면 알레시아는 상황을 웃어넘겼을 터다.

디디에와 젠킨슨 또한 주제넘게 나서지 않고 조용히 알레시아의 곁을 지켰겠지.

허나 레이가 검까지 뽑아들며 멘데스의 무례를 문제 삼은 순간.

멘데스는 이에 대해 반드시 해명해야 했다.

멘데스에게 레이가 행한 무례를 지적하는 건 그다음 순서였다.

헌데도 멘데스가 순서를 지키지 않고 레이에게 역정을 낸다면.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은 멘데스의 행동을 알레시아를 향한 모욕이라 판단하고 곧장 검을 뽑아들 것이다.

디디에와 젠킨슨은 검 자루에 손아귀를 올림으로써 그러한 뜻을 드러내고 있었다.

'감히 이것들이...!'

오시리스 가는 필립스 가보다 몇 배는 강대한 가문이다.

때문에 오시리스 가의 사람들이 가벼운 무례를 저질러도 필립스 가는 적당히 눈을 감고 넘어갔었다.

'헌데 갑자기 태도를 바꿔?'

멘데스는 분노했으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자존심 세우겠다고 검을 뽑아 백작가 영애들 앞에서 칼부림을 했다간 정말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플로리아가 나서서 레이를 타박한다면 당장은 상황을 무마할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필립스 가의 적통한 후계자를 향한 모욕을 플로리아가 승인한 모양새가 되어 버린다.

고작 기사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플로리아가 그러한 정치적 부담과 오명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끄득!

멘데스가 목덜미에 닿기 직전이었던 레이의 검을 손으로 멈춰 세웠다.

잠시 레이를 내려다본 멘데스가, 알레시아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눈치를 보던 빅토르가 황급히 멘데스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알레시아는 은근히 상기된 얼굴로 히죽거리더니, 이내 손을 저으며 관용을 베풀었다.

"괘념치 말거라. 나는 마음이 넓으니, 사소한 무례쯤은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멘데스가 앓는 소리를 삼켰다.

알레시아는 멘데스의 무례를 사소하다 치부하며 용서했다.

이제 와서 멘데스가 '더 작은 무례'를 범한 레이를 타박했다간 꼴이 이상해진다.

더군다나 알레시아가 대놓고 나의 기사라고 자랑한 스콰이어 아닌가.

굉장히 자존심 상했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저 빌어먹을 놈이...'

상황이 이리 돌아갈 걸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턱을 찢어놓니 뭐니 건방을 떤 것일 터다.

멘데스가 혀를 씹어가며 다시 한 번 알레시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알레시아는 세상 흡족한 얼굴로 레이를 바라봤다.

'역시 나의 기사는 다르구나!'

암, 주인이 모욕을 당했으면 저리 먼저 나설 줄도 알아야지.

알레시아가 흐뭇한 감정을 드러내는 동안 플로리아는 한 발 떨어져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레이를 살폈다.

어쨌든 더는 교류를 진행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시리스 백작가 측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젠킨슨이 탁자 위에 흐른 다과를 집어들며 속삭였다.

"근데 레이 저놈이 위계 운운할 처지냐? 툭하면 아가씨께 이년 저년 하고 다니는 놈이?"

이년 저년에서 끝나면 또 몰라.

알레시아의 이마에 딱밤을 쳐대는 걸 기사들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옆에 서 있던 디디에가 침음을 흘리더니 머쓱하게 답했다.

"아가씨께서도 좋아하시니 된 거 아니겠습니까."

"기사도를 숭상하는 네게 그런 말도 다 들어 보는군. 보통 하극상이 아닌데."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사람마다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게 썩 명예로운 일은 아니다만.

디디에 말마따나 상대가 상대였다.

젠킨슨이 고개를 저었다.

허나 투덜대는 젠킨슨의 입가에는 은은한 웃음이 맺혀있었다.

어쨌든 레이는 알레시아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 검을 뽑았다.

남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레이의 등이 꽤 든든하게 다가왔다는 걸 젠킨슨은 인정하기로 했다.

*

일련의 과정을 영주성 안에서 지켜본 필립스 백작이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백작은 지난 몇 년 동안 레이의 성정을 꽤 정확히 파악해 놓았다고 자부했다.

루나를 구하기 위해 그 지랄을 떨었던 것 하나만으로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지만, 레이는 '자기 사람'을 굉장히 아꼈으며 직접적으로 표현을 안 할 뿐이지 정도 많았다.

때문에 최근 4년.

알레시아가 레이를 쫓아다닐 동안 백작은 알레시아를 말리기는커녕 뒤에서 은근히 부추기기까지 했다.

정이라는 게 본디 얼굴 보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연스럽게 붙는 것이다.

더군다나 알레시아가 어디 미색이 떨어지는 아이던가.

약간 맹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다들 그런 모습조차 귀여워할 만큼 굉장히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레이가 대단히 특이한 감수성을 지니지 않은 이상 내심 알레시아를 마음에 들어 할 거라고 백작은 아비로서 자신했다.

물론 백작도, 한때는 알레시아가 레이를 따르는 걸 경계했다.

백작은 레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비범한 인물이 되리라는 걸 직감했지만, 그렇다 해도 신분이 너무 천했다.

알레시아가 레이를 가까이한다면 추문이 붙는 건 금방이었다.

때문에 백작은 알레시아를 통제해 레이와 너무 가까워지는 걸 막았었다.

"멍청한 판단이었지."

추문 따위 붙어도 상관없다.

귀하게 키운 딸인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푹 빠져 해롱거려도 문제없다.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있어 '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백작은 그걸로 족했다.

레이가 알레시아에게 푹 빠져 같이 해롱거려주면 더욱 좋았고.

성년이 된 알레시아의 곁을 레이가 지키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 백작의 입 꼬리가 이리저리 뒤틀렸다.

"내 사위가 누구?"

제국 역대 최연소 소드마스터.

"크읍...!"

흐물거리는 입가로 웃음을 터뜨린 백작이 품위를 지키기 위해 자세를 다잡았다.

아직은 너무 앞서 간 생각이었다.

어쨌든 레이의 존재는 알레시아에게 필요했다.

필립스 백작가의 '맹약'이 마무리되면 잠깐은 혼란이 찾아올 터다.

이때 레이가, 어떤 형태로든 알레시아의 힘이 되어준다면 백작가는 빠르게 안정을 찾고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이야 필립스 가의 적통한 후계자가 천민과 놀아난다는 추문이 좀 돌겠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레이는 현 시점에서 그래듀에이트의 경지를 목전에 두고 있었고.

전투 기량만 따지면 이미 완숙한 그래듀에이트를 정면에서 상대할 수 있었다.

이대로 나아가면 레이는 서른이 되기 전에 마스터의 경지에 닿는다.

그때가서도 신분 운운하며 레이와 알레시아를 무시할 수 있을까?

턱이 찢겨나가고 싶지 않으면 다들 알아서 바닥을 기어 다닐 거다.

"참으로 든든하군."

레이가 검술에 관한 재능만 타고 났다면 백작은 이토록 쉽게 알레시아의 곁을 레이에게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레이는 충분히 똑똑하고 넓은 시야를 가진 아이였다.

방금만 해도 그렇다.

레이가 흥분을 주체 못하고 눈이 뒤집혀 칼을 뽑았을까?

아니다.

본인의 명분이 멘데스보다 앞선다는 분석이 끝났기에 거침없이 칼을 뽑은 거다.

결과적으로 레이는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알레시아의 체면을 살리고 멘데스에겐 굴욕을 주었다.

"현명한 아이지."

거기에 정도 많고 받은 은혜도 쉽게 잊지 않으니, 설령 알레시아와 사이가 틀어지더라도 백작가가 곤란에 빠지면 반드시 손을 내밀어 줄 터다.

"...사고 방식과 수단이 좀 과격할 때가 있긴 하다만."

사람이 어찌 완벽하겠는가.

백작이 커튼을 다시 닫고 등을 돌리는데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출입을 허하자 지미와 매튜가 안내를 받고 집무실에 들어왔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식용 검을 허리춤에 찼다.

명예 작위는 황제의 인가를 받은 수훈이다.

전달할 때도 격식을 지켜야 했다.

*

주변의 눈이 사라진 걸 확인한 빅토르가 멘데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되었다. 네 잘못이 아니니."

"아닙니다. 벌을 내리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

침묵을 지키는 멘데스 대신 아벤시오가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입조심 하거라. 이곳은 필립스 백작의 영지다. 필립스 가의 기사들이 건방을 떠는 꼴이 눈꼴시렵긴하나, 기강을 잡으려거든 영지를 벗어나서 하는 게 옳다."

"알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 종자의 건방은 선을 넘었구나."

빅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출신도 천한 스콰이어가 멘데스에게 치욕을 주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데, 이번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게 다름 아닌 빅토르 자신이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빅토르가 의지를 다졌다.

"반드시 손 봐주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를 후려팰 방법이야 많았다.

검술을 나누자며 대련을 신청해 자리를 만드는 게 가장 깔끔하겠다만.

막말로 지나가던 레이를 다짜고짜 후려팬다해도, 아예 불구를 만들지 않는 이상 그다지 큰 징계를 받을 일은 없었다.

그때 멘데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 마라."

"예?"

빅토르가 당혹스럽게 되묻자 멘데스가 분명히 말했다.

"필립스 백작 영애가 아끼는 자다. 괜히 문제를 일으키지 마라."

아벤시오가 실소를 터뜨렸다.

"백작위 계승자가 평민과 놀아나다니. 귀족의 수치로군. 필립스 가의 후계자 교육이 문제인가, 아니면 후계자가 사리분별도 못할 만큼 멍청한 건가."

"둘 모두 아니겠습니까."

아벤시오의 종자인 하무스가 맞장구쳤다.

빅토르도 따라 웃는데, 유일하게 멘데스 만이 표정을 굳힌 채 자기 흉갑을 바라봤다.

레이의 검이 훑고 간 흉갑 겉면엔 쇠가 긁힌 자국이 아주 얇게 남아있었다.

멘데스가 가슴과 맞닿아 있던 흉갑 안쪽을 다시 살폈다.

흉갑의 강철이 기포처럼 부풀어 올라 크게 팽창해 있었다.

검 끝으로 갑옷 내부에 마나를 주입해 팽창시킨 거다.

아까는 너무 흥분한 탓에 눈치채지 못했는데, 계속된 가슴 통증에 흉갑을 열어보니 이꼴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 수준의 기예를 부리려면 최소 엑스퍼트엔 근접해 있어야 한다.

끼기긱!

부풀어 오른 흉갑 내부를 손가락으로 짓누른 멘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괜히 출신 천한 아이를 스콰이어로 받은 게 아니군.'

기껏해야 14살일 텐데, 앞으로 2년 안에 엑스퍼트의 경지까지 발전할 게 확실했다.

또래 중엔 손꼽히는 기재일 게 분명했다.

"필립스 백작령을 떠날 때까지는 조용히 대기하도록."

멘데스는 굳이 동료 앞에서 남의 스콰이어가 지닌 재능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 스콰이어가 본인에게 굴욕을 선사한 녀석이라면 더더욱.

빅토르는 불만을 품으면서도 멘데스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며 순응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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