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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49화 (49/446)

건방 (1)

49화

플로리아가 필립스 백작가의 영주성에 방문했다.

젠킨슨이 시종들과 함께 예를 갖춘 후 플로리아를 영주성 안으로 안내했다.

영주성 정문에 멀거니 남게 된 레이와 지미가 서로를 쳐다봤다.

"아니, 레이...!"

살갗이 터진 레이의 뺨을 확인한 지미가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대체 어떤 귀인께서 네 얼굴을 이렇게 만든 거냐?"

레이가 자기 뺨을 쓰다듬더니 떫은 얼굴로 답했다.

"이번에 젠킨슨 경의 종자로 들어가게 되어서요."

"종자? 스콰이어 말하는 거냐?"

"그렇죠."

"그래서 뺨 한 대 얻어맞았고?"

"네."

"쯧쯧, 삼십 년 전만 해도 반나절은 몽둥이 찜질을 했다던데."

과거에는 스콰이어를 임명할 때 밧줄로 묶어놓고 반나절을 팼었다.

그 과정에서 골병이 들거나 아예 목숨을 잃는 스콰이어까지 나오자 점차 강도가 줄어들어 이젠 뺨 한 대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지미가 사라진 악습을 아쉬워하며 레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쨌든... 이제 천민 소리는 안 들어도 되겠네. 축하한다."

"그렇게 됐네요."

사실 천민과 평민을 나누는 정확한 기준이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배경 없고 직업이 천하면 대충 뭉뚱그려 천민이라 부르고는 했다.

다만 지미의 말마따나 스콰이어를 천민 취급하는 미친놈은 없었다.

지미가 썩 부럽다는 눈빛을 하고 있자 레이는 명예 작위 이야기를 해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미리 얘기하면 김 새잖아?'

아무것도 모른 채 백작에게 불려 가서 소식을 듣는 게 좀 더 극적일 터다.

속으로 낄낄거린 레이가 지미의 안색을 다시 살폈다.

"근데 오시리스 가의 영애님이랑은 어쩌다 동행하게 된 거예요?"

"그~게 말이다."

지미가 자기 팔을 더듬으며 추모비 앞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레이가 미간을 구기고 있자 지미가 실소했다.

"귀족에게 칼 던져놓고 몸 성히 돌아왔으니 자비에 감사해야 할 판이다."

"아니, 그게, 하아..."

레이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지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여긴 신분제 사회다.

원인 제공을 귀족이 했다 해도 지미가 앞뒤 안 가리고 검을 투척한 건 중죄가 맞았다.

쉽게 넘어가 준 게 다행이었다.

레이가 고생했을 지미의 등을 한 번 쳐주었다.

*

필립스 백작이 플로리아를 영접하는 동안 양 가문의 기사들이 정원에서 만남을 가졌다.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고, 남는 시간 동안 간단히 인사나 나누자는 취지였다.

오시리스 측에서 파견한 기사는 총 세 명이었다.

레옹, 멘데스, 아벤시오.

레옹은 현재 플로리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멘데스와 아벤시오가 종자를 데리고 정원을 찾아왔다.

영주성에서 대기하던 디디에와 젠킨슨이 그들을 맞이했는데, 둘 곁에는 레이가 뚱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필 눈에 띄어가지고.'

얻어 터진 뺨을 크게 부풀린 채 젠킨슨을 뒤따르는 모습을 보여버렸으니, 이제 와서 종자가 아니었다고 무를 수도 없었다.

다과를 앞에 둔 오시리스 백작가의 기사, 멘데스가 레이의 뺨을 바라보더니 젠킨슨에게 물었다.

"아이가 스콰이어로 임명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오?"

"...그렇소. 오늘 막 스콰이어로 임명된 참이오."

젠킨슨은 레이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얌전히 있어라.'

레이가 이유 없이 사고를 치진 않았으나, 어째 옆에 두고 있자니 영 불안했다.

한편 멘데스는 레이의 나이를 가늠하고 있었다.

얼추 12~14살 사이처럼 보였는데, 근래 스콰이어의 임명 시기가 빨라지는 추세라는 걸 감안하면 조금 늦은 나이였다.

멘데스가 레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갑구나."

"처음 뵙겠습니다. 멘데스 경."

악수를 마친 멘데스가 레이에게 물었다.

"혹시 귀족인가?"

"평민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가문의 사람인가?"

멘데스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이어갔다.

이는 무례가 아닌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평범한 평민'을 기사의 종자로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작위를 지닌 귀족이 자식들을 낳으면 그들 중 한 명에게만 작위가 계승된다.

작위가 없는 귀족들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들의 계급은 평민으로 내려간다.

계급이 평민으로 내려간 자들을 보통 '젠트리'라 칭하며, 준귀족 대접을 해주었다.

평민 계급의 아이가 스콰이어에 임명됐다면 대개 젠트리 계층이었다.

그러니까 멘데스는 레이를 젠트리 계층이라 생각하고 선대의 가문을 물어본 거다.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내세울 가문은 없습니다. 아비 없는 자식이었던지라."

"호오."

의미 모를 탄성을 터뜨린 멘데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어미는 있겠지? 어미의 직업이 어떻게 되나?"

"하하, 여기까지 하시지요."

젠킨슨이 레이가 입을 열기 전에 얼른 대화를 끊었다.

젠킨슨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이 새끼는 면전에 대고 자기 어미의 직업을 매춘부라 밝힐 놈이다.'

레이는 벨라의 직업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레이에게 있어 벨라는 성역이었고, 벨라가 지닌 직업 또한 마찬가지였다.

4년 동안 레이를 보아왔던 젠킨슨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새끼는 자기가 욕먹는 건 별로 신경 안 쓴다.'

허나 벨라가 모욕당하는 경우엔, 높은 확률로 눈이 돌아갔다.

이 자리에서 레이가 벨라의 직업을 밝힌다면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은 레이를 배려하긴커녕 이죽댈 게 뻔했다.

젠킨슨은 되도록 평화롭게 지금 순간을 넘어가고 싶었다.

"비록 평민이라 해도 좋은 재능을 가진 아이라오."

"어련하시겠소."

멘데스가 빈정거림을 숨기지 않았다.

네가 평민을 받고 싶어 받았겠냐? 네 밑에서 종자 노릇할 젠트리도 찾지 못했으니 마지 못해 출신이 천한 평민을 스콰이어로 받았겠지.

그런 의도가 잔뜩 담겨 있는 한 마디였다.

"하하..."

젠킨슨은 무시를 당하면서도 웃는 낯을 유지했다.

레이가 천연덕스럽게 다과를 집어 먹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오시리스 가의 기사들이 필립스 가의 기사들을 무시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놈의 맹약이 문제로군.'

필립스 가의 기사들은 함부로 외부에 실력을 노출하지 않았다.

티티를 보호하는 데 있어, 저력을 되도록 감추는 편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필립스 백작령과 엇비슷한 역량을 지닌 영지들은 고작해야 엑스퍼트 급 기사 서넛을 운용하는 게 한계였다.

필립스 가는 맹약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과도한 군사력을 유지했다.

그 부담 탓에 영지가 이렇게 쪼그라들었으니, 맹약만 벗어나면 기사 전력을 크게 축소할 확률이 높았다.

'이 체계가 600년이나 유지된 것도 대단하다, 진짜.'

역시 영웅의 후손이라는 것일까.

어쨌든 외부의 세력들은 필립스 가의 기사들을 기껏해야 엑스퍼트에 발을 디디다 만 반쪽 짜리 기사라 여겼다.

젠킨슨을 비롯해 필립스 가의 기사들은 한평생 그런 모욕을 웃어넘겼다.

레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젠킨슨을 향해 귓속말로 속삭였다.

"마스터, 배제할까요?"

"제발 그냥 닥치고 있어."

젠킨슨이 정색했다.

물론 레이도 농담이었다.

굵직하게 사고 친 게 많아서 평가가 박하긴 했지만.

기실 레이도 젠킨슨 만큼이나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했다.

오시리스 백작가 측의 이야기를 적당히 한 귀로 흘리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레이!"

알레시아가 손을 흔들며 플로리아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알레시아는 누가 봐도 신이 나 있었다.

'플로리아가 나의 영주성에 찾아오다니!'

비록 성격은 좀 나쁘지만, 플로리아는 알레시아가 과거부터 교제해 왔던 몇 안 되는 또래였다.

항상 알레시아가 일방적으로 오시리스 가를 왕래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플로리아가 필립스 가를 찾아왔다.

알레시아는 플로리아에게 정말 자랑하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갑작스러운 백작가 영애들의 출현에 기사들이 황급히 예를 갖췄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알레시아가 레이를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플로리아, 이 자가 바로 나의 기사라네!"

레이는 골통이 아려왔다.

평소에도 '나의 기사'를 노래처럼 부르고 다니는 알레시아였지만.

설마 영주성을 찾아온 손님 앞에서도 나의 기사를 운운할 줄은 레이도 예상 못 했다.

뭐,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만큼 알레시아가 레이를 신뢰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증거였으니.

다만 남들에게 내보이기엔 레이의 신분이 많이 천했다.

'알레시아가 그걸 모를 것 같진 않고.'

저래봬도 알레시아는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천한 신분과 어울린다고 손가락질받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리 행동한 거다.

'백작이 대놓고 어울리라 밀어준 탓인가.'

레이가 한숨을 쉬는 사이 플로리아가 부채를 살랑이며 레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정말 이자가 네 기사라고?"

"아직은 스콰이어지만! 곧 나의 기사가 될 것이네!"

"그래?"

나이가 열여섯인 플로리아는 레이보다 시야가 꽤 높았다.

레이를 내려다본 플로리아가 한 차례 지나갔던 질문을 반복했다.

"귀족이니?"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평민입니다."

"어느 가문의 사람이니?"

"내세울 가문은 없습니다."

"...젠트리 계층이 아니란 말이니?"

"예, 맞습니다."

레이를 재차 훑어본 플로리아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조소했다.

"알레시아, 정말 이자가 네 기사가 맞니?"

"그러하다!"

"둘이 아주 잘 어울리네."

"정말 그러한가?"

알레시아가 얼굴을 붉히며 기뻐하자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알레시아님, 저거 비꼬는 겁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아무튼 잘 어울린다니 되었다."

해맑게 웃음 짓는 알레시아를 보고 레이의 입꼬리가 풀리려는 순간 옆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크읍!"

멘데스의 종자인 빅토리가 잠깐 어깨를 들썩였다.

멘데스는 빅토리를 타박하긴커녕 따라서 어깨를 들썩이다 헛기침을 했다.

웃음은 바로 그쳤으나, 젠킨슨과 디디에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여전히 해맑은 얼굴을 한 알레시아를 바라본 레이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플로리아는 알레시아보다 나이가 많았고, 오시리스 가는 필립스 가에 비해 다섯 배는 강대했다.

그럼에도 알레시아는 플로리아를 하대했다.

알레시아가 멍청해서 실수한 게 아니다.

플로리아는 머리 위로 남자 형제만 셋이 더 있었다. 작위를 계승 받지 못할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그에 비해 알레시아는 필립스 백작가의 유일한 적통이었다.

작위의 계승이 예정된 귀족이란 소리였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자들 중 가장 급이 높은 자가 바로 알레시아였다.

뭐, 플로리아는 알레시아와 오래 교제했다고 하니 선을 좀 넘는 장난도 칠 수 있다.

헌데 기사란 새끼들이 쳐 웃어?

웃음이 나올 수는 있다. 그럼 혀를 씹어서도 버텨야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면, 곧장 고개를 처박고 죄를 빌어야지.

헌데도 멘데스는 목을 뻣뻣이 세운 채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도 오시리스 백작령이 아닌 필립스 백작령 한가운데서.

'대감 집에서 노비 질을 하다 보니 정신이 쳐 나갔다 보군.'

레이가 입을 뗐다.

"멘데스 경, 지금 발을 디딘 곳이 어디인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뭐라?"

멘데스가 되물었다.

레이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다과 접시를 잡아끌었다.

"이곳은 오시리스 백작령이 아닌 필립스 백작령입니다."

모서리를 향해 나아가던 다과 접시가, 이내 지면에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졌다.

쨍그랑!

멘데스를 코앞에 둔 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새 뽑혀나온 레이의 검이 멘데스의 흉갑을 톡 건드렸다.

깡!

"그러니까 건방 좀 작작 떨어 새끼야. 턱을 찢어놓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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