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8화 (48/446)

플로리아 (2)

48화

지미 보육원에 기거하다 소풍을 나온 알프는 달리기 하나는 자신 있었다.

아이들을 추월한 알프는 혹시 따라잡히지는 않을까 뒤를 바라본 채 정신없이 내달렸다.

나무 뿌리 등이 돋아나 있는 산길은 굉장히 위험했으나, 이미 잔뜩 신이 나 있던 알프는 균형 감각 하나에 의지한 채 환호를 지르며 달려갔다.

그때 지미가 외쳤다.

"앞에 봐!!"

위압적인 지미의 외침에 알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알프의 시야 끄트머리에서 녹색 늑대가 나타나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높이 뛰어오른 늑대는 알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입을 덥석 닫았다.

"으아앗!!"

목을 물어뜯긴 줄 알았던 알프가 비명을 지르며 지면에 넘어졌다.

숨을 헉헉 몰아쉰 알프가 자기 목을 매만졌다.

피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어?"

[크르륵-]

알프를 그냥 통과해버린 반투명한 늑대가 이빨을 내보이며 으르렁거렸다.

늑대의 위협에 알프가 재차 비명을 지르며 엉덩이를 뒤로 끌었다.

텁!

얼마 물러서지도 못한 알프의 등이 누군가의 다리에 맞닿았다.

알프가 위를 올려다보자 부채로 얼굴을 가린 플로리아가 고저 없는 탄성을 내었다.

"어머, 아주 무례한 아이네. 함부로 귀족의 몸에 손을 대다니. 벌을 받아야겠어."

스르릉!

호위 기사가 검을 뽑아들었다.

알프는 상황 파악도 못 한 채 입을 벌리고 있다가 호위 기사가 검을 휘두를 자세를 취하자 그제야 딸꾹질을 했다.

날카로운 예기를 지닌 검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 번쩍였다.

허나 플로리아의 호위 기사 리옹은 정말로 검을 휘두를 생각이 없었다.

플로리아는 리옹에게 아이의 팔다리를 베어내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플로이라는 주로,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을 만들어 주변인의 반응을 감상하는 걸 즐겼다.

지금도 플로리아의 눈은 아이들을 쫓아온 지미와 티모시를 향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인솔하기 위해 애쓰던 선생들이, 과연 위기에 처한 아이를 앞에 두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도망칠까? 용서를 구할까? 아니면 얼어붙을까?

뭐, 눈이 돌아가 달려들 수도 있겠지.

플로리아가 흥미롭게 지미와 티모시를 지켜봤다.

그 순간, 빛살이 번쩍였다.

까앙-!

"큭?!"

일순 검을 놓칠 뻔했던 리옹이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무게중심을 다시 잡았다.

자기 검을 바라본 리옹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투박한 검 한 자루가, 리옹의 검 한가운데를 관통해 있었다.

*

지미는 오판했다.

선생 몇 명보다 자신의 무력이 강하기에 서른에 가까운 아이들을 혼자 제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아무리 검을 잘 다룬다 해도 손은 두 개였고, 애들 관리엔 무력보다 사람 머릿수가 더 중요했다.

지미 말 한마디에 아이들이 벌벌 떨었다면 무척 편했겠지만.

비교적 선입견이 덜한 아이들은 지미가 소문처럼 무서운 깡패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지미는 아이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고, 발 빠른 몇몇 아이들은 지미의 시야를 벗어나 추모비를 향해 달려갔다.

아이들을 쫓아간 지미는 추모비 앞에 낯선 인물들이 머물고 있는 모습을 뒤늦게 발견했다.

상대의 차림새를 훑어본 지미가 알프에게 소리쳤다.

"앞에 봐!!"

알프는 늦지 않게 앞을 돌아봤고, 본래라면 다리를 멈춰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헌데 난데없이 웬 늑대 형상의 정령 하나가 나타나 알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지면을 구른 알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플로리아의 신체에 멋대로 접촉했다.

직후 레옹의 검이 뽑혀나오자, 지미 또한 반사적으로 검을 뽑았다.

스릉!

달려가서 막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

지미는 용병이었고, 검기를 다룰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온갖 잡기를 익히며 살아남았다.

지미가 왼발을 지면에 내려찍으며 마나를 머금은 검을 투척했다.

까앙-!

알프를 내려 베려던 검 한가운데에 지미의 검이 박혀 들었다.

'시발.'

지미는 검을 던지고 나서야 좆 됐다는 걸 깨달았다.

붉은 머리카락을 묶어 올린 플로리아의 차림새는 누가 보아도 고귀한 귀족의 것이었고, 플로리아 옆을 지키던 기사 또한 광택이 서린 갑옷으로 무장해 있었다.

'귀족, 붉은 머리카락, 기사의 망토에 새겨진 늑대를 형상화한 문양.'

어렵지 않게 상대가 오시리스 백작가의 사람이란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지미가 입술을 씹었다.

아무리 급했다고 해도 귀족을 먼저 공격한 꼴이 되어버렸다.

적당히 무마하고 넘어갈 수 있는 선을 완전히 넘었다.

리옹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검신 중앙을 꿰뚫은 지미의 검을 노려보다, 손아귀를 뻗어 두 검을 분리했다.

끼기기기긱!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쇠가 긁히는 소리가 산속을 메아리쳤다.

지미의 눈동자가 흔들리던 찰나 플로리아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설마 검을 던질 줄이야."

지미가 곧장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플로리아가 물었다.

"귀족이야?"

"아닙니다."

"귀족의 사생아라도 돼?"

"아닙니다."

"믿는 게 있으니 검을 던진 것 아니겠니? 대답해봐."

하다못해 귀족의 남첩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머리가 제대로 달려 있으면 플로리아를 보고 감히 검을 던질 생각은 못할 터다.

대놓고 귀족티를 내기 위해 치장을 잔뜩 해놓았는데 검을 던진다는 건 그냥 목숨을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지미가 지면에 머리를 붙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하여."

플로리아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알프를 흘겨봤다.

"이것과 관계가 어떻게 되기에? 아비라도 되니?"

"보호자입니다. 혈연관계는 아닙니다."

"호방함은 기사보다 낫네."

슈욱!

바람이 불어와 지미가 투척한 검을 쏘아냈다.

허공을 가른 검이 지미의 코앞에 떨어졌다.

"본래는 목을 베야겠지만, 선택지를 줄게."

플로리아가 알프를 가리켰다.

"이 아이의 팔 하나. 아니면 네놈의 팔 하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봐."

"...팔 하나로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싫어? 그럼 한 번 덤벼볼래? 보아하니 실력에는 자신 있는 거 같은데."

"플로리아님!"

리옹이 기겁하자 플로리아가 깔깔 웃으며 구멍이 뻥 뚫린 리옹의 검을 붙잡았다.

"기사가 손에 쥔 검을 관통했다라. 기습이었다 해도, 어설픈 실력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엑스퍼트급 기사가 검을 쥘 때는 언제든지 검기를 자아낼 수 있도록 미리 마나를 흩뿌려둔다.

헌데 엑스퍼트급 기사가 손에 쥔 검이 관통당했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동수의 실력자란 의미다.

"승산이 없지는 않잖아?"

플로리아의 권유에 지미가 검을 잡았다.

플로리아를 지키는 기사가 눈앞에 보이는 한 명도 아닐뿐더러, 여기서 싸워 이겨 시체를 땅에 묻는다 해도 뒷수습은 절대 불가능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지미가 자기 팔에 검을 가져다 댔다.

플로리아가 부채 너머로 입꼬리를 치켜올린 채 속으로 되뇌었다.

'그만.'

늑대를 닮은 바람 정령이 슬그머니 플로리아를 돌아본다.

플로리아가 입가에 경련을 일으키며 재차 되뇌었다.

'그만.'

바람 정령의 고개가 살짝 돌아간다.

흡사 이리 말하는듯했다. 좀 더 간절하게 빌어봐.

'그만!'

"그만."

검이 지미의 살갗을 파고들기 직전 플로리아가 입을 뗐다.

부채를 살랑이며 숨을 고른 플로리아가 지미를 상찬했다.

"나름 재밌었어. 나를 즐겁게 했으니, 이번 한 번은 용서해줄게."

"..."

지미는 여전히 팔에 검을 붙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플로리아가 물었다.

"기사는 아닌 것 같은데."

기사 작위를 받았다면 진즉 신분을 밝혔을 터다.

"이름이 어떻게 되니?"

"지미라고 합니다."

"지미, 지미... 아, 지미!"

기억 한편에서 지미의 이름을 떠올린 플로리아가 탄성을 내질렀다.

출신 천한 용병이 최근 명예 작위를 받게 되며 귀족들 사이에 잠깐 화제였는데, 그 당사자가 눈앞에 있었다.

"로커스트를 토벌하는데 공로를 세웠다는 용병이 맞니?"

"...공로라고 하실 것까지도 없습니다."

"내가 큰 실수를 할 뻔했네."

황실에서 직접 내린 수훈을 받은 자다.

작위를 계승하지도 못한 플로리아가 멋대로 해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여기서 더 괴롭히면 플로리아도 곤란해질 수 있었다.

플로리아는 강고한 의식과 감정을 담아 부채 너머로 바람 정령을 노려보았다.

바람 정령은 플로리아를 비웃듯 방정맞은 걸음으로 엉덩이를 흔들더니 실체화를 풀고 사라졌다.

플로리아가 한숨을 삼켰다.

어린 시절 멋모르고 해버린 정령과의 불공정 계약에 묶여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황실 마탑에 거주하는 마법사 중 정령학을 주로 다루는 마법사들을 찾아가볼 생각이었지만, 솔직히 원하는 답을 얻기는 요원해 보였다.

정령과의 계약은 일종의 '계약 각인' 중 하나였기에 상호 동의 없이는 멋대로 수정하기가 불가능했다.

일방적 파기야 가능했지만, 워낙 불공정한 계약에 묶여 있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러다 평생 고생하겠어.'

자기 처지를 비관한 플로리아가 다시 지미를 바라봤다.

정령과는 별개로 지미에게 관심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

천박한 용병이라 들었는데, 자기 팔을 내주어 가며 혈연관계도 아닌 아이를 구하려는 모습이 꽤 흥미가 돋았다.

상대 신분에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었지만.

기사도를 아는 자가 아닌가.

"필립스 백작령에서 생활하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마침 잘 됐네. 무례는 용서해줄 테니, 길 안내나 좀 해봐."

"길 안내라 하시면..."

"필립스 백작가의 영주성. 잘 알 것 아니니? 나는 초행길이라서."

잠시 알프를 돌아본 지미가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플로리아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알겠습니다."

*

젠킨슨이 떫은 얼굴로 레이를 바라봤다.

"너 아직도 나한테 4년 전 앙심이 남아있었냐?"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당시 제가 고집을 부렸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백작님을 비롯해 젠킨슨 경에게도 감사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왜 하필 나야? 너 디디에 경이랑 더 친하잖아?"

"디디에 경은 훌륭한 기사님이시죠."

"그렇지."

"그러니 제가 없는 사이에도 보육원을 잘 보호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젠킨슨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결국 디디에를 제외하고 남는 놈들 중 고르다 보니 널 선택했다는 소리다.

레이가 젠킨슨의 반응을 보고 의아해했다.

"아니, 근데 뭐가 불만이십니까? 저 만큼 많이 배우고, 눈치 빠르고, 강한 종자가 어디있다고요?"

젠킨슨이 아예 두개골로 파고드려는 미간을 붙잡았다.

백작은 레이가 알레시아의 곁을 수행하기 전에, 적당한 신분을 갖춰야 하니 기사의 종자로 들어가라 일렀다.

기사의 종자, 즉 스콰이어는 귀족 대접은 못 받을지언정 어딜 가서 함부로 무시받지는 않았다.

백작이 기사들 중 모하메드를 제외하고 아무나 골라잡으라기에 레이는 젠킨슨을 택했다.

사실 별 생각 없이 고른 거였지만, 레이에게 지목된 젠킨슨은 죽을 맛이었다.

종자가 하나 새로 들어오는 거야 아무 문제 없다.

헌데 새로 들어온 종자가 나보다 많이 배우고, 나보다 눈치 빠르고, 나보다 강하다면 그건 굉장한 문제였다.

젠킨슨도 자존심이 있다.

종자보다 실력이 부족한 기사라니.

대체 어느 기사가 그딴 굴욕을 당하고 싶겠는가.

젠킨슨이 애원했다.

"레이, 이제라도 마음을 바꾸는 게 어떻겠냐? 백작님께서도 들어주실 거다."

"젠킨슨 경, 이미 결정된 사안인데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앞으로 언제 제 따귀를 한 번 후려보겠어요."

기사는 스콰이어를 임명하기 전 따귀를 한 대 후리는 전통이 있다.

젠킨슨이 한숨을 쉬었다.

레이의 말마따나 젠킨슨이 레이의 따귀를 후릴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 유일할 게 분명했다.

당장도 일대일로 붙으면 젠킨슨이 일방적으로 쳐맞는데 언제 레이의 따귀를 후려보겠는가.

젠킨슨이 현실을 수긍한 후 품 속에 고이 챙겨왔던 가죽 장갑을 꺼냈다.

거칠게 무두질이 되어 있어 살에 쫙쫙 감기는 장갑이었다.

레이가 식겁하며 한 발 물러서자 젠킨슨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쓰읍! 일로 안 와? 어딜 도망가?"

레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되물었다.

"젠킨슨 경, 뒷감당 되시겠습니까?"

"벌써부터 협박질을 하는 거 보니 싹수가 노란 종자로구나. 이래도 지옥 저래도 지옥일 거 감정이나 한 번 풀자꾸나."

저저 속이 좁아터져 가지고는.

투덜댄 레이가 결국 눈을 감은 채 뺨을 대주었다.

얼마 안 가 살가죽이 터지는 소리가 영주성을 울렸다.

쫘악!!

레이의 고개가 꺾일듯이 돌아갔다.

온몸을 부들부들 떤 레이가 핏물을 뱉어냈다.

살갗이 터진 뺨이 금세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가래 끓는 신음을 길게 흘린 레이가 젠킨슨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마스터, 대련 한 판 하쉴?"

"일 없다, 미친놈아."

젠킨슨이 슬금슬금 발을 빼는데 영주성 정문에 지미와 함께 못 보던 얼굴이 나타났다.

레이는 뽑아내려던 검을 내려놓은 채 헬쑥해진 얼굴의 지미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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