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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47화 (47/446)

플로리아 (1)

47화

"마탑이 정신병자 소굴이라..."

백작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삼키기 위해 목울대를 꿀렁였다.

백작을 호위하던 모하메드 또한 괜히 헛기침을 터뜨리며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말이 옳다."

마법사들이 신의 없는 족속이긴 하다.

실리를 따른다는 핑계로 규율과 윤리를 저들 멋대로 재단하는 자들이다.

백작 또한 마법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에 레이의 머릿속에 박힌 고정관념을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허나 레이, 그대에겐 체계화된 마법 이론을 학습한 마법사가 필요하지 않은가."

백작은 레이의 심중을 잘 알고 있었다.

레이는 기사가 파견되기 전까지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검을 쥐여주지 않았다.

태권도 같은 생활 무술을 전수해 무게중심을 옮겨가며 몸 쓰는 법을 가르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레이는 걱정한 거다.

어설프게 검술을 가르쳤다가 토대가 잘못 잡혀 개선이 불가한 나쁜 습관이 들어버릴까 봐.

때문에 검술에 정통한 기사들을 데려올 때까지 검술 전수를 미룬 것이다.

루나 또한 마찬가지다.

시행착오는 겪을지언정, 어설픈 마법서 몇 권만 있어도 루나는 독학으로도 마법사 흉내쯤은 어렵지 않게 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건 재능을 버리는 짓이다. 레이의 지론은 그러했고 백작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마탑이 아니면 그대가 바라는 수준의 마법사를 찾기는 힘들 걸세."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헌데 제가 간다고... 그 폐쇄적인 마법사들이 얼굴이나 비춰주겠습니까?"

"이번에 알레시아를 황실 마탑으로 단기 유학을 보낼 기회를 얻게 됐네."

"황실 마탑이요?"

레이가 의아해하자 백작이 황실 마탑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황실 마탑은 황가의 지원 아래 탄생한 마탑으로, 마탑 간의 중재, 아티펙트 상용화, 연구 용역, 공동 학회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구였다.

말만 마탑이지 기실 파벌이 나뉜 마법사 집단을 제어하고 거대 마탑의 정보 독점을 견제하려는 정치 기구에 가까웠다.

"편의상 마탑이라 부를 뿐이지 용도별로 구분된 건물들이 다수 모여 도시 형태를 이루고 있네. 황가의 지원을 받는 만큼 황실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행동거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지."

"눈치 보는 정신병자란 말씀이군요."

"틀린 말은 아닐세. 그래도 눈치 볼 게 적은 정신병자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끌끌 웃은 백작이 말을 이었다.

"이론 연구에 치중하는 마법사들의 비율이 높은 곳일세."

해박한 마법 지식에 비해 서클의 단계가 낮은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통제하기도 쉽고 선생이란 역할에도 어울린다.

"어떤가?"

"정말 감사한 제의입니다만, 제가 무슨 자격으로 황실 마탑을...?"

"알레시아의 수행인으로 따라가게."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리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는 것보단 작은 가능성이라도 시도를 해보는 게 나았다.

"알겠습니다. 자리를 만들어 주셨으니, 노력해보겠습니다."

"흔치 않은 기회일세. 황실 마탑은 단기 유학이라 해도 아무나 받아주는 곳이 아니야."

황실에 줄을 댈 수 있는 얼마 없는 경로다.

때문에 황실 마탑에 단기 유학을 허가받기 위해선 연줄도 있고 배경도 뛰어나고 재능도 받쳐줘야 했다.

레이가 턱을 긁적였다.

"음... 알레시아가 마법적 재능이 그리 뛰어났나요?"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로커스트를 토벌한 위명 덕분에 기회를 얻게 됐네."

잠깐 망설인 백작이 말을 덧붙였다.

"마침 오시리스 백작 영애가 유학을 떠난다 하여, 오시리스 백작에게도 도움을 좀 받았네."

말인즉슨 유학을 떠나는 오시리스 백작 영애 옆자리에 알레시아를 억지로 낑겨 넣었다는 뜻이었다.

필립스 백작가와 이웃한 오리시스 백작가였지만, 그 위세는 다섯 배 이상 차이 났다.

상황을 납득한 레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왈가왈부해봤자 필립스 백작의 자존심만 상할 사안이었다.

"출발은 언제입니까?"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네. 족히 2주는 더 기다려야 하니 천천히 고민해보게."

"감사합니다."

"오시리스 백작 영애의 이름은 플로리아네. 알레시아와 동행하게 된 관계로 영주성에 한 번 들리겠다더군."

"성격은 어떻답니까?"

질문이 좀 건방지긴 했지만, 레이에게 이건 꽤 중요한 문제였다.

백작이 짧게 침음했다.

"실로 귀족적이네."

고생 좀 하겠군.

속으로 중얼거린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도록 하지."

백작은 유학 신청서처럼 보이는 종이를 집어넣은 후 밀봉된 편지 하나를 레이에게 내밀었다.

레이의 표정이 대번 밝아졌다. 세리아로부터 온 편지였다.

백작이 편지를 건네주며 덧붙였다.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네. 심의를 마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감이 있지만, 드디어 명예 작위가 수여됐네."

"...명예 작위요?"

"작위라기보다는 훈장에 가깝네. 큰 공을 세운 이들에게 황실이 내리는 상훈이지."

"백작님, 제가 이런 사안에 대해 무지해서 여쭙니다만, 명예 작위의 혜택이 어떻게 됩니까?"

"큰 혜택이 있는 상훈은 아니나, 황실이 직접 내리는 상훈이니만큼 이름이 가볍지는 않네. 수훈자는 얄팍하게나마 준귀족 대접을 받을 수 있네."

눈을 깜박이는 레이를 향해 백작이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위세 높은 귀족이라도 명예 작위 수여자에겐 정당한 절차 없이 함부로 벌을 내릴 수 없다는 의미일세. 황실의 권위를 모독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지."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레이가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근데 명예 작위 수훈자가 누굽니까?"

"누구겠나?"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백작이 느슨하게 입꼬리를 풀었다.

"그대 공을 대신 나눠 가진 자들이지."

*

태양이 쨍쨍 내리 찌는 하늘 아래.

밀짚모자를 눌러 쓴 지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잡초를 뽑아내고 있었다.

잡초 옆에는 하얀 뿌리에 짙푸른 이파리를 지닌 '라파'란 식물이 무릎에 닿을 만큼 크게 자라올라 있었다.

라파는 식용 채소 중 하나로 아삭아삭한 식감 덕분에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인기 있는 식자재였다.

울타리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밭에는 라파 말고도 이런저런 채소들이 싹을 틔운 채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지미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미는 최근 본인이 꿈꾸던 슬로우 라이프를 부분적이나마 이루어보기 위해 작은 밭을 하나 일궈 채소를 가꾸고 있었다.

무럭무럭 자라는 채소들을 바라보니 지미는 그동안 쌓아왔던 스트레스가 천천히 해소되는 것 같았다.

"저, 저기..."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니 아직 새파란 나이의 위병 하나가 사색이 된 채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흥이 깨진 지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여, 여기서 그, 그런 거 키우시면 안 됩니다."

"...?"

이건 또 뭔 소리야.

지미가 자꾸만 구겨지려는 얼굴을 어거지로 피며 말했다.

"이봐,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밭은 내 사유지야."

시세보다 높은 돈을 주고 밭을 샀고, 사람 먹을 수 있는 채소 몇 개를 길렀을 뿐이다.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헌데 위병은 지미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자리를 지키고 선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지미가 고함을 치려는 순간.

선임병처럼 보이는 위병이 다가와 젊은 위병의 머리를 후려쳤다.

"폴로! 여기서 뭐 해?! 내가 이 주변은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잖아!"

"하, 하지만 조장님, 저건 '브라시아' 아닙니까?"

폴로라 불린 위병이 '라파'를 가리키며 항변했다.

지미는 그제야 위병이 무엇을 오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브라시아는 마약의 원료가 되는 식물로, 민간인이 멋대로 재배하는 게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헌데 브라시아는 라파와 생김새가 비슷해, 종종 라파로 위장하고 브라시아를 재배하는 악질적인 경우가 있었다.

지미가 허허 웃으며 '라파'를 가리켰다.

"아이고,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이건 라파입니다. 라파."

"하하, 확실히 '라파'가 맞군요. 실례를 끼쳤습니다."

선임병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폴로를 데리고 밭에서 멀어지며 속삭였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저기 가까이 가지 말랬지!"

"하, 하지만 조장님, 저건 라파가 아닌 브라시아 아닙니까?"

"내가 눈깔병신인 줄 알아? 나도 저게 브라시아인 건 알아! 근데 어쩌라고!"

상식적으로 암흑가의 지배자라는 인간이 태평하게 라파를 기르고 있겠는가.

저 밭에서 자라는 건 분명 특상의 브라시아일 게 분명했다.

허나 그렇기에 더더욱 아는 척을 하면 안 됐다.

"상대는 그 잔악무도하다는 암흑가의 지배자, 지미야! 야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뒈지고 싶지 않으면 못 본 척해! 넌 모셔야 될 어머니도 있잖아! 알아들어?!"

폴로가 겁먹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새끼... 앞으로는 말 잘 들어라."

선임병이 혀를 차며 폴로의 등을 쳐주는 사이 지미는 구슬픈 눈을 하고 라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꽤 떨어진 거리라 둘은 안심하고 있었지만.

지미의 귓가에는 위병들의 대화가 아주 잘 들렸다.

축 처진 얼굴을 한 지미가 정성을 들여 열심히 키웠던 라파를 뽑아냈다.

그는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한다는 암흑가의 지배자.

무슨 행동을 하든 다들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다.

정상적인 슬로우 라이프는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라는 뜻이었다.

'내 인생은 대체 어디서부터 꼬였는가!'

그 새끼, 그 악마 같은 새끼만 만나지 않았다면, 모든 게 괜찮았을 텐데!

지미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부디 보육원 아이들에게 더욱 지랄 맞은 사춘기가 찾아오게 해달라고.

부디 레이가 자기가 쌓은 업보에 깔려 고통받게 해달라고.

"와아아아-!"

지미가 자세를 경건히 하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와중에 아이들의 환호가 멀리서 들렸다.

흙을 털고 일어난 지미가 환호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하는 사람한테 쿠키 몰아주기!"

"와아아아!"

서른 정도 되는 아이들이 우르르 뛰쳐나와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전부 지미 보육원 '디나르 지부'에서 기거하는 아이들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미가 고용한 글쓰기 선생인 티모시가 아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헐떡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지미가 다가가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 지미님. 오늘 소풍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이들이 많이 신 났네요."

"소풍? 어디로 가는데?"

"다비드님의 추모비를 구경하러 갑니다."

지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비드는 어느샌가 세리아와 함께 제국이 두려워했던 암흑정령사 로커스트를 토벌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 병신이 9살 먹은 꼬마한테 칼 맞아 죽었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할 텐데.

'정작 로커스트와 죽도록 싸웠던 나는 명예를 얻긴커녕 악명만 높아졌는데!'

하여튼 존나 억울한 일이었다.

속으로 툴툴댄 지미가 티모시를 향해 물었다.

"근데 아이들을 데려가기엔 좀 위험한 장소일 텐데."

"그래서 다른 선생들과 동행하기로 했는데 아이들이 신나서 먼저 뛰어갔네요. 얼른 잡아오겠습니다."

"아니, 뭐... 됐어. 내가 같이 갈게."

"아,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침 할 일도 없고. 어서 쫓아가자고."

아삭아삭!

지미가 방금 뽑아낸 라파를 생으로 씹어먹으며 아이들을 가리켰다.

티모시가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물었다.

"근데 그거... 생으로 먹어도 약효가 있습니까?"

지미가 라파로 티모시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

"여기인가 봐."

시그니 산맥 초입.

은은한 푸른 빛을 내뿜은 광물인 청광석으로 제작된 다비드의 추모비 앞에서.

오시리스 백작 영애, 플로리아가 아직까지 주변에 남아있는 전장의 상흔을 살피고 있었다.

워낙 격렬한 전투였던지라 아직까지도 바스러진 바위나 박살 난 나무 기둥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쉬웠겠어. 생환했다면 평생을 남들에게 떠받들어지며 살았을 텐데. 어마어마한 공훈이잖아? 단둘이서 로커스트를 토벌했다는 건."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도 거들었다고 합니다."

호위 기사의 첨언에 플로리아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6서클의 마법사가 비명횡사한 전장이야. 진정 백작가의 기사들이 거들었다면 그들이 전부 생환할 수 있었겠어?"

전투에 참여하긴커녕 멀리서 지켜보기라도 했을까?

"부끄러움도 모르는 작자들 같으니라고."

부채를 탁탁 턴 플로리아가 추모비를 한 번 쓰다듬고는 등을 돌렸다.

"그만 영주성으로 가보자."

"알겠습..."

호위기사가 고개를 숙이려다 말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수십에 가까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얼마 안 가 숲 속에서 10살 내외의 꼬맹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일등이야!"

가장 앞서 달리던 꼬맹이는 추격해오는 다른 아이들을 보느라 앞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달려오는 방향이 정확히 플로리아를 향해 있어 기사가 호통을 치려는 순간.

"기다려 봐."

플로리아가 짐짓 흥미롭다는 얼굴로 기사의 행동을 제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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