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6화 (46/446)

사춘기 (3)

46화

레이는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내가, 내가 카렌보다 키가 작다고? 이 열셋 밖에 안 먹은 꼬맹이보다?'

물론 레이도 신체 나이로는 열셋 밖에 안 먹은 꼬맹이였고, 내심 요즘 카렌과의 눈높이가 비슷해져 스트레스를 받고 있긴 했지만.

아무렴 설마 카렌보다 작겠냐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세워 고개를 쳐드는 불안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헌데 방금 요하나의 발언으로 레이는 억지로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손을 부들부들 떨던 레이가 카렌의 팔을 당겼다.

"카렌, 일어나봐."

"응? 일어나?"

"응, 일어나서 뒤돌아 봐."

레이는 여전히 설마설마 했다.

내가 그래도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은 카렌보다 크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렌이 꼿꼿이 서자 레이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음의 준비를 한 후 카렌에게 등을 맞붙였다.

"데런, 이리와 봐."

눈치껏 교실 밖으로 슬금슬금 도망치려 했던 데런이 축 처진 얼굴로 레이에게 다가왔다.

레이가 물었다.

"누가 더 커?"

"음..."

레이 머리 위로 붉은 머리카락이 빼꼼 튀어나와 있었다.

데런의 눈빛이 흔들리자 카렌은 눈치껏 무릎을 살짝 굽혔다.

카렌의 키가 쪼그라들자 데런은 그제야 표정을 피며 답했다.

"혀, 형이 조금 더 커요."

"..."

물론 레이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레이가 참담한 심정으로 카렌과 떨어져서 입술을 씹는데 마침 루나와 눈이 맞았다.

루나가 볼을 빵빵히 부풀린 채 대놓고 웃음을 참고 있다는 티를 내고 있었다.

레이가 정색했다.

"루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웃으면 진짜 뒈질 줄 알아."

취이이익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빵빵했던 루나의 볼이 줄어들었다.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간 루나를 보고 레이가 미간을 짚었다.

루나가 웃음을 못 참아서 볼을 부풀린 게 아니다.

그냥 레이를 한번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저리 행동한 거다.

그저 착하기만 했던 우리 애들이 왜 이렇게 변하였는가.

레이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손을 저었다.

"루나는 잠깐만 나 좀 보고, 너희들은 그만 들어가 봐."

데런이 곧장 자리를 피했고, 요하나는 카렌의 팔을 잡아끌며 끝까지 레이의 속을 긁고 나갔다.

"꼬맹이 주제에."

'시발.'

레이는 잠시잠깐 저걸 쥐어팰까 고민했지만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속을 다스렸다.

사실 요하나가 대놓고 엇나갔으면 레이는 진즉 요하나를 쥐어팼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선을 어긴 몇몇 아이들이 개처럼 쳐맞고 운동장을 기어다녔던 경우도 몇 번 있었다.

허나 요하나의 신경질이 대부분 레이 하나를 향해 있었기에, 레이는 근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요하나에게 일방적으로 처맞고 있었다.

"우리 착했던 요하나가 대체 어쩌다가..."

눈을 감으면 마냥 해맑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요하나가 아른거린다.

레이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요하나를 보며 전생에 사촌이 키웠던 골든 리트리버를 연상하곤 했다.

항시 웃는 얼굴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던 귀여운 골댕이 말이다.

헌데 어쩌다가 저런 지랄견으로 암흑진화했던 말인가.

레이가 지친 얼굴로 의자를 끌고 와 루나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루나의 볼이 어느새 다시 빵빵이 부풀어 있었다.

레이가 두 손을 뻗어 루나의 뺨을 잡고 흔들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재밌냐?"

"..."

루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포자기한 레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재밌으면 됐다. 근데 요하나는 요즘 나한테 왜 그러냐?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어?"

루나는 고민했다.

레이가 요하나에게 실수한 게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일단 레이는 기본적으로 터치가 가벼웠다.

사춘기가 찾아온 아이들은 감성이 섬세해지며 육체를 접촉하는 행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는 아이들의 머리나 턱을 습관적으로 쓰다듬는 경우가 많았다.

좋아하는 애들은 여전히 좋아했지만, 아무래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레이는, 요하나가 제대로 검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 요하나를 천재라고 엄청나게 치켜세워 주었다.

요하나는 확실히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독보적인 속도로 검술을 발전시켰다.

레이를 제외하고 말이다.

요하나가 기사의 검을 다섯 번이라도 막아내기 위해 끙끙댈 때 레이는 구석에서 기사를 주먹으로 패고 있었다.

기사를 들것에 실려 보낸 레이는 요하나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벌써 기사님의 검을 흘려낼 수 있다니! 요하나 너는 정말 천재구나!

아무리 좋게 봐도 기만행위였다.

허나 요하나가 레이에게 부리는 심통이 심각해진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관계성의 모호함 탓이 컸다.

요하나에게 레이는 어떠한 존재인가?

부모? 보호자? 또래 친구? 스승? 관심 가는 이성?

요하나를 비롯해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있어 레이와의 관계성은 굉장히 복합적이었으며, 이에 따라 혼란을 느끼는 아이들이 많았다.

예컨데 아이들은, 또래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레이를 보고 동경과 자부심을 느껴야 할지 질투와 경쟁심을 느껴야 할지 헷갈리곤 했다.

사춘기가 찾아온 많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이유 없이 반항하기도 하고.

또래 친구에게 질투를 느껴 좌절하거나 분노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이성에게 제대로 마음을 전하지 못해 괜히 괴롭히기도 한다.

그리고 요하나에게 있어 레이는, 부모이자 친구이자 멋진 이성이기도 했다.

"...요하나는 레이를 정말 좋아해요."

루나가 레이를 향해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요하나를 미워하지 말아요."

"내가 설마 그러겠니."

낄낄 웃은 레이가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나는 여전히 레이의 손길이 좋았다.

한숨을 한 번 쉰 레이가 중얼거렸다.

"빨리 네 마법 스승을 구해야 할 텐데."

루나는 오늘 수업을 참석했으나, 사실 4년 전에 이미 배운 내용이었다.

레이가 루나를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밑천이 털리기까지 2년을 예상했고, 실제로는 2년도 안 돼서 밑천 대부분을 털렸다.

결국 레이는 가르치기를 망설였던 물리학과 공학적 지식들까지 전부 루나에게 전수했다.

지구와는 다른 세계이기에 괜히 잘못된 지식이나 고정관념을 심어줄까 망설였는데, 레전드리 고아를 가만히 놀리기도 뭐해 '이런 가설도 세워볼 수 있다'는 뉘앙스로 수업을 진행했었다.

'그것도 얼마 못 갔지.'

정말 더는 가르칠 게 없어진 이후.

루나는 레이의 손을 잡고 백작가나 교단에 들려 관심 있는 책을 빌려 와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복잡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를 향해 루나가 종이 더미를 건넸다.

"...이거 같이 풀어볼래요?"

"이게 뭔데?"

"직접 만든 문제예요."

레이가 슬그머니 종이 더미를 살폈다.

첫 장부터 잘 이해도 안 가는 수학 수식들의 조합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근래 들어 루나는 레이의 두뇌 용량을 초과하는 수학 문제를 만들어와 코앞에 들이밀고 풀어보라 떼를 쓰곤 했다.

이해는 됐다.

루나의 곁에는 수리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레이 하나밖에 없었다.

허나 레이는 루나의 사고 회전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레이가 한숨을 삼키며 필기구를 집어들었다.

한 시간 정도는 루나의 취미에 어울려줄 생각이었다.

*

레이는 며칠 동안 애들 성교육을 다시 하고 홍등가 사람들에게 애들 관리에 협조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다녔다.

효과가 얼마나 갈지는 미지수였다.

요하나는 여전히 틱틱거리며 꼬맹이 꼬맹이 노래를 불렀고 루나의 뺨은 부풀어 올랐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길 반복했다.

불평할 건 많았지만.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레이는 오랜만에 숲 속 냇가를 찾아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이전에 비해 보육원 예산이 풍족해져 굳이 피임구 알바를 뛰지 않아도 되었고 보육원 내에 수련 장소가 확보되어 이곳을 찾아오는 횟수가 줄었었다.

그리운 풍경을 마주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반투명한 나뭇잎이 떨어지는 햇살을 쪼개 무지개를 그린다.

고개를 드니 다채로운 색깔로 하늘이 가득 차 있었다.

레이는 마음이 진정됨을 느꼈다.

확실히 사춘기이긴 했다.

이성은 확고했으나 불균형한 호르몬 탓인지 자주 감정이 불안해졌다.

사춘기가 온 아이들이 왜 그렇게 지랄을 해대는지 맨정신으로 사춘기를 겪어보니 잘 알 수 있었다.

삐익-!

레이가 팔을 들어 올렸다.

백작이 날려 보낸 브릿지가 허공에서 내려앉았다.

편지를 뜯어본 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백작을 찾아가봐야 했다.

*

"나의 기사가 찾아왔구나!"

영주성에 찾아가니 알레시아가 가장 먼저 레이를 맞아주었다.

알레시아가 미리 정문에 나와 있었다는 건 백작이 귀띔을 해주었다는 의미일 터다.

14살이 된 알레시아는 겉모습만큼은 앳된 태를 슬슬 벗어나고 있었다.

찰랑이는 금발 사이로 드러난 싱그러운 미소가 퍽 매력적이었다.

레이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알레시아를 마주 봤다.

'어렸을 때부터 발랑 까져가지고 사춘기까지 찾아오면 감당이 될까 싶었는데...'

레이의 근심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알레시아는 귀족 영애치고 여전히 조신함이 부족했지만 예전처럼 앞뒤 안 가리고 사고를 치진 않았다.

'사춘기가 좀 일찍 찾아왔었던 거네.'

이제 돌이켜 생각하면 사춘기라는 게 일찍 찾아오는 게 보호자 입장에서 차라리 편한 것 같았다.

머리가 좀 굵은 다음에 사춘기가 찾아오니 대처하기가 더 힘들었다.

뭐, 알레시아에게 문제가 하나 남아있다면.

여전히 눈치가 좀 없긴 했다.

"으음, 레이."

레이를 '내려다본' 알레시아가 레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요새 좀 작아졌구나."

"으그그극..."

레이는 몸을 배배 꼬며 환생하고 처음으로 시간이 빨리 가길 바랐다.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꼬꼬마들에게 꼬꼬마 취급을 받으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레이는 시간이 지나면 본인이 카렌이나 알레시아보다 키가 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뭐? 키가 안 크면 어떡하느냐고? 그런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레이는 스스로를 그리 세뇌했다.

알레시아가 레이의 머리를 하늘을 향해 몇 번 당겨보더니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 나의 기사는 나보다 키가 컸으면 좋겠구나."

알레시아의 취향은 확고했다.

첫키스는 자기보다 15cm가량 더 큰 상대가 약간 강압적으로 턱을 위로 끌어당겨 입을 맞춰주길 원하고 있었다.

헌데 레이를 바라보니 도리어 자기가 턱을 당겨줘야 할 모양새였다.

"레이, 키가 크려면 잠을 많이 자고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하더구나."

"으그그극..."

안 그래도 레이는 잠은 정시에 자고 밥도 제대로 챙겨 먹고 있었다.

알레시아가 고통스러워 하는 레이에게 권했다.

"최근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귀한 약재가 들어왔는데, 받아가도록 하여라."

평소의 레이였다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알레시아의 권유를 쳐냈을 테지만.

때로는 자존심보다 우선되는 문제도 있는 법이었다.

레이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잘됐구나! 부디 내 목이 뻐근할 만큼 크게 자라다오!"

내 키가 자라는데 네 목이 왜 뻐근하냐.

레이는 굳이 궁금증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백작이 기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먼저 응접실에 도착해 있던 백작이 레이를 향해 웃었다.

"들어오게."

레이가 곧장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평소에 까불어 대는 만큼 이런 소소한 것에 신경을 더 써야 했다.

백작의 허락을 받고 몸을 일으킨 레이가 의자에 앉았다.

일상을 묻는 대화가 몇 개 지나간 후 백작이 본제를 꺼냈다.

"루나에 대한 그대 걱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네."

다비드와 로커스트가 탐낸 인재다.

스승을 구하겠다고 아무한테나 루나를 함부로 보였다간 골치가 조금 아픈 걸로 안 끝난다.

"아예 숨기고 사는 것도 방법이 될 터."

그게 가장 리스크를 줄이는 선택이긴 했다. 더군다나 백작은 루나를 평생 숨기고 살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대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후 루나의 정식 후견인이 되어준다면 얼마든지 마법을 배울 수 있을 걸세."

"안 됩니다."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만약 루나가 영웅의 운명을 타고났고 대체가 불가능한 자원이라면.

당장 성장시키지 않으면 추후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었다.

"그녀의 재능을 꽃피워주고 싶습니다. 괜찮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럼 이건 어떤가."

백작이 종이 한 장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직접 마탑으로 가 스승을 한 번 찾아보는 건."

레이가 되물었다.

"마탑이요?"

"그래, 마탑."

"거기 정신병자 소굴 아닙니까?"

레이가 생각하기에 마법사들은 정신병자였고.

마탑은 마법사들이 모인 곳이었으니.

마탑은 정신병자 소굴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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