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2)
45화
"오늘은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인데."
레이가 최선을 다하겠다는 건 오버드라이브와 도약 검기를 제외한 모든 기술을 사용하겠다는 뜻이었다.
"세분 한꺼번에 들어오시죠."
열세 살의 싹바가지 없는 선언에 젠킨슨이 자연히 떫은 얼굴을 했다.
허나 꼬운 건 꼬운 거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젠킨슨은 고개를 저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연이어 디디에와 지미가 검을 뽑았다.
일렁이는 검기가 압축되며 검 위를 코팅하듯 미끄러진다.
엑스퍼트급 무인 셋을 앞에 두고 레이가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간을 봤다.
디디에와 젠킨슨은 숙련된 엑스퍼트 급 기사로서 어지간하면 뚫리지 않는 바위와 같은 존재였다.
지미 또한 4년 간의 노력 끝에 마나를 정제하고 코어를 만드는데 성공해 과거보다 훨씬 안정적인 검기를 구현할 수 있었다.
셋 모두 어딜가서도 한 자리 얻을 수 있는 실력자다.
쾅!!
디디에, 젠킨슨, 지미가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레이가 호흡을 고르며 되뇌였다.
'집중하자.'
하르시아류 공간검은 기본이 이도류다.
허나 레이는 4년 전만 해도 도약 검기를 사용할 때를 제외하곤 두 번째 검을 거의 뽑지 않았다.
이도류는 오랜 숙련 기간을 필요로 하는 검술이었다.
검 두 자루를 들고 어설프게 설쳤다간 금세 검로가 꼬여 빈틈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레이는 여전히 두 자루의 검을 사용하기엔 기교가 부족했다.
더군다나 이도류는 필연적으로 어마어마한 근력을 요구한다.
상대가 두 손으로 휘두르는 검을 한 손으로 흘리거나 쳐내야 하니 남들보다 배는 뛰어난 근력을 갖추어야 했다.
레이가 정면에서 돌진하는 디디에를 바라봤다.
곰 같은 덩치를 자랑하는 디디에는 레이보다 근육량이 몇 배는 많았다.
이렇게까지 힘 차이가 나는 적을 상대로 익숙치도 않은 이도류를 쓰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허나 레이는 개의치 않았다.
츠즉!
검 전체를 감쌌던 검기가 얇은 실처럼 압축되어 검날을 타고 흐른다.
서로의 검격이 충돌했다.
카가각!!
"큭?!"
디디에의 몸이 옆으로 크게 휘청였다.
레이는 자연스레 한 발자국 물러서며 죄측에서 파고든 지미의 찌르기를 피했다.
젠킨슨의 검이 레이의 어깨를 노리고 사선으로 떨어져 내린다.
레이가 오른 손의 검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젠킨슨의 검격을 쳐냈다.
파각!! 쿵!!
젠킨슨의 검이 지면을 내려찍었다.
본래 젠킨슨 정도의 실력자라면 지면을 찍기 전에 검을 회수했어야 한다.
젠킨슨이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검을 다시 잡았다.
'자존심이 남아나질 않는군.'
젠킨슨은 기가 찼다.
젠킨슨과 디디에는 혹독한 수련과 실전을 거치며 완성된 강인한 기사였다.
수없이 담금질 된 강철을 닮은 그들은 어지간한 변수가 아니면 틈을 내주지 않았다.
허나 레이와 검을 부딪칠 때마다 그들의 불굴에 균열이 일었다.
레이가 지닌 검기의 성질이 문제였다.
카가각!!
디디에의 몸이 또 다시 휘청였다.
일단 검기의 순수한 위력부터 레이에게 크게 밀렸다.
더군다나 레이와 검을 마주댈 때마다 매번 다른 방향으로 반동이 돌아왔다.
예컨데 정면에서 검이 충돌하면 그 반동이 좌측이나 우측으로 크게 꺾여 손아귀를 울렸다.
이 탓에 레이를 상대할 때는 평소보다 검을 제어하기가 배는 힘들었다.
"흐읍!"
디디에가 코어를 쥐어짰다.
찰나 간 검기의 위력이 증폭된다.
디디에는 빈틈이 노출되는 걸 각오하고 검을 크게 휘둘렀다.
레이가 왼손검을 들어올렸다.
카각!!
공격을 막아낸 레이의 왼손검이 우측으로 밀려났다.
일순 검로가 꼬인 레이가 움찔거리자 젠킨슨이 귀신 같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촤악!
허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횡베기.
상체를 깊게 숙이는 동시에 몸을 회전시켜 공격을 피한 레이가 다리를 뻗어 젠킨슨을 걷어찼다.
허벅지를 얻어맞은 젠킨슨이 지면을 구르며 레이를 향해 검기를 방출했다.
촤악!!
"...!!"
검기 방출은 대련에서 활용하지 않기로 합의했었다.
허나 기사들은 고의로 합의를 어겨가며 레이를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돌발적인 변수에 민첩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였다.
레이는 당황치 않고 검 두 개를 맞부딪쳤다.
우웅-!
공간의 일그러짐이 파문처럼 번져나가며 두 검을 중심으로 왜곡장이 생성됐다.
왜곡장에 휩쓸린 젠킨슨의 검기가 방향이 뒤틀리더니 레이의 배후를 노리던 디디에를 향해 쇄도했다.
"이런!"
파가각!!
디디에가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해 젠킨슨의 검기를 막아냈다.
레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혼자 남은 지미를 향해 가속했다.
지미가 물러서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카가각!!
아직 지미의 검기는 기사들보다 완성도가 떨어졌다.
예전처럼 검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일방적으로 밀려나야 했다.
검을 다섯 번 정도 받아내니 디디에와 젠킨슨이 재차 합류해 지미와 협공을 가했다.
몇 번 더 검을 나눈 레이는 이내 두 손을 들고 외쳤다.
"항복!"
코어의 마나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대련이 끝난 후 넷은 한동안 대화를 나누며 대련을 복기했다.
상황을 재현해보며 더 나은 선택에 대해서 토의도 하고 서로의 문제점을 번갈아 짚어주며 약 한 시간 동안 의견을 나누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레이가 인사했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보육원에 오후 수업이 있다며 레이가 먼저 목책을 떠났다.
레이가 사라지자 검을 내동댕이친 젠킨슨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투덜댔다.
"망할 괴물 꼬맹이 같으니라고."
셋이서 하나를 합공했는데 도리어 밀렸다.
더군다나 레이는 저게 전력도 아니었다.
젠킨슨은 레이가 몸을 두 배는 가속시킬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레이가 진짜 전력을 내면 셋이 합공해도 1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쌍검술은 대체 누가 가르쳤어? 지미 너냐?"
"난 제대로 된 검술을 여기와서 처음 배웠어. 쌍검술은 견식도 못해봤다고."
지미가 고개를 저었다.
건방진 태도였으나 젠킨슨은 개의치 않았다.
로커스트 토벌전 당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지미와 매튜는 악을 쓰며 전선을 유지했다.
지미와 매튜가 당연히 도망갈 것이라 여겼던 젠킨슨은 그 광경을 보고 크게 탄복했다.
의외로 호탕한 이면이 있었던 젠킨슨은 로커스트 토벌 이후 자주 지미와 매튜를 불러 술자리를 가졌고, 마침 연배도 비슷했던 덕에 이제는 거의 친구 같은 사이였다.
"그럼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야?"
"다른 기사님에게 배운 거 아니야?"
"그럴 리가. 물론 나도 쌍검술을 쓸 줄 모르는 건 아니야."
기사들은 다양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되도록 많은 종류의 병기를 다룰 수 있도록 훈련한다.
"하지만 쌍검술을 주력으로 삼는 기사는 백작가에 한 명도 없어. 백작령을 통틀어 저 괴물 꼬맹이가 쌍검술을 가장 잘 쓸 거다."
"그럼 레이 저놈이 쓰는 쌍검술은 어디서 난 거야?"
"아마도."
디디에가 앓는 소리를 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직접 창안한 것 같습니다."
"...말이 됩니까?"
"9살에 검기를 뽑아내던 아이니, 말이 안 될 건 없잖습니까."
"옳은 말씀이긴 합니다만..."
디디에가 이가 나간 자기 검을 바라보며 시원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레이는 엑스퍼트의 경지를 넘어서기 직전입니다. 신체를 가속시키는 불가사의한 기술까지 사용하면 그래듀에이트도 능히 맞상대 가능할 겁니다."
레이가 지닌 문제는 하나였다.
"대체 마나 연공법을 거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마나만 충분하면 어렵지 않게 엑스퍼트의 경지를 넘어설 텐데."
"아, 그게 말입니다."
지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마나를 안 늘리는 게 아니라 못 늘린다고 말하더군요."
*
레이는 고민했다.
2년 전 잠깐 마나연공법을 활용해 코어의 마나를 늘리려고 했다가 하마터면 비명횡사 할 뻔했다.
쥐꼬리만큼 늘어난 코어의 마나가 심장에 엄청난 부하를 걸었고, 근 한 달을 침대 위에서 굴러다녀야 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코어의 마나를 안전하게 늘릴 수 있지? 정말 마법이라도 배워봐야 하나?'
허나 마법은 손쉽게 배울 수 있는 학문이 아니었다.
레이는 여러모로 마법사의 존재가 아쉬웠다.
루나는 4년이 지난 지금도 마법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다.
스승이 필요했다.
허나 레이는 다비드와 로커스트의 일을 연달아 겪으며 마법사를 향한 불신이 극에 이르러 있었다.
'그렇다고 레전드리 고아를 시골 구석에 방치한 채 썩힐 수도 없고.'
이 문제에 대해선 백작과도 몇 번 의논했다.
얼마 전에 백작이 괜찮은 방안이 있으니 잠시 기다려 보라고 했는데 레이는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래저래 아쉬운 게 많아.'
고개를 저은 레이가 옷을 갈아 입고 교실로 향했다.
레이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수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직접 가르치고 있었다.
쿠키 주머니를 어깨에 맨 레이가 교실에 들어섰다.
옛날만큼 아이들이 쿠키에 환장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그럭저럭 수업을 잘 따라오고 있었다.
레이는 평소처럼 수업을 진행했다.
"~해서, 이렇게 되는 거야. 이해 안 되는 사람?"
"..."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우와아!"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하나둘 교실을 떠났다.
레이도 교실을 떠나려 하자 카렌이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선생님! 질문 있어요! 물어봐도 돼요?"
"뭔데?"
"이 문제가 안 풀려서 그러는데, 한 번 풀어봐주면 안 돼요?"
"어디 보자."
레이가 카렌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카렌이 줄을 쳐놓은 문제를 보니 이차함수 개념이 필요한 문제였다.
레이가 필기구를 들고 설명을 시작하려는 찰나 카렌이 문제가 잘 안 보인다며 레이와 가깝게 몸을 붙였다.
이제 막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가슴이 레이의 팔에 맞닿는다.
레이는 별 생각 없이 설명을 계속하려 했지만 무언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아래를 내려봐야 했다.
카렌의 손이 레이의 허벅지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레이는 생각했다.
'제발 좀.'
레이가 손을 뻗어 카렌의 뺨을 움켜쥐었다.
"으욱?"
레이는 망설이지 않고 카렌의 뺨을 움켜쥔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카렌, 카렌, 카렌!!"
"아으아으!"
"자꾸 이상한 거 배워올래? 응?!"
"무, 무든 마리야...?"
레이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자 카렌이 제자리에서 버둥거렸다.
"아파아파!"
"또 리사 누나 찾아가서 이상한 거 배워온 거지? 응?"
카렌이 슬그머니 눈을 피한다.
레이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애들한테 이상한 것 좀 가르치지 말라고 그리 당부를 해놨는데!!'
레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근래 들어 지미 보육원의 고질적인 문제가 터져나오는 중이었다.
바로 교육환경이 씹창나 있다는 점이었다.
보육원 바로 옆에 홍등가가 붙어있었으니, 교육환경이 씹창났다는 건 비유가 아니라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되어버렸다.
한참 성적 호기심이 왕성해진 아이들이 홍등가를 구경하기 위해 기웃거리다 레이에게 잡혀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카렌 같은 경우 예전부터 알고 지낸 홍등가의 지인들을 찾아가 '남자를 유혹하는 법' 같은 이상한 지식을 배워와 레이에게 써먹으려 하곤 했다.
'돌아버리겠다.'
대한민국에 비해 비교적 널널한 성관념과 천혜의 교육환경이 합쳐져 여러모로 사건사고가 터지는 중이었다.
막아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긴 했지만, 솔직히 버거웠다.
"카렌, 이런 건 어른 되고 배우자. 응?"
레이가 한숨을 쉬며 카렌을 타박했다.
카렌은 자기 유혹이 실패했다는 사실에 실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뒷 자리에서 이야기를 엿듣던 요하나가 레이를 향해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카렌보다 키도 작은 주제에 어른 타령이야."
우드득!
레이가 쥐고 있던 책상 모서리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