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1)
44화
봄이 돌아온 후 레이는 13살이 되었다.
얼마 전만 해도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반투명한 나뭇잎이 새롭게 피어올랐다.
창문을 내다본 레이가 시원섭섭한 감성에 젖어 중얼거렸다.
"내가 벌써 13살이라니..."
나이를 먹는 게 마냥 좋지가 않다.
주접을 떠는 게 아니라, 레이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시간이 빨리 흘러봤자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20대에 잠깐 반짝였던 신체는 빠르게 노화할 테고, 예정된 세계의 멸망 또한 성큼성큼 가까워질 거다.
"안갯속을 정처 없이 헤매는 기분이야."
이 세상의 미래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레이는 항상 마음 한편에 불안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걷는 길이 과연 정답이 맞을까.
도리어 멸망을 앞당기는 행위는 아니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답이 없는 문제였다.
사념을 지우기 위해 양 볼을 짝짝 두들긴 레이가 잠옷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흠."
바지를 올리기 전 슬쩍 사타구니를 쳐다봤다.
슬슬 거시기에 털이 나고 있었다.
"불안불안한데."
근래 2차 성징이 찾아오며 크고 작은 혼란을 겪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레어 이상의 고아들 다수가 레이 또래에 편중돼 있는 탓에 골치가 꽤 아팠다.
가만히 있는 거시기 털을 몇 번 쓸어본 레이가 방문을 열고 나섰다.
마침 벨라가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벨라는 일주일에 두 번은 레이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자 했다.
레이 또한 벨라와 함께 식사하는 시간만은 웬만해선 준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식사 준비가 끝났다.
벨라와 식탁에 마주 앉은 레이는 포크로 계란을 가르다 말고 입을 열었다.
"엄마."
"왜?"
"슬슬 하던 일 그만두고 다른 일 알아보는 건 어때?"
"갑자기 무슨 말이니?"
"왜, 엄마 인기도 이제 좀 시들시들하잖아."
끼긱!
소시지를 찌르려던 벨라의 포크가 접시를 타고 미끄러졌다.
벨라가 항변했다.
"아들! 엄마 아직 인기 좋거든!"
"엄마, 솔직히 요새 픽률이 많이 떨어지긴 했잖아. 리사에게 에이스 자리 넘긴 지도 1년은 됐고."
짜악!
"아악!"
결국 등짝을 한 대 맞은 레이가 벽으로 달려가 등을 비볐다.
엄살을 떠는 레이를 향해 벨라가 도끼눈을 뜬 채 일렀다.
"이게 엄마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엄마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얼굴에 주름이 좀 지긴 했으나 벨라는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아직도 많은 남자들이 그녀와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기꺼이 높은 금액을 지불했다.
"5년은 더 있다 은퇴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아니, 엄마. 평생 한 가지 일만 해서 먹고살아야 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슬슬 다른 일 좀 알아보자."
벨라가 실소를 터뜨렸다.
"엄마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이제 와서 다른 일을 찾니? 허드렛일 하루 종일 해도 지금 버는 돈의 반의반도 못 벌어."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니까."
레이가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생활비야 지미나 백작에서 얼마든지 타서 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가 벨라의 은퇴를 종용하지 않은 건, 벨라도 벨라 나름의 프라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직업은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이 아니다.
사람은 직업을 가짐으로써 사회와 소통하고 심리적 욕구를 충족한다.
벨라는 '라일락의 저녁'이라는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나름의 안정감과 인정 욕구를 채워왔다.
다만 이제 그녀는 늙어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벨라는 한물간 여자로 취급받으며 자존심에 이런저런 상처를 입게 것이다.
레이는 그때가 오기 전에 벨라가 매춘업에서 손을 뗐으면 싶었다.
물론 벨라는 반대했다.
예전보다 인기가 떨어진 건 사실이었지만 여전히 수입이 괜찮았다.
벨라는 최대한 많은 돈을 모아두고 싶었다.
재능 넘치는 아들이 추후 진로를 선택할 때, 돈이 부족하여 꿈을 포기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벨라의 고집을 듣고 한숨을 쉰 레이가 방에서 검을 들고 나왔다.
"엄마, 잘 봐."
츠즈즈즉!
검에서 검기가 피어올랐다.
촛불처럼 일렁이는 검기가 햇살을 밀어내고 방 안을 푸르게 밝혔다.
레이가 부엌칼을 향해 검을 가져다 댔다.
깡!
부엌칼이 힘없이 부러졌다.
검술에 무지한 벨라였지만 눈앞의 현상이 무얼 뜻하지는 알 수 있었다.
"아들, 그거... 검기니?"
"응. 검기가 맞아."
레이가 검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엄마, 역사책을 뒤져봐도 내 나이 때 엑스퍼트의 경지에 이른 천재는 수십을 넘지 않아."
물론 역사에 적힌 수십의 인물도 절반 이상은 나이를 속였을 것이다.
"엄마,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아들은 어마어마한 천재거든. 백작님이 괜히 나한테 목을 매는 게 아니야. 이건 비밀인데, 사실 백작님이 날 사위 삼으려고도 했었어."
벨라는 당황스러웠다.
필립스 백작이 레이를 과하게 신경 쓰고 배려해 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가 상당한 재능을 지녔다는 건 눈치챘지만, 설마 열셋의 나이에 엑스퍼트의 초입에 들었을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벨라는 어찌할 줄 모르게 기뻐하면서도 레이를 걱정했다.
"네 어미가 나라서, 엄마 신분이 천해서, 아들 발목을 잡지는 않겠니?"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벨라의 질문은 정말이지 우문이었다.
레이가 이 세계에 처음 환생했을 때.
워낙 못 볼 꼴을 많이 봤던 레이는 결심했었다.
제국을 밀어버리고, 이 빌어먹을 세계가 멸망하는 꼴을 봐야겠다고.
그렇게 해서라도 날 여기에 보낸 초월자를 엿 먹여야겠다고.
허나 레이가 이 세계에 정을 붙였던 건.
정을 붙이다 못해 종말을 막아보겠다고 결심했던 건.
오롯이 벨라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그녀는 레이에게 짐이 아니었다.
그녀는 레이에게, 한때 이 세상의 전부보다 가치 있는 존재였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마, 걱정하지 말고... 이제 슬슬 하던 일은 내려놓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엄마가 계속 거기 있으면 아들 마음은 편하겠어? 솔직히 좋은 일은 아니잖아."
잠시 고민한 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 말은 알겠어. 지금 하는 일은... 올해 안으로 정리해보도록 할게."
눈물을 닦은 벨라가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요즘 보육원 아이들은 잘 지내니? 아들이 애지중지하며 키운 아이들이잖아."
레이는 순간 뒷골이 당겼다.
"약-간의 문제들이 있긴 한데."
잠깐 고민한 레이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잘 지내고 있어."
*
그날 오후.
기사들과 대련 약속을 잡은 레이가 지미와 함께 보육원에 들렀다.
약속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했더니, 보육원 뒷편 목책에서 젠킨슨과 디디에가 요하나의 특별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아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4년이 지났다.
많은 아이들이 재능을 꽃피웠지만, 특히 눈부신 발전을 이룬 아이가 바로 요하나였다.
천부적인 운동신경을 지녔던 요하나는 마나 감응력까지 타고났다.
1년만에 마나를 활용해 육체를 강화하는 방법을 터득한 요하나는 근래 들어 얼추 기사와 합을 맞출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발전했다.
지금 발전 속도 대로라면 2년 안에 엑스퍼트의 경지를 밟을 수도 있었다.
"후우..."
호흡을 고른 요하나가 가볍게 점프하며 검을 앞으로 찔렀다.
디디에가 찌르기를 흘려내기 위해 팔목을 움직이자 곧장 요하나의 검이 손목을 노리고 궤도가 뒤틀렸다.
디디에가 다시 방어 자세를 취한다.
요하나는 검을 위로 올려쳐 얻은 반동으로 지면에 안착하고는 나풀나풀 목책 안을 뛰어다니며 검을 휘둘렀다.
요하나의 움직임은 좋게 말해 화려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산만했다.
회전하고, 뛰어오르고, 구르고, 엎드리고.
전부 비효율적인 동작이었다.
실전에서의 검술은 빈틈 없고 간결해야 효율적이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론 그랬다.
허나 빈틈 없고 간결한 검술이라고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매번 간결하게 급소만을 노리는 검술은 쉽게 읽힌다.
때문에 무인들은 항시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공격에 다양한 변주를 가했다.
요하나는 자기 재능을 믿고 기사들이 가르쳐준 검술에 본인만의 변주를 섞었다.
그리고 요하나의 시도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촥!!
화려함 속에 몸을 숨긴 찌르기가 부지불식 간에 튀어나와 디디에를 노렸다.
디디에는 급하게 허리를 틀어 공격을 피한 후 크게 뒤로 물러났다.
요하나의 검술을 보고 레이가 감탄했다.
"저게 진짜 재능이지."
천부적인 감각을 동원해 자신만의 검식을 찾아간다.
진정한 천재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창조'의 영역이었다.
'역시 유니크 고아로 요하나를 승급시킨 건 옳은 결정이었어.'
레이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쇳소리가 목책 안을 울렸다.
캉!! 카강!!
"어라...?"
디디에의 공격을 막아낸 후 다시 한 번 허공으로 뛰어오르려던 요하나가 움직임을 멈췄다.
목책의 모서리까지 몰린 탓에 더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대련이 끝났다.
디디에가 목책을 활용해 요하나를 제압하는데 5분의 시간이 걸렸다.
손대중을 했다지만, 만약 목책이 없었다면 제압까지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짝짝짝!
"요하나, 정말 대단했어."
레이는 요하나의 발전이 굉장히 자랑스러웠다.
요하나를 보육원에 데려온 것도, 기사들에게 요하나를 소개시켜주었던 것도, 전부 레이가 한 일이었으니 뿌듯한 감정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요하나에게 다가간 레이가 미리 준비해놨던 수건으로 요하나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려 했다.
허나 수건이 이마에 닿기도 전에 요하나가 매몰차게 레이의 팔을 쳐냈다.
탁!
"내 몸에 멋대로 손 대지 마."
요하나가 짜증이 깃든 눈으로 레이를 훑어보더니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재수 없어 진짜."
레이가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요하나는 디디에와 잰킨슨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레이가 건넸던 것과 다른 수건을 가지고 목책 밖으로 나갔다.
"..."
잠시 냉기가 불었다.
제자리서 부들부들 떨던 레이가 이내 거품을 물며 소리쳤다.
"제엔장, 사춘기라니! 우리 순수하고 착했던 요하나에게 사춘기라니!!"
1년 전부터 조금씩 짜증이 많아지더니 근래 들어 아주 제대로 사춘기에 들어섰다는 티를 내고 있었다.
사춘기는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아주 자연스러운 진통 과정이다.
아이가 사춘기를 맞았을 때는 무조건 타박하고 나무라기보다는 꾸준한 소통을 통해 유대감을 높여 천천히 마음의 문을 열어갈 필요성이 있었다.
허나 어디까지나 이론이 그렇다는 거고.
레이는 요즘 사춘기를 맞은 몇몇 아이들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제엔장, 내가 해준 게 얼만데!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쳐 놨더니 날 이렇게 찬밥 취급 해?!"
머리를 쥐어뜯은 레이가 허공을 향해 외쳤다.
"니들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너희들 때문에 얼마나 개처럼 구르며 고생했는데! 굶어 죽거나 팔려갈 것들을 데려와서 키워놨더니 이제 와서 뒤통수를 쳐?!"
괴로워하는 레이를 보고 지미가 눈시울을 붉히며 미소지었다.
'저 새끼가 드디어 자기 업보를 치르는구나.'
레이 덕분에 강제로 암흑가의 지배자가 된 지미는 부디 보육원 아이들에게 더욱 지랄맞은 사춘기가 찾아와 레이가 더 큰 고통을 받기를 바랐다.
"크으윽...!"
레이가 흥분을 가라앉히기 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레이 또한 13살이 되면서 호르몬 밸런스가 좀 어긋난 탓인지 감정 조절이 예전보다 쉽지 않았다.
레이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춘기가 찾아온 요하나가 마냥 거칠게 변한 건 아니었다.
도리어 사춘기가 찾아온 것 치고는 예전과 변함없이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검술 수업도 열심히 듣고 윗사람에게 예의도 바르고 교우 관계도 변함 없이 원활하니까.'
단지 레이를 향한 반항기가 좀 강해졌을 뿐이었다.
어찌보면 모든 부모가 아이를 키우며 한두 번씩 거치는 과정이었다.
한숨을 길게 내쉰 레이가 목책 문을 닫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애들 수업이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엑스퍼트 간에 검을 나눌 시간이었다.
"오늘은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인데."
허리춤에서 검 두 자루를 뽑아낸 레이가 지미, 디디에, 젠킨슨을 한눈에 담았다.
"세분 한꺼번에 들어오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