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3화 (43/446)

저주 (3)

43화

환생 이전 내 불알 친구놈 말이다만.

정말 하루 종일 책을 놓지 않는 독서광이었다.

철학서나 수필도 자주 읽었고, 역사나 문화와 관련된 책도 굉장히 좋아했다.

물론 독서 시간의 절반 정도는 장르 소설에 투자했는데, 그놈은 장르 소설조차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

소설 내용을 떠들기 좋아했던 그놈은 내가 환생한 세상의 예언서쯤 되는 [제국멸망기]의 내용 또한 자주 입에 담았지만, 이게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됐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로 나는 완전기억 능력자가 아니었다.

내 기억력은 평범한 편이었고, 관심도 없는 소설 내용을 옆에서 떠들어봤자 9할가량은 곧장 머리에서 휘발됐다.

1할이라도 남은 게 어디냐 싶긴 한데 여기서 두 번째 문제가 터졌다.

불알 친구놈이 내게 떠든 판타지 작품 개수만 일백이 넘어갔다는 점이다.

[제국멸망기]와 설정이나 용어가 비슷한 작품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유사한 작품들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 뒤죽박죽 섞이거나 왜곡됐고, 써먹을 수 없게 변질됐다.

허나 이번 사건을 겪으며 얻게 된 무수한 키워드들이 조각난 기억의 파편을 하나로 묶어 뒤늦게 의식 위로 끌어올렸다.

"레시나 얘는 뒷설정이 되게 불쌍하네."

불알 친구 놈과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뭐가 불쌍해?"

"세상을 구해놨더니 저주를 받아 동족에게 버림받았고, 최후도 비참했고. 뭐, 이 소설 캐릭터가 다 이꼴이긴 하지만."

"무슨 저주?"

"그러니까, 어디 보자. 긴 시간에 걸쳐 육체가 쇠락하고, 기억을 망각하고, 이지를 상실해서, 결국 영혼이 붕괴하는 저주."

"난 그냥 자살하고 만다."

"그것도 마음대로 못한다는 설정일걸?"

적당히 호응하며 걸러들었던 내용이다.

허나 눈앞에 레시나를 마주하고 나니 잊고 있었던 그녀의 이야기가 하나둘 떠올랐다.

세계수의 분노를 받은 레시나는 본래 수백 년간 무력하게 세상을 떠돌며 갖은 풍파에 고통받다 폐인이 되어 바스러졌어야 했다.

허나 레시나의 동료이자 전쟁영웅이었던 카시야스는 레시나를 잠식한 저주의 존재를 알아채고 그녀의 수호자가 되길 자처했다.

카시야스는 자신의 죽음을 위장한 후 오직 레시나를 보호하기 위한 작은 가문을 새로 세웠다.

카시야스의 친우인 필립스가 그의 계획에 동참했다.

이미 영락했고 앞으로도 영락해갈 저주받은 영웅을 위해, 그들은 기꺼이 희생을 자처했다.

나는 떠오른 기억들을 곱씹으며 지독하게 탁한 눈을 한 레시나를 마주 봤다.

레시나는 잠깐 손을 떨더니, 조금씩 새는 발음으로 내게 물었다.

"당신은... 하르시아가 아닌 거죠?"

"우연찮게 그분의 진전을 잇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울트는... 어디 있나요?"

가디 자작가의 울트.

그의 풀네임은, 울티마 가디언.

해석하자면, 최후의 수호자란 뜻이다.

그를 수식하는 건 이름이 아니라 그에게 부여된 임무 그 자체였다.

어려운 임무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레시나의 마지막을 지키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허나 최후의 수호자는 레시나의 종말을 용납하지 못했다.

선조였던 카시야스조차 이루지 못했던 저주의 해주를 위해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났더라?

사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만.

아마도 울트는 레시나의 마지막을 지키지도 못했고, 저주를 해주할 방법을 찾는 것도 실패했을 것이다.

깊은 절망에 빠진 그는 결국 신을 원망하며 타락했고.

종래에 세계수를 제 손으로 불태웠다고 불알 친구놈이 떠들었던 것 같다.

레시나가 다시 물었다.

"울트는... 어디 간 거죠?"

"레시나님의 저주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잠시 여행을 떠났습니다."

"제 존재가 그를 망집에 들게 하였군요."

비틀거린 레시나가 눈물을 보였다.

"아직도 후회하고는 해요. 그날, ...가 내밀었던 손길을 거절하지 못한 것을."

레시나는 '카시야스'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듯했다.

세계수의 저주는 이미 그녀의 기억과 이지를 대부분 앗아갔다.

레시나는 절망에 빠져 무너져 가는 얼굴로 호소했다.

"부탁할게요. 울트를... 설득해줘요. 저는 망령이에요. 그가 저와 함께 몰락하길 원치 않아요. 울트가 망집을 내려놓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앞으로 얼마나 남으셨습니까?"

"20년을 넘기지 못하겠죠. 달빛이 비칠 때 약간의 이지를 되찾는 것도... 이제는 힘들 거예요."

"부탁하신 건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방으로 들어가시죠. 밤바람이 찹니다."

"고마워요."

레시나를 안내해주며 생각했다.

더 안전한 미래를 위해서는 울트의 타락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레시나가 남은 삶을 편안히 마칠 수 있게 돕는 것만으로 그의 타락을 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타락하기 전에 울트를 제거하거나, 레시나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세계수를 불태우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여유를 두고 고민해볼 문제였다.

*

로커스트를 토벌한 지 3개월이 흘렀다.

레이가 아침부터 보육원에 들려 운동장을 거닐고 있자, 티티가 손가락을 쪽쪽 빨며 뒤를 쫓아왔다.

"레이? 레이 왔어?"

레이가 티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티티, 잘 지내고 있어?"

"울트가 안 와서 슬퍼."

"선생님 말 잘 듣고 있으면 곧 돌아올 거야. 걱정하지 마."

"응, 알았어. 선생님 말 잘 들을게."

다그닥다그닥

말이 지면을 내딛는 소리가 들렸다.

보육원에 도착한 매튜가 레이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레이는 티티를 다른 선생에게 맡기고는 얼른 말 위에 올라탔다.

오늘은 무려 지미 보육원 디나르 지부의 완공식이 있는 날이었다.

보육원으로 활용할 부지와 건물을 구매하고 보강하는 데 든 금액은 대부분 백작이 지원해주었다.

백작은 디나르 지역을 관리하게 된데다 황실에서 내린 상훈까지 있어 복지 사업에 투자 가능한 예산이 크게 늘었다고 했다.

물론 공짜 호의는 아닐 터다.

레이는 티티를 조금 더 신경 써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말을 몰고 가며 매튜가 물었다.

"보육원을 두 군데 모두 네가 관리하기는 힘들 텐데. 괜찮은 계획이라도 있는 거냐?"

"음... [고아 승급 제도]를 한번 도입시켜 보려고요."

"...뭔 제도?"

"고아 승급 제도요."

매튜 말마따나 레이가 백작령과 디나르를 왕복하며 보육원 두 군데를 동시에 신경 쓰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레이는, 앞으로 고아를 수집하게 되면 일단 노멀 등급을 매겨 디나르 지부에 수용시킨 후, 그중 눈에 띈다 싶은 고아를 레어 등급으로 승급시켜 백작령으로 데려올 계획이었다.

레어 승급에 성공한 고아는 백작령에서 더욱 양질의 교육을 접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성공적인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레이는 뿌듯해하며 자기 이이디어를 자랑했으나, 정작 이야기를 들은 매튜는 떫은 표정을 한 채 되물었다.

"너무 비인간적인 발상 아니냐?"

"아니, 이게 왜 비인간적인 발상이에요?"

사람 급 나눠서 구분하는 게 언제 하루 이틀 일인가.

당장 이쪽 세상은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매겨져 차별받았다.

레이 생각에 고아 승급 제도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선진적인 시스템이었다.

"내가 뭐 애들을 내다 버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응? 애들 수준 맞춰서 눈높이 교육해주겠다는데, 얼마나 인도적이에요? 이름 하여 Orphan Promotion System. 줄여서 O.P.S. 어감도 괜찮네요."

"미친놈."

고개를 절래절래 저은 매튜가 말의 속도를 더 높였다.

얼마 안 가 디나르에 도착한 레이와 매튜는 먼저 지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현재 디나르의 암흑가는 완전히 지미 패밀리의 지배하에 놓이게 됐다.

때문에 디나르에도 지미가 사용할 수 있는 사무실을 하나 마련하게 되었는데, 물론 지미의 동의 없이 백작과 레이가 멋대로 진행한 일이었다.

"지미, 여기 있어요?"

지미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 창문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가 찾아오고도 연초를 뻐끔거리며 한동안 말이 없던 지미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난 백작령에 정착하며 평화로운 슬로우 라이프를 꿈꿨어."

"네?"

"소소하게 용돈 벌이 좀 하고, 애들 좀 돌보고, 작은 밭도 하나 일구며 근심 걱정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그런 슬로우 라이프 원했다고."

헌데 레이한테 휩쓸려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백작령과 자작령을 아우르는 악명 높은 암흑가의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지미가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젠 이룰 수 없는 꿈이겠지."

슬픈 눈을 한 지미에게 레이가 한마디 했다.

"지미, 벌써 갱년기 왔어요?"

"이런 개...!! 에휴, 지금은 너한테 화낼 힘도 없다."

지미는 던지려던 화분을 내려놓으며 한숨과 함께 옷을 챙겨입었다.

오늘 완공식에 백작도 잠시 얼굴을 비친다고 하니, 어쨌든 제대로 예의를 지켜야 했다.

*

지미 보육원 디나르 지부 완공식을 마친 후 일주일 뒤에는 알슈테인 공작가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세리아의 무사 복귀를 위해 공작가에서 파견한 호위 병력들이었다.

물론 필립스 백작의 허가를 구하고 파견한 병력들이었는데, 그 숫자가 일백에 가까웠다.

레이는 공작가 사람들이 세리아를 핍박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들은 깍듯이 예의를 지키며 세리아를 대했다.

백작의 추측대로, 공작가 또한 세리아가 얻게 될 위명의 가치를 파악하고 잡음 없이 세리아를 포섭하기 위해 기분을 맞춰주는 것 같았다.

정치적인 계산이었지만 세리아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세리아가 마중을 나온 레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당부했다.

"안 돼. 나 없을 때 사고 치면. 항상 조심해."

세리아는 레이가 걱정이었으나, 레이 또한 세리아가 걱정되긴 매한가지였다.

"고모도 조심하시고요. 공작가에선 포션병으로 사람 머리 내려치거나 그러면 안 돼요?"

"레이, 잘 들어. 엄마 말."

"돈 함부로 빌려주지 말고요. 도장 함부로 찍지 말고요."

"칼 휘두르지 마. 아무한테나."

"공작가에서 아티펙트 내놓으라 하면 그냥 다 줘버리고요."

"혼자 돌아다니지 마. 모르는 곳."

"제발 사기꾼 조심하세요."

"연락해. 누가 괴롭히면?"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절 누가 괴롭히겠어요?"

레이를 꼭 안은 세리아가 레이의 양 볼에 번갈아가며 입술을 맞췄다.

레이가 버둥댔지만 완력으로 찍어누른 세리아는 여덟 번이나 입술을 맞추고는 이마를 비벼오며 속삭였다.

"편지할게. 꼭 해야 해. 답장?"

"꼭 할게요."

"자주 찾아올게."

"알겠어요. 가늘 길 조심하세요. 가서도 조심하시고요."

레이를 내려놓은 세리아가 벨라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벨라도 마주 고개를 숙이며 세리아를 배웅했다.

레이는 어리숙한 세리아가 걱정되었지만, 설령 호구를 잡히더라도 공작가란 그늘 아래 있는 게 안전할 것 같았기에, 좋은 마음으로 세리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로커스트를 토벌한 제국의 영웅 세리아가 백작령을 떠났다.

*

"자, 모두 숙제해 왔어?"

세리아가 떠난 다음 날.

구운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쿠키들이 든 자루를 등에 멘 레이가 교탁에 서서 소리쳤다.

레이보다 쿠키를 향해 이목이 집중된 아이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네에!"

"그럼 어디 한번 숙제 검사해볼까?"

대부분의 근심걱정을 덜어낸 레이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평화가 찾아왔다.

레이는 되도록 이 평화가 오래가길 바랐다.

그렇게 세월이 빠르게 흘러, 어느새 4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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