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2화 (42/446)

저주 (2)

42화

레이는 앓는 소리를 내며 책을 덮었다가, 슬그머니 다시 손을 뻗었다.

백작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기도 했고, 환생하고는 처음 접한 관능 소설인지라 관심이 좀 가기도 했다.

'어차피 내 정신 연령은 성인이니까.'

합리화를 마친 레이가 책 후반부를 펼쳤다.

대체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 속 주인공인 아나스타샤가 개 목줄을 찬 채로 달빛이 비치는 영주성 복도를 네 발로 걷고 있었다.

[차디찬 밤바람이 이성을 일깨웠던 탓일까.

홍조가 가득했던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뒤늦게 공포가 찾아왔다.

"레, 레온하르트. 이제 그만 돌아가자꾸나. 누, 누군가 보면 어찌하려고 이러느냐."

"아가씨."

레온하르트의 회색 눈동자가 달빛을 머금고 섬뜩하게 빛났다.

아나스타샤는 뒤늦게 자기 실수를 깨닫고 엉덩이에 달린 꼬리 장식을 애처롭게 흔들었다.

레온하르트는 비열한 미소와 함께 손에 쥔 목줄을 거칠게 당겼다.

"짐승이 사람 말을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오우..."

레이는 퍽 흥미로운 심정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러나 다음 장을 제대로 읽어보기도 전에 노크 소리와 함께 메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작님께서 들어오십니다."

레이가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백작이 모하메드를 대동하고 응접실에 들어섰다.

레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자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대도 앉게."

"감사합니다."

"알레시아가 왔다 갔나?"

백작이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을 바라보고 물었다.

레이는 알레시아의 일탈을 알리는 걸 잠시 미루기로 마음먹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많은데 이것부터 까발렸다간 분위기가 개판이 될 게 뻔했다.

"잠깐 다녀갔습니다."

"알레시아가 그대를 참 마음에 들어 하는군. 요즘 그대 이름을 입에 달고 살아."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열 살 아이의 정열이 길어봤자 얼마나 가겠습니까."

백작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대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그렇긴 합니다만."

레이가 마주 웃었다.

가벼운 잡담을 몇 마디 더 건넨 백작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본제를 꺼냈다.

"레이, 우리는 로커스트를 토벌했네."

"네, 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를 보고 백작이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말하겠네. 이건 그대 생각보다도 정말 대단한 위업이야. 얼마 안 가 제국 전역이 이 주제로 시끄러워질걸세."

레이가 잠시 로커스트와의 일전을 상기했다.

그래듀에이트만 둘에 엑스퍼트가 열한 명이 달려들었음에도 도리어 밀렸었다.

정공법으로 로커스트를 토벌하려 했다면 엑스퍼트급 스물에 그래듀에이트급 넷 이상은 필요했을 것이다.

'만약 로커스트의 수하들까지 멀쩡하게 로커스트와 합류했다면... 그 두 배는 필요했을 테고.'

이리 생각하니 확실하게 와 닿았다.

로커스트는 비록 로드 급에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로드 급에 근접했다는 수식이 과장이 아닐 만큼 대단한 강자였다.

"참 운이 좋았구나 싶긴 하네요. 큰 피해 없이 로커스트를 토벌했으니."

"그대 공로가 크지."

"다비드 님이 전사하신 건 안타깝지만요."

"..."

찻잔 손잡이를 매만진 백작이 가볍게 웃었다.

"다비드 건을 처리해 주는 건 어렵지 않네. 로커스트의 지식을 탐한 다비드가 토벌 작전에 자원했다고 이야기를 꾸미면 되니."

"그래도 여러 흔적들... 같은 게 남았을 텐데요. 마탑에서 고위 마법사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낼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이, 다시 말하지. 우리는 엄청난 공로를 세웠네. 죄를 지은 입장이 아니란 말이야. 그 어떤 세력도, 현시점에서 우리를 무례하게 들쑤시는 건 불가능하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다비드의 죽음에 대해 금전적인 보상만 제대로 지급한다면 마탑도 굳이 까다롭게 굴며 백작가와 척을 지려 하진 않을 걸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백작님."

백작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레이 혼자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감사를 표하는 레이에게 손을 저은 백작이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그대가 디나르에서 죽인 사람 숫자가 생각보다 꽤 되더군."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타박하는 건 아닐세."

레이가 죽인 이들 대다수가 직간접적으로 로커스트의 반역 행위에 협조하고 있었다.

제국법 대로 일을 처리했으면 부모 자식까지 깡그리 몰살당한 중죄였다.

"영지민들에게는 흑마법사의 사악한 주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고만 발표할 걸세."

백작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레이에게 건넸다.

"황실에 올릴 보고서의 개요일세."

보고서에는 로커스트 토벌까지의 사건 개요가 시간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레이가 자세히 읽어보니 사실과 다른 점이 많았다.

흑마법사의 흔적은 갱들 간의 세력 다툼 중에 우연찮게 발견됐다고 서술되었고, 레이가 세운 공로는 대부분 지미, 매튜, 세리아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레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당분간 디나르 지역은 내가 관리하게 될 가능성이 높네."

"당분간이라면..."

"울트가 귀환할 때까지. 울트가 귀환하지 않으면, 아예 필립스 가의 영지로 귀속될 수도 있겠지."

"축하드리면 될까요?"

"나는 울트가 무사히 귀환하길 바라네."

한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백작은 로커스트 토벌 건으로 황실이 백작가에 막대한 상훈을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어설프게 레이를 속여 빚을 지우기보다는, 레이에게 신뢰를 얻길 바랐기에 취할 수 있는 태도였다.

레이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백작님."

"그리 생각해주니 고맙군."

"근데 백작님, 제 고모는 괜찮을까요?"

"세리아 말인가. 그녀가 문제 될 행동을 하긴 했지."

세리아는 미궁을 공략한 후 알슈테인 공작가에 어떤 보고도 없이 고향으로 향했다.

알슈테인 공작가가 한참 전에 세리아를 사망 처리했다지만, 어쨌든 트집이 크게 잡힐 행동이었다.

근심 어린 얼굴을 한 레이를 보고 백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하지 말게."

"백작님?"

"잘 생각해보게. 제국 변방의 보잘것없는 가문의 기사들이, 로커스트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활약했다는 사실을, 과연 사람들이 믿어줄까?"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다들 이리 생각하겠지."

백작가는 그저 숟가락을 얹었을 뿐이다.

로커스트를 토벌한 진정한 영웅은 따로 있다.

10년 만에 발레리우스의 미궁을 공략하고 복귀에 성공한 천재 기사 세리아.

그녀가 바로 로커스트를 물리친 진정한 영웅이다.

"사람들은 다비드와 세리아 단둘이서 로커스트를 물리쳤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네. 우리는 멀리서 구경이나 했다고 여기겠지."

"어, 음..."

호응하기가 마땅찮았다.

결국 필립스 백작과 그의 기사들이 남들에게 무시당할 거란 이야기였으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개의치 않네. 어쨌든, 향후 몇 년은 그녀의 이름이 제국 전역에 오르내릴 걸세. 세리아가 얻을 위명을 고려하면, 공작가도 큰 질책 없이 환영회를 열어줄 거야."

"그렇군요."

"물론 미궁에서 얻은 아티펙트는 순순히 내어줘야 하겠지만, 욕심부리지 않는 게 좋네. 거기 얽힌 세력이 워낙 복잡해."

"차라리 다행입니다. 지금처럼 아티펙트를 주렁주렁 들고 다녔다가는 누군가에게 노려졌을 테니까요."

레이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근심을 가졌던 사안이 대부분 정리된 탓에 긴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더 물어볼 게 있나?"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하나 더 남아있었다.

"왜 아직까지 티티가 보육원에 있는 겁니까?"

"그녀를 숨기기 적합하니까."

"백작님..."

백작의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다.

엘프를 영주성 안으로 들여 보호하면 당장은 안전하겠지만 남들의 시선을 살 수 있었다.

때문에 보육원에서 생활하게 하겠다는 거다.

받은 게 있어 무작정 거부하기 힘들었지만, 레이는 솔직하게 토로했다.

"저는 보육원이 위험해지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기사 둘을 보육원에 순환 배치 시켜주겠네. 기사 여럿과 대련을 하다 보면 그대 또한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거야."

"하아, 알겠습니다. 다만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레시나의 혈육을... 대체 왜 인간이 보호하고 있습니까?"

뒷사정을 알아야 만약의 상황에 대처가 가능했다.

한참 동안 레이를 바라본 백작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게네시스가 무엇인지 아는가?"

"레시나가 사용했던 병기 아닙니까? 세계수의 뿌리로 만들었다던."

"맞네. 그건 본래 세계수를 지키기 위한 방위 병기로써 엘프의 영역 밖에서는 사용이 금지된 무기였네."

"...레시나가 규칙을 어겼군요."

"그랬지. 세계수는 분노했고, 레시나의 혈육에게 저주를 내렸네."

백작은 최대한 담담하게 선조의 일을 전했다.

"우리의 선조는 저주를 받은 레시나의 혈육을 외면치 못했네. 때문에 저주와 관련된 기록을 말살하고 후손들에게까지 수호의 의무를 지게 하였지."

"수호의 의무라면..."

"말 그대로 해석하면 되네. 저주를 받고 동족에게 쫓겨난 레시나의 혈육이, 하다못해 남은 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한 거야. 허나 길었던 가문의 의무도... 이제 곧 끝이 나겠지."

"티티가 레시나가 남긴 마지막 혈육입니까?"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티티의 외견을 떠올리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직 어린 엘프 아닙니까? 한참 더 살 것 같습니다만."

"세계수가 남긴 저주 탓에 티티는 길어봤자 20년을 넘기지 못할 거야. 육체가 퇴화하고 기억을 잃어버리고 이지를 상실하고 마침내 영혼이 바스러져 죽음을 맞이하겠지."

잠시 침묵한 레이가 입을 열었다.

"백작님, 한 번만 다시 묻겠습니다."

"무엇을?"

"티티가 레시나의 '혈육'이 맞습니까?"

백작과 레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백작이 한숨을 쉬었다.

"그만 나가보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백작님."

레이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책을 가리켰다.

"저거 한 번 읽어보시죠."

"...?"

"앞으로 책 안쪽 내용물도 제대로 확인하시고요."

"뭐?"

백작이 의아해하며 책장을 펼쳤다.

그로부터 약 3일 동안.

알레시아는 방 안에 갇힌 채 문을 쾅쾅 두드리며 백작에게 잘못을 빌어야 했다.

*

로커스트를 토벌한 지 2주가 지났다.

야밤에 침대에서 일어난 레이가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며칠 전만 해도 관절이 쑤셔대서 밤마다 잠을 설쳤지만 이제는 통증이 대부분 가라앉았다.

백작의 지원 아래 신성력과 포션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덕분이었다.

레이는 검 한 자루를 들고 밖을 나섰다.

주택가 앞에서 검을 뽑았다간 위병에게 잡혀가기 딱 좋았기에, 넓은 운동장이 있는 보육원으로 향했다.

'가볍게 몸만 풀고 들어가자.'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무식하게 검을 휘둘러 몸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재활한다 생각하고 천천히 검술을 점검해볼 요량이었다.

스릉

운동장에 도착한 레이가 검을 뽑았다.

달빛이 강한 날이었다. 매끄러운 검신이 달빛을 머금고 은은하게 빛났다.

머리에 새겨진 검로를 따라 천천히 검을 휘두른다.

레이의 몸은 완벽하게 하르시아가 창조해낸 검술을 재현했지만, 레이의 머리는 검술에 담긴 하르시아의 깨달음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했다.

레이가 항상 스스로의 재능이 부족하다 되뇐 이유였다.

동작 하나하나를 끊어서 펼치니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레이는 그저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르시아라는 불세출의 천재가 닿았던 경지를, 레이는 정말 좁쌀만큼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후우..."

하르시아가 남긴 가장 기초적인 검술을 펼쳐본 레이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레이를 지켜보던 작은 소녀가 입을 열었다.

"하르시아와 같은 검식을 사용하시는군요."

"..."

레이가 땀에 젖은 머리를 털어내곤 티티와 마주 봤다.

달빛을 받은 그녀는, 평소의 멍청했던 인상에 비해 조금은 강맹하고 조금은 서글퍼 보였다.

레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600년 전 세상을 구하고도 세계수의 저주를 받아 영락한 영웅.

"레시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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