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41화 (41/446)

저주 (1)

41화

"너 엄마 없니?"

"어,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하하, 엄마가 없긴 왜 없어? 내 눈앞에 있는데."

"그럼 왜 그렇게 애미 없고 집도 없는 자식처럼 나다니는 거니? 어?"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레이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일단 고개부터 저었다.

지금까지 사고쳤던 게 워낙 많은 탓에 한 번 꼬리를 잡히면 한두 시간쯤은 우습게 설교를 들어야 했다.

미간을 찌푸린 레이의 양모, 벨라가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네 집이 여기가 맞긴 하니? 방도 따로 마련해주고 침대도 사주고 책상도 사주고 원하는 대로 꾸며줬더니 집구석엔 얼굴도 안 비치고 아주 보육원에서 눌러살고 있더만?"

"오, 오해야 엄마. 나 잠은 맨날 집에 들어와서 자."

"내가 밤마다 집에 없다고 아들이 뭐하고 다니는지도 모를 것 같지?"

"어, 음, 죄송합니다..."

멀쩡한 집구석 놔두고 보육원에서 살다시피 한 게 사실이라 변명할 구색이 없었다.

벨라의 한숨이 짙어졌다.

"요즘 사람도 패고 다닌다며."

"자꾸 양아치들이 보육원을 기웃거려서..."

"이게 지미랑 놀더니 깡패 다 됐네?"

"그런 거 아니야..."

"집에 가둬놔야 정신 차릴래? 백날 입으로만 얌전히 있겠다고 떠들어 대고. 이번엔 대체 어딜 갔다 온 거니?"

"디나르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갔다왔어."

"잠깐? 지금 '잠깐'이라고 했니? 잠깐 볼일 있다는 녀석이 하루 넘게 실종되더니 기절해서 실려와?"

"기절이라니. 그냥 잠을 좀 못 자서 깜박 졸았던 거야."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지? 너 사흘 만에 깨어났어."

"어? 정말?"

레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사흘 가까이 정신을 못차렸다고? 확실히 무리를 좀 하긴 했는데...'

디나르에 잠입한 후 로커스트에게 닿을 때까지 이틀에 가까운 시간이 소비됐다.

그 기간 동안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는 커녕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계속 칼을 휘둘렀다.

돌이켜보니 어찌 마지막까지 안 쓰러지고 버텼나 싶긴 했다.

벨라는 사흘 동안 신관과 기사도 모자라 백작까지 레이의 곁을 다녀갔다고 투덜대며 깝깝한 표정으로 레이를 쳐다봤다.

"레이, 좀 평범한 9살처럼 굴면 안 되겠니?"

레이는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입을 더 놀려봤자 하등 도움될 게 없었다.

벨라의 설교가 얼추 30분을 넘어갔을 때쯤.

노크 소리와 함께 새로운 손님이 레이를 방문했다.

"고모?"

레이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다 통증을 느끼고 침대에 엎어졌다.

갑옷 대신 평상복을 입고 다가온 세리아가 레이를 향해 물었다.

"일어났어?"

"방금 일어났습니다."

"몸 괜찮아?"

"움직일만 합니다. 근데..."

세리아와 벨라를 번갈아 바라본 레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두려운 감정이 급격히 마음 속에 차오르며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이 둘을 같이 둬도 되나?'

원망하는 감정을 가지고자 하면 양쪽 모두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관계였다.

눈치를 보던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미 마주친 건 어쩔 수가 없다.

두 사람이 통성명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레이는 일단 간단하게 상대를 소개했다.

"엄마, 이분은 내 고모 되시는 분이야. 그... 내 아버지, 에반의 동생분이야."

벨라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레이는 내심 안도했다.

"이름은 세리아라고 하셔. 이번에 대단히 큰 도움을 받았어. 그리고 고모, 이분은 제 어미니, 벨라예요."

벨라를 '엄마'라고만 소개하고 넘어가면 좋지 않은 오해를 살 수 있었다.

레이는 낯이 좀 뜨거웠지만 벨라와의 관계를 정확하게 풀어 설명했다.

"친엄마는 아니세요. 혈연적으로는 제 생물학적 모친의 친언니 되시는 분입니다. 갈 곳 없는 갓난아기였던 절 거둬주고 키워주신 분이죠."

벨라가 코웃음을 쳤다.

"키우긴 무슨. 지 혼자 멋대로 컸지."

"아니 엄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틀린 말 했니?"

"하늘 같은 어머니 은혜가 없었으면 내가 지금처럼 멀쩡히 자랄 수 있었겠어?"

"에휴, 말장난 그만하고 쉬어라. 난 나가 보련다."

"고모랑 이야기 안 나눠?"

"아들 쓰러져 있는 사이 충분히 나눴어. 세리아, 레이 좀 부탁할게요."

"알겠어요."

레이의 염려와 다르게, 둘의 분위기가 아주 험악해 보이진 않았다.

걱정을 덜어낸 레이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쉬고 있을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있어.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치료사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선 벨라가 피곤한 얼굴로 레이의 이마에 키스했다.

"많이 걱정했어."

"미안해, 엄마."

"다음에도 말 안 듣고 싸돌아다니면 아예 집에서 쫓아낼 줄 알아."

"니옙."

"필요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하고."

"없습니다."

"난 자러 간다. 우리 효심 깊은 아들 덕분에 이틀 밤을 샜거든."

"안녕히 주무십셔."

덜컹!

벨라가 문을 닫고 나갔다.

레이와 단둘이 방에 남게 된 세리아가 물었다.

"괜찮아? 몸 진짜로?"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안 괜찮아요. 끄으윽."

잠에서 깨어난 후 계속해서 사지가 비틀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중이었다.

낑낑거리는 레이의 이마를 세리아가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워낙 몸을 함부로 굴린 탓에 앞으로 한동안은 고생을 좀 해야 할 터다.

포션이나 신성력으로도 바로 해결하는 게 불가능한 문제였다.

*

로커스트를 토벌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레이가 누워있는 동안 아델을 비롯한 치료사들이 자주 왔다갔다하며 회복을 도왔다.

레이는 슬슬 바깥 구경을 하고 싶었다.

너무 오래 침대 위에서 뒹굴거린 탓에 기분이 계속 처지는 것 같았다.

레이는 한참을 떼를 써 간신히 벨라에게 외출 허가를 받아냈다.

만약을 위해 세리아가 동행하기로 했다.

레이는 자기 발로 걸어나갈 생각이었으나, 문밖을 나가기 전에 세리아에게 겨드랑이 아래를 양손으로 붙잡혀 위로 들어 올려졌다.

시야가 확 높아진 레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모? 갑자기 왜 이러세요?"

"안 돼. 걸으면. 절대 안정 취해야 해."

"그래서 절 이렇게 들고 움직이시겠다고요?"

"응. 이러면 편해."

"편하고 자시고 남들에게 보이기 부끄럽습니다만..."

"괜찮아. 안 부끄러워, 나는."

"아니 제가 부끄럽다고요."

레이가 허공에서 두 다리를 버둥댔지만 곧장 세리아의 완력에 제압당했다.

세리아는 자기 새끼를 자랑하는 동물처럼 레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뒤로 당겼다 해보더니 흡족한 얼굴로 집을 나섰다.

세리아의 품에 파묻힌 레이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고모, 얼굴 화끈거리니까 제발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조카 귀여워. 그러니까 괜찮아."

"고모, 저는 전혀 귀엽지 않습니다."

세리아가 레이를 둥가둥가 흔들어주며 고개를 저었다.

"조카는 귀여워."

레이는 뒷목이 당겨왔다.

몸만 9살이지 정신연령은 성인을 넘어선 레이로서는 이런 아이 취급은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뭐, 정을 붙여주는 건 고맙긴 한데...'

세리아는 미궁에 갇혔던 사이 유일한 혈육을 잃었다.

유일한 혈육의 흔적인 레이에게 정을 느끼는 것도 이해할만했다.

허나 레이는 분명히 선을 긋고 싶었다.

"고모, 아버지 묘비에서 뵈었을 때 말씀드렸지만."

잠시 망설인 레이가 말을 이었다.

"저는 아버지 친자식이 아니에요."

"으음..."

텁!

세리아가 레이를 옆으로 반 바퀴 돌려 잡았다.

레이와 두 눈을 마주한 세리아가 또박또박 자기 의견을 전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야."

"네?"

"가능성 있어. 오빠의 아들일 가능성. 아예 없지는 않아."

"어, 음."

생물학적 애미애비가 몸을 비비며 지껄였던 소리를 전부 기억하는 레이로서는 동의하기 힘든 주장이었다.

"남의 자식일 확률이 훨씬 더 높을걸요?"

"그래도 괜찮아. 레이는 지켰어. 오빠 곁을, 끝까지."

세리아가 레이를 끌어안았다.

레이의 허리에 닿은 세리아의 손 끝이 잠시 떨렸다.

"그러니까 레이는 내 조카야. 오빠는 지키지 못했어. 조카는, 내가 지킬 거야."

"..."

세리아의 품은 따뜻했다.

레이는 더는 매정한 말을 하기 힘들었다.

한참을 고민한 레이가 세리아를 마주 안으며 밝게 웃어주었다.

"걱정하지 마요. 저 검 휘두르는 거 봤죠? 앞으로 몇 년이면 제가 고모보다 강해질 걸요?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하나 줄까? 아티펙트? 잘 다룰 거야. 조카도."

"그거 돌려줘야 한다면서요. 괜히 저 때문에 문제 만들지는 마요."

틀린 말은 아닌지라 세리아가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멀리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다!"

"레이 왔다!"

"이상한 누나한테 안겨 있어!"

레이가 안겨 있던 사이에도 세리아가 열심히 걸어준 덕분에 어느새 보육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아이들의 선두에서 카렌이 루나와 요하나를 데리고 뛰어오더니 레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이! 보고 싶었어!"

휘익!

세리아가 레이를 높게 들어올려 카렌의 손이 닿지 못하게 했다.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카렌에게 세리아가 경고했다.

"만지면 안 돼."

"뭐, 뭐예요! 레이 돌려줘요!"

"조카는 지금 아파. 함부로 접촉 금지."

"그, 그런 게 어디있어요!"

카렌이 폴짝 폴짝 뛰어올라 레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두 팔을 하늘 위로 뻗은 세리아의 높이를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결국 레이를 붙잡는 데 실패한 카렌이 은근슬쩍 세리아를 옆으로 밀었다.

물론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이른 세리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울상이 되어가는 카렌을 보고 레이가 세리아의 손을 탁탁 쳤다.

"그만 내려 줘요."

세리아도 장난이었는지 순순히 레이를 내려줬다.

오랜만에 땅을 디딘 레이가 어설프게 중심을 잡은 후 카렌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카렌,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어?"

"없었어!"

"존댓말."

"없었어요! 레이는 몸 괜찮아요?"

"많이 괜찮아 졌어. 며칠만 더 쉬면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루나랑은 잘 화해했지?"

"당연하죠!"

레이가 루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루나,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곳 없어?"

"...괜찮아요."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선생님들한테 이야기하고. 공부는 조금만 쉬었다 가르쳐줄게."

루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레이가 보육원 운동장 구석에서 이질적인 외형을 갖춘 아이를 발견했다.

엘프, 티티였다.

'쟤는 왜 아직도 보육원에 있어?'

백작이 기사들을 이끌고 달려오게 한 요주의 인물이다.

잠시 보육원에 머물렀다 해도 진즉 백작이 데리고 떠났어야 한다.

레이가 티티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레이."

뒤를 돌아보니 보육원 울타리 너머에 디디에가 서 있었다.

디디에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백작님께서 널 찾으신다."

*

디디에의 안내를 받아 영주성에 찾아온 레이는 응접실에 앉아 백작을 기다렸다.

지난 일주일간 백작령과 자작령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조사가 있었다고 한다.

짧은 기간이라 해도 대략적인 사건의 흐름은 파악이 끝난 건지, 백작은 상의해야 할 일이 있다며 레이를 영주성으로 불렀다.

레이 또한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차분히 앉아서 백작에게 물어봐야 할 내용을 정리하고 있자니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며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알레시아가 쳐들어왔다.

"레이! 레이!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레이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난리가 아니긴 했지."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이번 일에 레이가 아주 큰 공을 세웠다고 하시더구나!"

"다행이네."

레이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백작이 알레시아에게 저리 말했다면 감옥에 갇히는 꼴은 확실히 면한 것 같았다.

알레시아 입을 헤벌쭉 벌리고 레이의 머리를 쓱쓱 넘겨주었다.

"역시 나의 자랑스러운 기사로구나! 아주 장하도다! 응?"

레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 알레시아가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레이! 왜 얼굴의 흉터가 그대로인가?"

"아, 이거."

중간에 치료를 중단했으니 흉이 질 수밖에 없다.

아델이 말하길, 이제 와서 흉을 지우려면 더 굵은 상처를 새긴 후 다시 치료해야 한다고 했다.

당장은 로커스트의 수하들과 싸우면서 갈아먹은 관절의 치료에 집중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레이가 대충 답했다.

"알레시아, 생각보다 이런 거 치료받는데 돈이 많이 들어."

"돈? 돈이 문제인가?"

"항상 돈이 문제지. 나는 귀족도 아니잖아."

"나의 불찰이로다. 주인된 자로서 이런 것 하나하나를 꼼꼼히 신경써주어야 했거늘. 잠시만 기다리거라! 내가 아버지 몰래 모아놓은 용돈을 가지고 오겠다!"

"아니, 잠..."

레이가 뭐라 말리기도 전에 알레시아가 용돈 주머니를 가지러 응접실을 뛰쳐나갔다.

알레시아를 뒤쫓는 걸 포기한 레이가 슬그머니 탁자 위로 눈을 돌렸다.

탁자 위엔 알레시아가 두고 간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귀축 기사와 악당 영애님]

"이게 아동용 도서가 맞나...?"

제목만 보면 음란 서적인데 알레시아는 이 책을 대놓고 들고 다녔다.

만약 진짜 불순한 내용이 담겨있었다면 진작에 빼앗겼을 거다.

책의 커버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전연령판'이라는 글자가 하단에 쓰여 있었다.

"전연령판이라면 문제없겠지."

레이가 아무 페이지나 펼쳐 책의 내용을 읽어봤다.

[찰싹!

그 누구의 손길도 허락한 적 없었던 아나스타샤의 엉덩이에 두꺼운 남자의 손이 휘감겼다.

섬찟한 감각이 허리를 타고오르자, 굴욕적인 자세로 엉덩이를 내보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발가락을 오므리며 경련했다.

"레온하르트! 미쳤느냐?! 네가 감히...!!"

우윳빛으로 빛나던 아나스타샤의 엉덩이가 새빨갛게 부어 오른다.

굴욕과 고통으로 점철된, 허나 알게 모르게 달뜬 아나스타샤의 신음을 음미하며, 레온하르트가 나른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아가씨의 성격이 아가씨 엉덩이의 반만큼이라도 말랑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뭔데 시발?"

당황한 레이가 다음 장을 펼쳤다.

레온하르트가 채찍과 촛농을 들고 아나스타냐에게 다가갔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

레이가 책의 첫 장으로 돌아가 북커버 사이의 틈을 살폈다.

떨어져 나갔던 북커버를 끈적이는 풀로 조잡하게 이어붙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책을 감싼 커버를 뜯어낸 후 내용물을 바꿔치기한 게 틀림없었다.

"이년이 벌써부터 발랑 까져가지고."

일단 이것부터 백작에게 일러야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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