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3)
38화
레이는 자신만만하게 로커스트가 보육원으로 향했으리라 주장했지만 내심 자신의 추측이 틀렸기를 바랐다.
지금 백작령엔 로커스트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로커스트가 보육원을 습격해 수하를 잃은 화풀이라도 했다면 꼼짝없이 참극이 벌어졌을 거다.
레이는 말을 같이 탄 매튜를 계속 재촉했다.
그리고 기사들과 함께 보육원에 도착한 레이가 볼 수 있었던 건.
운동장 한가운데서 남들의 시선을 받으며 엉엉 울고 있는 카렌이었다.
"얘는 왜 이러고 있어?"
주변을 둘러보니 지미와 디디에도 무사했고, 병사들도 멀쩡한 얼굴로 보육원을 순찰하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레이가 지미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루나 부모가 나타나서 루나를 데려갔다고요?"
레이는 두통이 오는 걸 느꼈다.
전생에서든 현생에서든 하여튼 부모 같지 않은 새끼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았다.
"지미, 그걸 또 가만히 보고 있었어요?"
"야, 말리고 싶어도 명분이 있어야지. 루나가 자기 입으로 엄마아빠랑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하는데 내가 거기서 뭘 더 어떻게 해?"
"나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붙잡아 뒀어야죠. 근데 카렌은 왜 울고 있어요?"
"루나가 부모 손잡고 보육원을 떠나려니까 애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말리더라고."
"근데요?"
지미가 조금 전 카렌과 루나의 대화를 떠올렸다.
카렌이 루나의 손목을 붙들고 외쳤었다.
"루나!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우리랑 계속 같이 있겠다고 약속했잖아?"
"...약속은 취소야. 엄마아빠가 날 데리러 와 줬어."
"저 사람들은 나쁜 어른들이야! 레이가 그랬어!"
"그렇지 않아. 카렌은 이해 못 해. 엄마도 아빠도 없으니까."
"...뭐?"
"나는 엄마도 아빠도 있어. 난 너희들이랑 달라. 그러니까 이거 놔."
지미의 이야기를 들은 레이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실소했다.
"가지 말라고 뜯어말리니까 그리 말했다고요? 루나가?"
"그래."
"아이고, 깝깝하다."
친구라 믿었던 루나에게 패드립을 당한 카렌은 서럽게 울면서 주먹을 말아쥐었다.
"루나랑은 절교야! 다시 찾아와도 절대 안 받아줄 거야!"
레이가 씩씩거리는 카렌을 일으켜주며 달랬다.
"루나도 진심은 아니었을 거야. 너무 상처받지 마."
"하지만 루나가 나한테 엄마아빠도 없다고 놀렸는걸!"
"카렌, 없느니만 못한 엄마아빠도 있는 법이야. 루나는 카렌이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다고 부러워 한 거야."
"못 믿겠어. 루나랑은 절교야!"
"그러지 말고. 다시 데려올 테니까 루나랑 한 번 더 이야기 해봐."
"루나 데리고 올 거야?"
"그래야지."
레이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했다.
로커스트는 루나를 조용히 데려가기 위해 루나의 부모까지 포섭했다.
허나 디나르에서의 수작이 들킨데다 수하들까지 전멸했으니, 도리어 그를 억제할 요인이 사라져 버렸다.
이젠 일을 어렵게 할 필요가 없었다.
루나가 부모를 따라나서지 않고 버텼다면 직접 찾아와 보육원을 불태웠을 거다.
'로커스트의 존재를 눈치채고 보육원에 해가 갈까봐 제 발로 걸어 나간 건가.'
레이가 지미를 보았다.
"지미, 난 지미를 믿어요. 루나 부모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파악했죠?"
"뻔하잖아. 시그니 산맥이야."
"로커스트도 거기 있겠네요. 디나르에서 벌였던 수작은 이미 망했으니, 루나를 챙기고 바로 근방을 뜰 생각인가 보군요."
물론 이건 레이의 일방적인 추측이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부모를 다시 만난 아이가 보육원을 떠났을 뿐이다. 아무 문제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사들이 백작에게 조언했다.
"백작님, 영주성으로 귀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습니다."
"로커스트는 이미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을 겁니다. 제국의 지원을 받아 정식으로 추격대를 조직해야 합니다."
"안 됩니다."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기사들 대부분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할 말은 해야 했다.
"로커스트가 부모를 이용해 루나를 데려간 겁니다. 지금 당장 시그니 산맥으로 가 루나를 구하고 로커스트를 물리쳐야 합니다."
"정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군."
젠킨슨이 차갑게 분노했다.
"백작님의 관대함이 너의 방종을 부추겼구나."
레이는 젠킨슨의 분노를 이해했다.
로커스트가 루나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제대로 된 근거 하나 없는 레이 혼자만의 주장이었다.
기사들도 어지간히 답답했을 거다.
로커스트는 진즉 몸을 뺀 것 같고 뒤처리 해야 할 건 산더미인데, 웬 애새끼가 자꾸 나서서 헛소리를 해댔으니까.
"천한 것들의 천성이 이렇다. 한 번 자비를 베풀어주면 감사할 줄 모르고 자꾸만 기어오르지."
젠킨슨이 계속해서 분노를 쏟아냈다.
백작도 더는 젠킨슨을 제지하지 않았다.
레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나는 엄마아빠 손을 잡고 보육원을 떠났다. 단지 그뿐이다.
백작과 기사들은 이쯤에서 일을 마무리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레이가 이 자리에서 아무리 화려하게 입을 놀려도 그들의 선택을 돌릴 수는 없었다.
젠킨슨이 검 손잡이를 붙잡고 경고했다.
"네 공로를 무시하는 건 아니나, 더 이상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입을 놀리면 백작님이 용서해도 내가 널 용서치 않을..."
"아, 시발."
레이가 침을 찍 뱉었다.
"야, 꼬우면 한 판 붙어."
갑작스러운 폭언에 젠킨슨이 잠깐 얼을 탔다.
"...뭐?"
"아가리만 놀리지 말고 남자답게 한 판 붙자고. 빨리 덤벼. 아님 내가 갈까?"
"이 정신 나간...!"
쿵!
레이가 지면을 박찼다.
오버드라이브로 가속된 신체가 기사들의 시야에서조차 껌처럼 늘어진다.
레이가 뽑아낸 검에서 섬광이 터져나왔다.
젠킨슨은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서로의 검기가 충돌한다.
카드득!
"?!"
젠킨슨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검기의 위력에서 밀렸다.
젠킨슨이 그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레이가 품을 파고든 뒤였다.
몸을 회전시킨 레이가 젠킨슨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억!
콰당탕!!
젠킨슨이 꼴사납게 지면을 굴렀다.
발에 차였을 뿐인데다 갑옷을 입고 있어 실질적인 피해는 없었다.
허나 젠킨슨은 흙바닥에 입을 맞춘 채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못했다.
비단 젠킨슨뿐만 아니라, 자리를 지키던 모든 기사들이 눈을 부릅뜬 채 차갑게 굳어 있었다.
모하메드를 제외하곤, 다들 찰나의 순간이나마 레이의 움직임을 놓쳤다.
눈으로 본 현상을 받아들이지 못한 머리가 자꾸만 과열되어 사고를 흐트렸다.
"백작님."
레이가 검을 던졌다.
백작가 문양이 새겨진 검이 필립스 백작의 발아래 박혀 들었다.
무릎을 꿇은 레이가 고개를 숙였다.
"제 목을 걸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루나가 위험합니다.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백작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사에 새겨질 불세출의 재능을 타고나고도, 고작 몇 달 알고 지낸 남을 위해 목숨을 걸어오는 이유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이 멸망하니 뭐니 레전드리 고아니 뭐니 그딴 소리를 해봤자 백작에게 씨알이라도 먹히겠는가.
그래서 적당히 둘러댔다.
"제 가족이니까요.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합니까."
"..."
침묵이 흘렀다.
백작과 기사들의 얼굴에 다양한 감정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가족, 가족을 위해서라는 그 고전적인 한 마디가,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젠킨슨이 모래알을 씹어내며 일어섰다.
"불가능하다."
"무엇이 불가능합니까?"
"네 추측이 전부 옳다고 해도 어떻게 로커스트를 찾아내자는 거냐? 상대는 고위 마법사고 시그니 산맥은 넓다. 현재로선 그를 추적할 방법이 없다."
"괜찮습니다."
레이가 확신했다.
"루나가 우리를 인도해줄 겁니다."
*
루나는 말없이 부모를 따라 걸었다.
보육원이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시그니 산맥에 진입하니 조르지아가 나타나 루나의 가족을 안내했다.
루나는 부친의 허리춤에 달린 돈 주머니가 짤그락짤그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상상했다.
이번엔 나를 얼마를 받고 팔았을까. 저번보다는 비싸게 받았을까?
기왕이면 제값을 받았기를 바란다. 나의 심장이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귀한 물건으로 취급되는 것 같으니 말이다.
루나는 계속 걸었다. 검은 거인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얼마 안 가 루나는, 바람을 다루는 마법을 가르쳐준 남자와 재회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흰자위를 검게 물들인 남자가 두 손을 힘껏 맞부딪치며 루나를 환영했다.
그는 덤덤한 척을 하려 했지만 찾아오는 희열이 생각보다 강렬했던지 입꼬리를 계속 꿈틀거렸다.
짤그락!
돈 주머니가 루나의 부모 앞에 떨어졌다.
루나의 부모는 돈 주머니를 챙기더니 루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내 이름은 윌리암이다. 남들은 나를 로커스트라 칭하기도 하더군."
크르륵!
짐승을 닮은 검은 정령이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코앞에서 정령을 마주한 루나의 부모가 끔찍한 비명을 토해냈다.
루나는 가만히 서서 부모의 사지가 찢겨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로커스트, 윌리암이 착잡한 미소를 띠었다.
"디나르에서의 일은 완전히 망쳤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아. 널 얻었으니 말이다."
루나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한 번 더 깨달았다.
코앞에서 부모를 찢어 죽인 걸 보면, 로커스트는 루나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에게 중요한 건 루나의 육체였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렇게 솔직하게 나와준다면, 루나 또한 불안에 떨며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었다.
우웅!
루나의 서클이 활성화됐다.
루나의 몸을 감싼 거대한 서클을 보며 로커스트가 헛숨을 토했다.
"아... 훌륭하군."
로커스트의 눈이 독한 마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하게 풀렸다.
루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클에 술식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계산을 그만두고, 그저 화염을 빗발치게 하는 술식을 한계까지 반복하고 압축해서 새겨넣는다.
통제되지 않은 마나가 날뛰어댄다.
작은 불꽃이 하나 이는 순간, 화염이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화르르르륵!!
예기치 못한 재앙에 조르지아는 허둥대다 불타 죽었다.
정령이 씹어 먹은 부모의 잔여물 또한 검게 타 재로 돌아갔다.
통제되지 않은 마나가 주인까지 잡아먹는다. 루나의 손아귀에서부터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로커스트가 희열에 절여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로커스트의 몸에서 마나가 뻗어나왔다.
멋대로 날뛰던 화염이 둥글게 압축되어 얼어붙었다.
루나가 재차 서클에 술식을 새겨넣으려 했지만, 쏟아져 들어온 로커스트의 마나가 루나의 서클을 붙잡아 봉인했다.
로커스트가 소리쳤다.
"너라면 할 수 있다. 네가 있으면 할 수 있어! 너로 인해 나는, 진정한 '로드'라 불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스터 급 무인과 대마법사.
홀로 국가 하나를 전복시킬 수 있는 전략 병기들.
그들을 하나로 묶어 로드라 칭한다.
언제나 한 끗 부족했던 그 수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 로커스트에게 찾아왔다.
"훌륭해. 훌륭하군! 하지만 이곳을 떠나기 전에 기를 조금 꺾어놔야겠구나."
시도 때도 없이 불을 피워대서는 곤란하다.
검게 물든 폭풍이 로커스트의 손아귀에서 피어올랐다.
팔다리 정도는 미리 잘라내 버릴 생각이었다.
농축된 마나가 루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옥죈다.
온몸이 비틀려가는 고통 속에서, 루나는 레이에게 불려 갔을 때를 떠올렸다.
'내 앞에서 말고는 절대로 힘을 드러내지 마.'
레이는 그리 당부한 다음 덧붙였다.
'루나,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네 목숨이 많이 위험하거나, 또는 친구들의 목숨이 위험할 때는, 망설이지 말고 힘을 써. 뒤처리는 내가 해줄게.'
루나는 그때 물었었다.
나 홀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레이는 손쉽게 답을 주었다.
'불을 피워. 최대한 화려하게. 지평선 너머까지 보이도록.'
그럼 달려오겠다고 했다.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단숨에 달려올 거라고 했다.
달려와서.
내가 너를.
'구해줄게.'
루나의 코앞까지 다가온 검은 폭풍을 찬란히 빛나는 검기가 양단했다.
카가가가각!!
폭풍을 베어낸 레이가 루나를 옥좼던 마나의 감옥을 힘으로 깨뜨렸다.
뒤로 넘어지려는 루나의 허리춤을 잡아챈 레이가 다시 한 번 불어닥친 검은 폭풍을 막아내고 크게 물러섰다.
레이는 관절에서 피를 뚝뚝 흘려내며,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얼굴 보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레이가 로커스트를 향해 검을 겨누며 감정을 토해냈다.
"너 때문에 키가 5 cm는 줄었겠다, 이 씹새끼야. 넌 뒈졌어."
"...어처구니가 없군."
로커스트가 할 말을 잃고 중얼거렸다.
꼬맹이 혼자, 검기를 뽑고 나타나서, 갑자기 낄낄거리며 욕을 내뱉는데, 일반적인 상식과 무엇하나 맞물리는 게 없었다.
허나 해야할 일은 명확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까부느냐?"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굴러다녔는데 새끼야, 뭘 당연한 걸 쳐 묻고 있어?"
"근데 혼자 찾아와서 머리를 내밀어?"
"혼자 오긴 누가 혼자 와?"
보스 레이드를 해야하는데 설마 혼자 왔을 리가.
레이는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니라 구경하러 왔다.
촤아아악!
사방에서 짙푸른 검기가 피어올랐다.
포위 당했다는 걸 깨달은 로커스트의 눈가가 살짝 좁아졌다.
레이가 루나를 자기 품으로 끌어안으며 선언했다.
"로커스트, 넌 여기서 뒈지는 거야."
당혹에 빠졌던 로커스트가 이내 조소를 터뜨렸다.
"무식한 촌뜨기 새끼들. 기사 몇 좀 끌고 오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가."
검은 거인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다.
동시에 검게 물든 정령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내려 지면을 뒤덮었다.
일백이 넘어가는 암흑 정령들이 검게 물결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소수의 수하들만 대동하고도 제국을 공포에 떨게 했는지 잘 모르는가 보군."
크아아아아아-!!
현실에 현현한 최고위 암흑 정령이 적들을 향해 포효했다.
"너희들은 전부 여기서 죽는다."
그의 이명은 로커스트.
7서클의 경지에 이른 고위 마법사이자 제국이 두려워하는 최강의 암흑 정령사.
"내가 바로, 불사(不死)의 군단이다."
"불사?"
레이가 킥킥거렸다.
"이봐, 그거 알아? 정령도 피를 흘리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