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37화 (37/446)

가족 (2)

37화

***

로커스트가 세운 아지트 주변엔 결계가 펼쳐져 있었지만, 결계가 모든 위협을 완벽히 보호해주는 수단은 아니었다.

때문에 결계의 외곽을 돌며 순찰을 진행하던 로커스트의 수하, 우니는 얼마 못 가 표정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연락이 늦어. 이 새끼들 어디서 뭐 하는 거야?"

"너무 조급해하지 마."

"빌어먹을, 시모네가 죽었어."

우니가 동료 흑마법사인 옥트를 향해 신경질을 냈다.

"일이 다 꼬였다고. 당장이라도 몸을 피해야 할 지 몰라. 시모네의 죽음을 조사하러 간 놈들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이렇게 연락이 늦는다고?"

옥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모네가 죽자마자 디나르 시내에 나가있던 동료들 전부가 영주성으로 향했다.

이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우니의 말이 맞았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지금, 영주성으로 향한 동료들은 최대한 빠르게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헌데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연락이 없었다.

"불안해하는 건 이해해. 하아, 하필 이런 때 로드께서 자리를 비우시다니."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어. 젠장,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와 놓고 무책임하게 뭐 하는 짓이야?"

"우니, 입조심 해."

"좋은 거 혼자 먹겠다는 건 알겠다고. 근데 굳이 이 타이밍에 밖으로 나돌아야겠어?"

"제발 진정해. 일단 우리끼리라도 의논이 좀 필요하겠어."

"그래, 지금 당장 말이야."

우니가 몸을 돌렸다.

강줄기를 따라 쭉 걸으니 아지트 역할을 하는 오두막이 나왔다.

오두막에 도착한 우니가 벌컥 문을 열며 외쳤다.

"노벰! 두오데! 이야기 좀 해요!"

"무슨 일이야?"

"불안해서 못 참겠어요. 여기서 더는 죽치고 못 있겠다고요."

"로드께선 기다리라고 하셨다."

"빌어먹을. 두오데, 아직도 모르겠어요? 로드는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다고요!"

"우니, 지금 반기를 들겠다는 거냐."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당장은 로드의 도움을 받기 글렀으니 일단 우리끼리 살길을 찾아보자고요."

"그게 항명이다."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요. 시모네도 죽었고! 조사대의 연락도 늦어지고 있어요! 제발 아지트라도 좀 옮기자고요. 노출됐을 확률이 높아요."

"..."

우니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두오데가 짧게 고민했다. 멋대로 아지트를 옮기는 건 분명 로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거다.

허나 로드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수하들을 방치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나중에 형벌을 받더라도 당장의 목숨을 부지하는 게 중요했다.

두오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짐 챙겨. 흔적 지우고. 로드께는 내가 따로 연락하겠다."

"훌륭해요, 두오데. 정말 고마워요."

"쓸 데 없는 소리 말고 빨리 움직여."

이야기를 듣던 노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엘프는 어떻게 할까요?"

"...일단 챙겨."

"그리하죠."

방에 들어간 노벰이 엘프의 팔목을 붙들고 나왔다.

끌려나온 엘프가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반항했다.

"이, 이거 놔아-!"

"닥쳐!"

노벰이 불같이 화를 내며 엘프의 다리를 걷어찼다.

퍽!

"아악!"

엘프가 넘어지자 노벰은 연속해서 복부를 걷어찼다.

등 뒤가 벽으로 막혀있었기에 엘프는 속절없이 폭력에 노출됐다.

퍼억! 퍼억!

"으극! 아악!"

"젠장, 쓸모없는 년. 동족에게도 버림받은 병신년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신음이 잦아들 때까지 발길질을 계속한 노벰은 널브러진 엘프의 팔을 씩씩거리며 붙잡았다.

엘프가 피를 게워내며 중얼거렸다.

"울트가... 다 혼내줄 거야..."

"울트? 실종된 영주 놈을 말하는 거냐?"

"우엑, 우윽..."

"병신년."

노벰이 비웃음을 머금은 채 엘프를 끌고 나갔다.

아지트를 옮기기 위한 준비는 금방 마무리됐다.

제국에 쫓기는 처지인 만큼 그들은 언제나 도주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두오데가 약도를 펼쳐놓고 설명했다.

"강줄기를 타고 넓게 돌아 시그니 산맥으로 이동한다."

"좋은 판단이네요. 여의치 않으면 도망치기 좋은 곳이죠."

그냥 산맥 깊숙이 파고들어도 추적이 쉽지 않은 곳이다.

다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결계를 해제..."

두오데가 흠칫 놀라며 숲속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침입자다. 숫자는 열 명. 속도를 보면 기병이다."

"시발, 이럴 줄 알았지. 결계로 시간을 얼마나 벌 수 있죠?"

"못 버틴다. 은폐 결계와 감지 결계가 동시에 찢겼어. 아지트 위치가 정확히 노출된데다 침입자 사이에 엑스퍼트 급이 포함되어 있다."

"빨리 튀어요. 침입자 중 기사가 몇 명이나 섞여 있을지 어떻게 알아요."

"짐은 최대한 줄이고 움직인다."

노벰이 혀를 찼다.

"그럼 이년은 처리하겠습니다. 언제 또 소리를 빽빽 질러댈지 모르니, 불안해서 못 데려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고개를 끄덕이려던 두오데가 황급히 노벰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지면에서 검은 창이 솟아올라 노벰의 팔목을 꿰뚫었다.

"크악! 어떤 개새끼야!"

엘프를 놓친 노벰이 분노를 토하는 순간 아티펙트의 은폐장이 벗겨지며 세리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눈을 붉게 물들인 노벰이 팔목에서 흘러나온 피로 거대한 클로를 만들어냈다.

노벰은 다가오는 세리아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클로를 휘두르려 했으나, 세리아의 검에서 검강이 터져 나오자 기겁하며 뒷걸음질쳤다.

세리아는 우선적으로 엘프를 확보한 후 다시 거리를 벌렸다.

정신 없어 보이는 엘프에게 세리아가 물었다.

"네가 티티?"

"티티?"

"응, 티티."

"티티를 알아?"

"잘 몰라. 울트에게 듣기만 했어."

"울트를 알아?"

"친구야."

"정말이지? 울트가 보고 싶어. 언제 돌아온대?"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대화였으나 상대가 티티임을 확신한 세리아가 신호탄을 터뜨렸다.

말을 타고 아지트로 달려가던 모하메드가 신호탄을 확인한 후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제국의 적을 섬멸하라!!"

모하메드를 따라 말에서 뛰어내린 기사들이 찬란한 검기를 뽑아냈다.

다음 순간 수십 개의 검기가 난무하며 앞을 가로막는 나무를 전부 부수어냈다.

콰가가가가가각!!!

신호탄이 터진 위치까지 일직선으로 길을 연 기사들이 흑마법사들을 향해 전력으로 돌진했다.

흑마법사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

"아이고, 기사님들 모시고 오니까 세상 편하네."

레이가 흙바닥에 주저앉아 기사들과 흑마법사들의 전투를 구경하며 감탄했다.

기사가 분대 단위로 결집해 화력을 쏟아내니 지형이 훅훅 바뀌었다.

멀쩡했던 평지가 분지처럼 주저앉은 후 강물이 쏟아져 들어와 고이는 광경을 보며 레이가 한탄했다.

"우리 애들은 언제 커서 저렇게 날아다닐까."

빨리 좀 컸으면 좋겠다.

그래야 고생을 좀 덜 하지 않겠나.

지금처럼 싸워댔다간 퇴행성관절염이 30대에 찾아올 거다.

레이는 10년만 더 버텨봐야겠다고 중얼거리며 전장을 살폈다.

자그마한 엘프가 세리아의 품에 안겨 찡찡거리고 있었다.

'저 엘프 하나 때문에 백작이 기사 전력을 싹 다 끌고 출전했단 말이야.'

덜 떨어져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상당히 중요한 인물인 모양이었다.

레이는 이번 일로 생색을 좀 내도 되겠다 싶었다.

뒷걸음질 치다 얻어걸린 격이긴 했지만, 레이가 아니었으면 사태가 얼마나 더 악화됐을지 모를 사안이었다.

'그건 그렇고 전투가 너무 일방적인데.'

세리아가 아티펙트를 활용해 티티를 무사히 구출한 덕분에 기사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전력을 쏟아낼 수 있었다.

흑마법사 중엔 5서클에 이른 실력자도 있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쪽은 엑스퍼트 급 이상으로만 11명을 꽉꽉 채워 왔다.

"크아악!!"

"아, 안 돼!! 으악!!"

흑마법사들은 변변찮은 반항도 못하고 죽어갔다.

레이는 한편으론 속이 시원했고, 한편으론 골치가 아팠다.

저들 사이에 로커스트가 포함되어 있었다면 전투가 이리 쉽게 풀리진 않았을 것이다.

가장 위험한 놈을 놓쳤다.

쿠우웅---!

폭음이 잦아들었다.

최후까지 저항했던 흑마법사가 허리가 양단된 채 지면을 굴렀다.

백작가 측의 피해라 해봐야 기사 두 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은 게 전부였다.

완벽한 승리였다.

허나 환호를 지르는 일 없이, 모두의 시선이 흑마법사 우니에게 쏠렸다.

동료 흑마법사들이 끝까지 저항한 것과 다르게 우니는 얌전히 생포됐다.

드문 일이었다. 흑마법사는 사형을 피할 수가 없기에 생포될 바에야 차라리 자결하곤 했다.

모하메드가 물었다.

"무슨 수작이지?"

"그냥 편하게 죽고 싶었을 뿐이야."

"얌전히 협력하면 고려해보겠다."

"지랄하지 마. 얌전히 잡혀줬으니 목이나 깔끔하게 쳐 주지?"

"로커스트의 수하가 맞나?"

"빌어먹을. 그래, 그놈 밑닦개 역할이나 해주고 있었지."

"로커스트는 어디 간 거지?"

"몰라, 모른다고. 그따위 눈으로 쳐다보지 마. 진짜 모르니까."

우니가 거칠어진 숨과 함께 배신감을 토로했다.

"그 새끼는 얼마 전부터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었어. 기껏 여기까지 와 놓고 우릴 방치하다시피 했다니까? 제길, 이 꼴 날 줄 알았어."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었다?"

"그래. 대단한 보물이라도 찾았나 보지. 혼자 꿀꺽할 생각이었는지 우리에겐 아무 정보도 공유해주지 않았어. 지금도 그 정체 모를 보물 곁에 가 있겠지."

"언제 너희들 앞에서 모습을 감췄지?"

"오늘 아침."

"아이고, 돌겠네."

레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 당장 보육원으로 가봐야 합니다."

"이 정신 나간 놈이 정녕 선을 넘는구나."

젠킨슨이 레이를 향해 칼을 뽑아들며 분노했다.

무식한 천민이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꼴을 더 이상은 용인할 수 없었다.

레이는 젠킨슨의 반응이 이해가 갔기에 일단 숙이고 들어가려 했는데, 세리아가 한발 앞서 젠킨슨의 검을 쳐냈다.

카강!

세리아의 살기가 젠킨슨을 향한다.

젠킨슨 또한 물러서지 않고 기세를 끌어올렸다.

긴장이 흐르는 순간 백작이 투구를 벗고 물었다.

"레이, 로커스트가 노리는 보물이 루나라고 확신하나?"

"아니었으면 제가 디나르까지 와서 이 난리를 치진 않았을 겁니다."

"정체를 들켰다고 판단한 로커스트가 수하들을 버리고 그냥 도망쳤을 수도 있네."

"압니다. 근데 당장 로커스트를 추적할 묘수가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현재 로커스트가 모습을 드러낼 확률이 가장 높은 장소가 보육원입니다."

"보육원이라."

"백작령에서 도망친다 하더라도 탐욕적인 마법사답게 눈독 들여놨던 보물은 챙겨가려 할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아, 일리는 있군."

로커스트를 제거하고 싶은 건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원한을 산 채 살려 보냈다간 후일 굉장한 불안 요소로 작용할 거다.

밑져야 본전이니, 백작은 레이의 말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피에트로와 티티를 챙겨 보육원으로 이동해 디디에와 합류한다. 이견 있나?"

"..."

"움직이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몇몇 기사들이 얼굴에 불만을 드러냈지만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일단 말에 올라탔다.

레이가 세리아에게 물었다.

"고모, 이번 사태의 주동자를 잡으려는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응, 괜찮아. 다른 부탁 해도 돼. 조카니까 괜찮아."

"감사합니다."

레이가 고개를 숙이자 세리아가 뿌듯해하며 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뭐? 루나의 부모?

지미가 수척한 남자를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애를 버리고 도망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는가.

더군다나 시기도 아주 미묘했다.

지미의 표정을 읽은 남자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내 딸을 내놓으란 말이오!! 루나!! 애비가 왔다!! 어서 나와보렴!!"

남자의 곁에 선 여자가 신분패를 내보이며 따졌다.

"의심되면 확인해 봐요. 우리가 루나의 부모가 맞다니까? 자! 어서 확인해 봐요!!"

"허허, 이것들이 자꾸 개수작을 부리네."

"이런 깡패 새끼들한테 내 딸을 맡기진 못하오! 정식으로 고발하기 전에 어서 내 딸을 내놓으시오!!"

지미가 힘으로라도 이것들을 쫓아내야 하나 고민하는데 디디에가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은."

쿠웅!

한 발 내디뎠을 뿐인데 땅이 둔중하게 울린다.

대놓고 마나를 흘려 루나의 부모를 위협한 디디에가 눈을 푸르스름하게 빛냈다.

"큰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고 자식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들었다. 사실이 아닌가?"

"오, 오해입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남자가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친척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잠시 집을 떠났는데 사고가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게 좀 늦어졌을 뿐입니다. 금전 관계는 전부 청산했습니다."

"사실관계를 확인해 봐야겠군. 필립스 백작님께 탄원하게. 공정한 조사를 거친 뒤에 문제가 없다면 아이를 돌려주실 거다."

"아, 아니 우리가 부모란 말입니다! 부모에게서 이렇게 멋대로 아이를 뺏어가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디디에가 무어라 답하려던 순간 카렌의 목소리가 운동장을 크게 울렸다.

"루나는 내 친구거든요!! 절대 못 데려가요!!"

카렌을 시작으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아이들이 꽥꽥 소리치기 시작했다.

"루나는 우리 가족이거든!!"

"나쁜 어른들한테 뺏기지 않을 거야!!"

"루나 자꾸 괴롭히면 레이가 와서 때려줄 거예요!!"

"끄응."

지미가 콧잔등을 움켜쥐었다.

위험하다고 방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더니 말은 참 더럽게 안 들었다.

"조용히 해!! 너희들 빨리 방에 안 들어가?!"

"지미, 나쁜 어른들 쫓아내 줘요!!"

"빨리 걷어차 버려요!!"

"계속 가만히 있으면 나중에 레이한테 이를 거예요!!"

"이젠 저것들까지 레이를 들먹이며 날 겁박하네."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린 지미가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루나가 보육원 건물 앞에 서서 자기 부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 어린 소녀는 혼란스러웠는지 작은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지미는 굳은살 박인 손을 뻗어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불안해할 필요 없어."

"...?"

"우리 모두가 널 지켜줄 거야. 안심해라. 누구도 널 함부로 할 수 없어. 이곳에 남고 싶으면 남고 싶다고 말하면 돼."

루나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마음을 안정시킨 루나는 결심을 세웠는지 지미에게 말했다.

"...엄마아빠한테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싶어요."

"그럼 같이 가서 인사하자꾸나."

지미가 루나의 손을 잡고 울타리를 향해 걸었다.

루나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지난 몇 개월 동안의 기억을 떠올렸다.

보육원에 와서 참 많은 걸 경험했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도, 공부를 배우는 것도, 친구를 사귀는 것도.

전부 다 처음이었다.

이불을 같이 덮고 조잘거릴 때 느꼈던 답답함도.

간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을 때 느꼈던 조바심도.

카렌과 사이가 벌어졌을 때 느꼈던 초조함조차도.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참 소중한 감정들이었다.

염치가 없는 바람이었지만, 루나는 계속해서 친구들의 곁에, 레이의 곁에 남고 싶었다.

울타리 입구까지 걸어간 루나가 웃음이 각박했던 부모를 향해 미소 지었다.

"엄마, 아빠."

루나를 확인한 남자가 반색했다.

"루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집으로..."

루나가 고개를 돌려 보육원 너머 산기슭을 바라봤다.

검은 거인이, 거기 있었다.

루나는 알 수 있었다.

시리도록 어둡게 빛나는 검은 거인이, 금방이라도 현실에 간섭해 불길을 뿜어낼 것처럼 흉포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루나는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정말 그리웠어요. 어서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엄마,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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