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1)
36화
갑작스레 발생한 로커스트 수하들과 세리아의 전투는 방심했던 남자가 세리아에게 어깻죽지를 베이고 물러섬으로써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레이는 열기가 식어가는 전장을 한발 물러선 채 살폈다.
헤일로라고 불린 세리아의 아티펙트는 동체가 과열된 탓인지 움직임을 멈춘 채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헤일로의 폭격을 얻어맞은 흑마법사들은 로브가 대부분 불에 타 얼굴이 드러났지만, 치명적인 피해를 허용한 이는 없어 보였다.
결국 이번 전투의 성과라고는 남자의 어깻죽지를 베어낸 것 하나였는데, 그 과정에서 아티펙트의 성능이 드러났으니 세리아의 일방적인 이득이라 보기도 어려웠다.
레이는 주변을 크게 둘러보았다.
남쪽의 영주성을 제외하면 사방이 탁 트인 개활지였다.
굉음과 불길이 연속으로 발생했기에 근방의 사람들은 대부분 도망갔겠지만, 혹시 철없는 아이가 몰래 다가와 숨어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세리아는 자신을 고모라 소개했으나 레이 입장에선 근거 없는 주장일 뿐이었고,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녀가 어떤 인격과 배경을 지녔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나서면 안 되긴 하는데...'
레이는 디나르에 진입할 때 교전수칙을 세웠다.
목격자까지 완벽히 제거 가능한 상황에서만 검기를 드러내고, 여의치 않을 경우 물러날 것.
여기서 검기를 뽑아내는 건 처음에 세웠던 교전 수칙에 완전히 반하는 행위였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디나르는 현재 적의 근거지다. 시모네를 죽이자마자 적들이 찾아왔다.
언제 다른 지원이 추가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투는 피하거나,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 했다.
물러날 수 있다면 물러난다.
그게 당장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래듀에이트가 로커스트와 합류하면 백작령과 자작령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도 도주를 저지하는 게 불가능해질 거야.'
백작령 병력을 결집해 정면 대결을 벌인다 해도 기사만 절반 이상 죽을 거다.
필립스 백작이 로커스트와 철천지원수가 아닌 이상 그만한 희생을 감수하고 선공을 가할 리가 없다.
로커스트 또한 불필요하게 귀족을 해쳐 제국의 추적이 집요해지는 결과는 원치 않을 테니, 정체를 들킨 시점에서 얌전히 도주할 가능성이 컸다.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양측이 서로를 방관하는 모양새가 될 거야. 이런 상황에서 백작이 보육원 아이들까지 신경 써줄 리는 없어.'
로커스트가 도주하는 길에 부모 없는 아이 몇을 보육원에서 납치한다 해도 기사단이 움직이진 않을 거다.
이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로커스트 휘하의 그래듀에이트와 흑마법사들을 여기서 제거한다면.
필립스 백작이 로커스트를 '사냥할만하다'고 여기게 만들 수 있었다.
'더군다나 세리아와 피에트로의 대화, 백작에게 전해진 편지의 내용을 고려했을 때... 이들 전부가 로커스트가 데려간 '티티'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티티라는 존재가 백작가, 자작가, 세리아를 하나로 묶는다.
판만 유리하게 깔아주면 이들은 힘을 합해 로커스트를 칠 것이다.
숨겨야할 실력을 세리아에게 노출하게 되는 건, 분명 많이 불안한 일이었다.
허나 로커스트 휘하의 병력이 아무 피해 없이 돌아가 규합하는 건, 훨씬 위험했다.
레이는 결정을 내렸다.
'나도 참전한다. 여기서 각개격파 해야 해.'
세상 일이라는 게 본디 최선보다 차악을 골라야 하는 때가 많았다.
레이는 정체를 알게 된 지 몇 분 되지도 않은 고모를 믿어보기로 했다.
'적의 전력은 그래듀에이트 하나와 3~5 서클 사이로 보이는 흑마법사 셋. 어느 쪽이든 만만치 않아.'
세리아의 아티펙트 하나에 손발이 묶였던 흑마법사들이지만 이는 기습을 허용했던 탓이 크다.
다시 붙으면 아티펙트 하나에 무력화 되진 않을 거다.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려면 흑마법사 무리와 그래듀에이트 중 하나는 내가 잠시 붙들어야 해.'
단순 전력 자체는 그래듀에이트가 월등하다.
하지만 경험이 적은 레이에게 있어 변칙적인 마법을 구사하는 흑마법사들은 상성이 안 좋았다.
'난도가 높더라도 그래듀에이트 쪽을 내가 붙든다.'
몇 초만 붙들면 된다.
세리아가 다수의 아티펙트로 화망을 형성한 채 돌격하면 흑마법사들은 무력하게 목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길어봤자 10초 안에 전멸할 거다.
결론을 내린 레이가 앞으로 걸어나가며 자기 의견을 개진했다.
타인이 듣기엔 헛소리였고, 세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포션병을 휘둘렀다.
깡!
"푸흑?!"
골통이 한 번 울리니 좁아졌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잠시 얼을 탄 레이가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정신을 차렸다.
너무 자기 생각에 매몰되어 일의 순서를 잊고 있었다.
합공을 위해선 당연히 세리아를 먼저 설득해야 했다.
레이가 코어를 활성화시켜 마나를 쏟아냈다.
입으로 설명해봤자 어차피 믿을 리가 없으니, 그냥 보여주는 게 빨랐다.
"고모, 고모께서도 한 재능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푸르게 빛나기 시작한 레이의 눈동자가 세리아를 향했다.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오른 세리아의 감각이 레이의 심장에서 뻗어나오는 마나의 흐름을 정확히 인식했다.
세리아의 눈가가 당혹스럽게 좁혀졌다.
"...?!"
"조카가 조금 더 잘난 것 같거든요."
레이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그래듀에이트 붙드는 사이 흑마법사 좀 처리해주실래요? 5초면 충분하시죠?"
"...너무 위험해."
"시간 끌면 더 위험해져요."
잠시 고민한 세리아가 정팔면체 형태의 아티펙트를 레이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달릴 수 있어? 나보다 빨리? 그럼 허락할게. 아니면 바로 물러나."
레이가 말없이 남자를 가리켰다.
콰앙!
레이와 세리아가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어깨를 지혈하던 남자가 갑작스러운 둘의 돌격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꼭 끝을 봐야...?"
애새끼 하나가 세리아와 함께 달려온다.
처음엔 아이를 품에 끼우고 싸울 생각인가 싶었다. 아예 말이 안 되는 짓거리도 아니었다.
허나 약간 뒤처졌던 레이가 한 번 더 가속하며 짓쳐들어오자, 남자가 탄식을 흘렸다.
그래듀에이트의 눈에는 보인다.
레이는 지금 어떠한 외부의 도움도 없이 본인의 신체를 활용해 세리아를 앞질렀다.
"...오늘 죽으면 굉장히 억울하겠는데. 지금 광경을 술안주로 써먹지도 못하고 뒈진다니."
남자의 검에서 검강이 솟구쳤다.
레이는 관절이 바스러지는 격통을 느끼며 검기를 뽑아냈다.
오버드라이브로 따라잡을 수 있는 건 속도 하나다.
그 속도란 것도 결국 가벼운 몸뚱이 덕분이고, 실질적인 운동량은 몇 배 이상 차이 난다.
어설프게 검을 맞대면 저 멀리 튕겨져나간다.
레이는 남자를 붙들어야 했다.
검을 돌려 잡는다.
초격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베듯.
쿵!
지면에 다리를 박아넣으며 검을 휘두른다.
찰나의 순간 검 전체를 감쌌던 검기가 날을 따라 얇게 압축된다.
남자의 눈에 흥미가 새겨진다.
외견에 비해 참으로 믿기지 않는 성취였으나, 그와 별개로 얇게 압축된 검기 하나로 검강을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최대한 잘 빗겨낸다 해도 검기를 둘렀던 검이 통째로 박살 날 터다.
남자는 한 번 버텨보라는 듯 정직하게 검을 내려 벴다.
검강과 검기가 충돌한다.
쩌엉!!!
굉음과 함께 레이의 관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어깨가 뒤틀리며 검로가 흔들렸다. 허리에 걸린 부하 탓에 자세가 무너졌다.
검기가 벗겨진 검신은 검강에 노출되어 쩍쩍 균열이 갔다.
허나 버텨냈다.
레이는 관절 사이에 다시 한번 마나를 폭발시켜 기형적인 움직임으로 충돌의 여파를 흘려냈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환상적이네."
괴이한 검기였다.
검강의 위력을 부분적이나마 분산시켰다.
현상을 보았음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자는 세리아가 마법사를 향해 방향을 트는 걸 인식했다.
다수의 아티펙트가 빛을 뿜어내며 마법사들을 화력으로 찍어 눌렀다.
'협공이 아니라 마법사를 노린다고?'
이 어린아이가 나를 붙들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가.
굴욕을 느껴야 하는 상황에서 남자는 희열을 느꼈다.
아이가 언젠가 닿을 경지에 대한 기대와, 이 불세출의 천재를 지금 내 손으로 찢어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번잡스럽게 섞였다.
남자의 시야가 온전히 레이에게 좁혀졌다.
"좋아, 버텨 봐."
남자의 검이 지면을 긁다 레이의 허리를 노리고 사선으로 가속했다.
레이가 잠시 고민했다.
충격 해소를 위해서는 몸을 띄워야 한다.
허나 몸을 띄운 채로 검강을 받아냈다간 수십 미터를 날아갈 게 뻔했다.
다음 공격에 완전히 무방비해질뿐더러 남자를 붙들어 놓을 수도 없었다.
촤악!
레이가 왼쪽 무릎을 굽히며 오른발을 옆으로 길게 뻗었다.
자세가 확 낮아지며 상체가 좌측으로 기운다.
왼쪽 팔꿈치를 지면에 꽂아넣은 레이가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카가가가각!!!
허리를 노리던 남자의 검격을 극단적으로 낮춘 자세를 활용해 하늘로 빗겨낸다.
검강과 충돌한 반발력 탓에 왼쪽 팔꿈치가 아예 지면에 파묻혔다.
레이는 꺾일 뻔한 손목을 이마로 짓눌러 고정한 채 허리를 옆으로 틀었다.
검강과 검기가 다시 한 번 부딪친다.
파가각!!
반발력을 역이용해 뒤로 물러난 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오른손을 검자루 아래로 미끄러뜨리며 왼손을 역수 형태로 다시 잡는다.
쿠웅!
지면이 갈라지며 남자의 잔상이 길게 이어졌다.
레이가 미처 자세를 다잡기도 전에 정면에서 찌르기가 들어온다.
이거 흘릴 수 있나?
왼손을 역수로 전진시켜 검을 잡았다는 건 기술이 아닌 힘으로 찍어누르겠다는 겁박이었다.
'이건 제자리에서 못 버틴다.'
레이가 다리에서 힘을 뺐다.
뒤로 밀려나며 지면을 굴러서라도 검강에 실린 위력을 분산시켜볼 생각이었다.
카각!
검기와 검강이 맞닿은 순간 불똥이 튄다.
아니, 불똥이 아니다.
피어오르는 불빛 하나하나가 얇게 압축된 검기였다.
남자가 고의로 검강의 제어를 느슨하게 한 탓에 검강을 이루던 검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레이의 시야가 온통 날카로운 빛 무리로 가득 찼다.
'이건 잘못하면 진짜 죽겠는데.'
검기의 그물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힘으로 뚫고 나가야했지만 레이의 마나량으론 불가능했다.
위기의 순간, 뇌리에 각인된 하르시아의 기술들이 레이의 의식을 달궜다.
레이가 직감에 의지해 두 번째 검을 뽑았다.
검기 다발이 쏟아져 내리며 온몸을 찢어놓으려는 찰나.
양손의 검이 맞닿는다.
우웅-!
공간을 변질시키는 검기가 중첩되며 서로를 공명시킨다.
공간의 일그러짐이 파문처럼 번져나가며 일순 두 검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왜곡장이 생성됐다.
레이를 향하던 남자의 검기가 왜곡장의 영향을 받아 미약하게 방향이 틀어졌다.
촤자자작!
레이를 스쳐 간 검기가 지면에 흩뿌려졌다.
남자가 검을 고쳐 잡으며 중얼거렸다.
"이건 또 무슨 정신 나간 기술이야."
레이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이론만 알던 기술을 생전 처음 써봤는데 예상보다 마나 소모가 극심했다.
실시간으로 관절과 근육까지 박살 나고 있어 눈앞이 멋대로 점멸했다.
세리아가 대가리에 내리쳤던 포션이 뒤늦게 흡수되지 않았다면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비틀거리는 레이를 향해 남자가 무자비하게 다음 일격을 가했다.
콰드득!
레이가 방어를 위해 휘둘렀던 왼손의 검이 완전히 박살 났다.
체력도 마나도 바닥을 보인다.
'더는 한계다.'
"어딜."
레이가 물러서려는 타이밍을 남자는 노련하게 간파했다.
검강이 빛을 토해내며 검신을 타고 올랐다.
남자가 검강을 방출하려는 순간.
레이의 품에서 방어 아티펙트가 가동되며 빛의 장막을 펼쳤다.
꽈드드득!!
검강을 정면에서 받아낸 실드가 균열을 일으킨다.
레이가 세리아를 돌아보았다.
마지막 마법사의 심장을 꿰뚫어버린 세리아가 레이를 향해 가속했다.
레이는 남자의 검을 한 번은 더 받아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실드가 한 번 부서졌었던 탓인지 아티펙트가 두 번째로 펼친 실드의 강도가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레이가 하나 남은 검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헌데 남자는, 분명 당장이라도 실드를 뚫어낼 수 있음에도 어깨를 으쓱이며 한 발 물러섰다.
"진짜로 버텨낼 줄이야. 마법사도 다 죽었고, 저 레이디의 아티펙트를 피해서 도망가기도 그른 것 같네. 내가 졌어."
푸욱!
남자가 방금까지 딛고 섰던 땅에서 검은 창 한 자루가 불쑥 솟아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또한 세리아의 아티펙트였다.
"이거이거 무섭다니까. 아티펙트가 몇 개야?"
남자가 감탄하는 사이 세리아가 레이 곁에 와서 섰다.
승패는 갈렸다.
하늘을 바라본 남자가 길게 숨을 내뱉더니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또박또박 말했다.
"잘 들어, 꼬맹아. 내 이름은 댄이다. 미르테르 가의 쫓겨난 세 번째 아들, 댄."
"웬 통성명이야. 이제 와서 회개라도 하시려고?"
"회개는 무슨."
댄이 가슴에 힘을 준 채 두 팔을 넓게 벌렸다.
"꼬맹아, 훗날 쓰여질 네 서사시에 반드시 한 줄 적어놓도록 해. 바로 이 미르테르 가의 댄에게, 아직 꽃 피지도 못했던 어린 영웅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곧 죽을 녀석이 이상한 걸 바라는군."
"꼬맹아, 사람은 어차피 죽어."
아티펙트만 5개를 전개한 채 다가오는 세리아를 보며 댄이 시원하게 웃었다.
짧디 짧은 인간의 인생, 몇 년 길게 살려 발악하기보단 죽을 자리를 잘 찾아 눕는 게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 정도면 죽을 자리로 나쁘지 않았다.
불세출의 천재가 써나갈 서사시의 첫 장에 이름을 남길 기회는, 좀처럼 없었으니까.
댄이 세리아의 검을 막아낼 준비를 하며 레이에게 당부했다.
"부디 객사하지 말고 잘 성장해서 훌륭한 영웅이나 악당이 돼라. 그래야 내 이름도 오래오래 기억되지."
"몽블랑 가의 스미스 씨, 덕담 말고 차라리 욕을 해줄래요?"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 이름은 댄이라니까. 너 이 새끼 지금 일부러 그러지?"
세리아와 남자가 충돌했다.
콰가가각!!
*
세리아는 어렵지 않게 댄을 격살했다.
댄이 끝까지 반항한 탓에 산 채로 제압하진 못했다.
어찌됐든 로커스트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출혈이 될 것이다.
세리아가 레이에게 포션을 들고 다가왔다. 레이는 일단 정수리부터 가렸다.
포션을 건네준 세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바라봤다.
레이는 피에트로를 데리고 일단 백작령으로 탈출하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하다 한발 늦게 땅의 진동을 느꼈다.
레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기사...?"
갑옷을 입은 기사가 돌격 대형까지 갖추고 말을 몰아 다가오고 있었다.
갑옷에 새겨진 문양이 굉장히 눈에 익었다.
필립스 가의 기사들이다.
방금 전 전투의 굉음을 들었는지 검기까지 줄기줄기 뽑아내며 돌격해오던 기사들이 이내 속도를 늦췄다.
저쪽에서도 레이와 피에트로의 얼굴을 알아본 것 같았다.
레이가 욱신거리는 관절을 붙잡으며 투덜댔다.
"아이씨, 올 거면 조금만 더 빠르게 오지. 성장판 다 갈아내고 나니까 달려오네."
사실 반 농담이었고, 편지를 받은 필립스 백작이 이렇게 신속히 반응할 줄은 레이도 예상치 못했다.
기사만 보낸 줄 알았더니 심지어 필립스 백작 본인도 무장을 한 채 동행했다.
영지 내 기사급 전력을 대부분 집결시킨 거다.
필립스 백작과 기사들, 피에트로, 세리아, 레이가 한자리에 모였다.
시체를 끌고 영주성 안으로 들어간 모두는 불필요한 이야기를 배제한 채 최대한 건조하게 현 사태와 관련된 정보를 공유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레이는 자신이 간과한 부분을 깨닫고 다급히 물었다.
"디디에 경은 어디 있습니까?"
"보육원에 지미와 같이 남아있다."
레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기사 전력을 대부분 이끌고 온 백작이 단순 호의로 디디에를 남겼을 리는 없다.
레이는 백작이 루나의 사정을 파악했다는 걸 알아챘지만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핵심적인 이야기가 끝난 직후 레이가 주장했다.
"흑마법사가 도주하기 전에 아지트를 바로 쳐야 합니다."
젠킨슨이 나지막이 분노했다.
"이 천한 것이 어느 자리라고 입을 놀리느냐."
"편지 전달, 주동자 색출 및 제거, 피에트로 구출, 흑마법사 아지트 위치 파악까지 전부 제가 했습니다. 제게 입을 열 자격이 없습니까?"
"그게 네놈 공이겠느냐? 어린 것이 벌써부터 허언을 하고 다니는...!"
"그만."
백작이 기사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네. 흑마법사들이 도피하기 전에 아지트를 습격해 티티를 구출하고 역량이 허하는 선에서 제국의 적들을 섬멸하게. 이견 있는가?"
"..."
"바로 출발하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기사들이 신속히 몸을 움직였다.
매튜가 기사들을 따라나서며 레이에게 검을 건넸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다행히 목은 붙어있네요."
필립스 가문의 인장이 찍힌 검을 받아든 레이가 숨을 크게 골랐다.
로커스트는 과거부터 열 명이 안 되는 소수의 수하들과 움직였다고 한다.
이변이 없다면 아지트 내 로커스트의 수하들은 기껏해야 다섯 안팎일 테고, 이쪽은 엑스퍼트 급 이상 전력이 11명이었다.
로커스트 본인의 무력이 변수이긴 하지만 세리아까지 동행하는 이상 충분히 해볼 만했다.
필립스 백작이 레이의 예상을 한참 상회하는 속도로 결단을 내린 덕분에 사태를 마무리할 기회를 잡았다.
레이는 부디 로커스트가 얌전히 아지트에 틀어박혀 있길 바랐다.
이게 마지막 전투가 되어야 했다.
*
"감사합니다."
보육원 입구를 지키던 지미가 디디에를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백작님께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나 싶었는데, 먼저 나서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디디에가 아니었다면 보육원이 무방비한 상태에 놓였을 수도 있었다.
지미가 거듭 감사를 표하자 디디에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니라 백작님의 관대함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오랜 용병 생활 동안 귀하신 분들을 많이 봤지만, 백작님처럼 관대하고 현명한 분은 몇 없었습니다."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둘은 감각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언제 흑마법사가 보육원에 나타날지 몰랐다.
허나 몇 시간 뒤 지미와 디디에가 마주한 건, 참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뭐라고?"
지미가 인상을 쓰고 되묻자 수척한 남자가 자기 가슴을 텅텅 두드리며 외쳤다.
"내 딸을 되찾으려고 왔소. 듣자하니 이 보육원의 관계자가 멋대로 딸을 데려갔다고 하던데, 빨리 돌려주시오."
"딸 이름이 뭔데."
"루나. 루나라고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