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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32화 (3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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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녹빛으로 빛나는 달빛 아래 붉은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법사들은 다시 한 번 세심한 조정을 가하여 마법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함을 확인한 후 뒤로 물러섰다.

"데려와."

"알겠습니다."

검은 로브를 펄럭이며 어둠의 뒤편으로 사라졌던 여자가 얼마 안 가 작은 인영과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의 곁에는 이제 막 10살 남짓 되었을까 싶은 소녀가 사방을 살피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여기 어디야? 나 너희 몰라! 돌려보내 줘! 울트는 어디 있어?"

"닥쳐."

계속해서 반항하는 소녀의 팔목을 여자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잡아끌었다.

자그마한 소녀는 힘에서 성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왁!"

여자가 마법진 한가운데로 소녀를 던져 놓았다.

붉게 빛나는 마법진이 소녀의 외형을 어둠 속에서 밝혀냈다.

일견 볼품없다 느껴지는 살집 없는 몸뚱이는 평범한 아이의 것과 다를 게 없었지만, 머리 옆으로 길쭉하게 뻗어 나온 귀가 명백한 이질감을 자아냈다.

엘프.

세계수에서 태어나 세계수로 돌아가는 존재.

그 어떤 종족보다 순수한 마나를 타고나는 고결의 상징.

마법사가 보았다면 하다못해 강렬한 탐욕이라도 드러내야 할 상대였지만.

괴이하게도 엘프를 바라보는 마법사들의 시선엔 온전히 짜증만이 서려 있었다.

콱!

"아악!"

마법사 하나가 망설임 없이 소녀의 손목을 짓밟았다.

허리를 숙인 마법사가 단검으로 소녀의 손가락을 깊게 베었다.

마법진으로 흘러들어 간 핏물이 수십 갈래로 찢어지며 각기 다른 색으로 분화했다.

치이익!

"..."

시시각각 요동치는 마법진을 면밀히 살핀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는 멀리 떨어져 일련의 과정을 주시하던 남자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로드."

"보고하라, 카이브."

"정밀 분석을 해봤지만... 결과의 변화는 없습니다. 어떤 기만이나 은폐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타고난 마나 자체가... 불순한 것 같습니다."

"어이가 없어 흥미로울 지경이군."

그 어떤 생물종보다 순수한 마나를 타고나는 엘프 아니던가.

헌데 저 빼빼 마른 엘프는 마나 한번 정제해본 적 없는 늙은 인간 노인보다 혼탁한 마나를 지니고 있었다.

타락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혼탁할 뿐이었다.

말하자면 저건 일종의...

"결함품이군."

"성장은 멈췄고 지능 또한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허허, 엘프에게도 장애자가 태어나는가?"

"들어본 적 없습니다."

"허나 이상한 일은 아니지."

엘프 또한 결국엔 생물이었으니.

변이에 의한 특이 개체의 발생은 필연적이었다.

"엘프 중에도 선천적으로 뛰어난 자가 존재한다. 그 대척점 또한 분명 존재할 터."

"동족에게 버림받은 걸 주워왔다는 시종장의 말이... 사실일지 모르겠습니다."

"그 거만한 엘프들이 결함을 안고 태어난 동족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참으로 궁금하군."

클클거리는 로드를 보며 카이브는 의아한 감정을 품었다.

카이브가 생각하기에, 지금 로드의 감정은 결코 유쾌할 수 없었다.

"저 엘프에게 '게네시스'와의 연관성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혹여 레시나의 핏줄이나 후계인가했지만, 저런 결함품을 레시나와 연관시키는 것도 불경이겠군."

"제물로서 가치조차 인간의 아이보다 떨어집니다. 처분...할까요?"

"시종장의 심문을 마치고 처분한다."

"알겠습니다."

"아파! 아프다고 하잖아!!"

엘프는 자기 피를 보고 계속해서 소란을 떨고 있었다.

그 품위 없는 행동에 카이브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가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심문이 마무리될 때까지 현 상황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도록. 갱들의 통제를 맡기지. 다른 지역에 부정적인 소문이 돌아봤자 좋을 게 없다. 여의치 않으면 손을 써라."

"알겠습니다."

"로, 로드시여!"

암막 저편에서 턱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 남성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조르지아 패밀리의 수장, 조르지아였다.

몇몇 마법사들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이놈...!!"

타인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본인들의 영역을 침범당했다.

응당 분노를 드러내야 마땅한 일이었으나, 로드가 손을 휘젓자 들끓던 마나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조르지아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로드에게 다가갔다.

"조금 뒤에... 다시 올까요?"

"괜찮네. 무슨 일인가?"

"며, 명하신 대로 그들을 찾아왔습니다. 가까운 곳에 가둬 놨습니다."

"훌륭하군. 아주 좋아. 카이브, 뒷일을 맡기지.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네."

"...알겠습니다."

카이브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카이브는 로드의 곁을 떠나면서도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당한 공을 들여 영지 하나를 일시적으로 지배에 놓았다. 발각되면 한동안 집요한 추적이 계속될 터다.

위험을 감수하고 영지를 접수한 이유는 '게네시스'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허나 제대로 된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600년도 전 게네시스의 마지막 사용자의 흔적이 디나르 근처에서 끊겼다는 정보에 의지해 벌인 일이다.

처음부터 도박성 짙은 시도였다.

'허나 실망스러운 건 실망스러운 거다.'

아직 시종장의 심문이 끝나지 않았지만 앞뒤 상황을 보아하니 시종장 또한 대단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대로는 영지에 눌러앉아 실종된 영주라도 찾아봐야 할 판이다.

그런데도 로드는 근래 계속해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냉철하고 잔혹한 로드가, 기대 이하의 성과를 얻고서도 무려 어깨가 들떠 있었다.

대체 이유가 뭐지?

카이브는 턱을 매만지며 엘프를 향해 걸어갔다.

*

하늘에 동이 트기 시작했다.

로드의 재촉에 조르지아는 산길을 성큼성큼 걸어서 오두막을 찾았다.

얼마 안 가 수하 하나가 오두막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르지아가 손짓하자 수하는 눈치껏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허겁지겁 오두막까지 달려간 조르지아는 벌컥 문을 열어 자신이 데려온 두 사람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오, 얌전히 계셨구먼."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우린 그냥 보내주시기로 했잖습니까?"

"쓰읍!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돈 문제로 당신들을 다시 찾아온 게 아니야."

조르지아가 짐짓 화난 체를 하다 주머니를 뒤적여 순도 높은 은화 몇 개를 꺼냈다.

"일단 이거 받고 진정 좀 해."

은화를 받아든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조르지아는 친절하게도 남자의 손목을 붙잡아 주머니까지 인도해 주었다.

"당신들이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아주 간단한 일이야. 귀하신 분이 부탁한 일이니까, 이번 일만 잘 끝내고 한 몫 단단히 챙겨서 떠나면 돼."

때마침 오두막에 들어선 로드가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던졌다.

주머니를 슬쩍 열어본 남자가 기겁하는 소리를 냈다.

"착수금이다. 일이 잘 끝나면 동일한 금액을 한 번 더 지불하겠다."

"그... 나리, 저희가 이런 돈을 받을 만큼 대단한 재주를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혹시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 건 아닌지..."

"아니."

로드가 웃었다.

"자네들이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그 누구도 아닌, 자네들만 가능한 일이지."

*

갑작스러운 백작의 호출에 지미와 매튜는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영주성으로 말을 몰았다.

알레시아 실종 사건에서 활약하며 백작의 호의를 산 둘이다.

웬만해서는 영주성을 찾아가며 긴장하지 않았겠지만, 타이밍이 나빴다.

"혹시 레이 녀석이 사고 쳤나?"

"대장, 그 새끼는 사고를 친다고 선언하고 갔어."

"거리 생각하면 디나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텐데 도착하자마자 사고 쳤다 해도 소식이 벌써 도착했겠어?"

"그럼 아침밥이나 같이 먹자고 부르셨나 보지."

"우리 같이 천한 용병놈들이랑?"

"아니면 아가씨께서 또 가출하셨거나. 그도 아니면 저번 일로 포상을 내리실 수도 있지."

"우리 이미 돈 받았잖아? 이제 와서 무슨 포상이야?"

"젠장, 나까지 불안해지니까 그만 좀 촐싹대, 대장."

영주성 앞에서 서로의 흐트러진 옷차림을 잡아준 지미와 매튜는 침을 꿀꺽 삼키고 메이드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을 찾아갔다.

무기를 건넨 후 집무실에 입장한 지미와 매튜가 나란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일어나게."

지미와 매튜는 오랜 용병 생활로 다져진 '눈치'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좋은 일로 부른 건 절대 아니었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어떻게든 시선을 피해 보려는 둘을 가만히 내려본 백작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레이가 디나르 지역에 있나?"

"크윽!"

일순 혈압이 치솟은 지미가 제자리에서 비틀댔다. 매튜는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가져가 얼굴을 가렸다.

"반응을 보니 맞는 것 같군."

"그, 그것이..."

"혹시 레이가 디나르를..."

편지지를 한 번 살펴본 백작이 떫은 얼굴로 물었다.

"조르지아 패밀리를 '조지기' 위해서 갔나?"

"끄르륵..."

지미는 사뭇 거품을 물 것 같은 얼굴로 답답함을 토했다.

매튜가 백작 앞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지미의 등을 탕탕 두들겼다.

컥컥 거리며 숨을 뱉어낸 지미가 간신히 혈압을 낮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일단 묻지. 자네들이 레이에게 사주했나? 디나르 지역의 갱단과 마찰을 일으켜 달라고?"

"그, 그건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웬만해서는 9살 아이가 혼자 디나르에 찾아가 난리를 피웠겠냐고 심문하고 싶지만 상대가 레이이니 넘어가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레이가 디나르에 찾아간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

잠시 고민한 지미가 앓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레이가 최근 수집한 고아가..."

"수집한?"

"...데려온 고아가 디나르 산 고아입니다."

"디나르 '산'?"

"...디나르 지역에 거주하던 고아입니다."

"그게 문제가 되었다는 건가?"

"본래 조르지아 패밀리가 노리던 아이였습니다. 크음."

슬쩍 눈치를 본 지미가 말을 이었다.

"똑똑하고 미색이 괜찮은 아이였다 보니 탐이 났나 봅니다. 상대를 잘 찾으면... 비싼 값에 넘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해했네. 그럼 레이는 충돌이 발생했던 조르지아 패밀리를... 제거하기 위해 디나르로 간 것인가?"

"비슷합니다."

"말릴 생각은 안 했는가?"

"백작님, 그놈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닙니다."

매튜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싸우면 저희가 집니다."

"..."

"힘으로도 못 말립니다."

매튜는 하늘을 우러러 9살 먹은 놈한테 힘에서 밀린다는 사실에 일절 부끄러움이 없었다.

레이가 2~3살만 더 먹었어도 어지간한 정식 기사조차 승부에서 발을 뺄 게 뻔했다.

떳떳하기 짝이 없는 매튜의 눈동자를 바라본 백작이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잠시 나가서 기다리게."

"알겠습니다."

집무실 문이 닫히자 백작은 편지의 앞면을 펼친 채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고민에 잠겼다.

"...모하메드 경."

"하명하십시오."

"흑마법사의 존재까지 확인됐다면 황실에 보고해 지원을 기다리는 게 현명한 처사 아니겠나?"

"필립스 백작령의 기사는 결코 나약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기사들을 믿네. 그대들의 강건과 충직을 믿어 의심치 않아. 허나 굳이 남의 영지의 일에 내 기사 전력을 희생시킬 필요는 없는 법이지."

"시간이... 부족합니다."

"맞는 말일세. 지원을 기다리는 동안 누군가 '티티'를 해칠지 어떻게 알겠는가."

백작이 클클거리며 편지지를 읽었다.

['티티'에게 위해한 세력.]

이 마지막 줄만 아니었다면.

백작은 자신의 기사들을 결코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영락했네. 600년도 더 지난 선조의 맹약에 묶여서."

"..."

"필립스 가는 제국 변방에 기생하는 이름 모를 가문이 되었고, 자네는 빛나는 재능을 지니고도 황도 한 번 밟지 못하고 내 곁을 지켰지."

"백작님."

"우리들의 선조는 이 모든 것은 예견하고서도, 우리가 600년전 영웅과 같이 영락하길 바라셨지."

필립스 백작은 어린 시절 한 번 보았던 썩은 나뭇가지를 회상했다.

세계수가 태초로 대지에 내딛은 12 뿌리 중 하나이자.

세계수의 분노와 저주를 받아 그 가치와 힘을 잃고 영락한 영웅의 무장.

게네시스.

"흑마법사의 출연은 우연인가, 그도 아니면 이제 와서 무언가를 눈치챘나."

"..."

"하긴, 무슨 상관이겠나. 얼마 남지 않았네. 길어봤자 20년이지. 마지막 수호자조차 의무를 버리고 사라졌네. 알레시아에게까지 이 속박을 씌우진 않을 걸야."

"..."

"그러니 우리는 맹약에 의한 의무를 다하도록 하지. 기사들을 전부 소집하게."

"보육원에 파견을 나간 디디에 또한 귀환시키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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