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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소란스럽던 위층이 조용해 졌다.
지하에서 대기하던 브랙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갑작스러운 소요가 발생할 수는 있으나 그 끝이 침묵이어서는 안 됐다.
마른 침이 꿀떡꿀떡 넘어가는 와중 탁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살짝 열린 지하실의 문틈으로, 주먹만 한 무언가가 통통 굴러 온다.
"...?"
쉬이이이익!
"제길!"
주먹만한 구체로부터 연기가 새어나오자 황급히 코를 막은 브랙이 수하와 함께 비밀 통로로 달려갔다.
건물 바로 옆에 세워진 창고로 이어진 통로는 브랙의 마지막 목숨줄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브랙이 창고 구석에서 머리를 내민 채 주위를 살폈다.
'없다.'
일단 창고 내부는 안전하다.
브랙이 환희하며 창고 문을 열자 레이가 어둠 속에서 푸른 기류에 휩싸여 다가오고 있었다.
브랙의 심장이 덜컥 굳었다.
"둘 중 누가 브랙이지?"
"주, 죽여!"
브랙의 명령에 수하가 무심코 창고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레이는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닥이며 검을 휘둘렀다.
촤악!
수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이 떨어졌다.
창고 안으로 들어선 레이가 브랙과 시선을 마주했다.
"쉽게 쉽게 가자."
레이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 붙이자 브랙은 바짝 얼어붙은 채로 눈알만 좌우로 굴렸다.
레이는 지하실에서 연기가 빠질 때까지 잠시 시간을 가졌다.
지미의 설명에 따르면 저 연기를 밀폐된 공간에서 들이 마시면 어지간해서는 의식을 잃는다고 했다.
연기가 잦아들자 레이가 브랙을 사다리 아래로 걷어찼다.
"자, 진실의 방으로."
"크억!"
등부터 떨어져 고통스러워하는 브랙을 붙들고 레이는 지하실을 향해 내려갔다.
"네가 브랙 맞지?"
"그, 그렇습니다만..."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어. 오는 길이 좀 험하더라."
지하실에 들어서니 작은 감옥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쇠로 된 창살 너머에는 레이 또래쯤 되는 아이 두 명이 잠들어 있었다.
"이 새끼들 이거 뒷구멍에서 내 가챠 빼돌리고 있었네."
우측으로 시선을 돌리자 지하실에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책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책상 위로 자잘한 서류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의자에 앉은 레이가 싸구려 종이 위에 쓰인 문자를 읽어가며 브랙에게 물었다.
"인신매매는 어떻게 이루어지지? 음습한 곳에 경매장이라도 열리냐?"
"서, 설마요. 그... 브로커가 있습니다. 고객들과 저희를 이어주는."
"그쪽이 더 일리가 있긴 하네."
레이가 책상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며 질문을 이어갔다.
"최근 칼과 한스가 납치하려 했던 아이를 기억해?"
"...네?"
"너희들이 부모가 도망가도록 작업 쳤잖아. 아이 혼자 남았을 때 데려가려고 칼과 한스를 보냈고."
"그, 기억이 잘..."
"마법사."
순간 브랙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리는 모습을 레이는 놓치지 않았다.
"마법사가 사주했을 거야. 아이를 납치해 달라고. 기억나지?"
"그, 그건 저도 잘..."
레이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브랙은 그제야 강렬한 후회를 느꼈다.
"저, 저기..."
"무릎 좀 꿇어봐."
"무릎요? 끄으으으읍!"
발목을 짓밟힌 브랙이 입이 틀어막힌 채 몸을 떨었다.
"반항할거면 화끈하게 혀라도 깨물든가. 그럴 자신 없으면 쉽게 좀 가자."
"끄윽..."
"그 아이의 납치를 사주한 마법사 정체가 뭐야?"
"저, 저도 잘 모릅..."
콰가각!!
채찍처럼 휘둘러진 검기가 브랙 바로 앞의 지면을 후려쳤다.
얼굴에 돌조각이 박힌 브랙이 무심코 뒤로 물러섰다가 곧장 제자리로 돌아와 무릎을 꿇었다.
레이가 시푸른 검기로 브랙의 목을 겨누었다.
"좋게좋게 말하니까 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 같지?"
"시, 시종장! 가디 자작가 시종장의 아들 시모네! 시모네의 측근이 사주했습니다!"
"시모네라는 녀석의 측근이 마법사라고?"
"그, 그렇습니다."
"이 새끼가 자꾸 장난질을 치네?"
레이가 인상을 구기자 브랙이 기겁을 했다.
"자, 자, 잠깐만! 대체 뭐가 문제야?!"
"마법사가 뭐가 아쉽다고 자작가 시종장 아들 옆에 붙어 측근 노릇을 해?"
"오해입니다! 그, 그쪽께서 자작령 사정을 잘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잠시 동안 브랙을 응시한 레이가 제자리로 돌아가 뒤지던 서랍을 마저 확인하며 경고했다.
"팔다리 멀쩡히 달렸을 때 똑바로 대답하자?"
"알겠습니다!"
"목소리 낮추고."
"네, 넵."
"자작령 사정이 뭔데?"
"영주님이 몇 년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업무 전반을 시종장이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영주가 실종됐고 시종장이 영주 대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뿌드득!
잠겨 있던 서랍을 무식하게 열어 재낀 레이가 안의 내용물을 보고 눈가를 좁혔다.
푸른 깃털을 지닌 새가 날개가 뜯긴 채 죽어있었다.
브릿지다.
브릿지 옆에는 뜯어진 편지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레이가 편지지를 들어 올렸다. 암호 기법이 사용됐는지, 아는 문자인데도 전혀 해석할 수가 없었다.
"브랙, 혹시나 해서 묻는데, 설마 시모네가 아버지를 제치려고 너희와 야합한 거냐?"
"...그렇습니다."
"마법사도 그 과정에서 개입했고."
"그렇습니다."
"걔들은 대체 뭘 노리고 개입한 거야?"
"자,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어련하시겠어."
레이가 자꾸만 찌푸려지는 미간을 눌러 피며 생각을 정리했다.
'영주가 실종됐다. 헌데 그간 별문제가 없었던 걸 보면 영주가 미리부터 시종장이 자기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게 준비했다고 봐야 해.'
근 몇 년 동안 자작령은 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헌데 이제 문제가 생길 거다. 자식새끼가 갱단까지 동원해 아버지를 제쳤으니.
벌써부터 조르지아 패밀리가 활개를 치고 다니며 분위기를 흐리고 있지 않은가.
"브랙, 솔직히 말하자면."
한숨을 쉰 레이가 자기 한탄을 늘어놓았다.
"나는 이 문제가 간단하길 바랐어. 그냥 멍청한 마법사 하나만 제거하면 끝날 문제이길 바랐다고."
근데 매튜의 가설처럼 앞뒤로 자꾸 이상한 게 엮여나오기 시작했다.
갱단부터 시작해 영지 내 암투까지 마법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정수리가 다 화끈거렸다.
"생각보다 판이 너무 큰데. 마법사에 대해 뭐 더 아는 것 없어?"
"시종장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측근들을 치울 때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
"한 명이 아니야?"
"여, 여러 명이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한 사람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납치를 사주한 인간이 그 대장격 마법사야?"
"그렇습니다."
"아하..."
실소를 자아낸 레이가 자기 콧잔등을 움켜쥐었다.
"야, 마법사 이름은 들은 적 있어? 하다 못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냐?"
"전혀 모르겠습니다. 조, 조르지아 형님이라면 아는 게 있을 수도... 으억!!"
브랙이 깜짝 놀라 손아귀로 바닥을 긁으며 물러섰다.
레이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줄줄 떨어지고 있었다.
"이걸 작성한 게 시종장이고?"
"나, 날아가는 브릿지를 마법사가 죽였고 저희가 회수했습니다. 아, 아마도 시종장이 보낸 게 아닐까요...?"
무작위로 나열되었던 문자가 법칙에 따라 재정렬된다.
아예 사라지는 문자와 새롭게 합쳐지는 문자를 겹쳐보며 레이는 기절하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문 채 암호화된 편지를 읽어갔다.
[실권이 강탈당했다.]
[조르지아 패밀리가 조력함.]
[치안, 행정 분야를 담당하는 관료들 대거 회유 됨. 비협조적인 인물은 실종 상태.]
[주동자는 시모네로 파악.]
[흑마법사 존재를 확인.]
['티티'에게 위해한 세력.]
마지막 줄을 읽은 레이가 탄식을 흘렸다.
[필립스, 영주 대리 자격으로 즉시 병력 파견을 요청한다. 영지를 정상화시키길 바란다. 맹약에 속한 의무를 다하라.]
"대체 이 시종장이란 새끼는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두 손 놓고 뭐한 거야? 옆에 새끈한 여자라도 붙였냐? 침대 위에서 기력을 다 빨아놓기라도 했어?"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대체 뭔데? 아, 돌겠네."
어쩐지 스타팅 지역이 좀 평범하다 싶더라고.
갓난아기 때부터 센세이셔널한 출생의 비밀을 마주한 것치고는 스타팅 지역인 백작령은 나름 평화로운 장소였다.
"그래, 이해해. 이런 이벤트 한두 개쯤 터질 수는 있어. 근데 시발 나는 이게 무슨 이벤트인지 모른다고."
레이는, 말하자면.
읽지 않은 소설에 빙의당했다.
공략집이 존재치 않았기에 파편적인 정보만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움직여야 했다.
지금 사태가 어설픈 마법사 몇 명이 떡고물 좀 먹으려고 벌인 일인지.
혹은 대단한 사연이나 음모가 얽혀 있어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사안인지.
누구도 명쾌한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늘에 계신 초월자님, 사람을 잘못 보내놨으면 계시 같은 거라도 내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
"응, 기대도 안 했어 병신아."
저 멍청한 시발련한테 내가 뭘 바라겠냐.
툴툴댄 레이가 최초의 목적을 상기했다.
흑마법사의 제거. 제거가 불가능하면 최소한 정체라도 정확히 파악할 것.
'돌아가는 꼴을 보니 나 혼자 칼 들고 돌격했다간 개죽음일 것 같고.'
일단 이 사태를 필립스 백작에게 알려야 했다.
가디 자작과 필립스 백작이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흑마법사까지 연관되었다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터다.
다만 걱정됐다.
백작의 움직임을 눈치챈 흑마법사들이 먼저 발을 빼버리면 그들을 추적하기 극히 힘들어진다.
도망친 흑마법사들은 언제고 보육원으로 돌아올 터다.
레이가 손가락을 탁탁 튕겼다.
전생에서 레이는 도박을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환생하고 내내 하는 짓거리가 가챠였다.
'자작령을 이렇게 휩쓸고 다닐 기회도 이번이 마지막이니...'
불확실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기회를 잡았을 때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레이가 편지의 뒷면을 펼친 채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펜을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장인어른. 오랜만에 편지드립니다.]
강탈 당할 위험 탓에 일부러 이렇게 썼다.
[저는 디나르에 와 있습니다. 아이들을 사고판다는 조르지아 패밀리를 조지다가 죽은 브릿지와 함께 이런 편지를 주웠습니다. 무슨 뜻인지 해독 가능하실는지요? 장인어른이 그런 잡기에는 능하셨지 않습니까.]
필요한 정보는 다 담아야 한다.
잠시 고민한 레이가 계속 펜을 움직였다.
[디나르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영지의 주인이라도 바뀐 것처럼요. 혹시 방문하게 된다면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돌아가기까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으니,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이른 시일 내에 다시 뵈었으면 좋겠군요.]
몇 줄 더 적어넣은 레이가 브랙에게 물었다.
"마법사를 몇 명이나 봤지? 대충이라도 말해봐."
"세, 셋에서 다섯? 정도였을 겁니다. 다들 차림이 비슷해서 같이 모여 있지 않으면 동일인인지 구분이 안 갔습니다."
레이가 시종장이 암호로 적어낸 '흑마법사'란 단어 위에 '최소 3~5'라는 내용을 추가했다.
지하실 바깥으로 나온 레이가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잠시 기다리니 바람 소리와 함께 브릿지가 팔 위에 내려앉았다.
브릿지는 푸른 부리로 살쾡이처럼 생긴 짐승을 물고 있었다.
"독수리도 아니고 이걸 혼자 잡아? 네가 영물이긴 하구나."
가볍게 웃은 레이가 브릿지의 다리에 편지를 동여맸다.
"조용히, 낮게 날아라. 걸리지 말고."
살쾡이 닮은 짐승을 뱉어낸 브릿지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듯 밤하늘을 낮게 날아 시야에서 벗어났다.
브릿지의 무사를 기원한 레이가 지하실로 다시 내려갔다.
"감옥 열쇠 좀 줘봐."
"네? 네, 여기 있습니다."
단검 하나만 들고 아이들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들어간 레이가 철창 사이로 손을 뻗어 다시 자물쇠를 잠갔다.
"그... 뭐하십니까?"
스스로 감옥에 갇힌 레이에게 브랙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레이가 열쇠 꾸러미를 던져준 후 주머니를 가리켰다.
"열쇠 다시 집어넣어."
"알겠습니다."
"야, 혹시 너도 키우는 자식 있냐?"
"그, 아들딸 하나씩 있습니다만..."
"이 양아치들은 남의 자식 팔아가며 제 자식 입에 고기 집어넣는 게 취미인가."
혀를 찬 레이가 바닥에 눌러앉았다.
"니들 같은 놈들 안 설치게 일 끝나면 디나르도 아예 지미가 관리할 수 있도록 해야겠어."
"..."
"자애와 사랑이 넘치는 지미 보육원 '디나르 지부'도 하나 만들고."
최근 인근의 고아를 싹 쓸어간 탓에 고아난에 허덕이고 있던 레이다.
허나 오늘을 기점으로 가챠 돌릴 코인이 꽤 쏟아져 나올 예정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브랙."
"?"
"디나르 지부가 완공되면 네 아들딸부터 우선 입소시켜줄게."
퍼억!
브랙의 미간에 단도가 박혀 들었다.
충격량을 이기지 못한 브랙의 몸뚱이가 바닥을 굴렀다.
레이가 잠든 아이들 사이로 몸을 끼워 넣었다.
'운이 좀 따라주었으면 좋겠는데.'
흑마법사의 존재를 다수 확인한 이상 몸을 사리긴 해야 했다.
허나 어떻게든 마법사의 정체를 파악해야 했던 레이는, 아예 피해자 행세를 하며 기회를 노려보기로 마음 먹었다.
시모네가 이번 학살극을 숨기고 싶다면 측근을 보내 뒷처리를 맡길 거다.
운이 좋다면 시모네의 측근에게 회수되어 가장 가까이서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기회를 얻을 지도 몰랐다.
물론 까딱 재수 없으면 독 안에 갇혀 목숨을 잃는다.
모 아니면 도에 가까운 도박.
레이가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눈을 감았다.
피비린내 나는 어둠 속에서 누워있길 한참.
천장에서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 레이가 다시 눈을 떴다.
과연 어떤 놈이 미끼를 물어줄 것인가.
쇠창살 너머를 응시하는 레이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습격을 당한 것 같습니다. 어찌할까요? 시모네님."
레이의 입가에 웃음 꽃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