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범죄 (2)
29화
준비를 끝마친 레이는 조용히 백작령을 떠났다.
레이가 자작령 근방에 발을 들였을 때는 이미 하늘이 꽤 어두워져 있었다.
"후우."
가라 앉은 마음속에서 심장 박동만이 불규칙하게 가슴을 때린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불쾌함인지 긴장인지 흥분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레이는 가죽 주머니에 꽂힌 단검을 매만지며 호흡을 골랐다.
검은 로브를 반으로 접어 허리에 감은 덕분에 무기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역으로 눈에 좀 띄긴 했다. 날씨에 맞는 복장이 아니었다.
콰득!!
나무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가 민가 근처로 다가가자 왜소한 남자 하나가 열린 문 틈으로 허겁지겁 기어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서진 의자를 들고 선 양아치가 남자를 따라나오며 소리쳤다.
"돈 갚으라고 돈!!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먹어, 응? 이자 밀린 거 어떡할 거야?"
"하, 한 달만 기다려주시면 이자는 제가 반드시...!"
"이 병신이 그게 지금 몇 번째 하는 소린 줄 알고 떠들어?!"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레이는 사람이 얻어터지든 말든 간섭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영지병 둘이 낄낄거리며 남자가 얻어터지는 꼴을 구경하고 있었기에, 흥미가 생겼다.
영지병은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는다.
상비군이자 정예병이기에 권위가 결코 낮지 않다.
음지에서 갱들이 돈놀이하는 거야 모를 사람이 없지만, 아무리 기세 좋은 갱들이라도 영지병들 앞에서 대놓고 사람을 패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설령 돈을 받아먹었다고 해도 병사들이 저리 대놓고 폭행을 방관하며 킬킬대는 건 어지간히 기강이 박살났다는 뜻이었다.
병사에게 다가가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꿉꿉한 냄새가 흘렀다.
체취는 아니었다.
'연초...라기엔 냄새가 독특한데.'
디나르 지역에 약이 돌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레이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눈꼬리를 툭툭 쳤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이른 시일 내에 조져 놔야겠는데.'
타락은 쉽게 번진다.
자작령에서부터 시작된 나태와 무질서는 금세 백작령까지 영향을 끼칠 터다.
아무래도 지미가 관리해야 할 영역이 넓어질 것 같았다.
레이는 지미를 어떻게 구슬려야 하나 머리가 아팠다.
"막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 때리잖아요."
레이가 병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꽤 극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이런 정신 나간 새끼가."
병사 하나가 밑도 끝도 없이 발길질을 해왔다.
레이는 옆으로 몸을 옮기며 병사의 몸무게를 지탱하던 반대 다리를 걷어찼다.
지면을 뒹군 병사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검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이 시발놈이!!"
레이가 뒤로 훅 물러섰다.
쇠 긁는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혀 나왔다.
병사의 행동을 보며 레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저씨 머리 다쳤어요? 양아치 새끼들은 가만히 두고 9살 애새끼를 상대로 무기를 뽑아?"
"이 빌어먹을...!"
"적당히 해."
다른 병사의 제지에 레이에게 검을 휘두르려던 병사가 움직임을 멈췄다.
'선임병과 후임병.'
둘의 관계를 파악한 레이가 팔을 꼰 채 선임병을 바라봤다.
레이가 생각해도 시건방진 태도였으나, 선임병은 사람 좋게 웃더니 양아치들을 향해 걸어갔다.
"적당히들 해. 금전 관계에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사람을 그리 패버리면 되겠어?"
양아치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한 후 일단 고개 숙이는 시늉을 했다. 저쪽 업계에서 눈치만큼 중요한 재능도 없었다.
폭행 사건을 무마한 선임병은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걸친 채 레이에게 다가왔다.
"주변에서 못 보던 얼굴인데, 혹시 다른 지역에서 왔니?"
"백작령에서 왔어요. 이름은 레이라고 해요."
레이는 굳이 자기 이름을 밝혔다. 선임병의 눈가가 찰나 간 휘어졌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니?"
"심부름 왔어요. 잡화점의 오일러 씨에게 전해줘야 할 물건이 있어요."
"그렇구나. 잡화점의 정확한 위치는 알고 있고?"
"직접 찾아가본 적은 없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음..."
고민에 빠진 척 침음을 흘린 선임병이 이윽고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장담했다.
"곧 밤이 될 거야. 아이가 혼자 돌아다니기엔 위험하니, 내가 안내해줄게."
"그래도 될까요? 정말 감사해요. 사실 여기 지리는 아직 익숙지가 않아서 걱정하고 있었어요."
"걱정 말고 잠시만 기다리렴."
후임병에게 다가간 선임병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거 그 녀석이다. 고아 수집가."
"아, 저 새끼가요?"
"그래. 그러니까..."
한동안 귓속말을 이어간 선임병이 레이에게 되돌아와 등을 떠밀었다.
"잠시 인수인계를 했어. 자, 빨리 출발하자. 널 빨리 안내해줘야 나도 다시 내 업무를 보지."
"배려해주셔서 감사해요."
레이는 이 새끼가 참 거짓말을 못한다 싶었다.
마을 변두리를 한 바퀴 돈 선임병은 점차 음습한 장소로 레이를 이끌었다.
반쯤 무너져 내린 폐건물 사이로 들어서자 일련의 무리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껴있던 덩치가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이~ 시발놈아. 너 무슨 낯짝으로 다시 디나르에 기어왔냐?"
한스였다.
한스의 무리 뒤에서 후임병이 낄낄거리며 레이를 비웃고 있었다.
레이가 선임병을 되돌아보자, 선임병은 짐짓 엄한 얼굴로 레이를 꾸짖었다.
"네가 남의 '물건'을 함부로 탐했다는 이야기는 예전에 들었어. 잘못을 빌고 훔친 물건은 되돌려 주도록 해."
앞뒤 사정을 몰라서 저딴 개소리를 하는 건 아닐 터다.
레이는 한스가 속한 무리를 살폈다. 마른 남자, 칼이 보이지 않았다.
"하, 일을 두 번 하게 생겼네."
첫만남 때 대화를 고려하면 칼이 분명 한스의 상급자였다.
내심 칼이 이 자리에 나오길 바랐는데, 칼 대신 덩치만 기어나왔다.
"어이, 한스."
레이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고작 이 인원으로 날 잡겠다고? 백작령에서 소식은 못 들었어? 더 데려올 친구 있으면 빨리 불러와봐."
"미친 새끼.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게 너 하나일 것 같냐?"
한스가 레이의 오만을 비웃었다.
일반인 중에서도 마나를 다루는 법을 깨우쳐 일시적으로 근력을 강화하는 등의 묘기를 부릴 수 있는 자가 몇 있었다.
한스가 속한 무리에는 미약하게나마 마나를 각성한 자가 둘이나 있었다.
같은 경지라면, 당연히 경험 많고 덩치 큰 성인이 유리하다.
같은 경지라면 말이다.
"혹시 칼이란 녀석은 안 왔냐?"
"넌 시발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지?"
"파악 잘하고 있어. 둘이 같이 좀 다니지 그랬어. 그럼 일이 편했을 텐데."
레이는 투덜대며 검을 뽑았다.
검집을 긁지 않고 깔끔하게 뽑혀나온 검이 선임병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선임병은 반응하지 못했다.
레이의 속도가 빨랐다기보다는 방심한 탓이 컸다.
"?!"
병사가 찔렸다.
그 아찔한 광경을 코 앞에 두고 양아치들이 잠시 얼을 탔다.
뇌리를 휘몰아친 강렬한 당혹과 분노는 이내 괴성이 되어 터져나왔다.
"저 미친 새끼가!!"
병사가 죽으면 골치가 심각하게 아파진다.
약 몇 주 치 쥐여주고 껄껄 웃으며 무마시킬 일이 아니란 뜻이다.
양아치들이 광분하며 레이에게 달려들었다. 그들 사이 후임병도 섞여 있었다.
후임병은 특히나 골치가 아팠다.
선임병이 9살짜리 꼬맹이 칼에 맞아 죽었다.
보고를 대체 어떻게 써 올려야 책임을 회피할 수 있을지 머리가 복잡했다.
허나 후임병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후욱!
선임병의 가슴을 꿰뚫은 레이의 검에서 푸른 빛이 타올랐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시간.
시야를 밝히는 푸른 빛의 존재감이.
모두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촤악!
사람의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간다.
조각조각 쪼개진 선임병의 장기를 뒤집어쓴 양아치들이 다리를 멈춰 세웠다.
살얼음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돌처럼 굳어있다 간신히 숨을 들이켠 양아치들은, 비릿한 혈향이 뇌리를 타고오르자 그제야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어, 어?"
퍼억!
뒷걸음치던 후임병의 목에 단검이 박혀 들었다.
후임병의 대가리가 지면을 때림과 동시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에, 엑스퍼트!!"
"도망쳐!! 도망치라고!!"
"으아아아아악!!"
"다들 좀 닥쳐."
촤악!!!
비명을 크게 지른 순서대로 목이 떨어져 나갔다.
몇몇은 사지가 절단난 채 제자리에서 꿈틀거리다 움직임을 멈췄다.
다리에 힘이 풀린 한스가 주저앉았다.
도망치던 양아치 몇이 한스를 지나쳤지만, 귀신같이 날아온 단검에 허리나 다리가 꿰뚫린 채 넘어졌다.
어느새 새파랗게 빛나는 검기가 눈 앞에 다가와 있었다.
한스가 오줌을 지렸다.
그대로 한스를 지나친 레이는 단검에 맞아 부상당한 양아치들을 먼저 정리했다.
핏물이 여기저기 튄다. 한스는 귀를 막은 채 제자리에서 덜덜 떨었다.
마침내 자지러지던 비명 소리가 잦아들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레이가, 한스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한스? 상황 파악은 되셨지요?"
"네? 네, 네!"
"목소리는 낮추시고, 묻는 말에만 대답."
"네, 네, 알겠습니다."
"나랑 처음 만난 날 기억하지? 그날 데려가려 했던 아이, 데려오라고 사주한 친구가 누군지 알아?"
"모, 모르겠습니다. 저, 저는 그런 거..."
"그럼 데려오라고 명령한 조직원은 누구야?"
"저, 저, 저는 칼 형님이 시키는 대로..."
"칼은 지금 어디 있는데?"
"주, 주점에서 한잔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주점?"
"잘은 모, 모르겠습니다. 이 주변에..."
"이것 봐. 도움이 안 된다니까."
"잠깐...!!"
푸욱!!
"커, 커컥..."
검기에 가슴이 꿰뚫린 한스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을 뽑아낸 레이는 혹시 묻었을지 모를 핏물을 털어내며 혀를 찼다.
"얻은 게 별로 없군."
칼, 그 새끼를 찾아야 한다.
*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던 칼이 요의를 느끼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바지를 주섬거리던 칼이 두 눈을 부릅떴다.
푸욱!
"크읍!!"
단검이 쇄골에 박혀들었다.
칼의 아가리를 틀어막은 레이가 칼을 질질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칼이 사라진 방향을 따라 노란 물이 길게 이어지다 지면에 스며들었다.
음습한 뒷골목까지 칼을 끌고 간 레이가 귓가에 대고 물었다.
"뒈지기 싫으면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크흡! 으읍! 으으..."
"루나를 눈독 들이고 너희 패밀리를 사주한 새끼가 누군지, 아는 건 전부 다 불어봐."
"컥! 너, 너 누구...!"
"레이."
"...!"
"아가리 열게 해줄 테니까, 눈치껏 조용히 해."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떠들어 봐. 누가 사주했지?"
"나, 나도 시켜서 한 거야."
"날 자꾸 실망시키면 재미 없을 텐데."
"이, 이런 일을 담당하는 간부가 따로 있어. 브, 브랙이라고... 브랙이라면 사주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을 거야."
"그분은 어디 계실까?"
"어디있는 지 알아. 내, 내가 안내해 줄게."
"상황 파악 안 돼? 왜 자꾸 개수작이야."
레이가 쇄골에 박아넣은 검에 힘을 주자 사지를 부들부들 떤 칼이 애원하듯 매달렸다.
"아, 아지트가 있어. 문 닫은 술집처럼 꾸며놨지만, 간부들이 자주 모여 의견을 나누는 곳이야. 브랙도 거기 있을 거야. 내가 안내해 줄게. 혼자 찾아가긴 힘들 거야."
"그래?"
"저, 정말이야."
"어쩔 수 없네."
쇄골에서 검을 뽑아낸 레이가 허리에 묶어둔 로브를 탁탁 턴 후 몸에 뒤집어썼다.
로브를 여미어 얼굴까지 가려버리니 그 알맹이가 무엇인지 알아채기 쉽지 않았다.
까치발을 한 레이가 잠깐 걸어보곤 한숨을 푹 쉬었다.
"여자치고도 키가 좀 작긴 한데 네 취향이 특이한 걸로 하자고."
칼의 허리춤에 딱 달라붙은 레이가 로브 안에서 단검을 겨누었다.
날붙이의 예기가 로브 너머에서 느껴지자 칼이 몸을 떨었다.
"자연스럽게 걸어. 애인 하나 옆에 끼웠다 생각하고 움직이면 되잖아."
칼은 목구멍까지 치솟은 욕설을 간신히 씹어 삼켰다.
레이가 낄낄 웃으며 단검에 힘을 주었다.
로브를 찢고 튀어나온 단검 끝이 칼의 살갗을 가로질렀다.
"아지트로 안내해. 제발 개수작 부릴 생각 말고. 목숨은 소중하잖아, 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