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8화 (28/446)

완전범죄 (1)

28화

"상담할 게 있어요."

레이가 입을 열자 지미는 뒷목부터 잡았다.

노이로제 섞인 반응에 레이가 뻔뻔한 얼굴로 따졌다.

"본론도 안 꺼냈는데 왜 이리 과민반응이에요?"

"기다려봐. 소화제 좀 먹고 올 테니까."

지미가 소화제를 가지러 간 사이 레이가 허리춤에서 검을 풀어 탁자에 놓았다. 필립스 백작가의 인장이 박혀 있는 검이었다.

매튜가 썩 부럽다는 얼굴로 검을 바라보자 레이가 방긋 웃으며 검을 내밀었다.

"매튜, 이것 좀 며칠 보관해 줄래요? 훈련할 때 남들 몰래 몇 번 써봐도 괜찮아요."

"오, 정말 그래도 괜찮겠...?"

잠깐 검에 눈이 돌아갔던 매튜가 이성을 되찾았다.

필립스 가문의 문장이 찍힌 검을 굳이 남에게 맡겨?

대놓고 사고 한 번 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속이 거북해진 매튜가 지미를 따라서 소화제를 찾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잠시 뒤 돌아온 지미와 매튜가 레이를 향해 험악하게 눈을 좁혔다.

"그래서, 뭔데?"

"가디 자작령에서 현재 가장 힘 좋은 조직이 조르지아 패밀리 맞나요?"

"디나르 지역은 꽉 잡고 있다고 봐야지."

그 말이 그 말이었다.

"조르지아가 언제 그렇게 컸죠?"

"원래 세력은 컸지만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건 몇 달 안 됐어. 그거 포함해서 자작령이 좀 뒤숭숭해. 영주는 몇 년째 두문불출에 치안은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지. 최근 들어 약장사까지 횡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어."

레이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루나 아시죠? 머리 푸른 애."

"잘 알지. 똘똘한 거 같더만."

"너무 똑똑해서 문제죠. 후우... 지미, 매튜, 잘 들어요.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절대 외부로 새어나가면 안 돼요."

"무게 그만 잡고 얘기해봐."

"루나가 말이죠... 대마법사의 자질을 타고난 것 같아요."

"..."

잠시 말이 없던 지미가 정색한 채 손가락을 두 개 들어 올렸다.

"레이."

"네."

"아무리, 아무리 멍청한 사기꾼이라도."

"?"

"같은 상대에게 같은 사기를 두 번 치지는 않아."

레이가 황당한 얼굴로 검을 뽑아들어 검기를 생성했다.

"아니 내가 언제 사기를 쳤어요? 나 소드 마스터 될 거라니까?"

공수표를 뿌린 거긴 하지만 9살이 검기 촥촥 뽑아내는 시점에서 최연소 소드 마스터 내정자 선언은 결코 신빙성이 부족하지 않았다.

레이가 억울함을 표하겠답시고 앉아서 검기를 휘두르자 지미가 덩달아 흥분해서 소리쳤다.

"야 임마!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 좆만 한 백작령에서 로드(Lord) 급 인재가 둘이나 튀어나온다는 게 말이 되냐?! 너 하나만 해도 믿기지가 않아!"

"지미, 틀렸어요."

검을 내려놓은 레이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지미의 착오를 바로잡았다.

"루나는 필립스 백작령이 아닌, 디나르 산(產) 고아예요."

"...아하, 백작령이 아니라 디나르."

"그렇죠."

"아이고오~ 미안해서 어쩌나아?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할 뻔했어! 고아를 어디서 캐왔는지 다 헷갈리고!"

에베베베 혓바닥을 놀린 지미가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지금 고아를 윗마을에서 주워왔는지 옆마을에서 주워왔는지 따지는 거 같냐?!"

"산지가 얼마나 중요..."

"둘 다 그만!"

쾅!

매튜가 책상을 내려쳤다.

벌겋게 변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매튜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아내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레이, 네 말을 믿는다고 치자. 루나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뭐지?"

불신의 기색이 서린 매튜의 표정을 보고 레이가 두 손을 들었다.

"음... 알겠어요. 좀 급했네요."

레이, 지미, 매튜 모두 마법에 관해선 무지한 편이었다.

마법을 다룰 줄도 모르는 레이가 마법사의 자질에 대해 입을 놀려도 신뢰를 사긴 어려웠다.

레이가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정확한 사실만 이야기했다.

"루나가 서클을 타고났어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죠?"

"서클을 타고났다고?"

"이미 각성도 끝났어요. 알레시아가 사용한 마법을 단번에 모방하더라고요. 마법이 발현되기 전에 겨우 말렸죠. 지금 보여달라고 하진 말아요. 보육원에 기사님까지 와 있어서, 잘못하면 걸려요."

"제기랄."

지미와 매튜가 동시에 앓는 소리를 냈다.

"제대로 된 배경 없는 어린아이가 마법적인 재능을 뽐내고 다니는 건 자살 행위야. 함부로 내보이면 안 돼."

"주의하고 있어요. 근데 루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골치가 좀 아프더라고요."

진정된 분위기 속에서 레이가 루나의 사정을 처음부터 설명했다.

몇 개월 전.

루나는 서클을 각성했다.

허나 서클을 각성했을 뿐, 서클의 정확한 용도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루나의 부모는 자식에게 무관심 했다.

허나 집안일을 열심히 해놓으면 가끔은 짧은 칭찬을 들었기에, 루나는 그날도 물을 길어 낑낑거리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기 직전 부모를 발견한 루나는 반갑다고 빨리 걷다가 돌을 밟고 넘어졌다.

크게 다칠 뻔한 순간, 바람이 불어 몸을 지탱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냐고.

고개를 끄덕인 루나는 직감적으로 서클의 사용법을 깨달았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이였기에, 루나는 남자와의 만남이 운명이라 생각했다.

루나는 남자가 자리를 떠나기 전에, 남자의 심장 주위를 회전하는 서클의 흐름을 모방하는데 성공했다.

바람이 불었다.

미약한 바람이었기에, 루나의 서클은 잠시 점멸하다 사라졌다.

루나는 기뻐했다. 자신이 기회를 잡았다고 확신했다.

남자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루나의 부모가 다가오는 걸 깨닫고 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렴.'

그후 얼마 안 가.

루나의 부모는 도박에 빠져 갚지 못할 빚을 졌고.

본래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없다시피 했던 부부는 루나를 버리고 떠났다.

"-라는 사연인데."

레이의 이야기가 끝날 때쯤 지미와 매튜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레이가 웃었다.

"궁금한 건 이거죠."

일련의 사건이 우연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왜 굳이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썼는가? 이걸 물어보고 싶었어요. 루나가 탐났으면 그날 밤에라도 납치하면 됐잖아요? 왜 갱단을, 조르지아 패밀리를 끌어들였죠?"

"합법적인 집단에 속한 마법사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

지미가 두피를 벅벅 긁으며 답답함을 드러냈다.

"뒤가 켕기는 게 없다면 회유든 협박이든 납치든 빠르게 일을 마쳤을 거야. 공사친 걸 보면 최대한 잡음 없이 일을 처리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아, 잘 모르겠네."

남자의 정체가 제국에 수배된 흑마법사였다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적이었다.

고작 아이 하나 빼오는 일이다.

그냥 야밤에 몰래 납치해 도주하는 게 양아치들을 동원해 어설프게 공사치는 것보다 차라리 깔끔했다. 상대가 귀족도 아니지 않은가.

관자놀이를 두드리던 매튜가 입을 열었다.

"가설을 하나 세워보자면."

둘의 시선이 매튜에게 향했다.

"상대는 흑마법사다. 디나르 지역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던 거야. 프로젝트를 위해 조르지아 패밀리와 결탁했지."

"루나와 마주치기 이전에 이미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 프로젝트가 완료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고, 흑마법사는 그 기간 동안 디나르를 떠날 수 없다.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눈에 띄는 짓은 삼가야 했기에, 길에 떨어져 있던 '보석'을 줍는 일은 조르지아 패밀리에게 위탁한 거다."

"만약 '보석'의 가치가 남에게 위탁하기 힘들 만큼 높았다면요?"

"글쎄. 조르지아 패밀리를 완벽히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대단히 중대해 눈 돌리기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그래도 꽤나 그럴듯했다.

지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든 마법사 놈이 노리던 아이를 보육원에 데려다 놨다는 거 아니야?"

"그렇죠."

"매튜 가설대로라면 그 프로젝트 끝나자마자 여기 찾아오겠네?"

"그렇죠."

레이가 낄낄 웃다가 정색했다.

"사람을 좀 죽여야겠어요."

"..."

지미는 레이에게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느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사람 죽이겠다는 놈 앞에 세워놓고 확인해야 할 건 하나였다.

"사람 죽여는 봤고?"

"많이는 아니고. 몇 명 정도."

"미친놈. 좋아,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뭐냐?"

"어... 별 거 없어요. 앞으로 며칠 간 시내 좀 나가서 사람 좀 많이 만나고, 야밤에 술도 좀 사 먹고 하세요."

"?"

레이의 말을 이해 못 한 지미가 되물었다.

"네가 디나르 가서 사람 죽일 동안 우리는 놀고먹고 있으라고?"

"음, 지미. 저는 보육원을 호시탐탐 노리는 잠재적인 적을 방치할 생각이 없어요. 최소 마법사의 신상이라도 알아야겠어요. 원만한 해결을 위해 대화를 하고 싶어도 상대를 알아야 하잖아요?"

사실 무조건 죽여야 했다.

레이 혼자서 죽일 수 없다면, 지미든 백작이든 끌어들여 반드시 죽여야 했다.

레이는 이런 마음을 감춘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안을 양보할 생각은 없어요."

"그래서?"

"그 마법사 놈의 신상을 파악할 때까지 조르지아 패밀리를 쑤시고 다닐 거예요. 상대가 갱이라고 해도 상해나 살인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 문제가 커질 테죠."

"...그렇겠지."

"그래서 검기를 사용할 거예요."

"...뭐?"

"검기요. 양아치든 갱들이든 검기로 목을 치고, 검기로 반토막을 낼 거라고요. 무조건. 목격자만 없으면 돼요. 여의치 않으면 목격자 목까지 쳐버리죠. 그렇게만 하면..."

지미는 레이가 하려는 말을 알아들었다.

"넌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게 되지."

"정확해요."

"너 대체...!"

"그러니까 검기 쓸 줄 아는 지미와 매튜는, 괜히 불똥 튀지 않게 알리바이 많이 만들어 놓으라고요. 이해해요?"

레이는 9살이다.

9살은 검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그건 당연한 상식이다.

때문에 목격자만 없으면, 레이가 검기로 사람 목을 얼마나 자르든, 또한 범인과 행적이 얼마나 겹치든 간에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꼬리가 길면 잡히겠지만, 딱 한 번 정도는, 자유롭게 자작령을 휩쓸고 다니며 사람을 죽일 수 있다.

9살이기에 가능한 특권이었다.

"맙소사, 진심이냐? 한두 명 죽여서 될 일이 아닐 텐데?"

"어쩔 수 없어요. 잘못하면 보육원이 습격당할거예요."

"젠장, 레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 그냥 고아일 뿐이잖아? 완전히 남이라고? 차라리 그냥 내줘버려! 주워왔던 자리에 다시 버리고 오라고!"

책상을 쾅쾅 내려친 지미가 진심으로 분노했다.

"몇 년도 아니야. 몇 달 전만 해도 생판 남이었던 고아 하나 지키기 위해 네가 그런 위험을, 그런 업보를 감수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다는 거야?"

"한 번 유기된 고아 다시 유기하라는 건 인간적으로 좀..."

"검기로 사람 수십 찢어죽이겠다는 건 인간적이냐?!"

"지미."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연거푸 고함을 치려던 지미는, 섬뜩하게 빛나는 레이의 눈동자를 보고 목소리를 죽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가 창밖을 바라봤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운동장엔 아직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서로를 향해 깔깔대고 있었다.

루나를 지키기 위해 저들을 방패삼을 수는 없다.

역으로, 다른 아이들을 위해 루나를 희생양 삼을 생각도 없었다.

이건 양보가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레이가 웃었다.

"제 보육원에 들어온 이상, 제 식구예요. 제가 지켜야죠."

잠시 멍하니 레이를 바라보던 지미가 따라 웃었다.

"여기가 내 보육원이지 왜 니 보육원이야 시발놈아."

"흐흐흐..."

셋은 잠시 마른 웃음을 흘렸다.

지미가 호흡을 고르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레이의 계획이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되도록이면 동선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꼬리는 짧아야했다.

"누구부터 칠 거냐?"

"한스와 칼. 루나를 데려가려 했던 놈들. 얘들이 대단한 걸 알 것 같진 않고, 이놈들부터 타고 올라가 루나의 납치를 사주한 놈을 찾을 거예요."

"...사주한 놈을 찾을 때까지, 다 죽일 거냐?"

"어쩌겠어요. 쓰레기 치운다는 마음으로 해야죠."

레이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다비드와의 일전이 상기됐다.

다비드의 관심을 끄는데 실패했으면, 루나와 더불어 카렌, 요하나, 미아까지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다비드와 전투 때 조금만 판단을 잘못했어도, 보육원이 통째로 불탈 뻔했다.

레이는 다짐했다.

보육원이 전장이 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레전더리 고아 한 번 뽑았다가 골치가 더럽게 아프다 싶긴 한데...'

이번 일만 잘 마무리 되면 불안 요소는 완전히 사라진다.

레이가 손아귀를 강하게 쥐었다.

피를 뒤집어 쓸 각오는 했다.

이제 움직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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