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에 (3)
26화
못 볼 꼴을 본 매튜가 봉투를 귀에다 건 후 자기 입 아래에 단단히 붙였다.
지미가 하늘에 무지개가 맺힐 만큼 토사물을 뱉어내는 통에 아이들은 계속해서 목책 안을 뛰어다니며 비명을 질렀다.
매튜를 방패로 내세운 레이가 아이들을 불러 모아 한소리 했다.
"다들 조용."
"으에에..."
"냄새나."
"하늘에 무지개 떴어."
"무지개 더러워..."
"조용."
레이가 눈에 힘을 주자 그제야 아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다들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 기사는 항상 번쩍번쩍한 갑옷을 입고 고결하게 전장을 누비는 존재가 아니야. 때로는 똥물에 몸을 담그고, 때로는 며칠을 굶어가며 임무를 수행하지. 근데 고작 남의 토사물 좀 묻었다고 우는 소리 할 거야?"
아이들이 풀이 죽은 채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니요..."
"다들 정신 차려. 기사님 앞에서 오두방정 떨지 마. ...근데 냄새가 좀 나긴 하네."
점심에 뭘 퍼먹은 거야 대체.
투덜거린 레이가 수건을 탈탈 털고서 아이들의 머리를 꼼꼼히 닦아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속이 안정된 지미가 지면에 쓰러진 채 꿈틀거렸다.
잠시 레이에게 눈길을 준 디디에가 지미를 보며 묘한 표정을 했다.
"잘못된 마나 운용 탓에 혈맥의 2할가량이 막혀있습니다. 이 상태로 검기까지 활용했던 겁니까?"
"그륵, 그에엑..."
"어린 나이에 제대로 배웠다면... 음, 아닙니다."
쓸데 없는 소리였다.
고개를 저은 디디에가 첨언했다.
"지금은 막힌 혈도를 다시 개척하는 데 집중해야겠습니다.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계속 정진하면 엑스퍼트 끝자락에 닿을 수 있을 겁니다."
디디에가 마나의 밀도를 좀 더 높여 지미의 몸 안에 주입했다.
반응은 곧장 돌아왔다.
"크에에에엑!!"
토사물이 와다다다 쏟아졌다.
바들바들 떠는 지미를 빙 돌아간 레이가 물었다.
"공복 상태에서 훈련을 진행하는 게 낫지 않나요?"
"속이 차 있는 게 좋다. 아니면 위장이 망가지는 경우가 생긴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래."
디디에는 얼굴에 튄 토사물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은 실제로 똥물에 입수하거나 짐승의 내장에 머리부터 들이미는 훈련을 거친다.
토사물이 튄 걸로 엄살떨기엔 디디에는 충분히 숙련된 기사였다.
"아이들의 재능이 훌륭한 편이더군."
"다행이네요. 보육원 에이스들이라서, 평가가 박하면 어쩌나 했어요."
"...그대의 수업은 언제 진행하지? 원한다면 야밤에 따로 시간을 잡아도 된다."
"연공법 수업보다 다른 걸 부탁드리고 싶어요."
"...? 검술을 시사 받길 원하나?"
"대련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잠시 말이 없던 디디에가 턱을 훑었다.
"네 재능이 훌륭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헌데 가진 재능을 완전히 개화시키기 위해선, 기초를 잘 다져 놓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디디에가 지미와 매튜를 번갈아 바라봤다. 미약한 안타까움이 눈가에 번졌다.
"저 두 분 또한 나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자질을 타고났을 터다. 허나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울 기회가 없어 제자리에 머물고 있지. 너는 기회를 잡았으니,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란다."
레이는 한 번 더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할 시간이 왔음을 느꼈다.
천재 코스프레를 시작한 시점에서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허나 그 또한 범인의 이야기지요. 저는 다릅니다."
"..."
디디에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레이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이를 꽉 깨물고 쪽팔림을 참았다.
마나 연공법은 함부로 익힐 수 없었고, 기초 검술은 하르시아의 공간검에도 내재되어 있었다.
자세 몇 개쯤은 교정받아도 되겠지만 그보다 대련을 통해 검술을 숙련하고 실전 감각을 익히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급했다.
"흠."
디디에는 잠시 고민했다.
'머리가 좀 똑똑하다 해도... 역시 9살은 9살인가?'
어린 아이 특유의 고집과 스스로를 향한 과신이 레이에게서 느껴졌다.
저 나이에 벌써 마나를 각성하고 어른들을 때려눕혔으니 세상 오만한 감정을 가져도 어리석다고 폄하할 이유는 없다.
다만 스스로의 오만에 빠져 가르침을 거부한다면 불세출의 재능을 지녔다고 해도 마스터에 오를 시기가 10년 이상 늦춰질 터였다.
'자존심을 한 번 철저히 꺾어야겠군. 마침 백작님이 내리신 임무도 있으니.'
레이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해달라.
백작이 내린 임무 중 하나였다.
디디에는 레이가 이제 막 마나를 각성했다고 알고 있었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기왕 이리된 거, 레이의 한계를 끝까지 끌어내 볼 생각이었다.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 대신 내기를 하나 하자꾸나."
"내기요?"
"5분간의 대련에서 내게 마나를 쓰게 만들어라. 성공하면 보상을 하겠다."
"마나... 감각의 보조는 어찌하실 건가요?"
기사급의 전투에선 마나를 활용한 오감의 강화가 필수적이다.
디디에가 고개를 저었다.
"마나는 전혀 사용하지 않을 거다. 그 정도 핸디캡은 있어야 내기가 성립할 거다."
"근력을 강화하지만 않으시면 돼요. 그래야 균형이 맞겠네요."
디디에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레이의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이건 너무 주제 파악을 못 했다.
디디에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며 큼직한 미끼를 던졌다.
"네가 성공한다면, 내 역량이 허하는 선에서, 기사도에 어긋나지 않는 부탁을 하나 반드시 들어주겠다."
"진심이세요?"
"내 기사로서 명예를 걸고."
"음... 제가 실패한다면, 앞으로 디디에 경의 교육을 충실히 따를게요. 또한 마찬가지로 디디에 경의 부탁을 하나 들어 드릴게요. 이 정도면 될까요?"
"나는 기사로서 명예를 걸었으니, 그대도 그대의 의지를 증명해야지."
디디에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내심 레이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던진 농이었는데, 레이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답했다.
"제 어머니의 명예를 걸겠습니다."
"그래, 그대 어머니의 명예를... 어머니?"
사전 조사를 통해 레이의 어머니가 누군지 알고 있던 디디에가 눈을 콱 좁혔다.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냐.
대충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디디에의 시선을 받으며 레이가 뻔뻔하게 아가리를 털었다.
"밑바닥 천민에게도 명예가 있습니다. 저는 항상 제 어머니를 존경해 왔습니다."
"..."
디디에가 입을 우물거렸다.
뭐라 한마디 하고 싶긴 한데 뭐라 해도 패드립이 될 것 같아 할 말이 궁했다.
고민하던 디디에는 깨달았다.
'외통수다.'
9살과 진지하게 느금마 명예의 가치에 대해 말싸움할 게 아니면 결국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으음... 그래, 알겠다."
"바로 시작하실 건가요?"
"그래. 그러자꾸나."
졸지에 기사와 매춘부의 명예를 동일 선상에 놓게 된 디디에가 찜찜함을 버리지 못하고 목검을 들었다.
어째 말리고 시작하는 기분이다.
설마 의도한 걸까? 어처구니없는 가정에 괜히 입꼬리가 실룩였다.
한편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지미가 서로에게 목검을 겨눈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레이 저놈이 기사님까지 등쳐먹으려 드는구나!'
디디에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저 족보도 없는 놈이 재능만 믿고 아가리를 터는구나! 내가 오늘 참된 교육을 뼛속 깊이 새겨주겠다!
'근데 생각대로 될 리가 없지.'
지미가 디디에에게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디디에는 지미의 눈빛을 이해 못한 채 레이를 향한 기세를 가다듬었다.
"시작하지. 선공을 양보하겠다."
"알겠습니다."
목검을 손에 쥔 레이가 호흡을 골랐다.
실력을 숨겨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미 백작에게 들킨 뒤다.
제대로 된 성장을 위해선 결국 검을 받아줄 상대가 필요했다.
상대를 고를 거면 백작 휘하의 충직한 기사만큼 적절한 인물도 없었다.
'최선을 다한다.'
화악!
땅을 툭툭 밀어낸 레이가 어느새 디디에 앞에 섰다.
예상보다 빠르다.
디디에가 그런 생각을 품은 순간 레이가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사아악!
흙바닥을 긁는 소리가 뒤늦게 디디에의 귓가를 때렸다.
날카로운 섬찟함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끼며, 몸을 회전시킨 디디에는 기꺼이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콰앙!!
"?!"
엄청난 반발력에 몸이 밀려난 레이가 지면을 한 바퀴 구른 후 자세를 다시 잡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위력의 충돌이었다. 목검이 반쯤 파여 있을 지경이었다.
'뭐지?'
고작 검 한 번 부딪쳤을 뿐인데 이 꼴이다.
아무리 디디에가 고강도의 훈련을 거친 대단한 기사라 해도 마나를 사용 않고 이만한 괴력을 낼 수는 없었다.
고개를 처들은 레이가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그 냉철해 보였던 디디에가 웃고 있었다.
만면에 웃음꽃을 피운 채, 참으로 기껍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출하고 있었다.
디디에가 팔을 휘둘렀다.
쾅!
디디에의 짐 근처에서 기파가 터지며 검 두 자루가 허공을 날았다.
여러 차례 회전한 검 두 자루가 레이와 디디에를 사이에 두고 지면에 박혔다.
디디에가 시퍼런 예기를 발산하는 검을 뽑아들었다.
"내기는 내가 졌다."
단 일격이었지만 디디에는 깨달을 수 있었다.
레이의 속도, 발재간, 검속, 검로, 검압, 대응.
그 모든 것들이 제대로 된 엑스퍼트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디디에는 백작에게 감사했다.
가히 영광이었다. 미래의 소드 마스터에게 짧은 시간이라도 스승의 역할을 자처하게 되었다는 건.
"지금부터 제대로 덤벼 봐라."
레이 또한 검을 뽑았다.
망설일 것 없었다.
"기꺼이."
*
"엉덩이가 아프구나아아..."
"승마를 배우긴 하셨어야 합니다."
모하메드가 바짝 붙어 알레시아가 탄 말을 이끌며 웃었다.
"결국 이리 익히실 걸, 왜 그렇게 배우기 싫다 고집을 부리셨습니까?"
"시야가 높아서 무섭구나. 아버지가 보육원을 왕복할 때 마차를 금하지만 않으셨으면 평생 말을 타지 않았을 것이다아..."
"보육원을 안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모하메드가 순진한 척하며 물었다.
입술을 삐죽거린 알레시아가 중얼거렸다.
"나의 기사는 내가 관리해야 하는 게야..."
저앞에 보육원이 보였다.
금세 말을 타고 보육원 입구에 당도한 알레시아가 말 위에서 몸을 파닥거렸다.
속으로 한숨을 쉰 모하메드가 알레시아를 붙잡아 말에서 내려주었다.
"너는 저번에 보았던 얼굴이구나."
"허억!"
지미 패밀리에 소속되어 있으며 보육원 경비 업무를 하고 있던 졸탄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알레시아가 보육원에 머물렀을 때 남에게 말도 못하고 부담감 때문에 홀로 끙끙 앓았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알레시아를 다시 마주하니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곧장 한쪽 무릎을 꿇은 졸탄이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음, 레이가 검을 배운다기에 실력을 보러 왔느니라!"
"그, 그, 그럼 들어가 보시죠."
보육원에 들어서자 알레시아를 발견한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일일히 손을 흔들어주며 마음껏 인기를 즐긴 알레시아가 목책을 향해 걸었다.
목책 내부에서부터 엄청난 굉음이 연거푸 울리고 있었다.
카앙!! 콰콰쾅!!
"오! 전투를 벌이고 있나보구나. 모하메드 경! 나를 좀 올려주게나!"
"아가씨, 그건 위험하..."
"어서 올려주게나!"
"..."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갈아낸 모하메드가 알레시아의 겨드랑이를 붙잡고 하늘 높이 들어주었다.
시야가 확 높아지며 목책 안의 광경이 알레시아의 눈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