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25화 (25/446)

디디에 (2)

25화

보육원을 훑어본 디디에가 말에서 내렸다.

지미와 매튜는 가까워지는 디디에의 그림자를 보며 입에 담겨 있던 침을 꿀꺽 삼켰다.

바짝 긴장해 있는 둘을 번갈아 본 디디에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미 님, 매튜 님."

님?

지금 님이라고 했나?

예상치 못한 호칭에 지미와 매튜는 바로 답변을 못하고 얼을 탔다.

디디에는 얼음장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부드러웠다.

"아가씨의 흔적을 수색할 때 큰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두 분이 아니었다면 수색이 크게 지체되었을 겁니다. 필립스 가의 기사로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눈알을 빙글빙글 돌리던 지미가 뒤늦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평소에 백작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겸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아버지께서도 이번 일로 식견이 넓어졌다며 한 말씀 하셨습니다."

"그, 가, 감사합니다."

"백작님께서 제게 보은을 대신 행하라 명하셨으니, 백작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임무에 충실할 생각입니다. 잘 부탁하겠습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디디에와 눈이 마주친 지미와 매튜기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

보육원에 기사가 온다는 소문은 그제부터 아이들 사이에 돌고 있었다.

검술 교육이 시작되면 어차피 막지 못할 이야기인지라 레이는 입단속을 포기하고 아이들의 정신 무장에 신경 썼다.

기껏 기사까지 초청했는데 아이들의 태도가 해이하여 기사의 눈 밖에 난다면 손해가 막심했다.

'지금 봐서는 크게 걱정 안 해도 되겠다만.'

이 세계의 사람들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기사에 관한 영웅담을 동경한다.

일신의 무력이 군단과 버금가는 인간병기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니, 영웅담에서 풀어내는 기사를 향한 선망과 공포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마음 깊이 내제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언제 기사가 올지 모른다며 아침부터 발을 맞춰 걸으며 군기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들뜬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은 레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보육원 정문을 바라봤다.

'저 사람이... 디디에구나.'

체격이 무시무시했다.

평범한 남성에 비해 건장한 편인 지미와 비교해도 몸집이 눈에 띄게 차이 났다.

지면에서 일어선 레이가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찾아와주셔서 영광입니다, 디디에 경."

레이를 내려다보는 디디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대가 레이로군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가씨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기사님께서 신분이 천한 저를 이리 높여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알겠다."

디디에는 헛웃음이 새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레이가 혓바닥을 꽤 잘 굴린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으나, 레이에게서 느껴지는 정적인 감정이 디디에를 당황시켰다.

'기사를 처음 마주한 아이는 으레 흥분해서 목소리를 떨길 마련인데.'

레이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무지에서 나오는 평온이라 하기엔 위화감이 짙었다.

디디에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역시 기대가 됐다.

"보육원을 한 번 둘러봐도 되겠는가?"

"제가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부탁하지."

레이가 시종처럼 디디에의 곁을 걸었다.

울타리를 끼고 돌면서 디디에가 감탄했다.

"다들 얼굴에 생기가 도는구나."

"의외입니까?"

"좀 더 어두울 것이라 생각했지. 선의가 느껴지는 곳이야. 벌써 작은 선입견이 벗겨지는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수업 말입니다만, 5명 내외의 인원으로 조를 쪼개 검술 지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적절한 인원이야."

"첫 번째 수업은 가장 재능 넘치고 열의 넘치는 친구들을 모았습니다. 잘 살펴주시길 바라요."

"나는 백작님의 보은을 대리하여 왔다. 최선을 다할 테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의 성취가 백작님께 보고될까요?"

"그렇다."

"백작님에게만 보고되는 겁니까?"

"..."

자리에서 멈춘 디디에가 레이를 돌아보았다.

자기들의 성취를 보고해 백작님의 눈에 띄게 해 달라. 레이가 그런 속셈을 품고 이야기를 꺼낸 줄 알았으나 두 번째 질문을 보니 아니었다.

당돌한 질문이었으나 순순히 답해 주었다.

"백작님께서 내게 맡기신 임무다. 임무의 내용은 함부로 누설하지 않는다. 백작님의 허가 없이는 내 아버지께라도 보육원의 일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을 것이다."

"과연 기사시군요."

"불쾌한 질문이었다."

"죄송해요. 근래 마법사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워낙 많이 접해서요."

"하하하!"

디디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입술 위는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었지만 어쨌든 처음 보인 표정 변화였다.

"기사와 마법사는 지향하는 가치가 많이 다르다. 마법사에 대한 소문이야 나도 잘 안다만, 기사와 겹쳐보면 서운하지."

"죄송해요."

레이가 속으로 혀를 찼다.

마법사에게 한 번 데이고 나니 의심병이 도지는 느낌이다.

디디에가 겉으로 보이는 만큼 속까지 충직한 기사이길 바라며 보육원의 뒤쪽 공터로 향했다.

하루 전 사람들을 시켜 공터 중앙에 나무 기둥을 빽빽이 세워 목책을 만들어 놨다.

일단 기사의 가르침이니, 함부로 남에게 보일 수 없었다.

목책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보였다.

카렌이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외쳤다.

"안녕하세요! 카렌이라고 합니다!"

"와! 진짜 기사님이다! 전 요하나라고 해요! 히히!"

요하나는 마냥 좋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물론 긴장을 안 한 건 요하나 혼자였다.

"악! 저저, 데, 데런이라고 합니다!"

멍하니 서 있던 데렌은 뒤에 서 있던 지미가 등을 살짝 꼬집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했고, 이안은 사지를 벌벌 떨며 몇 번이고 말을 더듬었다.

"이, 이, 이, 이, 이안이라고 하, 하, 합니다."

"만나서 반갑다. 디디에라고 한다. 디디에 경...은 너무 딱딱하군. 그냥 교관님이라고 불러도 된다."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핀 디디에는 귀족이 아닌 자가 기사에게 배움을 청할 기회가 닿는다는 게 얼마나 귀중하고 축복받은 일인지 설명했다.

백작님의 관대함을 찬양했고, 또한 지미와 매튜, 레이에게 감사하라고 충고했다.

할 말을 마친 디디에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요하나, 카렌, 데런, 이안. 첫 번째 수업은 이 네 학생이 참가하는 것이 맞습니까?"

"큼, 그, 디디에 경."

눈치를 보던 지미와 매튜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리에게도 가르침을 내려주실 수 있습니까?"

"...?"

디디에가 잠시 당황하고 있자 레이가 백작과 브릿지로 주고받은 편지를 건네었다.

"백작님께 허락은 구했습니다."

"허. 백작님께서 널 정말 아끼시는구나."

"관대하시게도 제 건방을 용인해주고 계시죠."

"좋다. 바로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지. 축기라는 개념부터 설명하겠다."

*

마나는 세상 만물에 존재한다.

인간 또한 삶을 살아가며 체내에 자연스레 마나가 쌓인다.

이를 억지로 집약시켜 밀도를 높이는 게 축기의 첫 번째 과정이다.

밀도가 일정 수치 이상 높아진 마나는 자연스레 응집력을 가지며 주변의 마나를 끌어당긴다.

"마나 연공법은 주요 혈관을 따라 응집된 마나를 순환시켜 체내의 마나를 온전히 흡수하고 주변의 마나를 체내로 끌어당기는 기술을 일컫는다."

물론 체내에 응집된 마나를 바로 활용하는 건 비효율적인 짓이다.

성질이 상이하고 그 농도조차 들쭉날쭉해 검기로 뽑아내봤자 쉽게 바스러졌다.

때문에 기사들은 마나 정제법을 활용해 마나의 성질을 하나로 고정시키고 심장에 코어를 생성했다.

"마나의 압축, 제어, 가속 등의 모든 행위에 있어 심장의 코어는 필수적인 역할을 맡는다. 체내에 아무리 마나가 많아도 코어가 없다면 마나를 다루는데 한계가 생기지. 그럼 이제 마나 연공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배워보겠다."

디디에가 수건과 봉투 하나를 요하나에게 쥐여주었다.

"지금부터 압축한 마나를 네 몸에 주입해 연공법에 따라 순환시키겠다. 마나가 순환하는 감각을 잘 기억하도록."

"네!"

요하나는 일단 고개부터 끄덕였다.

디디에가 고농도의 마나를 요하나의 심장에 주입해 주요 혈관을 거쳐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고밀도의 마나를 생전 처음 받아보는 요하나의 혈관이 곧장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응윽?"

삽시간에 꼬여가는 속을 느낀 요하나가 윽윽 거리며 몸을 떨다 입을 헤 벌렸다.

"우에에에에엑..."

토했다.

쏟아져 내리는 토사물에 다른 아이들이 기겁하며 한 발짝 물러섰지만 디디에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마나가 정상적인 길을 따라 순환토록 인도했다.

애초에 구역질은 마나 연공법 전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현상이다.

한 바퀴 순환을 마친 디디에가 마나의 제어를 멈췄다. 요하나는 당연하다는 듯 제어를 넘겨받아 두 번째 순환을 시작했다.

"우에에에엑..."

계속해서 토했다.

디디에의 미간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가 되돌아왔다.

"두 번째 순환을 마무리한 후 속을 다스리고 있어라."

다음 순서는 카렌이다.

토사물과 하나 된 요하나의 끔찍한 몰골을 확인한 카렌이 레이에게 눈을 돌렸다.

"나, 나가!"

"응?"

"나가 있으라고!"

"카렌, 구역질이야 마나 연공법 배우면서 누구나 다 거치는 과정이야. 굳이 숨기려 할 필요 없어."

"레이는 변태야!! 빨리 나가!!"

"등 돌리고 있을 게."

"그냥 나가라고!"

카렌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등을 퍽퍽 치자 레이는 못 이기는 척하며 울타리 밖으로 나갔다.

되도록이면 집중해야 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았다.

잠시 뒤 새로운 구역질 소리가 목책 안에서 들렸다.

"흡! 흡! 흐우우에에엑..."

계속해서 구역질을 이어가던 카렌이 토사물에 피가 좀 섞여 나왔는지 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으엑.... 나 피나왔어요. 나 죽는 거예요?"

"걱정 안 해도 된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니."

"레이, 나 피나와. 나 괜찮은 거야? 레이, 나 죽을 것 같아."

"아이고, 괜찮다니까."

결국 다시 목책 안으로 들어선 레이가 여러 이물질로 범벅되어 있는 카렌의 입을 수건으로 닦아주며 속이 진정될 때까지 달래주었다.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린 카렌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레이와 등지고 앉았다.

그 사이에 아이들 모두에게 마나 연공법을 지도해준 준 디디에가 지미에게 다가갔다.

"연공법을 제대로 배우신 적 있습니까?"

"길바닥에 돌아다니는 책을 주워 감으로 익혔습니다."

"흠, 일단 한 번 제 인도에 따라 마나를 순환시켜 보시겠습니까?"

디디에가 수건과 봉투를 건네자 지미가 손을 저었다.

"이래 봬도 잔뼈 굵은 용병입니다. 너무 아이 취급은 하지 말아주십쇼."

"음... 알겠습니다."

잠시 뒤 피 분수와 토사물이 지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크에에에에엑!!!"

"꺄아악!!"

사방에 뿌려지는 지미의 분비물을 뒤집어쓴 아이들이 비명을 질러대며 도망쳤다.

매튜 뒤에 선 레이가 벌레 씹은 표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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