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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24화 (24/446)

디디에 (1)

24화

귀가 들리고 난 후 알게 된 사실은 내가 꽤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영민함과 성실함을 토대로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

헌데 여자 보는 눈은 영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가정에도 충실한 훌륭한 사람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내 친부가 아니었다.

생물학적 애미애비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알게 되었다.

시이발 내가 뻐꾸기라니. 내가 뻐꾸기라니!

이세계 환생까지 해놓고 뻐꾸기 처지라니!!

이제 슬슬 의심이 든다. 초월자란 새끼는 그저 날 엿 먹이고 싶어서 여기다 떨군 것이 아닐까?

세계를 구원하라고?

개-새끼야 그럼 지원이나 똑바로 해주든가.

다시 한 번 귓구멍에 남녀의 교접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아직 나지도 않은 이가 갈리는 것을 느꼈다.

이딴 식으로 날 엿먹이다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이렇게 된 이상 마왕 편에 선다. 마왕 옆에 붙어서 내가 먼저 제국을 밀어버릴 것이다.

제국을 멸망시킨 날 반드시 하늘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울 것이다.

신음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아우에으, 아바바바(작작 좀 해, 시발년놈들아)!!"

혼심의 힘을 다해 욕설을 뱉었지만 아가리로 나오는 건 옹알이뿐이다.

생물학적 애미가 날 쓱 보더니 깔깔 웃었다.

"자기, 우리 둘째도 만들까?"

"둘째는 누가 키우라고?"

"설마 자기 보고 키우라고 하겠어?"

생물학적 애미애비가 깔깔거렸다.

그들은 관계를 맺으며 조미료를 치듯 내 호적상 아버지를 모욕했다.

진짜 돌아버릴 것 같네.

마음 깊이 맹세했다.

제국을 지워버리기 전에, 일단 도구를 들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저 년놈부터 찔러죽여 버리겠다고.

허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패륜을 저지를 직접적인 기회를 잡는 일은 없었다.

*

"야."

"...?"

"죽어. 여기서 계속 자면?"

"끙, 그러게요. 궁색 좀 그만 떨어야지."

레이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서서히 줄어가던 호흡이 강제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몸이 추웠고 묘비에 기대고 있던 등이 아팠다.

무엇보다 거지 같은 꿈을 꿔서 기분이 나빴다.

갓난아기 때의 기억은 정말 여러모로 상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굳이 생물학적 애미애비와 함께했던 병신 같은 기억을 제하고라도, 바깥세상과 접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기의 몸뚱이는 툭하면 열이 오르길 반복했다.

태어난 후 몇 달 동안은 하루종일 감기를 달고 사는 느낌이었다.

"후우, 후우."

그래, 지금처럼.

레이가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냈다.

일어나기 위해 몸을 들썩이는데 묘지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물었다.

"너가 했어?"

"뭘요."

"관리."

"?"

"묘비 관리."

"그렇죠. 저 말고 딱히 할 사람이 없는지라."

"알아?"

"네?"

"이 사람. 아냐고."

레이가 여자를 바라보았다.

말 하는 게 나사 하나가 빠져있는 것 같아 무시하고 지나칠까 싶었지만,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여자에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신장이나 차림새를 고려하면 나이가 적지는 않아 보였다.

기억을 뒤져봤지만 안면이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잠시 고민한 레이가 답했다.

"제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친부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요."

"친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의미죠."

"...아빠라면서?"

"그러니까 제 말은."

레이가 머리카락의 물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이분이 호적에 제 아버지라고 등록되어 있었긴 합니다만, 제 애미에게 씨앗을 준 생물학적 애비는 다른 사람이었다, 이 말입니다."

"...!"

여자는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입을 벌리고 있다가 되물었다.

"그럼 아니잖아?"

"뭐가요."

"아빠 아니잖아?"

"호적상으로는 아버지셨습니다. 피붙이는 아니지만 이 묘비 관리할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말이죠, 제가 아버지 묘비를 관리해 왔어요. 물론 아버지는 제게 아버지라 불리는 게 싫으실 수도 있겠지만."

어깨를 으쓱한 레이가 묘비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찾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니, 불만이 좀 있어도 접어두셨을 겁니다."

몸이 더 얼어붙기 전에 지붕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비틀거리던 레이가 균형을 바로잡고 여자를 마주 봤다.

"저는 가볼게요. 혹시 아버지랑 인연이 있으셨다면 가끔 찾아와주세요. 외로우신 분인지라. 아, 깨워주신 거 감사했습니다."

레이가 등을 돌렸다.

비틀거리며 두 발자국 정도 걸었을까. 유리병 하나가 지면을 데구루루 굴렀다.

안에 담긴 시푸른 액체를 보며 레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뭡니까?"

"포션."

"나 먹으라고요?"

"다쳤잖아."

"혹시 저 누군지 아시나요?"

"몰라. 하지만 이제 알아. 다음에 봐."

"다음에요?"

"응. 지금은 해야 돼."

"뭘 해요?"

"약속들. 지켜야 해."

"뭐, 일 잘 풀리길 바랄게요."

고개를 끄덕인 여자가 멀어졌다.

레이는 땅에 굴러다니는 포션을 주워들었다.

시푸른 액체 위로 푸른 빛이 은은히 흘러가는 게 마치...

"방사능 덩어리 같은데."

대체 무슨 포션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작정 입에 넣기는 불안해 보였다.

애초에 모험가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 중 하나가 '남이 준 포션'이었다.

레이는 찰랑거리는 액체를 보며 고민하다, 비에 축 젖어 무거워진 옷을 느끼며 불현듯 깨달았다.

"아, 그렇군."

여자에게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

"옷이 젖지 않았어."

마법사인지 기사인지 모르겠으나 마나를 쓸 줄 아는 게 분명했다.

얼굴을 한 번 쓸어올린 레이가 포션을 들이켰다.

맛은 생각보다 상쾌했다.

*

다비드가 죽고나서도 며칠이 지났다.

거울을 보며 몸 단장을 마친 지미가 레이를 향해 물었다.

"너 얼굴 그거 치료 안 받을 거냐?"

"얼굴요?"

레이가 자기 콧잔등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더듬었다.

큰 상처였지만 신성력을 활용해 집중적으로 치료받으면 흉터를 없앨 수 있었다.

비용이야 많이 깨지겠지만 아델에게 부탁했으면 푼돈만 받고 치료를 해주었을 것이다.

레이 또한 얼굴에 그림 그리는 취미는 없었다. 허나 아델을 찾아갔다간 온몸에 새겨진 상처를 들킬 게 분명했다.

포션도 좋은 걸 먹었으니 다비드와 전투 흔적이 완전히 아물 때까지는 아델에게 접근 금지였다.

레이가 말이 없자 지미가 큰 흉터가 새겨져 있는 자기 어깨를 보여주며 충고했다.

"그거 시기 놓치면 나중에 지우려 해도 안 지워질 텐데. 게다가 얼굴이잖아."

"뭐, 큰 상관..."

레이가 적당히 대답하고 넘기려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말을 멈췄다.

지미와 매튜가 도끼눈을 한 채 레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의심받고 있네.'

잘 받고 있던 치료를 안 받겠다고 하니 의심이 들만 했다.

평소에도 골 때리는 사고를 워낙 많이 치고 다녔던 레이였기에 둘의 경계심은 이미 최고치에 이르러 있었다.

어물거리며 넘겼다간 일이 귀찮아질 것을 예감한 레이가 목을 가다듬었다.

"음. 지미, 매튜. 이건 다른 사람들한테 비밀인데."

"응?"

"거울을 보니까 상처가 좀 멋있게 보이더라고요."

"뭐?"

"좀 더 남자다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강해 보이기도 하고. 얼굴에 새겨진 흉터를 남이 보면 위압감 같은 것도 느끼지 않겠어요?"

"..."

납득이 될 듯 말 듯했던 지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9살 꼬맹이라면 충분히 저런 생각을 가질만했다.

저 나이 때 애들은 놀다가 팔뚝이 찢어지면 한참 울다가도 나중 가서는 영광의 흉터라고 다른 애들한테 자랑하고 다니고는 했다.

그러니 9살짜리 꼬맹이가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전혀 이상치 않았지만, 상대가 레이다 보니 껄끄러움이 가시질 않았다.

"레이, 지금 네 인상도 충분히 더러워."

지미가 남들에 비해 길게 찢어진 레이의 눈을 흉내내듯 양손을 눈가에 가져다 댄 채 좌우로 당겼다.

"관리만 잘해도 성격 나빠 보인다는 소리 듣고 살 텐데 거기서 굳이 더 힘든 길을 걸어야 겠냐?"

"이런 인종차별자 새끼..."

"지금 뭐라고 했냐?"

"저는 야성미 넘치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레이가 내심 울컥한 감정을 숨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지미와 매튜는 의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슬슬 준비하지 그러냐? 디디에 경이 곧 도착하실 거다."

"마중은 잘 부탁할게요."

"너 정도 재능에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운다면 발전이 훨씬 빨라질 텐데, 넌 기대도 안 되냐? 왜 그렇게 평온해?"

"글쎄요."

레이는 이미 하르시아의 검술을 알고 있다.

마나 연공법 또한 함부로 익혔다간 몸이 부하를 감당 못할 가능성이 있기에 익히기가 조심스러웠다.

기사를 보육원에 초대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서였다.

레이가 기사를 상대로 무언가를 확실히 얻는 방법은...

"대련을 한번 해보고 싶네요. 기사님이랑."

*

디디에는 굳은 얼굴로 말을 몰고 보육원으로 향했다.

간소한 무장을 했고, 주변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종자 또한 대동하지 않았다.

미리 보육원 앞에 마중을 나와 있던 지미와 매튜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디디에 경."

부모 없는 천민 아이들을 상대로 검술을 가르치는 일이다.

기사로서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 해도 반박하기 어려웠다.

지미와 매튜는 고개를 숙인 채 분위기를 살폈다.

차게 가라앉은 디디에의 눈동자가 보육원을 한 바퀴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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