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혐오 (4)
22화
"큼큼. 오해를 산 것 같은데,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구나."
다비드가 사람 좋게 웃었다.
"여기서는 아이들이 깰 수도 있으니,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어떻겠니?"
"좋아요."
레이 또한 순진한 아이의 표정을 흉내 냈다.
서로의 속내를 뻔히 알고서도 의견이 통했다.
둘 모두, 이 자리에서 전투를 벌여 '자기 물건'이 다치는 걸 원치 않았다.
둘은 나란히 서서 복도를 걸었다.
빗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보육원 밖으로 나온 다비드와 레이는 후문으로 향했다.
다비드는 친절하게도 장막을 펼쳐 레이가 비를 맞지 않게 배려해주었다.
대부분의 진동을 흡수해주는 다비드의 장막은 내부의 소리를 밖으로 흘리지 않았다.
"오해하지 말아주었으면 싶구나."
"오해요?"
"나는 누군가를 해치고 싶어서 이곳을 찾아온 게 아니란다."
"하지만 허락받지 않고 보육원에 들어왔잖아요?"
"본디 마법사란 비밀스러운 족속이지. 이해해주길 바란다."
"보육원엔 왜 찾아왔나요?"
"참으로 재능 넘치는 아이를 보았다.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그 아이를 만나고 싶었단다."
"루나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럼 루나를 마법사님의 제자로 받아주시는 건가요?"
보육원 후문을 넘어서자 텅 빈 공터가 나왔다.
보육원은 마을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기에, 이 방향으로 걸어가면 다른 마을이 나올 때까지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다비드가 걷는 속도를 줄였다.
"아이야, 강대한 서클을 타고난다 해도 반드시 높은 경지에 닿을 수 있는 건 아니란다. 아무리 많은 마나를 지녔어도, 술식을 이해하고 구성할 수 있는 지능이 부족하면 간단한 마법조차 제어할 수 없지."
레이는 웃었다.
레이는 루나의 지능이, 환생 전에 역사책에서 본 세기의 천재들과 비견될 것이라 확신했다.
물론 다비드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담담히 물었다.
"제자로 받아주시는 게 아닌가요?"
"그 아이에겐 그것보다 더 훌륭한 쓰임새가 있단다. 예컨데..."
다비드가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심장을 뽑아낸다든가."
"심장을요?"
"그래. 심장을 뽑아 마법적인 가공을 거치면, 막대한 마나를 저장할 수 있는 훌륭한 마나 배터리를 제작할 수 있단다. 일종의 생체 아티펙트지. 물론 고위 마법사 정도는 돼야 시도할 수 있는 제작법이란다."
"하지만 심장을 뽑으면 사람은 죽잖아요?"
다비드가 웃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니."
뒷머리를 긁적인 레이가 물었다.
"다비드님."
"음?"
"마법사는 다 그꼴인가요?"
"마도를 걷는데 인간성은 불필요한 법이란다."
"그렇군요."
레이가 검을 뽑았다.
*
레이는 다비드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어떤 사소한 방비조차 하지 않았다.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음은 물론, 보육원의 경비를 늘리지도, 함정을 파지도, 값비싸고 강력한 무기를 준비하지도 않았다.
다비드에게 그 어떤 의심도 사지 않도록 철저하게 일상을 가장했다.
때문에 다비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늘 레이와의 만남이 오로지 우연에 의해 발생한 변수였음을.
다비드는 신중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아이들이야 몇 명이 실종되든 상관없었다.
허나 아이들의 실종에 어떤 강압의 흔적도 발견되어선 안 되었다.
그래야만 일이 깔끔했다.
때문에 다비드는, 레이가 또 다른 변수를 만들어내는 걸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일단 레이를 바로 옆에 두었다.
설령 수백 미터 떨어져 있더라도 레이를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혹시라도 레이가 비명을 지르거나 도주를 택할까 염려되어, 그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가 이변을 눈치채지 않을까 염려되어 바짝 거리를 좁혔다.
레이가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레이가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목소리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레이가 토해낼 핏물이 지면을 적셔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다비드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주위에 마법을 펼쳤다.
레이가 검을 뽑자 다비드는 참으로 기꺼워했다.
다비드는 신중했기에, 레이를 자기 손길이 닿는 거리에서 확실히 마무리 짓고 싶었다.
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
두 번째 9살을 맞이한 레이는 확답할 수 있었다.
9살은 생각보다도 개념이 굉장히 부족한 나이였다.
전생에 레이가 9살이었을 적에, 진심으로 싸우면 어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뭔 병신 같은 생각이냐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9살이란 나이는 경험이 부족해 자기객관화가 잘 되지 않았고 상대와의 격차를 인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동안은 간과했지만 근래 들어 보육원 애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명확히 깨달았다.
9살은 개념이 없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철저하게 9살을 흉내냈다.
자신이 진심으로 싸우면 어른도 이길 수 있을 거라 믿는, 철없는 9살을 흉내냈다.
더군다나 레이는 실제로 마나를 각성해 어른 여럿을 때려눕혔다.
자신감이 하늘을 찔러 눈이 뒤집혀도 이상치 않을 상황이었다.
때문에 고위 마법사의 무서움을 겪어본 적 없는 레이는, 자신이 진심으로 싸우면 마법사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비드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레이는 최선을 다했다.
검을 뽑는 속도도, 휘두르는 속도도.
이제 막 마나를 각성한 꼬맹이 수준에 걸맞게 한참을 늦췄다.
다비드가 사방에 보조 마법을 펼쳤다.
그 수많은 마법 대부분이 외부의 간섭과 관측을 차단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다비드는 스스로가 방심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다비드는 삶을 살면서 마법을, 특히 감지 마법을 익힌 후로 단 한 번도 이토록 가까운 거리를, 이토록 오랜 시간 타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방위 시도와 암습을 포기한 대가로 레이가 얻어낸.
단 한 번의 기회였다.
검이 다비드에게 향한다.
다비드는 방어 마법을 펼치지 않았으나, 아티펙트가 자동으로 마나 실드를 전개했다.
레이의 심장이 뒤틀렸다.
급격하게 활성화된 코어가 신체에 걸리는 부하를 무시하고 폭주하다시피 마나를 쏟아냈다.
검에 푸른빛이 치솟아오른다.
휘둘러지던 검이 삽시간에 가속했다.
'검기?'
비현실적인 광경을 앞에 두고 다비드는 무심코 팔을 뻗었다가 조소했다.
아티펙트에서 전개된 실드는 '어지간한 종류의 검기'는 몇 번이고 상쇄시킬 수 있을 만큼 단단했다.
검기와 실드가 충돌했다.
끄드득!
공간이 변형된다.
검기와 맞닿은 실드의 형태가 기이하게 꺾였다.
반발력 탓에 흐트러질 뻔한 검기는, 금속으로 된 검에 의지해 다시금 응집됐다.
뿌드드득!
실드가 관통된다.
앞으로 나와 있던 다비드의 왼팔이 먼저 잘려나갔다.
핏물을 증발시킨 검기는 다비드의 가슴마저 양단하기 위해 떨어져 내렸다.
우웅-!
다비드가 착용하고 있던 모든 아티펙트가 동시에 반응했다.
강력한 마나 실드가 심장 주위로 전개됨과 동시에 고밀도로 압축된 마나가 레이를 요격하기 위해 쏘아졌다.
레이는 살이 타들어가는 와중에도 실드에 막혀버린 검에 자기 몸을 들이댔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 검기를 다비드의 심장에 꽂아넣고자 발악했다.
다비드가 분노했다.
"네놈이 감히...!!"
다비드의 손아귀에 불꽃이 일어난다.
아티펙트의 요격 탓에 이미 레이의 사지는 벌겋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레이는 고통을 느끼며 웃음 지었다.
공간을 변형시키는 기이한 검기가 실드를 부순다.
동시에 다비드의 화염구가 레이에게 적중했다.
콰앙!!
폭팔음과 함께 레이가 수십 미터를 튕겨져 나갔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허나 다비드는 본래, 이 근방을 불바다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레이를 아예 증발시켜버릴 생각이었다.
헌데 쓰러져 있는 레이의 몸엔 팔다리가 전부 멀쩡하게 붙어있었다.
다비드가 각혈했다.
"크륵!! 쿨럭!! 쿨럭!!"
다비드의 가슴에 검기가 파고든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분열된 서클 6개 중 2개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남은 서클 또한 무사하진 않았다.
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이 화상으로 가득했지만, 붉게 달아오른 피부는 장대비에 의해 금방 식었다.
비틀거린 레이는 자신의 가슴 위를 만져보더니 입꼬리를 깊게 올렸다.
"나의 코어는 무사한데, 당신의 서클은 어떨지 모르겠군."
"네, 네놈... 네놈이...!"
"얼추 밸런스가 맞기를 기대하며, 계속해보지."
레이가 지면을 박찼다.
흔들리던 다비드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이 빌어먹을 보육원이 대체 무슨 괴물들을 키워내고 있는지 혼란스러웠으나, 지금은 부동심이 필요했다.
기습을 허용한 대가로 다비드의 전력은 4서클 마법사에 가깝게 떨어져 내렸다.
아직은 충분히 유리했다.
사방이 물이었기에, 특기는 아니었으나 빙결 마법을 운용했다.
지면이 얼어붙으며 거대한 얼음송곳이 레이를 향해 치솟았다.
레이가 사각에서 짓쳐들어오는 얼음송곳을 피해 몸을 굴리자 허공에서 뇌전이 떨어져내렸다.
콰가가각!!
"큽...!!"
전격 마법은 회피가 불가능하다.
마나가 깃든 전류를 오로지 피격자의 마나 저항력만으로 견뎌내야 했다.
레이의 몸을 흐르는 가공할 성질의 마나가 외부의 마나에 강력한 저항력을 부여해주었으나 잠시 몸이 굳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 틈을 타 사방에서 얼음송곳이 치솟아 올랐다.
"아, 시발."
레이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 나이에 이런 거 쓰면 키 안 크는데."
전생에 키가 작은 편이었던 레이는 이번 생엔 한 번 멀대 같은 신장을 가져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았다.
'동화책에 기술 이름이 뭐라고 적혀있었더라? 오버드라이브?'
하르시아는 언제나 더 빠르게 움직이고 싶어 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그 누구보다 뛰어난 민첩함을 갖추고도 그러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르시아는 발상의 전환을 꾀했다.
근육을 마나로 강화해봤자 그 한계가 분명하니, 근육을 배제하고 신체를 가속시킬 방법을 찾았다.
고민하던 하르시아는 마나의 성질을 변형시켜 관절 사이에 응축, 폭발시켰다.
마나의 폭발력을 활용해 관절이 회전하는 속도를 억지로 끌어올린 거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지만 않으면 효과는 확실했다. 떨어져 나가지만 않으면.
"아오, 시발. 이딴 걸 비기라고."
초월자 덕분에 오버드라이브의 원리 자체는 꿰뚫고 있었다.
몸에 걸리는 부하가 말도 안 되게 강해 써볼 생각도 안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레이는 장신의 꿈을 단념했다.
콰앙!
관절 사이에 응축된 마나가 폭발한다.
뒤틀린 관절이 채찍처럼 휘둘러짐과 동시에 레이의 몸이 삽시간에 얼음 송곳을 뚫고 나갔다.
촤아악!!
속도를 제어 못 해 바닥을 한 바퀴 구른 레이가 곧장 다비드를 향해 가속했다.
성장판이 작살나는 고통을 느끼며 레이가 중얼거렸다.
"이번 생도 운 좋아야 170따리겠네."
"네 녀석은 대체...!!"
안 그래도 몸뚱이가 가벼웠던 레이다.
하르시아의 비기를 사용하자 그 속도가 완숙한 그래듀에이트 급 무인과 비견될 정도로 상승했다.
당황한 다비드가 넓은 범위에 걸쳐 무수한 마법을 쏟아냈다.
촤자자자자작!!
레이의 온몸에 상처가 새겨졌다.
허나 위력이 분산된 마법으론 레이를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설령 힘줄이 잘려나가더라도, 하르시아의 비기는 팔다리만 달려있으면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적어도 4서클 마법을 적중시켜야 했다.
다비드의 얼굴이 악귀처럼 구겨졌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눈앞의 꼬맹이를 상대로 승리를 취하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했다.
망가진 여섯 개의 서클이 일시에 빛을 발한다.
드드드득!
4개의 마법이 동시에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찰나 레이가 뒷걸음치던 다비드를 따라잡았다.
허리를 향해 솟구치는 얼음 송곳을 검기로 베어낸 레이가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다비드는 레이를 눈으로 쫓지 않았다. 그는 눈보다 마법을 믿었다.
다비드가 전개한 탐지 마법이 어느새 뒤를 잡은 레이의 위치를 간파했다.
탐지 마법과 연동되어 있던 화염구가 레이를 지향하여 폭발했다.
콰아앙!!
"큭...!!"
폭발에 휘말려 뒤로 밀려난 레이가 다비드의 하나 남은 팔에 붉은 마법진이 펼쳐지는 모습을 확인했다.
위험하다.
레이는 회피를 준비하면서도 최악의 경우 동귀어진을 시도하기 위해 두 번째 검을 뽑아들었다.
마법이 쏘아지는 즉시 지면을 구르려고 했으나, 레이는 움직임을 멈췄다.
"..."
"..."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4서클 혼합 마법 '레드 레이(Red Ray)'.
초고열의 열선을 방사해 사선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섬멸 마법.
그리고 다비드는, 레이가 아닌 보육원을 향해 마법을 겨누고 있었다.
레이가 제자리에서 가만히 멈춰서 있자 다비드가 웃었다.
"네놈은 멍청한지 똑똑한지 알 수가 없군. 네 목숨보다 저 보육원이 소중한가?"
"거기다 쏘면, 너도 뒤지는 거야."
"기왕이면... 네 목숨 하나로 끝내는 게 낫지 않나?"
"..."
촤악!
레이가 허공에 양손의 검을 휘둘렀다.
다비드는 순간 검기라도 방출하는 것이 아닌가 경계했지만, 레이의 검에는 검기가 깔끔하게 증발해 있었다.
레이가 다비드 쪽으로 검을 던졌다.
지면을 구르는 두 자루의 검을 보며 다비드는 실소를 터뜨렸다.
"멍청한 놈."
다비드가 레이를 향해 레드레이를 겨누었다.
숨을 몰아쉰 레이는, 다비드의 머리 위를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나한테 바로 쏘지 그랬어."
다비드가 의아함을 품기도 전에.
허공에 얇은 실금 두 가닥이 새겨졌다.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