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혐오 (3)
21화
웬만한 일에는 무던했던 루나가 피눈물을 뚝뚝 흘리는 레이를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서클을 해독하던 레이는 찌르는 듯한 두통을 느끼며 책상 위에 머리를 쿵 박았다.
"포기, 포기."
상황이 다급하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도전해봤으나 역시 실패했다.
해독은 어디까지나 95%가량 해결한 문제에 대해 마지막 방향성을 짚어주는 용도였다.
룬 문자고 서클이고 완전히 무지한 상태에서 권능을 사용하니 무언가를 습득하긴커녕 정신 분열만 올 것 같았다.
'서클을 분석할 거면 개안부터 완벽히 마친 다음 마법학의 기본적인 조예는 갖춰야 할 것 같은데.'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무게 잡고 눈 부라린다고 답 안 나오는구먼."
레이는 대단한 기적을 바랐던 몇 시간 전의 자신을 질책하며 몸에 힘을 뺐다.
억지로 날카롭게 다져놓은 눈빛이 느슨하게 풀렸다.
"평소처럼 하자."
최선을 다하되, 마음을 가볍게 먹자.
집착을 버리니 다비드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는 가닥이 잡혔다.
다비드를 죽이는 데 실패하면? 얌전히 목이 따여주면 된다.
환생 후 레이의 모토 중 하나가 '뒤지면 어쩔 수 없지'였다.
"근데 루나."
"...네."
눈가에서 피를 훔쳐낸 레이가 루나를 마주 봤다.
여전히 흰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어 사람보단 귀신에 가까운 몰골이었다.
루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레이가 옆에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덮은 채 대화를 계속했다.
"내가 남의 과거 묻는 걸 좋아하진 않아. 우리끼리 옛날 일 꺼내봐야 부모 욕밖에 할 게 없거든. 누구 부모가 더 개새끼인지 토론하는 게 뭐가 재밌겠어."
사실 재미는 있었다.
누구 부모가 더 개새끼인가 개새끼 지수 매겨가며 낄낄대면 시간은 꽤 잘 갔다. 얻을 게 없어서 그렇지. 기껏해야 세상에 쓰레기는 많다는 교훈 하나 배울 수 있었다.
"아, 내가 항상 욕하는 부모는 생물학적 애미... 엄마아빠를 말하는 거야. 나는 나를 길러주신 엄마를 존경해.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이지."
"..."
"그렇다고 루나 네 부모님 욕을 하는 건 아니고. 욕은 네가 해야지. 하여튼."
루나는 레이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근래 계속해서 고민 많아 보였던 레이는, 피눈물을 한 번 흘린 후 그 시니컬함을 되찾아 있었다.
"루나, 너는 마법사의 자질을 타고났어."
레이가 뒤집어쓴 수건을 나풀나풀 흔들었다.
"잘 들어, 루나. 재능을 타고나는 건 축복 받은 일이야. 문제는 네 재능을 탐내는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거지."
"나쁜... 사람들?"
"그래, 나쁜 사람들. '사람'을 '물건'처럼 여기는 쓰레기들. 물론 내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사족을 덧붙인 레이가 얼굴에서 수건을 치웠다.
"전적으로 내 안일함 탓이긴 한데, 네가 서클을 한 번 드러내는 바람에 내가 고생을 조금 하게 생겼어. 앞으로는 꼭꼭 숨기고 다니자."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내가 마법사에 대한 이미지를 너무 멋대로 상상했던 거 같아. 약간 좀... 현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집스러운 학자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거든."
백작에게 고위 마법사와 관련된 사건 사고 썰을 자세히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전에도 한 번 했던 말이지만, 내게 배운 지식을 절대 남에게 말하고 다니면 안 돼. 상대가 부모든, 귀족이든, 선생이든, 나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 똑똑한 척 하지 마. 어려운 암산 같은 거 하지 말라고. 서클이랑 마법도 마찬가지야."
레이는 말을 하다말고 이마를 눌렀다.
마법사는 학자가 아니었고 루나는 단순히 지능만 높은 게 아니었다.
루나가 무언가를 배울 때 학습 속도를 자의적으로 늦추면 타인의 탐욕을 피하거나 느슨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됐었다.
"기준을 세워줄게. 카렌이 못하는 건 아예 하려고 하지 마. 내 앞에서 말고는, 절대로. 그게 안전해."
"...알겠어요."
"어쨌든 내가 궁금한 사안은 이거야. 네가 서클을 처음 각성했던 시기가 언제이며, 네가 서클과 마법을 다룰 줄 아는 걸 다른 누군가에게 보인 적이 있냐는 거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루나가 입을 열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레이가 한마디 했다.
"내가 폭탄을 주워왔네."
루나가 죽은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레이가 손을 휘저었다.
"네 원망을 하는 건 아니고."
루나는 믿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네. 운이 좋다면 잘 엮어서 뒤짚어 씌울 수도 있겠어. 어렵겠지만."
결론을 내린 레이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한 달만 조금 고생해 보자."
한 달 동안 노력해보고 수습 못 하면 뒤지면 되는 문제였다.
"아, 루나."
"?"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마지막 당부를 마친 레이가 재차 확인했다.
"알아들었지?"
"...네."
"좋아. 그만 나가봐도 돼."
루나를 내보내고 난 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당장 며칠 후에 뒤질 수도 있는데, 그전에 꼭 해결하고 싶은 일이 남아있던가?
"아, 카렌이나 달래주자."
*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매튜."
"네 덕분에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힐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매튜가 레이를 앞에 태운 채 보육원을 향해 말을 몰았다.
"대장이나 나나,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갈망 중 하나였다. 고맙다, 레이."
"시기가 많이 늦지는 않았나요?"
"늦었지. 하지만 대장과 나는 심장에 코어조차 만들지 못했어. 마나를 그냥 몸속을 순환하게 내버려 두었지. 제대로 된 기술을 익힌다면 반쪽 짜리 엑스퍼트는 벗어날 수 있을 거다."
"정제법도 부탁을 드려 볼게요. 아마 들어주실 거예요."
"큭큭, 작위가 아니더라도 널 위해 두 번 정도는 목숨을 걸 수 있을 것 같구나."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매튜는 이미 레이 때문에 목숨이 간당간당한 처지였다. 본인은 몰랐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사흘 뒤에 디디에 경이 보육원에 오시기로 했다."
"매우 좋은 소식이네요."
"너도 검술을 배우는 게 기대되는 거냐?"
"음... 뭐, 그런 걸로 치죠."
디디에가 하루종일 보육원에 머물지는 않겠지만 그 존재 자체가 다비드에겐 껄끄러울 거다. 소식을 들었다면 일을 빨리 끝내려 하겠지.
레이는 다비드가 찾아올 타이밍을 좁힐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다 와 가네요."
"바로 잡아와라."
운동장에 나와 있던 아이들이 말이 달려오는 소리에 하나둘 반응했다.
커다란 덩치를 지닌 말이 멋진 갈기를 휘날리며 다가오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던 카렌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을 바라보다, 이내 안장 위에 레이가 앉아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입을 삐죽인 카렌이 보육원 안으로 들어가려 한 순간 레이가 안장 위에서 몸을 던졌다.
촤촤촥!
지면을 두 바퀴 굴러 충격을 줄인 레이가 쏜살같이 달려가 카렌의 허리를 잡아챘다.
"흐악?"
깜짝 놀란 카렌이 몸을 버둥거렸지만 레이는 그대로 카렌을 납치해 다시 말 위로 뛰어올랐다.
레이와 카렌을 태운 매튜가 고삐를 돌리자 말은 그대로 운동장을 U턴해서 보육원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요하나가 헤벌쭉 웃었다.
"역시 레이는 카렌을 좋아해!"
*
"와악! 와악!"
카렌이 혀 짧은 비명을 연거푸 내뱉으며 안장 위에서 몸을 버둥거렸다.
갑자기 높아진 시야와 휙휙 지나가는 풍경 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허나 카렌은 선천적으로 운동 신경이 좋고 성향이 담대했다.
얼마 안 가 위아래로 요동치는 안장에 적응한 카렌이 두 팔을 넓게 벌려 온몸으로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우와아!"
레이가 카렌의 허리를 붙잡은 손에서 힘을 살짝 뺐다.
매튜는 한소리 하려다가, 레이가 엑스퍼트라는 것을 되새기며 그냥 기분 좋게 웃었다.
매튜가 조금 더 속도를 높이자 헤실 거리며 까불던 카렌이 곧장 몸을 낮췄다.
레이가 다시 카렌의 허리를 잡아주었다.
"카렌."
카렌의 볼이 슬그머니 부풀어 오른다.
레이가 손을 뻗어 볼을 움켜쥐었다.
"언제까지 삐쳐 있게?"
"나 안 삐쳤어."
"나만 보면 볼에 바람 넣고 다니면서 뭘 안 삐쳤데?"
"...레이가 날 별로 안 좋아하니까, 나도 레이를 안 좋아할래."
매튜가 눈치껏 속도를 낮춰 바람 소리를 줄여주었다.
"카렌, 나는 카렌을 좋아해."
"나는 요하나보다 운동을 못 해. 루나보다 똑똑하지 않아."
울적한 얼굴을 한 카렌이 먼지가 들어간 눈가를 닦았다.
"그러니까 레이 말은 거짓말이야."
"아이고, 요 녀석아."
"으앗!"
묶여 있던 카렌의 머리카락을 풀어 확확 헤집은 레이가 꿀밤을 살짝 먹였다.
"카렌, 너는 보육원의 리더야."
"...리더?"
"성실하고, 똑똑하고, 착하고, 강하잖아. 보육원의 모두가 널 좋아해. 나도 그렇고. 내가 없으면, 네가 보육원의 리더야."
"...레이가 없는 건 싫어."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래도 내가 자리를 비우는 일이 생길 때는, 네가 아이들을 이끄는 거야."
"내가... 이끌어?"
"카렌, 너보다 특정 분야에서 더 재능있는 아이는 있을 수 있지만, 네 역할을 대신해줄 수 있는 아이는 없어.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
"..."
카렌의 표정이 다시 슬금슬금 풀리자 레이는 이제야 삐친 게 풀렸구나 싶었다.
허나 카렌은, 레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레이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보육원에 루나와 요하나와 데런이 있기 때문이야.'
루나와 요하나와 데런이 없었다면, 레이는 보육원에, 그리고 카렌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카렌은 생각했다.
마치 기생하는 것 같다고.
자신보다 더 재능 넘치는 아이들 곁에 붙어 레이의 관심을 나눠 가지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런 기생충 같다고.
카렌은 고개를 쓱쓱 저었다.
더 노력할 것이다. 더 노력해서, 다른 아이들이 없더라도 레이가 날 좋아하게 할 것이다.
허나 노력하고 노력해도 레이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면, 그때는...
"레이!"
"응?"
"나 레이가 엄청 좋아!"
"그래, 나도 카렌이 엄청 좋아."
한 번 더 카렌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레이가 이번엔 꽤 강하게 꿀밤을 때렸다.
"아얏!"
"그리고 귀족한테는 까불지 말고."
"레이가 알레시아는 평민이라며!"
"그때는 사정이 있었어. 아무튼, 앞으로 귀족처럼 보이는 사람한테는 함부로 접근하지도 마."
"알레시아는 귀족처럼 안 보였어!"
"그렇긴 해."
고개를 저은 레이가 앞으로 할 일에 한 가지를 추가했다.
필립스 백작은 워낙 성향이 관대하여 면전에서 까불어도 허허 웃으며 넘어가겠지만, 추후 다른 귀족을 만나게 될 경우를 대비해 아이들에게 경고를 해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에, 말 한 마디 잘못해서 목이 날아가는 험악한 세상에 대해 아이들이 무지했다.
"자, 이제 내릴 준비해."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보육원으로 되돌아오자 아이들이 우르를 몰려와 손을 치켜들었다.
"다음은 내가 탈래!"
"아니야, 내가 탈 거야!!"
"가위바위보 해서 정하자니까!"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친구들은 다음 기회에."
충격적인 소식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카렌에게 향했다.
원망과 질투가 서린 그런 시선들이 카렌은 썩 싫지가 않았다. 사실 내심 우쭐해지는 기분이었다.
잠깐의 침묵 뒤에 분노가 우르르 터져 나왔다.
"레이는 맨날 카렌만 신경 써!"
"레이는 카렌만 좋아해!!"
"우리도 차별하지 마! 말 태워줘!"
"말 태워줘어!!"
"에혀, 다음에 태워주겠다니까. 그때까지 순서 좀 정하자."
"그럼 왜 오늘은 카렌만 태워줬어?"
"존댓말."
"태워줬어요?"
"그야 카렌이 이 보육원의 4인자니까. 우선권이 있는 거지."
4인자?
4인자란 단어 뒤에 당연히 따라올 궁금증 탓에 모두가 잠시 목소리를 죽였다.
요하나가 대표해서 물었다.
"3인자는 누구예요?"
"매튜지."
"?"
내가 3인자라고?
말 안장에 앉아 있던 매튜가 도끼눈을 하고 레이를 쳐다봤다.
요하나가 다시 물었다.
"2인자는요?"
"지미지."
"1인자는요?"
"뭘 당연한 걸 묻고 있어. 당연히 나지."
"아니 저 시발 새..."
매튜가 욕을 하려다 말고 이마를 짚었다.
여기서 말싸움해봤자 손해 보는 건 이러나저러나 매튜였다.
왁자지껄한 아이들을 두고 매튜가 고삐를 돌렸다.
*
말에서 내린 후 몸을 닦은 카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밖은 어느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다들 슬슬 이부자리를 깔고 있기에, 카렌은 자리에서 머뭇거리다 루나에게 다가갔다.
"루나..."
"...?"
"그동안 레이한테 수업받는 거 방해해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내가 부탁했을 때, 날 도와줘서."
카렌은 루나가 마법을 실제로 행하려 했다는 건 알지 못했지만, 루나가 자기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는 건 알고 있었다.
카렌을 바라보던 루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카렌은... 친구니까요."
잠시 눈을 크게 떴던 카렌이 방긋 웃었다.
"고마워. 그리고 말 편하게 해! 루나와 나는 친구잖아."
"...응, 알았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하나가 헤벌쭉하게 웃었다.
"히히! 드디어 화해했다."
그동안 묘한 분위기가 방을 흐르고 있어 엄청나게 답답하던 참이었다.
둘을 안고 이부자리에 쓰러진 요하나는 자기 이불 위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오늘부터 다시 누워서 얘기할 수 있어!"
"불 끄고 이야기하면 레이가 뭐라고 해."
"그럼 불 끄기 전까지 이야기하자!"
편한 자세로 누워서 재잘재잘 떠들다 보니 어느새 취침 시간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요하나가 초를 꺼트리자 완전한 어둠이 방에 찾아왔다.
루나가 천장을 보고 눈을 깜박거렸다.
때마침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꽈르릉!
조금 놀랐지만, 루나는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때 요하나가 벌떡 일어나 얼핏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번개 친다!"
곧장 이불을 둘둘 만 요하나가 옆에 있던 미아를 툭툭 밀었다.
미아 또한 이불을 둘둘 말더니 루나가 있는 곳까지 요하나와 같이 굴러 왔다.
잠시 눈치를 보던 카렌도 이불을 데굴데굴 말아 루나 곁으로 굴러왔다.
"?"
양쪽에 낀 루나가 당황하자 요하나가 외쳤다.
"번개 칠 때는 원래 이러고 자는 거야!"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와 꼼지락대다 스치는 팔다리들.
익숙치 않은 감각에 루나는 잠시 불편함을 느꼈지만, 이내 그 따스함에 몸을 맡겼다.
하늘이 번쩍이며 계속해서 천둥소리를 쏟아냈지만 루나는 평온함 속에 눈을 감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보육원의 모든 아이들이 잠들었다.
"..."
어두운 복도에 그림자 하나가 스며들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그림자는 제자리에 멈추어 방향을 잡더니, 이내 머뭇거림 없이 복도 위를 흘러갔다.
문앞에서 움직임을 멈춘 그림자가 손가락을 앞으로 세웠다.
본래 시끄러운 쇳소리를 내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림자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4명의 아이들이 이리저리 엉켜있어, 하나만 잡아당기면 누군가는 깨어날 가능성이 높은 모양새였다.
다른 아이가 깨어나 이번 일을 들키면 곤란해진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목표였던 푸른 머리 소녀를 제외하고 남은 아이들은 조용히 죽인 후 시체를 챙기면 됐다.
짐이 조금 늘어나겠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이니 들어봄직했다.
보육원에서 아이들이 도망가는 건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니 아이들의 실종은 남들의 관심을 사지 못할 터였다.
핏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심장만을 얼려버리려고 손가락을 뻗은 순간.
다비드는 움직임을 멈췄다.
"야, 건들지 마."
"..."
"그건 내 거야."
다비드가 물었다.
"...네 것?"
"그래. 내가 돌 맞아가며 줍고 다닌, 내 소유물이라고."
몸을 돌린 다비드가 레이를 마주 봤다.
서로의 눈동자가 거울처럼 닮아 있는 상대의 감정을 비춘다.
끈적한 탐욕.
그 시작점과 방향성은 달랐을지언정, 결국 같은 종착지에 도달한 검붉은 감정이 서로의 눈동자에 비쳤다.
레이와 다비드는 동시에 생각했다.
원래 죽일 생각이긴 했는데.
반드시 죽여버려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