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혐오 (2)
20화
알레시아를 보내고 하루가 지났다.
편지를 매단 브릿지를 날려보낸 후 가만히 앉아 고민했다.
참 여러모로 상황이 개같이 꼬였지만 후회한다고 일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다비드는 루나를 원했다. 앞뒤 정황을 보았을 때 제자로 들이고 싶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6서클 고위 마법사 다비드로부터 루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가.
루나를 백작에게 의탁해서 다비드와 접촉을 막아달라 할까?
아주 잠시 동안 문제를 미룰 수는 있겠지만 그건 해답이 아니다.
백작가에도 다비드를 제외한 마법사는 있다.
그들은 기사처럼 백작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
백작과 마법사는 단순 고용 관계에 가까웠다.
내가 잘 몰랐고 간과했던 부분이다. 허나 이제는 알았다.
다비드와 마찬가지로, 백작가 내의 마법사들에게 루나의 재능을 들키면 그놈들도 본색을 드러내고 수작을 부릴 거다.
더군다나 다비드는 당장은 루나를 독차지하길 원하겠지만 여의치 않으면 지분을 나누는 한이 있더라도 지원을 불러 루나를 손에 넣을 것이다.
루나에 관한 정보가 여기저기 돌기 시작하면 제국 전역 마탑이 숟가락을 쳐들고 대가리를 들이밀 테고.
천운으로 일이 잘 풀려 제정신 박힌 대마법사가 딱 등장해 루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설 수야 있겠다만.
"하하."
조소가 터져 나올 만큼 허황된 가정이었다.
내가 알레시아와 연을 맺지 않겠다고 단호히 주장한 이유가 무엇인가.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 뭐..."
일단.
"죽이자."
뒤처리를 어찌할지는 죽여놓고 고민할 부분이었다.
"어떻게 죽이느냐가 문제인데."
지미와 매튜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루나 지키자고 설득해봐?
멍청한 판단이다.
루나는 마법에 제대로 입문도 하지 못했다.
아직 가공되지 않은 재능이 산발적으로 표출되는 단계이기에 개안이 제대로 이루어진 자가 아니라면 직관적으로 그 가치를 깨닫기가 어려웠다.
설령 루나가 대단한 재능을 지닌 인재임을 깨닫더라도.
그녀는 이 보육원의 누구와도, 심지어 레이에게도 그저 '남'이었다.
미래가 불확실한 그녀를 위해 6서클 고위 마법사와 대적해줄 바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미도, 매튜도, 심지어 필립스 백작도.
애미애비가 버리고 간, 재능이 탁월하다 하나 아직 개화도 덜 된 천민 하나를 위해.
고위 마법사, 더 나아가 마탑과 대적하려는 멍청한 선택은 결코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적당한 대가를 받고 루나를 넘겨주면 넘겨줬지.
오로지 내가 유일했다.
그 아이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인간은.
그 속내가 시커멓더라도 말이다.
"공간검으로 고위 마법사를 암살하는 건..."
아무리 고민해도 실패 확률이 너무 높았다.
공간검으로 암살에 성공하기 위해선 내가 충분한 거리를 두고 검기를 생성했을 때 다비드가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백작령 내에도 엑스퍼트 급 기사는 있으니 다비드가 검기의 존재를 눈치채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는 있다.
문제는 검기를 적중시킨다 해도 일격에 죽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다비드는 암습에 대한 대비를 하고 지낼 것이며, 주렁주렁 차고 다니는 아티펙트엔 방위 마법이 충분히 새겨져 있을 것이다.
금속으로 된 검에서 떠나간 검기는 관통력이 크게 떨어진다.
고위 마법사의 방위를 뚫으려면, 글쎄. 최소 4번은 검기를 중첩시켜야 하지 않을까.
현재 나는 검기가 공간을 도약하기까지 딜레이를 제어하지 못한다.
마구잡이로 도약시킨 4개의 검기가 일시에 다비드를 향해 떨어져 내릴 확률은?
0.002% 정도 되려나?
실패하면 다비드는 곧장 회피를 시도할 것이고 암살은 실패한다.
시도할 가치 없는 무식한 도박이었다.
"...하르시아. 600년도 더 된 영웅이라 했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좀 더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신성 교단에 들려야 했다.
*
백작령 근방에 제대로 된 도서관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이 근방에 가장 많은 책이 모여 있는 곳은 영주성과, 교회였다.
"레이! 교회는 오랜만에 방문하는구나!"
수녀복을 입고 있는 아델이 날 반갑게 맞아주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아델은 내가 기도와 같은 종교활동에 거의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교회를 들리는 목적은 대개 책이 필요해서였다.
"오늘은 어떤 책이 필요하니?"
"으음..."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물었다.
"하르시아님에 대해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하르시아! 대단한 영웅이시지."
아델은 따뜻한 웃음과 함께 하르시아와 관련된 책을 찾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이 6권, 역사서가 3권.
총 9권의 책에 하르시아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
역사서에는 하르시아가 세운 업적들이 담담하게 기술되어 있었고, 동화책엔 그린 듯한 영웅의 모험담이 제각각 기술되어 있었다.
역사서 간에서조차 하르시아의 행적은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많았다.
무려 600년 이상 지난 인물이다.
책들에 적힌 내용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구분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모든 책에서 그는 거대한 정령을 부렸으며, 대지를 얼음으로 뒤덮었다.
"하르시아님은 마법도 다룰 줄 아셨나요?"
"얼음 마법... 빙결 마법이라고 하나? 전투에서 언제나 한기를 몰고 다녔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하르시아님은 소드 마스터셨다고 들었는데..."
"마법도 다룰 줄 아는 마검사였단다."
"마검사가 흔한가요?"
"기사도 마법사도, 서클과 코어를 만들어낼 수는 있단다. 그들은 마나를 다루는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니까."
잠시 고민한 아델이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체내에 두 개의 마나핵을 생성한다는 건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일이란다. 서클과 코어는 특성이 상반돼서 서로 호환될 수 없고, 도리어 상대의 제어를 어렵게 하기도 한단다."
내 생각에도, 코어와 서클을 동시에 운용하는 건 무식한 짓이 맞았다.
그럼에도 하르시아는 마법을 익혔다. 정확히는 빙결 마법을 익혔지.
어째서? 단순히 코어와 서클을 동시에 무리 없이 다룰 만큼 재능이 뛰어나서?
그게 아니라면.
공간검의 해석 혹은 완성에 빙결 마법이 연관되어 있나?
"마법..."
가슴 아래를 내려다봤다.
난 서클을 타고나지 못했다.
또한 서클을 만들어볼 생각 또한 하지 않았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코어와 달리 마나 연산자라고도 불리는 서클은 내 지식과 직관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시도를 해봐야 할까."
서클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은 마법사들의 전유물이다.
대충 마나를 심장 주변으로 돌린다고 서클이 짠 생기는 것이 아니다.
허나 인공적인 서클은 결국 선천적으로 서클을 타고난 자의 것들을 모방한 것이다.
나는 반경 3 m가 넘어가는 서클의 소유자를 한 명 알고 있었다.
"모방이 가능할는지."
남의 서클을 눈으로 관찰해 그 구조를 재현할 만큼의 재능이 내게 있었으면 내가 직접 마왕을 때려잡았을 것이다.
재능이 부족하니, 꼼수를 부려야 했다.
아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귀한 책들이 모여 있는 서고로 걸음을 옮겼다.
책장의 꼭대기에,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비친다.
자리에서 책을 펼쳤다.
룬 문자가 새겨진, 아주 값비싼 책이었다.
교회의 도서관에서조차 룬 문자가 새겨진 책은 오로지 단 한 권뿐이었다.
나는 룬 문자를 이해할 수도, 읽어낼 수도 없었다.
나는 도저히, 이 어린아이가 낙서한 듯한 자국이 세상의 근원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 억지를 부려볼 생각이었다.
뿌득
흰자에서 실핏줄이 터져나가며 피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세상이 붉게 물들며, 책에 새겨진 어린아이의 낙서가 전능한 목소리가 되어 뇌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불꽃. 작열하는. 심판. 돌이킬 수 없는. 검은 재.]
"젠장."
강렬한 두통과 함께 룬 문자가 새겨진 책에서 눈을 돌렸다.
이 해독과 관련된 권능은 써먹기가 쉽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뇌에 걸리는 부하가 너무 심했다.
해독하고자 하는 현상을 내가 깊이 파악하고 있을수록 부하가 약해졌는데, 부하를 견딜 수 있을 만큼 깊이 파악하고 있는 현상은 굳이 권능까지 써서 해석할 이유가 적었다.
결국 해독 권능은 한 번 풀어본 문제 검산할 때나 유용했다.
"어째 하나같이 계륵이야."
검술도 권능도.
아직 내가 숙련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꼭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겠지."
책을 돌려놓은 후 아델에게 인사했다.
루나를 만나 서클을 살피기 위해 보육원으로 향하려는데 하늘 높이서 브릿지가 날아왔다.
삐익-!
어깨에 내려앉은 브릿지의 다리에서 편지를 풀어냈다.
백작이 전해 온 답장이 적혀있었다.
[레이.
내키진 않으나, 자네가 다비드 님을 만나 뵙고 싶다면 자리를 주선해 줄 수는 있네.
허나 당장은 불가능하네. 다비드 님은 급한 사정이 생겨서 현재 자리를 비운 상태야.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하니, 그때가 되어서도 마음이 변치 않았다면 다시 연락하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 탓에 편지지가 구겨졌다.
"다비드, 단단히 작정했군."
다비드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루나를 확보하기 위해 백작에게까지 모습을 숨겼다.
이리 되면 먼저 다비드를 찾아가 허를 찌르는 작전은 불가능해졌다.
그저 불안에 떨며, 다비드가 찾아오는 걸 기다려야 했다.
언뜻 보면 방어전이 유리할까 싶었지만, 제대로 준비한 고위 마법사를 상대로 어설픈 함정을 파봤자 미리 경고만 날려주는 꼴밖에 안 됐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내일이라도 마법사를 죽이면, 뒤처리할 시간을 한 달 벌 수 있다.
백작의 답장이 적힌 종이를 씹어 삼킨 레이가 브릿지를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