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혐오 (1)
19화
검객과 마법사의 대결은 언제나 흥미로운 소재거리다.
다만 전투를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은 암습과 같은 특수한 전제를 깔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전장에서 마법사가 전술적 우위를 지닌다고 말한다.
옳은 이야기다.
특히 6서클 이상의 고위 마법사가 상대라면 엑스퍼트 급 무인이 분대 단위로 달려들어도 승기를 잡기가 쉽지 않다.
적어도 엑스퍼트를 넘어선 그래듀에이트 급 무인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나, 이 또한 최소 조건에 가까웠다.
그러니 지미가 정면에서 다비드와 대치한 건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다비드는 잠시 잠깐 지미를 죽여버리겠다는 충동에 휩싸였으나 곧바로 부동심을 되찾았다.
다비드는 적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위치는? 천장 너머. 지붕 위.
반쪽짜리 엑스퍼트 둘을 죽이는 건 너무도 수월한 일이다.
허나 저들은 잔뼈가 굵은 용병. 작정하고 발악하면, 조용히 제압하기 힘들다.
근방에 백작까지 행차한 시점에서 전투의 소음이 외부로 새나가면 대단히 곤란했다.
용병 둘을 죽인 것이야 무마할 수 있겠지만, 만약에 일이 커지면 소식을 들은 다른 마법사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건 정말 곤란하다.
'저것'은 결코 타인에게 뺏길 수는 없다. 반드시 독차지해야 한다.
하루 이틀 차이로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아직 아무도 '저것'이 지니는 가치를 눈치채지 못했으니. 부동심을 지니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 했다.
다비드의 손아귀가 다시 로브의 그림자에 숨었다.
저벅 저벅
다비드가 걷기 시작했다.
지미는 여전히 검기를 생성한 채 두 다리 가득 힘을 주고 있었다.
다비드는 계속 걸어, 마침내 지미 곁에 섰다.
"..."
다비드는 그대로 지미를 지나쳤다.
지미의 콧잔등에 식은땀이 맺혔다가 떨어졌다.
극도의 긴장을 유지한 채 한참을 서 있던 지미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갔어, 대장."
"후우우우우우."
축축히 젖은 머리를 올려 넘긴 지미가 벽에 등을 기댄 채 물었다.
"나간 거 맞아?"
"보육원을 나가는 걸 확인했어."
"빌어먹을, 압박감만 보면 분명 고위 마법사였어!"
"백작가 측 인물 같던데, 고위 마법사라면 아가씨의 교육을 위해 초청된 다비드야."
"그 개 같은 새끼는 갑자기 왜 보육원에 쳐들어와서 지랄이야!"
지미가 벽을 후려쳤다.
용병질하며 비대해진 간덩이 덕분에 그럴듯하게 가오는 잡았지만 이번엔 정말 죽을 뻔했다.
기실 용병 시절에도 고위 마법사를 정면에서 대적한 적은 없었다. 그랬으면 진작 뒤졌겠지.
"둘 다 괜찮아요?"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아이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레이가 복도에 서 있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아주 좆같은 일이 있었지. 백작가 마법사가 실성했는지 여길 기어들어..."
지미가 말을 하다말고 눈가를 좁혔다.
"너 이 새끼 설마 이럴 줄 알고 우릴 보낸 거냐?"
"...마주칠 수 있겠다고 생각은 했죠?"
지미가 방긋 웃었다.
"야 이 개새끼야!!!"
이번 건은 레이도 할 말이 없었다.
얌전히 멱살을 잡힌 레이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이어지는 지미의 욕설을 들었다.
"크아아악!! 너 이 새끼, 사실 날 치우고 네가 대가리 해먹으려는 거지?!"
"제가 왜 바지사장을 치우고 싶어 하겠어요."
"이 미친놈아 내가 왜 바지사장이야!!"
고막이 아파올 때까지 욕설을 이어간 지미는 한참이 지나 레이를 내려놓고 따져 물었다.
"그래서 그 마법사 놈은 여길 왜 기어들어온 거냐?"
"...잘 모르겠네요. 보육원으로 향하는 것 같기에 믿을 사람이 지미와 매튜 밖에 없어서 부탁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언질도 없이 우릴 사지로 밀어넣어!!"
"무사할 줄 알았어요, 지미."
진심이었다.
마법사가 루나의 존재를 눈치 챈 뒤 수작을 부리려 했더라도 '전투'가 성립하는 상대가 보육원에 있다면 일단은 물러나리라 예측했다. 백작이 근방에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경고 없이 위험한 부탁을 한 게 사실이라 레이는 솔직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아이들을 지켜줘서 고맙고요."
"하아, 됐어. 이 얘긴 집어치우자. 지금도 간 떨려 죽겠으니까."
자리에 주저앉은 지미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가슴을 진정시킨 지미는 요 며칠간 계속 궁금했던 문제를 꺼냈다.
"너 편지는 왜 그따위로 써서 보낸 거냐?"
"사정이 있긴 한데."
작게 웃은 레이가 말을 이었다.
"하루 종일 산 뒤지다가, 와일드호그 잡아 죽이고, 찡찡대는 알레시아 업은 채 날밤 까며 산에서 내려오니까 도저히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뭐라 한 마디 하려했던 지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미 또한 용병질하며 극한 상황에 자주 처했다. 사람이 잠을 못 자고 체력 떨어지면 판단력 흐려지는 걸 넘어 헛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그중 얌전히 엄마 찾는 새끼들은 양반이었다.
"이해는 되네."
"그러는 지미야 말로 백작님께 나 검기 쓸 줄 안다고 아주 못을 박아 놨던데요."
"얌마, 아가씨가 사라졌다 해서 백작님 대동하고 시그니 산맥 수색하는데 와일드호그가 난도질이 되어 뒤져 있는 거야."
침을 한 번 삼킨 지미가 자기 배때기를 가리켰다.
"근데 어떤 멍청한 놈이 세상 허접하게 검기에 베인 흔적을 덮어놨어. 그래서 비장하게 '백작님, 검기를 숨긴 흔적을 보니 아가씨께서 납치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보고하니까 하늘에서 브릿지가 날아오더라."
"하하하!"
상황이 그려진 레이가 웃음을 터뜨리자 지미와 매튜도 따라 웃었다.
한참을 웃던 지미가 레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여튼 고맙다. 나는 이번 일 끝나면 목 간수하기 힘들 줄 알았다. 네 덕분엔 한시름 덜었어. 아가씨가 와일드호그에 갈기갈기 찢기기라도 했다면, 아우, 상상도 하기 싫네. 근데 백작님께 보상으로 뭘 달라고 했냐? 어지간한 건 다 챙겨주실 텐데."
"기사를 파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기, 기사? 그걸 들어주셨냐?"
"흔쾌히 들어주시던데요.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기초적인 마나 연공법과 검술을 배울 기회를 베풀어 주시겠다 약속하셨죠."
지미와 매튜의 눈빛이 변했다.
"...마나 연공법?"
"...검술? 기사들이 쓰는?"
"네. 비록 기초지만, 제대로 된 기사들이 쓰는 마나 연공법과 검술을..."
"오오오오오오..."
"오오오오오옥..."
"마나 정제법은 기초가 끝나면 부탁드려볼 생각..."
"마, 마나 정제법!"
"오오오오오옥...!"
지미와 매튜의 반응이 영 이상하자 이번엔 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대체 왜 그래요?"
"그, 레이, 있잖냐."
거리를 좁힌 지미가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되물었다.
"보육원의 '아이들'에, 우리도 포함이 되냐?"
이 인간이 마법사 상대하다 대가리가 깨졌나?
레이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지미를 보다 이내 이해한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용병질을 하며 싸구려 마나 기술을 익혀서 엑스퍼트 흉내를 내게 된 둘이다.
재능이 충분하나 개화하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배움에 대한 갈망이 상당할 것이다.
지금와서 체계화된 마나 연공법과 검술을 배워봤자 대성하긴 힘들겠지만, 그거야 지미와 매튜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뭐어, 일단 부탁은 드려 볼게요."
"으히히히히히힣!!"
"으하하하하하항!!"
지미와 매튜가 서로를 마주보고 기괴한 웃음을 토했다.
착잡한 시선으로 둘을 지켜보던 레이는, 입에 맴돌던 질문을 결국 털어놨다.
"지미, 궁금한 게 있어요."
"왜?"
"패밀리 전력을 전부 동원하면 6서클 마법사를 죽일 수 있을까요?"
예상치 못한 레이의 질문에 방금까지 킬킬거리던 지미의 손이 흠칫 떨렸다.
침묵이 길어지자 옆에 있던 매튜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 고위마법사는 그래듀에이트 급 무인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다. 술식 걸려있는 아티팩트만 여럿 달고 다닐 테고."
"저까지 전력에 포함한다면요?"
매튜가 레이의 눈을 바라봤다.
지금의 질문이 단순 호기심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존재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의 공간검은 미완성 상태다."
"그렇죠."
"마법사는 전투가 시작되면 결코 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요격을 피하기 위해 계속해서 움직이지. 거기다 고위 마법사라면 검기를 발현할 만큼 마나가 집약되는 순간 무조건 눈치를 챌 거다."
"저는 지금 공간 도약의 딜레이를 조절하지 못하니까..."
"암습한다 해도 일이 꼬이면 허공만 벨 거다. 적중시킨다 해서 고위마법사가 단칼에 죽어줄지 의문이고, 첫 공격에 못 끝내면 못 이긴다."
"얌마, 죽일 수 있다 쳐도."
지미가 끼어들었다.
"뒷감당이 안 돼. 마법사 놈들 한두 달 연락 끊기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만, 그 이상 실종이 길어지면 소속된 마탑에서 나설 거야. 아무리 백작님이라도 마법사 일에 우리 편은 안 들어 줄거고, 걸리면 다 죽는 거야."
레이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죽이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고 죽였다간 뒷수습이 불가하다.
선택을 해야 했다. 누구를 살릴지.
보육원을 통째로 불태울 생각이 아니라면 당장에 남은 방법은...
내주는 거다. 마법사가 원하는걸.
'내줘?'
누구를? 루나를?
"큭큭..."
몇 년 동안 개 같이 가챠 돌려서 간신히 뽑아낸 레전더리 고아를 오늘 처음 본 마법사 새끼한테 내주자고?
그럴거면 지금까지 이 개고생을 왜 한 거지?
유니크와 레전더리가 나올 때마다, 그 고아를 탐내는 새끼가 나타날 때마다 족족 가져다 바쳐야 하나?
그 따위로 살 거면 이 짓은 시작도 안 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였고, 레이는 뒤지더라도 모가 나올 때가지 윷을 굴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과연 꼬맹이 하나 지키는데 목숨을 걸자는 주장에 동의해 줄까?
레이는 회의적이었다.
동의하는 새끼가 있다면 그 새끼가 미친놈이었다.
6서클 마법사와 적대하자는 건 단순히 목숨 한 번 걸어보자는 것과 궤를 달리했다.
계속해서 낄낄거리던 레이는 불현듯 웃음을 멈췄다.
"뭘 고민하고 있는 건지."
레이는 '자기 것'을 뺏길 생각이 결코 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말이다.
*
"흑, 흐윽!"
마차 안에서 백작에게 혼이 난 알레시아가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닦았다.
딸아이가 우는 모습에 백작 또한 마음이 심란했으나 이번 일은 응석을 받아주고 대충 치워버릴 사안이 아니었다.
그래도 요 며칠 고생했을 딸아이를 생각하자 의지가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어, 백작은 질책을 그만하고 알레시아를 타일렀다.
"그만 울거라. 잘못을 알았으면 되었다."
"흑! 네에..."
언제부터 알레시아가 이렇게 사고를 치기 시작했지?
과거에도 말괄량이긴 했으나 이리 대책 없이 가출을 하진 않았다.
갑작스레 말을 더 안 듣기 시작했던 시점이...
'신분을 가려가며 사람을 사귀라고 혼냈을 때군.'
백작이 혹시나 해서 입을 열었다.
"알레시아, 신분을 가려가며 사람을 사귀라고 충고한 것이 그리도 마음에 안 들었더냐?"
알레시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백작은 골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허나 체면 때문에 대놓고 관자놀이는 누르지 못한 채 대화를 계속했다.
"그들의 피가 천하다는 이유 하나로 교류를 막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결국 환경에 물들게 되어 있다. 제대로 된 배움을 얻지 못한 자들은 무식하고, 천박하고, 무절제하고, 고집스러워지는 법이지."
"..."
"너는 그들을 이끌어야 하기에, 그들에게 물들어선 안 된다."
알레시아가 다리를 앞뒤로 휘휘 젓기 시작했다. 대놓고 툴툴대는 거다.
백작은 다시 한 번 관자놀이를 짓누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다만 레이 그 녀석은 다르더구나."
알레시아의 다리가 멈췄다.
"너의 또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현명한 아이다. 또한 선하고, 충직하다."
알레시아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진다.
백작은 딸아이의 반응을 보며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다.
"그리 현명한 아이가 지도하는 보육원에서 거주하는 아이들이라면, 너와 어울리는 데 크게 부족함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아이들과 교류하는 것은 막지 않겠다."
알레시아의 입술이 이리저리 실룩였다.
알레시아는 나름 티를 안 낸다고 노력했지만 백작 눈에는 그대로 보였다.
사실 저런 게 보여서 레이와 더욱 거리를 두라고 야단치긴 했다.
이제와서는 도리어 사이가 좀 좁아지길 기도해야 하게 생겼지만.
알레시아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아빠, 레이는 엄청 강했어요."
"그래.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더구나."
"레이라면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기사? 고작?
백작이 생각하기에, 지금이 난세였다면 레이는 제국 하나를 건국할만한 인재였다.
"충분히 될 수 있을 거다."
"으음... 으으음... 이히히..."
무슨 상상을 하기에 저렇게 기분 좋게 웃을까.
알아봤자 머리만 더 아플 것 같기에 백작은 물어보길 포기했다.
"근데 다비드 님은 아직인가?"
마차의 창문을 열자 마침 다비드가 마차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백작은 다비드가 마차에 타길 기다렸으나, 백작과 눈이 마주친 다비드는 제자리에 선 채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백작님, 한 달 동안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달.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기에 이번엔 백작 또한 불쾌감을 표했다.
"다비드님, 우리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앞으로 3개월간은, 알레시아의 수업에 집중해 주셔야 합니다."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져, 당장 움직여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백작님과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한 점에 있어 복귀 후에 충분한 보상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비드는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였고, 결코 말의 무게가 가벼운 자가 아니었다.
사과도 들었고 보상 또한 약속했으니 더는 서로 감정 상할 필요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십시오."
"백작님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다비드가 마차에서 멀어졌다.
백작은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마법사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늘상 있는 일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