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 (1)
17화
코어와 서클.
마나를 근원으로 하는 두 동력원은 그 상이한 성질로 인해 각각 기사와 마법사의 선택을 받았다.
정제된 마나를 심장 내부에 응축시켜 생성하는 코어.
코어로부터 뻗어 나가는 마나는 높은 안정성과 불변성을 지닌다.
기사들은 코어의 마나를 활용해 강화한 육체와 무기로 적을 베어낸다.
반면에 서클은, 그 자체로는 동력원이라기보다 일종의 마나 연산자에 가깝다.
심장을 회전하는 서클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며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불가사의한 현상을 구현한다.
코어와 서클은 본디 인위적으로 생성해야 하는 동력원이었지만, 아주 드물게도 선천적으로 서클을 타고나는 천재도 있었다.
허나 레이는 루나가 그러한 '천재'에 속한 존재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서클은 심장을 중심으로 도는 마나의 고리다.
심장을 중심으로 도는, 두 주먹을 합친 만한 반경의 고리다.
허나 반쯤 개안된 레이의 눈에 비친, 루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흐릿한 빛 무리는.
반경이 3 m가 넘었다.
쾅!
담벼락을 짓밟은 레이가 마나를 폭발시키다시피 해 몸을 쏘아냈다.
루나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마나의 고리에 마법적인 술식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루나는 마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때문에 지금의 과정은 온전히 알레시아 행했던 작업의 모방이었다.
같은 마법이라도 그릇의 크기가 달랐다.
같은 마법이어도 고작 모닥불을 만들어낸 불꽃이, 하늘을 뒤덮는 화염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루나는, 그조차도 천부적인 감각으로 연산해내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관심 없었다.
레이는 마법의 발현 자체를 반드시 저지할 생각이었다.
찰나 간에 레이의 검신에 푸른 빛이 번쩍였다.
수식이 새겨진 서클의 일각을 검으로 겨눈 레이가 루나의 지근거리에 떨어져 내렸다.
츠즉-!
공간을 변질시키는 검기의 접촉에 마법적인 수식이 타격을 입는다.
레이가 지면에 다리를 박아넣음과 동시에 흐트러진 마법이 역류하며 거대한 돌풍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콰앙! 화아아아아악!!
*
알레시아가 보여준 마법의 신비에 푹 빠진 아이들은 루나가 모닥불에 접근하든 말든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허나 피부로 느껴지는 열기가 점점 강해지고, 얌전했던 모닥불이 괴이한 방향으로 뒤틀리기 시작하자 환호를 멈춘 채 시선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붉은색이 번진다.
그 순간 번쩍이는 낙뢰가 모닥불과 루나의 사이에 떨어졌다.
콰앙! 화아아아아악!!
"우와악?!"
갑작스레 돌풍이 불어 닥치자 몸을 지탱하지 못한 아이들이 허우적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한참이 지나 돌풍이 그치고 나서야 아이들은 운동장의 한가운데 낙뢰처럼 떨어져 내렸던 레이를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
아이들의 환호성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
아이들의 감상은 간단했다. 개쩐다!
뭔가 번쩍거리기도 했고 열풍도 휘몰아쳤고 아무튼 개쩔었다.
보육원의 리더 격인 레이가 귀족의 마법보다 대단한 무언가를 보여주자 아이들은 가슴이 격하게 뛰는 걸 느끼며 방방 뛰어댔다.
뿌듯하게 느껴질 법도 한 광경이었지만, 레이는 무표정하게 오른 주먹을 들어 올렸다.
"다들 조용."
"..."
마나가 실린 목소리에 아이들이 삽시간에 입을 다물었다.
갈려나간 무릎 관절을 붙잡은 레이가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귀한 손님께서 보육원에 들를 수도 있으니, 전부 세안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대기하고 있어."
"레이, 혹시 귀한 손님이 아ㅃ...!"
"개인적인 질문은 나중에. 다들 알아들었으면 실시."
"실시!!"
뭔지는 모르겠지만 개쩌는 장면을 본 아이들이 군기가 바짝 들어 보육원 안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레이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오, 뒤질 뻔했네."
정말 간발의 차였다.
하마터면 불타오르기 시작한 화염 속에 몸을 던져 숯덩이가 될 뻔했다.
숨을 몰아쉰 레이가 남은 아이들을 바라봤다.
"알레시아, 카렌, 루나. 아침부터 왜 불장난이야?"
"그게 말이다, 레이!"
알레시아가 나서서 카렌이 자꾸만 시비를 걸어왔다는 사실과 자신이 얼마나 많이 인내하였는가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잘 들으세요."
"...응?"
갑자기 변한 호칭에 알레시아가 당황했다.
"왜, 왜 그러느냐?"
"카렌은 아가씨를 위해 자기 역할을 다했을 뿐이에요."
"어, 어째서 저 천민의 편을 드는 것이냐? 저 천민은 귀족인 나를 모욕했다."
"카렌은 귀족을 모욕하지 않았어요. 이 보육원을 나설 때까지 아가씨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의 신분이시니까요."
"나는 평민이 아닌 귀족이다!"
"아가씨, 이건 백작가와 합의된 사안이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아요."
귀족 영애가 보육원에 있다는 소식이 퍼져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
때문에 백작가 사용인의 동의 아래 가짜 평민 신분을 알레시아에게 부여한 거다.
"아가씨께서 떼를 쓰는 바람에 이도 저도 아니게 됐지만... 어쨌든, 아가씨가 평민처럼 행동하길 바라고, 제가 아가씨를 평민처럼 대한 것은 아가씨를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서였어요. 이해하시죠?"
"이해는 한다만..."
"자 아가씨,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저희가 아가씨를 평민처럼 대하려고 했던 이유가 뭐라고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죠. 꿀밤을 때리거나 뒤통수를 후리거나 시비를 걸거나 무시를 한 것도 전부, 아가씨를 평민처럼 대하려는 과정의 일환이었습니다."
"그, 그런 거냐?"
"그러니 카렌의 모든 행동도 그저 아가씨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겁니다."
"나를... 지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 정신을 못 차리던 알레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빽 소리쳤다.
"레이! 날 또 속이려고 하는구나!"
"루시아가 쓴 책은 그리 철석같이 믿으면서 절 상대할 땐 왜 그리 의심이 많아요?"
"네가 나를 한두 번 속이느냐!"
"알레시아."
알레시아가 휘둘러오는 주먹을 몸으로 맞아준 레이가 고개를 숙였다.
"마음 상한 거 있으면 대신 사과할게요. 오해가 있었을 뿐이니까 마음 깊이 담아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주먹질을 멈춘 알레시아가 팔짱을 낀 채 장담했다.
"레이! 날 뭘로 보고! 걱정 마라. 나는 어떤 천민처럼 그렇게 마음이 옹졸하지 않으니 말이다! 보육원에서 있었던 일은 담아두지 않도록 하겠다!"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레이가 카렌을 돌아보았다.
카렌은 여전히 붉어진 눈으로 말없이 레이의 발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달싹인 레이가 본래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입꼬리를 올렸다.
"카렌, 너도 들어가서 얼굴 좀 닦고 쉬고 있어."
카렌이 이번에 좀 겁 없고 철없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케어 못한 레이의 잘못이 컸다.
당장 화를 내기보단 삐친 것도 해소할겸 날을 잡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레이는, 급격히 심각해진 얼굴로 루나를 마주봤다.
"루나."
"..."
루나를 껴안다시피 거리를 좁힌 레이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다시는, 다시는 함부로, '그걸' 쓰려고 하지 마. 내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결코. 약속해, 루나."
"...미안해요. 안 할게요."
"자세한 건 다음에 이야기하자. 너도 들어가 있어."
카렌과 루나까지 들여보내고 나자 알레시아와 둘만 남게 되었다.
레이가 곧장 얼굴에 붙어있던 붕대를 거칠게 뜯었다.
얼굴을 반으로 가로지르는 상처에서 피딱지가 떨어지며 멈추었던 진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알레시아가 기겁하며 외쳤다.
"레, 레이! 뭐 하는 짓이냐!"
"곧 필립스 백작님께서 이 근처로 오신답니다."
"그건 기쁜 소식이다만 네가 붕대를 떼어낸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협상 전 약간의 쇼맨십 같은 거죠."
느그 딸내미 구하려다 이렇게 얼굴에 기스 났다, 뭐 그런 생색 내기였다.
*
필립스 백작은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무릎과 고개를 숙이는 광경을 원치 않았으므로, 보육원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마차를 세우고 알레시아와 레이를 불러냈다.
기사와 함께 보육원에 들어선 지미가 레이와 눈을 마주쳤다.
서로에게 입 모양으로 일 처리 똑바로 안 하냐고 욕한 둘은 겉으론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알레시아에게 무릎 한쪽을 꿇은 기사가 말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가씨.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머지 않은 거리에 마차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아빠아아!!"
기운 차게 백작에게 달려가던 알레시아가 얼마 못 가 속도를 줄이더니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제자리에서 꾸물거렸다.
백작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 있거라."
사고를 거하게 쳤다는 걸 그제야 제대로 자각한 알레시아가 기가 죽은 채로 작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백작과 거리를 좁힌 레이는 검을 멀리 내려놓고 무릎 하나를 낮게 꿇으려 했으나 백작이 손을 휘저으며 말렸다.
"됐네. 신세를 정말 크게 졌군, 레이. 얼굴에 그건 알레시아를 구할 때 생긴 상처인가?"
"별거 아닙니다."
"생색내려고 붕대까지 풀어 헤치고 내 앞에 와놓고는 겸양이 지나치군."
레이와 백작이 동시에 웃음을 흘렸다.
둘의 나이와 신분을 생각하면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둘은 사이가 꽤 좋았다.
인사를 마친 레이가 기이한 감각을 느끼고 눈을 돌렸다.
웬 로브 차림의 남자가 마차 옆에 가만히 서서 하늘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레이는 실례임을 알고서도 대놓고 물었다.
"저분이 누구 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소개하마. 다비드님이시다."
다비드라 불린 남자가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통보했다.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시죠."
일방적인 통보가 거슬리는 듯했으나, 백작은 최대한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비드가 사라지고 나서야 눈가를 슬쩍 좁힌 백작이 설명을 덧붙였다.
"조금 제멋대로이긴 하나, 저래 봬도 6서클에 닿은 대단한 마법사다."
6서클.
본격적으로 고위 마법사로 분류되는 경지였다.
레이가 하늘을 바라봤다. 기사보다 외부의 마나에 민감한 마법사는 5서클에 이르렀을 때 진즉 개안을 끝낸다.
개안이 완벽히 끝난 눈으로 본 지금의 하늘은 과연 무슨 색일까.
하늘에 아직, 휘몰아치던 마나의 잔향이 남아있을까?
레이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너라면 눈치챘겠지만, 알레시아의 마법 수업을 잠시 맡아주고 계신다."
"아가씨께서 좋은 스승님을 두셨군요."
"피차 길게 예의를 지키는 건 좋아하지 않으니 마차에서 단둘이 대화를 하지 않겠느냐? 네 공을 마음껏 치하하기엔 보는 눈이 조금 많구나."
레이 또한 바라던 바였으나, 여전히 하늘이 거슬렸다.
잠시 양해를 구한 레이가 지미와 매튜에게 부탁했다.
"지미, 매튜. 저 없는 사이 보육원에 좀 가 있어줄래요? 왠지 조금 불안하네요."
난데 없는 부탁이었으나 지미와 매튜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둘에게 감사를 표한 레이가 백작이 타고 온 커다란 마차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텅!
마차의 문이 닫혔다.